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테미스 신전 (문서 편집) [include(틀:안티파트로스의 세계 7대 불가사의)] [include(틀:튀르키예의 세계유산)]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아르테미스 신전 상상도.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helloephesus.com/the-temple-of-artemis.jpg|width=100%]] {{{-2 (상) 상상도 (하) 현재의 모습.[* 복원 상상도 사진과 비교해보면 기둥 한 개와 신전의 벽으로 보이는 벽돌 외에는 잡초만 무성한 채로 방치되어 있다.]}}} }}} || ||<|3> '''명칭''' || 그리스어 || Ἀρτεμίσιον || || 터키어 || Artemis Tapınağı || || 영어 || Temple of Artemis || ||<-2> '''국가·위치''' || [[튀르키예]] 이즈미르 주 셀주크 시 에페소 구 || ||<-3> [include(틀:지도, 장소=Temple of Artemis, 높이=224px, 너비=100%)] || || 건축년도 ||<-2> 불명 || || 파괴 ||<-2> 서기 268년 || [목차] [clearfix] == 소개 == 고대 [[에페소스]][* 현재 [[튀르키예]] 셀추크 부근]에 있었던 [[아르테미스]] 신을 모시던 [[고대 그리스]]의 거대한 신전.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로도 손꼽혔으나 268년 [[로마 제국]]을 침공한 [[고트족]]이 파괴하여 사라졌다. 고대 7대 불가사의를 현전하는 문헌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기원전 2세기 사람 [[안티파트로스|시돈의 안티파트로스]]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자신이 본 건축물 중 최고로 쳤다. >I have gazed on the walls of impregnable Babylon along which chariots may race, and on the Zeus by the banks of the Alpheus, I have seen the hanging gardens, and the Colossus of the Helios, the great man-made mountains of the lofty pyramids, and the gigantic tomb of Mausolus; but when I saw the sacred house of Artemis that towers to the clouds, the others were placed in the shade, for the sun himself has never looked upon its equal outside Olympus. >전차들이 그 위에서 경주를 할 법한 [[바빌론의 문|난공불락의 바빌론 성벽]]과, 알페우스 강변의 [[제우스 상|제우스]]를 목도하였다. [[바빌론의 공중정원|공중정원]]과, [[로도스의 거상|태양의 거상]]과, 장대한 인공산이라 할 만한 높다란 [[기자의 대피라미드|피라미드]]와, 광대한 [[마우솔로스 영묘|마우솔로스의 묘]]를 보았다. 그러나 내가 구름에 닿을 만큼 우뚝 서있는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전당'''을 보았을 때 이 모두가 그 그늘에 가려졌으므로 말하노니, "태양신 헬리오스마저 [[올림푸스]] 밖에서 그와 견줄만한 것은 보지 못했으리라". > >그리스 사화집(Greek Anthology) IX.58[*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없는데 저자 [[안티파트로스]]가 그 등대를 매일 봤던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 사람이었기 때문(...). 문헌 상으로 바빌론 성벽이 빠지고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가 포함 된 것은 [[6세기]] 무렵 로마의 시인이자 역사학자인 [[그레고리우스 투로넨시스가]]가 세계 7대 불가사의 목록을 재정립 하고 발표하면서부터이며 이때 [[바빌론]] 성벽이 빠지고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가 들어가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영어 번역판에서 중역 == 역사 == 첫 번째 신전은 [[청동기]] 시절부터 존재한 건축물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신전을 [[아마존(그리스 신화)|아마존]]이 건설했다고 추측했다. 기원전 7세기에 [[홍수]]로 폐허가 되었지만, 기원전 550년 [[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이소스]]가 [[크레타]] 출신 건축가 케르시프론과 그의 아들 메타게네스에게 의뢰하여 재건되었다. 이 시기 건설된 신전은 매우 화려했다고 하는데, 높이 30m에 너비도 대략 50 ×110 m가 넘었으리라 추측한다. 현재의 [[축구장]]과 비슷한 규모였다. 건물 자체도 [[크고 아름답다|크고 아름다웠을뿐더러]] 기반도 상당히 높은 곳에 건설되어서 [[에게 해]] 10 km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다니 위용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Miniaturk_009.jpg|width=100%]] {{{-2 [[튀르키예]] [[이스탄불]] 미니아튀르크(Miniatürk)[* [[튀르키예]] 전역에 있는 유명 유적지들의 미니어처를 모아놓은 전시장.]