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나바 (문서 편집) [[파일:안나바 알제리 8.jpg]] [[파일:알제리 안나바 1.jpg]] 시가지 전경 [[파일:안나바 알제리 9.jpg]] 히포레기우스 유적과 [[아우구스티누스]] 성당 [목차] == 개요 == [[아랍어]] عنّابة [[프랑스어]] Bône [[영어]] Annaba [[알제리]] 동북부에 위치한 산업 [[항구도시]]. 현재 [[인구]]는 47만명으로, 알제리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다. [[콩스탕틴]]에서 동쪽으로 80km 가량 떨어져 있고, [[튀니지]]와의 [[국경]]과는 50여 km 떨어져 있다. 고대에는 히포 레기우스 혹은 히포나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가톨릭]] [[성인(기독교)|성인]]인 [[아우구스티누스]]의 [[고향]]이자 그 임지로 유명하다. 지금도 그 유적이 시가지 남쪽에 남아있다. 그후 중세를 거치며 쇠락했다가 19-[[20세기]] 프랑스 지배기에 개발되어 현재는 알제리 동부의 주요 [[항구]] 도시로 남아있다. 시내에는 [[프랑스]] 시절 세워진 건물들이 여럿 남아있다. == 역사 == [[파일:알제리 히포.jpg|width=840]] 히포 레기우스 유적 430년 6월,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카르타고]] 정복을 목표로 정한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은 그 여정의 일환으로 도시를 포위하였다. 그들은 히포 주변의 경작지에 불을 질러 주민들을 기아에 시달리게 하였고, 그 와중에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해 8월 사망하였다. 14개월 간의 처절한 포위 끝에 보급품이 바닥난 반달족은 포위를 풀고 철수하였다. 하지만 로마 사령관 보니파키우스는 카르타고 수비에 집중하기 위해 도시를 포기, 주민들을 해상으로 소개시켰다. 따라서 히포는 [[반달 왕국]]령이 되어 8년 후 카르타고가 함락될 때까지 그 수도로 기능하였다. 534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정복으로 반달 왕국이 멸망하며 도시는 다시 로마령이 되었다. 당시 히포나는 반달족 최후의 왕 [[겔리메르]]가 항복 전에 거쳐 간 도시였다. 그후 699년 도시는 [[우마이야 왕조]]령이 되었다. 그후 [[압바스 왕조]], [[아글라브 왕조]], [[파티마 왕조]], [[지리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던 1033년 지리 왕조가 복속을 철회한 것에 대한 응징으로 파티마 조가 파견한 바누 힐랄에 의해 도시는 파괴를 겪었고, 그 이듬해에는 [[피사 공화국]] 함대의 습격까지 당하였다. 여기에 홍수까지 겹치며 히포나는 유적이 되었고, 시가지는 현재의 북쪽 방향으로 옮겨졌다. 1152-3년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인들이 도시를 점령했으나[* 그 사령관인 필리프는 사실 비밀 무슬림이었기에 현지인들을 잘 대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후에 그 의혹으로 인해 처형당한다.] 1160년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아브드 알 무민]]이 이슬람령으로 수복하였다. 1250년부터 도시는 [[하프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는데, 1360년에 [[카스티야 왕국]]이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1533년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고, 1535-44년의 스페인 지배를 제외하면 그 지배는 3세기간 이어졌다. 그동안 도시는 바르바리 해적들의 거점이 되었다. 도시는 1832년 [[프랑스령 알제리]]의 일부가 되었고, 많은 [[프랑스인]]들이 정착했다가 1960년대 독립전쟁 시에야 축출되었다. == 갤러리 == [[파일:알제리 안나바 2.jpg]] [[파일:안나바 알제리 2.jpg]] [[파일:알제리 안나바 3.jpg]] [[분류:알제리의 도시]][[분류:알제리의 옛 수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