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철재 (문서 편집) ||<-2> [[파일:안철재.jpg|width=300px]] || || 성명 ||안철재(安喆載) || || 이명 ||안중현(安仲賢) || || 생몰 ||[[1886년]] [[5월 27일]] ~ [[1921년]] [[4월 29일]] || || [[출생지]] ||[[경기도]] [[안성시|안성군]] 원곡면 지문리 || || 사망지 ||[[서대문형무소]]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안철재는 1886년 5월 27일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지문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1~2일에 걸쳐 안성군 원곡면, 양성면 일대에서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4월 1일 오후 8시경에는 외가천리에 있던 원곡면 사무소 앞에서 1천여 명의 독립만세 시위군중들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일본인 면장을 끌어내어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했다. 도중에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에 이르러 시위를 벌이다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 주민들과 합세한 뒤 다시 주재소로 쇄도했다. 이 때 그는 투석으로 유리창을 부수고 불타는 주재소 건물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양성우편소를 습격하여 투석으로 창문을 부수고 일본인 외리여수(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으로 가서 상품을 파기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4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안철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안성시 출신 인물]][[분류:1886년 출생]][[분류:1921년 사망]][[분류:옥사한 인물]][[분류:건국훈장 애족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