에 있는 모형. 첫 번째 신전을 모델로 한 것.}}} }}} || 그러나 기원전 356년 심각한 [[관심병자]] 헤로스트라투스가 '''"나쁜 짓을 저질러서 내 이름을 역사에 영원히 남기겠다." 하는 이유로 불을 질러 2번째로 파괴되었다.''' [[에페소스]]에서는 그를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소원인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까지 금지하려 했지만, 역사가 테오폼푸스가 기록을 남겨 결국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악명은 그가 바라던 대로 역사에 길이 남았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재건을 지시하였다. 대왕 사후인 기원전 323년에 세 번째 건설이 시작되어 [[로마 제국]]의 전성기가 끝날 때까지 굳건히 서 있었다. [[안티파트로스]]가 자신이 본 [[세계 7대 불가사의|7가지 놀라운 건축물]]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라고 평한 것도 바로 이 시기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마지막 건설 당시의 모습의 평면은 64.3×119.175 m. [[파일:external/www.ephesus.ws/bcjoxfli92.jpg|width=500]] 그러나 [[고대 로마]]의 힘이 예전 같지 않게 된 서기 268년에 [[고트족]]이 약탈하여 파괴되었다. 신전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후 [[그리스도교]]가 득세한 시절에도 이 신전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 등이 있으므로 재건/수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후 타 종교 신전을 파괴하고 폐쇄하는 와중에 아르테미스 신전도 폐쇄되어 파괴된 듯하다. 5세기 초까지는 신전이 존속했다고 추정한다. 한편 고대 유적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신전의 일부 자재는 다른 건축물의 자재로 전용되기도 했는데, [[하기아 소피아]]를 지탱하는 주 기둥의 출처가 바로 이곳이다. == 유물들 == 현재의 위치는 [[대영박물관]]의 후원을 받은 [[대영제국]]의 발굴단이 확인했으며 이때 수많은 유물들을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가 전시했다. 이 때문에 [[터키]]에서는 지금도 영국을 향해 반환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발굴 책임자였던 존 터틀 우드의 기록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이 유물들은 흔히 생각하듯 무작정 훔쳐온 [[약탈|약탈품]]이 아니라, 당시 [[오스만 제국]] 정부와의 교섭(발굴된 유물을 몇 대 몇으로 나눌 것인지 등)을 통해서 [[술탄]]의 발굴 허가증을 받아 발굴한 것이라(Wood, 1877), 터키 측에서 무작정 '우리 거니까 내놔라' 하기에는 법적으로 문제가 간단치가 않다. 당시 오스만 정부를 통해 구입한 파르테논 조각 유적과 비슷한 경우다. == 현대의 모습 ==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는 기념 성당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보이는 위치이다. 과거에는 바다였지만 강물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어 지금은 늪지대가 된 광활한 지역과 마주하고 있으며, 현재의 [[셀축]]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 [[사도 요한]]의 기념 성당 밑에는 이사베이 모스크가 있는데, 이 모스크 바로 밑에 위치해있다. 가봤자 별거 없고 입장료조차도 받지 않는다. [[사도 바오로]]가 봉변을 당할 뻔한 에페소스 극장은 지금도 유적으로 남아있고, 아르테미스 신전 만큼이나 고대 [[헬레니즘]] 세계에서 수준급으로 큰 극장이었는데 마찬가지인 아르테미스 신전과 비교해보면 뭔가 묘한 기분이 들것이다. == 기타 == 당시 이 신전의 위명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성경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사도 바울로]]가 에페소스에서 팔리던 은으로 만든 아르테미스 신전 모형[* 개역한글판에서는 은감실, 공동번역에선 은으로 된 신당 모형이라고 나와 있다. 오늘날 주요 [[랜드마크]]에 가면 기념품으로 파는 그 랜드마크의 모형을 생각하면 된다.]을 두고 '''"사람이 만든 건데 왜 신이라고 함?"''' 