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람 하차투리안 (문서 편집) [include(틀:서양음악사)] ||<-2> '''{{{+1 아람 하차투리안}}}[br]Արամ Խաչատրյան | Арам Хачатурян [br] Aram Khachaturian'''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ram_Khachaturian_1964.jpg|width=100%]]}}} || || '''본명''' ||아람 예기아이 하차트랸[br](Արամ Եղիայի Խաչատրյան)[* ''Aram Eġiayi Xačʿatryan''. 그의 이름인 [[https://en.wiktionary.org/wiki/Խաչատրյան|Խաչատրյան]]의 아르메니아어 발음은 [χɑtʃʰɑtˈɾjɑn\]이므로 하차투리안이 아닌 하차트리안 내지는 하차트랸으로 표기해야 하나 러시아어 표기나 영어 표기가 널리 통용되는 탓인지 하차투리안이라는 표기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어]]로는 아람 일리치 하차투랸(Арам Ильич Хачатурян), [[영어]]로는 애럼 카처투어리언(Aram Khachaturian)으로 표기한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아람 일리치 하탸투랸"으로 표기를 심의했으나, 2021년 재심의를 통해 "아람 일리치 하차투랸"으로 표기를 정정했다. 사실 러시아어 표기나 아르메니아어 표기를 봐도 '탸'가 나올 여지가 없었던지라 이전 표기는 명백한 오류였다.]|| ||<|2> '''출생''' ||[[1903년]] [[6월 6일]]|| ||[[러시아 제국]] [[트빌리시|티플리스]]|| ||<|2> '''사망''' ||[[1978년]] [[5월 1일]] (향년 74세)|| ||[[소련]]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SFSR]] [[모스크바]]||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러시아 제국)] → [include(틀:국기, 국명=소련)]|| || '''학력''' ||[[모스크바 음악원]]|| || '''직업''' ||[[작곡가]], [[지휘자]]|| || '''활동''' ||1926년 ~ 1978년|| || '''정당''' ||[include(틀:소련 공산당)] ^^(1943~1978)^^|| || '''배우자''' ||니나 마카로바 ^^(1933년 ~ 1976년, 사별)^^|| || '''자녀''' ||눈, 카렌|| || '''종교''' ||[[무종교]]([[무신론]])[* Bill Dunn, "[[https://ffrf.org/ftod-cr/item/38221-aram-khachaturian|Aram Khachaturian]]", Freedom from Religion Foundation]|| || '''서명''' ||[[파일:Aram_Khachaturian_signature.svg|width=200&bgcolor=#fff]]|| [목차] [clearfix] == 개요 == [[아르메니아인|아르메니아계]] [[소련인]] 작곡가 겸 지휘자이다. == 생애 == [[러시아 제국]] [[캅카스]] 부왕령 티플리스현 티플리스[* 現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조지아인]]은 아니었고 가족 모두가 [[아르메니아인]] 가계였다.[* 트빌리시는 원래 동부 아나톨리아 반도처럼 아르메니아인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 어릴 적부터 아르메니아 전통 음악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민속음악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제본공 아버지인 예기아(Եղիա, 러시아어로 [[일리야]]) 하차투리안이 벌어오는 얼마 안되는 돈으로 입에 풀칠하는 형편이라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래도 학창 시절 [[취주악]] [[동아리]]에서 테너호른([[미국식 영어]]로는 알토호른)을 독학으로 익혀 연주하는 등 어느 정도 음악 활동은 했다. 1921년에는 [[모스크바]]의 제2예술극장에서 무대 감독으로 일하던 형 수렌(Սուրեն) 하차투리안을 찾아갔는데, 형 수렌은 [[생물학]]을 전공하려던 하차투리안에게 비록 교육은 제대로 못받았지만 음악에 소질은 있으니 음악원에 입학 한 번 해보라고 권유했다. 하차투리안은 처음에는 가방끈도 짧고 해서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미하일 그네신이 세운 그네신 음악원에서 시험을 본 뒤 의외로 바로 합격했다. 처음에는 [[첼로]] 연주자를 지망해 세르게이 비치코프와 안드레이 보리샤크에게 배웠지만, 이후 원장인 미하일 그네신이 주관하는 작곡과 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 작곡가로 진로를 바꾸면서 여러 편의 [[실내악]]과 독주곡을 썼다. 1929년에는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으로 옮겨 [[니콜라이 먀스콥스키]]와 세르게이 바실렌코에게 각각 작곡과 관현악법을 배웠고, 1934년에 졸업 작품으로 첫 [[교향곡]]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과 1940년에는 각각 피아니스트 레프 오보린과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를 위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이 호평을 받았고, [[독소전쟁]]이 한창이던 1941~42년에는 [[시베리아]]에서 피난하면서 자신의 최대 명작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는 발레 '가야네'를 작곡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발레는 전쟁 중임에도 국내외에서 상당히 자주 상연되었고, 1943년에는 발레에서 발췌해 연주회용 관현악 모음곡도 세 곡이 나왔다. 