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국충 (문서 편집)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ece5b6 '''{{{+1 당나라의 대신[br]위국공(衛國公)[br]{{{+1 楊國忠 | 양국충}}}}}}'''}}} || || '''{{{#fff 작호}}}''' ||위국공^^(衛國公)^^ || || '''{{{#fff 성}}}''' ||양(楊釗)|| || '''{{{#fff 이름}}}''' ||조(釗) → 국충(國忠)|| || '''{{{#fff 부친}}}''' ||양순(楊珣) || || '''{{{#fff 출생}}}''' ||? ~ 756년 || || '''{{{#fff 출신}}}''' ||포주(蒲州) 영락현(永樂縣)[* 現 산서성 윈청시] || || '''{{{#fff 국적}}}''' ||당(唐)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조의 [[간신]]이자 무관이다. 본명은 양조(楊釗)[* 양쇠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釗]] 문서 참조.]이고, 산서성 예성(芮城) 사람이다. 당시,현종의 총애를 받던 양옥환과 같은 [[증조할아버지|증조부]]를 가진 6촌 당형이다. [[양귀비|양옥환]]을 등에 업어 [[당현종]]에게 중용되었다. 환관 [[고력사]]와 결탁해 환관 정치를 이루었다. [[안사의 난]] 때 난병들에게 처형당했다. == 생애 == [[측천무후]]의 충신 [[장역지]]의 사위로 학문에는 자질이 없었고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데만 밝았다. 그는 젊어서 군인에 종사하였다. 그러다가 검남절도사 [[장구겸경]][* 토번과 남조국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해 토번의 요새인 안융성을 계략으로 점령한 자이다.]이 요좌로 입경하자 현종은 양소를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했다. 왕홍(王鉷)을 모함해 관직에서 몰아내고 그를 대신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고, 경조윤(京兆尹)을 겸했다. 750년, 양옥환이 귀비가 되자 현종은 양소에게 `국충`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양국충은 [[이임보]]와 연합하여 [[관롱집단|세족(世族)]]을 정계에서 몰아내었다. 이에 양국충은 현종에게 신임을 얻게 되고, 이후 이임보와 암묵적인 대립을 이루었다. 752년, [[당나라]]의 실질적인 1인자로 군림했던 이임보가 사망하자 양국충은 뇌물로 인사를 교란시키고 정계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또한 우상에 올라 문부상서를 겸하여 관직 40여 개를 독점했다. 의기양양한 양국충은 선우중통(鮮于仲通)[* 이름은 향, 자는 중통]을 천거해 익주장사로 삼고 군사를 내어주어 남조를 공격했다. 그러나, 60,000여 명의 당군이 궤멸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선우중통은 이를 승전으로 허위 보고하나, 이후 그 사실이 밝혀져 실각하고 만다. [[두보]]가 선우중통의 패전 사실이 밝혀지기 전, 선우중통을 칭찬하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754년, 양국충은 또 다시 이복(李宓)에게 군사를 내주어 남조를 공격하게 하나 또 대패함으로써 [[천보전쟁]]에서 당군은 약 20만 명의 군사를 잃게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남조]]가 반당 정책으로 당을 배척하고 [[토번]]과 연합하는 초유의 사태를 초래하였다.] 그럼에도 양국충은 이 사실을 현종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관직을 독점해 사리사욕을 채우고 뇌물로 조정을 전횡하는 데에 골몰하였다. 이후 양국충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모함을 했는데 결국 755년 [[안록산의 난|안록산이 하북에서 난을 일으켰다]].