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 (문서 편집)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니콜라이 2세의 아들, rd1=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 ||<-2> '''러시아의 황태자[br]{{{+1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로마노프}}}[br]Цесаревич Алексей Петрович'''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lexey_Petrovich_by_J.G.Tannauer_(1710-15,_Russian_museum).jpg|width=100%]]}}}|| || '''이름'''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로마노프[br](Алексей Петрович Романов) || || '''출생''' ||[[1690년]] [[2월 28일]][br][[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프레오브라젠스코예 || || '''사망''' ||[[1718년]] [[7월 7일]] (향년 28세)[br][[루스 차르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배우자'''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샤를로테 크리스티네[br],,(1711년 결혼 / 1715년 사망),, || || '''자녀''' ||나탈리야, [[표트르 2세]] || || '''아버지''' ||[[표트르 1세]] || || '''어머니''' ||예브도키야 로푸히나 || [목차] [clearfix] == 개요 == [[표트르 1세]]의 아들로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다. [[임오화변|역모 사건에 휘말려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 생애 == === 초기 === 알렉세이는 1690년, [[표트르 대제|표트르]]와 예브도키야 로푸히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를 박대하는 걸 보았고[* 표트르 대제는 어머니 나탈리야 나리쉬키나의 명령으로 결혼한 데다 전형적인 러시아 여인이었던 예브도키야를 싫어했다.], 거기다 1698년에는 예브도키야를 [[수녀원]]에 집어넣는 걸 보았다. 당연히 알렉세이는 자신의 아버지 표트르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표트르는 자신의 황태자를 자신을 닮게 키우고 싶었다. 그는 아들이 자신의 서구화 개혁을 이어주기를 바랬다. 그는 [[러시아인]] 가정교사를 해임하고, [[독일인]] 가정교사를 임명해 알렉세이에게 지리, 역사 등을 가르치게 했다. 표트르는 아들을 강하게 키우고 싶어했다. 13살이 되던 1703년 표트르는 아들에게 포병으로 [[대북방전쟁]]에 종군하게 했다. [[나르바]] 요새가 함락될 때 알렉세이는 그 현장에 있었다. 하지만 알렉세이는 전쟁과는 영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신학과 교회학에 빠져들었다. 교회에 냉소적이던 차르로서는 열불이 뻗칠 일이었다. 당연히 부자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한다. 거기다 알렉세이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 때문에 구 세력들의 중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알렉세이의 중심에는 어머니처럼 표트르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반역|표트르가 빨리 죽어주고 알렉세이가 황제가 되어주기를 바랬다.]]''' 표트르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일단 아들에게 아직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를 변화시켜보려고 했다. 1708년에 표트르는 알렉세이에게 [[스몰렌스크]] 인근에서 군대와 군량을 모아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1709년 표트르는 자신의 아들을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드레스덴]]으로 보내 서구식 교육을 받게 했다. === 결혼 문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Charlotte Sophia Christine of Brunswick-Luneburg.jpg|width=100%]]}}} || || 아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샤를로테 크리스티네 || 서구식 교육을 받은 알렉세이가 돌아오자 표트르는 아들을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는 외국 여성을 며느리로 맞이하려고 했고 결국 알렉세이의 아내는 유서 깊은 [[벨프 가문]] 출신이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의 딸 샤를로테 크리스티네로 결정됐다. 알렉세이는 결혼을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결국 작센 선제후국인 토르가우에서 1711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조건은 샤를로테 크리스티네의 [[루터교]] 신앙은 그대로 유지하되 자식들은 [[러시아 정교회]]를 믿도록 키운다는 정도였다. 샤를로테 크리스티네는 [[소피아 팔레올로기나]] 이후 최초로 러시아 황가에 시집 온 외국 여인이었다. 다행히 두 사람의 부부관계는 원만했다. 하지만 이 원만한 관계는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1714년, 알렉세이는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불륜|핀란드에서 붙잡혀 온 14살 소녀 예프로시니야란 소녀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곧 그녀는 알렉세이의 정부가 되었다. 그러다 이듬해인 1715년 샤를로테는 [[표트르 2세|표트르]]라 불릴 아들을 낳고 9일 후 [[산욕열]]로 죽었다. 표트르는 며느리의 죽음을 지켜보며 슬퍼했다고 한다. 정작 알렉세이는 그 때 [[보헤미아 왕국]]의 카를스바트[* 현 [[체코]] 카를로비바리]에서 정부인 예프로시니아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샤를로테와 알렉세이는 1남 1녀를 두었다. 