이외에도 전쟁 분위기에 맞추어 [[소련군]]을 찬양하는 노래나 [[행진곡]] 같은 선전용 작품을 만들기도 했고, 1943년에는 전쟁의 참화와 분노를 다룬 두 번째 교향곡을 발표했다. 이 곡은 그 전에 발표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7번(쇼스타코비치)|교향곡 7번]]과 그 후에 발표된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5번 두 작품과 함께 전쟁 중 창작된 소련 교향곡들 중 걸출한 명작으로 선전되면서 국내외에서 자주 공연되었다. 이 무렵 하차투리안은 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와 더불어 '''소련 음악의 세 거성'''으로 불리며 서방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소련 3대 작곡가'라는 호칭은 [[세계 3대|마치 공신력 없는 일본 매체가 무작위로 붙인 듯한 느낌]]이 나지만, 1940년대의 유력한 서방 언론들이 이미 거론하며 즐겨 사용한 표현이었다(Three Titans of Soviet Music). 물론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의 천재성과 생산성이 워낙 압도적인 만큼 하차투리안은 평가에 있어 그에 못 미치는 느낌이 나지만, 보통은 세 명을 꼽으라 할 때 [[카발레프스키]] 대신 하차투리안이 거론되는 편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다른 유명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주도한 음악계 [[숙청]]에 휘말렸는데, 1943년에 이미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상태였지만 당적을 갖고 있던 것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해 교향곡 3번을 비롯한 신작들이 모조리 형식주의 작품이라고 격하게 비난 당했다. 결국 하차투리안도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아비판]]을 강요받았고, [[대숙청]] 시대 때 그랬던 것처럼 '명예회복'을 위해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룬 [[영화]]의 [[OST]] 같은 체제 순응 성향의 작품을 쓰거나 모교인 그네신 음악원과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 강사로 일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후 찾아온 해빙기에 다시 복권되었고,[* 에둘러 자신의 입장을 암시한 쇼스타코비치와 달리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여 음악적 해빙을 촉진시켰다.] 1956년에는 가야네에 이어 두 번째 발레 대작 '[[스파르타쿠스]]'를 발표했다. 이 발레도 마찬가지로 소련 발레 중에는 지금도 생명력을 얻고 있는 명작으로 손꼽히며, 마찬가지로 연주회용 모음곡 세 곡으로 정리되기도 했다. 1950년대 초반 부터는 작곡가 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는 지휘자로도 연주회에 자주 출연했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같은 서방 악단과도 공연하고 [[음반]]을 만들었다. 1961년부터 1968년 까지는 자신이 협주곡을 이미 남긴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단악장의 협주 작품들인 협주 광시곡들을 하나씩 더 작곡했고, 생애 후반기였던 1970년대 중반에는 [[현악기]]들을 위한 무반주 독주곡들을 남겼다. 1978년에 75회 생일을 약 한 달 남겨두고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에 묻혔다. == 주요 작품들 == === 교향곡 === * 교향곡 1번 E단조 (1934) * 교향곡 2번 E장조 (별칭 '종'. 1943, 1944 개정) * 교향곡 3번 C장조 (또는 교향시. 1947) === 관현악곡 === || [youtube(6NTdPMRhKXI)] || || 가면무도회 모음곡 || || [youtube(mUQHGpxrz-8)] || || 가야네(Gayane) 모음곡 No.3 中 "칼의 춤"(Sabre Dance). '''[[마성의 BGM]].'''