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 제거를 명분으로 삼고 [[시안(도시)|장안]]으로 진격했다. 이에 양국충은 안이하게 생각했다. 조정회의에서 그는 곧 안록산의 수급이 장안으로 도착할 것이라고 하며 낙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낙양에서의 방어작전은 실패하고, 양국충은 인망을 잃어 양국충에게 책임을 물려야 한다는 여론이 갈수록 타오르고 있었다. 위험을 느낀 양국충은 낙양 다음의 거점인 동관을 수비하는 [[가서한]]을 견제했으나 실패를 거듭해 입지만 좁아졌다. 그러나 현종을 움직여 가서한이 동관을 나와 안녹산을 요격하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는데, 이 결정은 조기에 끝날 수도 있었던 [[안사의 난]]을 연장시킨 큰 실수였다. 가서한의 병력은 수만 많았지 훈련이 되지 않은 오합지졸이라 가서한도 동관에 틀어박혀서 병력을 훈련시키고 있던 차였는데, 이런 병력으로 안녹산의 정예군을 요격한 결과 동관까지 뚫렸고 장안은 풍전등화가 되었다. 자기를 위해 나라를 파국으로 인도한 양국충은 현종에게 촉으로 피난 갈 것을 요청해 이를 승낙받고 장안을 버려 현종과 함께 [[쓰촨 성|촉]]으로 피란을 갔다. 그러나 피난 가는 도중 장안의 백성들을 버리고 황제와 자신의 일족들만을 데리고 갔으며 [[마외역]]에서 보급품 문제로 비난을 받는다. 결국, 그를 증오하는 장군 진현례와 병사들이 들고일어났으며 양국충은 그들에게 처형당했다. 진현례와 병사들은 처형당한 양국충의 [[거열형|사지를 가르고]] 그의 [[효수|머리를 잘라 마외역 문 밖에 내다 걸었다]]. 이 사태의 여파로 어사대부 위방진, 양귀비와 그녀의 언니들인 한국 부인과 진국 부인도 모두 자결하거나 처형당했다. == 평가 == >[[가서한]]이 출병하자 며칠도 안 되어, 천자가 피난하고, 조정이 함락되고, 백료가 항복하고, 후궁이 살해당하고, 군대가 천하에 충만하고, 독이 사해에 퍼진 것은 모두 양국충이 초래한 재앙이었다. >---- >『[[구당서]]』 >양국충은 성품이 간악하고 괴벽하였으며, 재능이 천하고 행실이 더러웠으며, 40여 개의 벼슬을 겸임하며 제멋대로 위세와 권력을 농단하여, 현종은 그의 거짓을 보지 못하였고, 신하들이 그로 말미암아 입을 막았으니, [[안록산]]의 [[안록산의 난|반역]]에 이르러, 황제가 파천하였고, 양국충의 목을 효수하고 종사를 무너뜨리며, 어려운 운수를 구하지 못하였다. 현종의 현명함은 두 사람에게 미혹되었는데, 대개 [[교언영색]]으로 아첨하고 영합하여 재물과 이익으로 현종을 미혹시켰으니, 현종은 두 사람에게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였다. 개원(開元) 연간에 요숭과 송경[* 요숭과 송경은 현종 시기의 명재상으로, 현종을 보좌하여 개원성세를 이룩한 재상들이다. 그래서 당태종의 명재상이었던 방현령과 두여회를 성을 따서 방두(房杜)라고 부르는 것처럼, 요숭과 송경을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요송(姚宋)이라고 불렀다.]을 임명하여 치세를 이루고 이임보와 양국충을 총애하여 난세를 이룬 것이, 대개 [[제환공]]이 [[관이오|관중]]과 [[공손습붕|습붕]]을 임명하고 [[수초(간신)|수조]]와 [[역아]]를 총애한 것과 얼마나 다른가! 『[[상서|서경]]』에서는 “신하가 복을 내고 위엄을 내면, 집안에 해를 끼치고 나라에 해를 끼친다.”라고 일렀고, 공자는 “아첨하는 이는 위태롭다.”라고 말하였으니, 진실로 이 말이었구나! >----- >『[[구당서]]』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천하의 개쌍놈]]이다.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며, 위에서 상술했듯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는데에 시간을 앞당긴 사람이며, 안사의 난으로 당조가 쇠퇴하였다. 특히 [[두보]]가 이 안사의 난 시절까지 당대를 살던 인물이기 때문에 그 개망나니같은 행적(...)