샤를로테의 죽음 이후 부자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표트르는 ~~사돈 남 말 하는 것 같지만~~ 예프로시니아와 알렉세이의 관계를 못마땅해했고, 아들이 개혁에 관심이 없다는 것에 화를 냈다. 또한 알렉세이에게 제위 계승권을 박탈하는 수가 있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이로써 부자관계는 실질적으로 파탄이 났다. === 최후 === 그러던 중 1716년 표트르는 대북방전쟁과 관련해 서유럽의 협조를 얻어보려고 다시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 국가 등을 방문했다. 그러던 와중인 1716년 8월 26일 알렉세이 황태자는 멘시코프 등에게서 돈을 좀 빌린 후 예프로시니아 및 소수 인원들만 데리고 러시아를 탈출, 폴란드 귀족 코한스키를 칭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오스트리아)|빈]]으로 도망쳤다. 그러다 곧 그는 빈에서 [[나폴리]]의 성 엘모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는 거기서 샤를로테의 언니[*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따지고 보면 [[표트르 2세]]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종사촌인 셈이다.]와 결혼한 자신의 동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카를 6세]]의 보호를 받았다. 카를 6세는 표트르가 알렉세이를 암살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고 하노버 선제후이자 [[영국 국왕]] [[조지 1세]]에게 지원을 요청하기까지 한다. 일이 이상하게 진행되자 표트르는 자신의 측근인 표트르 톨스토이 백작[*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의 현조할아버지.]을 보내 알렉세이를 고국으로 돌아오게 설득하라고 지시했다. 톨스토이 백작은 알렉세이를 설득했고, 결국 알렉세이를 처벌하지 않고 예프로시니아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전제하에서 귀국했다. 다만 예프로시니아는 당시 [[임신]]한 데다가 같이 온 남자 형제가 앓아누워 빈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1718년 1월 알렉세이가 돌아오고 나서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구금되었고, [[반역죄|반역혐의]]로 체포되었다. [[공범|알렉세이의 도주를 도운 사람들이나]] [[반역자|표트르에 대한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고문당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어머니 예브도키야의 정부까지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고문은 평등하게 적용되어 '''알렉세이도 예외없이 고문당했다.''' 거기다 4월경 예프로시니아가 귀국하자 그녀 역시 구금되었다. 당시 그녀는 알렉세이의 아들로 추정되는 아이와 함께 왔는데 그 아이는 강제로 어머니 품에서 떨어지게 된 후 기록에서 사라졌다. 예프로시니아는 그 뒤 반강제로 고문도구들을 보게 됐는데 그것들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 알렉세이가 아버지가 한 모든 것들을 원상복귀시키려 했고, '''반역을 도모하려고 했다고 자백했다.''' 한편 알렉세이는 이 말을 듣고 자포자기 한 건지, 아니면 계속된 고문을 버티지 못한 건지 결국 자신이 반란 음모 등을 꾸몄다고 자백했다. 원로원은 그 말을 듣고 알렉세이에게 6월 경 사형을 선고했고 표트르의 최종 서명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안 그래도 고문으로 약해져 있던 알렉세이는 19일에 25대의 채찍질을 당했고, 5일 후 15대를 더 맞았다. 이런 계속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쇠약해진 것인지, 혹은 고문 와중에 사망한 것인지는 몰라도 알렉세이 황태자는 6월 26일 사망했다. 유해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에 안장되었다. == 여담 == * 일설에 의하면 알렉세이가 죽는 순간 표트르는 아들과 화해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표트르는 [[사도세자|아들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이 설에 의하면 이후 표트르의 건강이 조금씩 악화되어 갔다고 한다. * 알렉세이의 사후 [[로마노프 왕조]]는 훗날 [[니콜라이 2세]]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외아들]]의 이름으로 짓기 전까지 '''절대로 황태자의 이름을 알렉세이라고 짓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니콜라이의 아들 역시 [[러시아 혁명|참혹한 최후]]를 [[총살|맞이했다]]. * 알렉세이의 동서로서 그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던 [[카를 6세]]는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이후로는 다른 나라의 왕족이 생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을 구명하기 위해 여러모로 힘썼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왕세자 시절 외가인 [[영국]]으로 도망치려다가 발각되어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 의해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왕족에 대한 재판은 제국 의회에서만 할 수 있다"는 근거를 들며 사형을 막아 프리드리히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도 카를 6세였다. [[분류:체사레비치]][[분류:로마노프 가문]][[분류:1690년 출생]][[분류:1718년 사망]][[분류:옥사한 인물]][[분류:모스크바 출신 인물]][[분류:즉위하지 못한 계승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