이라고 비판한 일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이 근방에서 장사를 하던 은세공자들의 수익에 큰 타격을 입게 되자 이들이 죄다 모여서 데모를 하는데 당시 이 집회의 주동자였던 데메트리우스의 발언은 이러했다. >[[사도행전]] 19장 25-27절(공동번역 성서) >"여러분,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이 사업으로 잘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로라는 자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 에페소에서뿐만 아니라 거의 [[아나톨리아 반도|아시아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마음을 돌려놓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의 사업이 타격을 입게 될 뿐만 아니라 위대한 여신 아르데미스 신당이 괄시를 받게 되고 마침내는 [[아나톨리아 반도|온 아시아]]와 [[로마 제국|온 세계]]가 숭상하는 [[아르테미스|이 여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말 터이니 참으로 위험합니다." 이 말을 듣고 은세공자들은 물론 에페소스 주민들까지 전부 격노해서 '에페소의 여신 아르테미스 만세'를 외치고 다녔고, 사도 바울로의 동행이었던 [[마케도니아]] 사람 둘을 붙잡아 극장으로 끌고 갔다. 이들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도시 전체가 소란해졌고, 사도 바울로가 저들을 말리고자 극장으로 뛰어들려 하자 사도 바울로를 따르던 신도들뿐만 아니라 그와 친분이 있던 [[아시아]]의 지방 장관들까지 뜯어말려야 했으며, 바울로를 훼방놓으러 왔던 [[유대인]]들조차 성난 주민들의 기세에 눌려 조용히 해달란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유대인들의 행보를 요약하자면, 사도 바울로가 가는 곳마다 소문을 따라 쫓아가서 방해 공작 및 선동을 일삼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살벌한 인간들이었다. ~~[[모사드]]의 기원?~~ 물론 유대인들 전부 다 그랬다는 건 아니지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로를 엿먹이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던 극성종자들이었는데 이런 사람들조차 찍 소리도 못했다고 나온 건 이 대목이 유일하다.] 소동은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이어졌고, 결국 에페소스 시장[* 개역한글판에는 서기장으로 나와 있다.]이 직접 나서서 '에페소스 시민 여러분, 여기가 아르테미스 여신님 모시는 동네라는 거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고 이 사람들이 아르테미스 여신님을 직접 깐 것도 아닌데 이렇게 난리피울 거 없잖아요. 만약 문제가 있으면 당사자들끼리 법대로 합시다. '''안 그러면 로마에서 소요죄로''' 뭐라고 할지도 몰라요.'라고 말한 끝에 간신히 해산시켰다고 한다. 다른 고대 종교들이 그렇듯 [[그리스 신화|그리스 종교]]도 신과 인간의 관계가 기브 앤 테이크식이었다. 인간은 신의 이름을 드높이고 신은 인간의 이익을 도모해주는 윈-윈 일종의 [[기복신앙]]이었다. 그래서 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과 자기가 부를 얻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이 구분되지 않았고, 그래서 인간의 것과 신의 것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기복신앙을 배척하는 기독교 교리가 전통적 기복신앙과 충돌한 사건이다. == 대중 매체에서 == [[문명 시리즈]]에서 [[문명 3]]에서 최신작 [[문명 6]]에 이르기까지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 문명 3: 약간의 문화를 매 턴 제공하고, 완공되면 같은 대륙에 지어진 모든 도시에 사원(약간의 문화를 매 턴 제공하고 불행한 주민 한 명을 만족한 상태로 만듦)이 즉시 건설된다. 효과 자체는 우수하지만 건설 비용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는데다 다음 시대인 중세 전반기에 배치된 교육 기술을 연구하면 퇴보하여 효과가 사라진다는 점으로 인해 인기는 별로 없다. * [[문명 4]]: 위대한 상인 점수와 적지 않은 양의 문화를 매 턴 제공하며 이 불가사의가 건설된 도시에 성직자 전문가 하나를 무료로 추가하고 이 도시의 교역로 수입을 두 배로 증가시켜 준다. 수도나 해양 도시에 건설하는 것이 좋으며, 특히 해양 도시의 교역로를 늘려 주는 파로스 등대도 확보했다면 초반부터 상당한 수입을 벌어들일 수 있다. 다만 여러 도시가 아니라 도시 딱 한 군데에만 보너스를 주는데다 건설 비용이 꽤 되기에 인기는 별로 없다. * [[문명 5]]: 소량의 문화와 위대한 기술자 점수를 매 턴 제공하며, 모든 도시에 식량 보너스를 주고 이 불가사의가 건설된 도시에서 원거리 공격 유닛을 빠르게 생산하도록 한다. 핵심은 식량 보너스인데, 초반에는 효과가 미미하지만 게임 중후반에는 체감이 될 정도로 강력해진다. * 문명 6: 식량을 매 턴 제공하고 이 불가사의가 지어진 도시에 주민 수용 공간인 주거를 추가하며, 이 불가사의 주변의 야영지, 목장, 재배지 시설물로부터 쾌적도를 얻는다. 불가사의가 지어진 도시의 성장을 무척 빠르게 만들어 주며 쾌적도 제공 효과도 사치품 타일 1~2개와 맞먹을 정도는 되어서, 대단히 우수한 불가사의로 평가받는다. 문제는 야영지와 인접한 타일에 건설해야 한다는 조건이 까다롭다는 것. [[분류:그리스 로마 신화/신전]][[분류:튀르키예의 유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