[* 흡사 [[톰과 제리]]의 경쾌하고 익살스러운 추격전이 연상되는 듯한, 명랑하고 천진난만한 느낌이 인상적이다.] [[키보드매니아]]에 수록되기도 했다. || * 무용 모음곡 (1933) * 가야네 모음곡 1~3번 (같은 제목의 발레에서 발췌. 1943) * '''가면무도회 모음곡''' (같은 제목의 부수음악에서 발췌. 1944) * 러시아 환상곡 (1944) * 스탈린그라드 전투 모음곡 (같은 제목의 영화음악에서 발췌. 1949) * 승리의 시 (1950) * 발렌시아 과부 모음곡 (1952, 같은 이름의 부수음악에서 편곡) * 스파르타쿠스 1~3번 (같은 제목의 발레에서 발췌. 1955) * 환영 서곡 (1958) * 레르몬토프 모음곡 (1959, 같은 이름의 부수음악에서 편곡) === 협주곡 === || [youtube(isEEixljAtc)] || || 피아노 협주곡 D♭장조 || || [youtube(Uf9FxirTRak)] || ||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 * [[피아노 협주곡 Db장조(하차투리안)|피아노 협주곡 D♭장조(1936)]] * [[바이올린 협주곡 (하차투리안)|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1940)]][* 프랑스의 [[플루트]] 연주자인 [[장 피에르 랑팔]](Jean-Pierre Louis Rampal, 1922-2000)이 작곡가 하차투리안의 제안으로 1968년에 이 곡을 플루트 협주곡 버전으로 편곡한 바 있으며, 관현악 파트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 바이올린 솔로 파트만 플루트 솔로 파트로 편곡한 것이다. 하차투리안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플루트 협주곡으로 편곡한 버전 또한 플루트 독주자들에게 유명한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 첼로 협주곡 E단조 (1946)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광시곡 (1961) *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광시곡 (1963) *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광시곡 (1968) === 실내악 ===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품 (1926)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알레그레토 (1929) * 현악 4중주 (1931) * 클라리넷,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3중주 (1932) * 바이올린 소나타 (1932) === 독주곡 === * 무반주 첼로를 위한 소나타 환상곡 (1974) *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독백 (1975) * 무반주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노래 (1976) === 피아노곡 === * 피아노 모음곡 (1932) * '''토카타''' (1932) * 3개의 소품 (1945) *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곡집 제1번 (1947) * 피아노 소나티나 (1959) * 피아노 소나타 (1961) *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곡집 제2번 (1965) === 합창곡 === *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1944) * 여성 독창자, 합창, 바이올린, 하프와 관현악을 위한 '환희의 송가' (1956) * 독창과 관현악을 위한 '조국에 대한 담시' (1961) === 발레 === * 가야네 (1941-42) * 스파르타쿠스 (1954) == 수상 경력/주요 직위 == * [[사회주의노력영웅]] (1973) * [[레닌훈장]] 3회 (1939, 1963, 1973) * [[10월혁명훈장]] (1971) * [[노력적기훈장]] 2회 (1945, 1966) * 소련 인민예술가 (1954) * 러시아 인민예술가 (1947) * 아르메니아 인민예술가 (1955) * 그루지야(조지아) 인민예술가 (1963) * [[아제르바이잔]] 인민예술가 (1973) * 러시아 공훈예술가 (1944) * 아르메니아 공훈예술가 (1938) * 레닌상 음악 부문 (1959) * 소련 국가상 (1971) * 국가 스탈린상 예술 부문 4회 (1941 2급, 1943 1급, 1946 1급, 1950 1급) * 아르메니아 국가상 (1965) * 소비에트 최고 회의 의원 (1958~62) *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예술원 회원 (1961) == 창작 성향 == 어릴 적부터 친숙했던 아르메니아를 비롯해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 캅카스 지역과 [[터키]], [[이란]], 여타 중앙아시아의 전통음악 소재를 특히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음악원 학생 시절 작곡된 작품들도 [[러시아 5인조]] 선배들처럼 국민악파 스타일로 고향의 민요 선율을 도입하거나 그 양식을 따르고 있다. 졸업 후에는 여기에 강렬한 불협화음이나 쉴새 없이 반복되는 격렬한 리듬 등 모더니즘 요소를 더했고, 이렇게 해서 성공시킨 작품들이 협주곡들과 발레들이었다. 특히 '가야네'에 나오는 칼춤(Sabre Dance)는 엄청나게 몰아붙이는 듯한 8비트 리듬과 관악기의 날카로운 연주가 곁들여져 하차투리안 작품 중 최고의 인기를 자랑한다. 