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문인의 작품에 그대로 박제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자신 이전의 권력자였고 자신과 대립하다가 결국 밀려난 [[이임보]]와 비슷하다. 양국충과 이임보 모두 세력을 강화하는데 후궁과 연계했고[* 양국충은 양귀비, 이임보는 무혜비.] 자기 잇속을 위해 펼친 정치질로 당의 정치를 붕괴시키고 당나라 멸망의 기반을 쌓았다. 그러나 이임보는 양국충과 달리 적어도 군사적 실패를 여러 차례 일으키지는 않았다.[* 이임보 시절엔 [[고선지]]를 비롯한 서역에 대한 군사 원정도 진행되었고 [[안사의 난]] 같은 지방의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 그 외 == 사치가 무척 심했는데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 따르면 한여름에 금띠를 두른 얼음 조각으로 방을 채우고 거기서 잔치를 벌이며 여름을 보냈다 한다. 더불어 여자를 줄 세워서 병풍의 대용으로 한 것을 이르는 말인 육병풍(肉屛風)은[* 국어사전에도 등재된 단어이다.] 양국충이 겨울에 자신의 비첩 가운데 뚱뚱한 자를 골라서 줄 세우고 찬 바람을 막은 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 대중 매체 == 사극 대당영요에서도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는데 주인공 광평왕과 여주 심진주에게는 만악의 근원[* 간신인 것도 있으면서 독고가문이 연계된 것과 함께 광평왕의 부친인 황태자를 내치려고 해서 적대적이라고 보면되고 그러면서도 보험을 두려는 건지 자신의 딸을 광평왕비로 들이면서 양귀비와 같이 황실의 겹사돈이 되려고 하며 이후 현종의 손자 며느리 선발 대회 때 양국충의 딸이 한 성깔하면서 그 장면을 현종과 양귀비가 목격한다 결국 왕비가 되지만 심진주도 같이 부인이 된다. ]이지만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해서 현종과 황태자 [[숙종(당)|이형]]과 광평왕에게 '''폐하 전하 록산이는 역모할 관상입니다.'''라고 자주 고하고 함정에 빠트리고 하는 등 안녹산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여기에 광평왕도 안록산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간신 양국충'''과 함께 안록산과 관련해서는 일시적으로 힘을 합치지만 현종의 '''신임'''으로 무위로 돌아거나 안록산이 스스로 나서서 '''의심'''을 벗는듯 하는 등 시간이 흐르고 최종 소환 할 때 결국 [[안사의 난|사건]]이 일어나며. 이후 마외파에서 정변이 일어나 주인공 광평왕이 자신과 가족을 지속적으로 모함하고 심씨 가문과 심진주의 원수를 갚으려 결국 광평왕의 손에 교살당하고 결국 이런저런 일로 인하여 심상찮게 미친 딸 광평왕비를 제외하면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 죽기 직전에 광평왕에게 자신은 심씨 가문 몰살과는 관련이 없으며 '''지금까지 과정을 보면 너와 내가 누군가에게 이용당했단 말이다 라고 말하고''' 광평왕에게 죽임당하는데 시즌 2에서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9338139&memberNo=33180239|대당영요:사라진 황후]] == 둘러보기 == ||<-5><:><#980000>'''[[당나라|{{{#yellow 당 제국}}}]]''' '''[[사공|{{{#yellow 사공}}}]]''' || ||<:>전임 이수례 ||←||<#980000><:> '''{{{#yellow 양국충}}}''' [br] {{{#yellow 754년~756년}}} ||→||<:>후임 [[곽자의]] ||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당나라의 외척]][[분류:홍농 양씨]][[분류:윈청시 출신 인물]][[분류:756년 사망]][[분류:살해된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