반대로 같은 발레에 나오는 아다지오의 경우 토속성과 서정성을 겸비한 것으로 유명하며,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도 다른 클래식 작품들과 함께 OST로 사용된 바 있으며, [[에일리언 2]]의 엔드 크레딧 음악에도 짧게 인용되었다. 물론 다른 러시아/소련 작곡가들처럼 [[왈츠]] 같은 서구에서 유래한 춤곡이나 그 양식의 음악도 곧잘 썼고, '가면무도회'에 나오는 단조의 멜랑콜리한 왈츠가 특히 유명하다. 다만 교향곡 같은 순수 기악 작품에서는 쇼스타코비치나 프로코피예프만큼의 명성은 얻지 못했으며, 3번의 경우 지나치게 비대해 보이는 편성[* 3관 편성의 [[관현악단]]에 [[트럼펫]] 주자 15명(!!!), 그리고 [[파이프오르간]]까지 동원된다. 트럼펫 주자들은 모두 숙련된 인물들이 필요하고, 오르간의 경우 [[딥 퍼플]]의 존 로드가 했을 법한 속주를 퍼붓는 등 기교적으로 꽤 까다로운 곡이다.] 때문에 [[높으신 분들]]에게 과대망상 형식주의 작품이라고 까였고, 지금까지도 실제 연주 기회가 뜸한 편이다. 그래도 그 중 협주곡은 특유의 춤곡 분위기도 잘 살렸고, 독주자의 기교도 드러낼 수 있어서, 자신의 레파토리를 넓히려고 약간 독특한 곡을 원하는 독주자들이 종종 선택해서 다른 기악곡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연주 기회가 많은 편이다. == 사생활 == 꽤 굴곡 많은 삶을 살았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쇼스타코비치]]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프로코피예프]]와 달리 비교적 큰 말썽 없이 가정을 꾸리고 살았는데, 모스크바 음악원 재학 시절 [[니콜라이 먀스콥스키|먀스콥스키]]의 문하생으로 만나 사귀기 시작했던 작곡가 니나 마카로바(1908-1976)와 결혼해 평생을 해로했다. 이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카렌 하차투리안은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고, 이름이 똑같은 조카(1920-2011)는 삼촌과 마찬가지로 작곡가로 활동했다. 또 다른 조카 에민 하차투리안(1930-2000)도 지휘자로 활동하는 등, 가문에서 꽤 많은 음악 관련 종사자가 나온 것으로 유명하다. 창작 인생 초반에 걸쳐 상당히 유명한 곡들을 숨가쁘게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하차투리안에 대해서는 '게으른 작곡가였다'는 증언들이 많다.[* [[쇼스타코비치]]나 [[리흐테르]]가 하차투리안의 이런 느긋한 성향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만큼 일할 만큼만 일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확실한 결과물을 내놓는, 경제적인 타입의 작곡가였을지도 모른다. == 그 외 == 강사/교수직을 지내면서 여러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대부분 소련이나 여타 사회주의 국가 혹은 [[제3세계]] 출신 학생들이 하차투리안의 문하생으로 거쳐가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발레 등 리드미컬한 곡의 작곡자로 지나치게 유명했고, 자신도 그걸 자각하고 있었는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특히 선율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다고 한다. 이들 제자 중에는 [[월북]] 작곡가로 유명한 [[김순남]]도 있었고, 하차투리안은 김순남을 가르치면서 꽤 재능 있는 학생이라고 치켜세우면서 김순남이 작곡한 노래 '조선 빨치산의 노래'를 러시아어 번안 가사로 편곡해주기도 했다.[* 이 편곡은 하차투리안의 다른 편곡 작품들과 함께 작품 전집 악보에도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김순남은 [[한국전쟁]] 후반에 [[북한]]에서 귀국하라는 지시에 따라 얼마 배우지 못하고 떠나야 했고, 귀국 후 [[숙청]]과 복권을 반복하다가 [[결핵]]으로 인해 제대로 활동을 못하고 사망했다. 과거 [[아르메니아 드람|아르메니아 50 드람]] 지폐 앞면에 하차투리안의 얼굴이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아르메니아에서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이며, 아르메니아 음악을 세계화하였다고 큰 존경을 받고 있다. 같은 아르메니아계로 저명한 작곡가인 앨런 호바네스나 유명 밴드 [[시스템 오브 어 다운]] 등을 생각해보았을 때, 아르메니아는 많지 않은 인구에 비해 음악적 저력이 꽤나 강한 나라이다. 그의 악보와 영화음악 자료들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소련 관련 문서)] [include(틀:러시아 관련 문서)] [include(틀:아르메니아 관련 문서)] [[분류:러시아의 작곡가]][[분류:러시아의 지휘자]][[분류:소련/인물]][[분류:아르메니아의 인물]][[분류:1903년 출생]][[분류:1978년 사망]][[분류:화폐의 인물]][[분류:아르메니아계 러시아인]][[분류:트빌리시 출신 인물]][[분류:사회주의노력영웅]][[분류: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