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염군 (문서 편집) [include(틀:청나라의 실패한 내란)] {{{+1 捻軍 }}} [[파일:Nian_Rebellion.png]] ||활동 지역|| [목차] == 개요 == 1851년부터 1863년까지 남중국의 [[태평천국]]과 동시대에 [[화북]]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청운동. 1840년대부터 [[황하]]가 범람하고 흑사병이 유행하며 [[소금]] 밀매업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청나라가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제대로 내치에 신경쓰지 못하자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이다. 초기에는 피해를 그나마 덜 입은 지역들을 약탈하는 데에 그쳤으나, 점점 세력을 확대하여 화북의 상당 지역을 장악하였다. 비록 그들은 태평천국과의 직접적인 연대는 하지 않았으나, 청 조정과 남중국 간의 연락을 힘들게 하여 태평천국의 존속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염군은 태평천국과 달리 중앙집권적 정부를 형성하지 못하였고, 5개 집단의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하여 팔기군 및 향용에 각개격파 당하였다. 1863년, 가장 세력이 강하였던 지도자인 [[장낙행]](張樂行)이 전사하였다. 1864년에 태평천국이 멸망한 이후로 그 잔당과 합세하여 마지막 불꽃을 피웠으나 청조가 [[증국번]] 장군과 신식 무기를 갖춘 [[상승군]]을 파견하자 대패하였다. 이후 염군은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도주하다가 괴멸되었다. == 배경 == 1851년, 1855년 [[황하]]가 범람하며 [[태산]] 북쪽으로 물길을 틀면서 많은 백성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특히 [[안휘성]], [[산둥성]] 남부, [[강소성]]의 피해가 컸다. 이곳의 사람들은 황하 [[운하]]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홍수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진데다가 냉해까지 겹치니 농사도 망치고 말았다. 즉 그들은 어떻게 죽나 이판사판인 상황인 것. 만약 청나라가 민생에 신경을 썼다면 모르겠다만 서양 열강의 침입과 회족 반란, 부정부패,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그러지도 못했다. 거기에 더해서 위 지역들의 특수함이 있다면 당시 국가전매로만 거래되던 [[소금]]을 밀매하는 자들이 많았다. 당시 소금은 청나라 재정의 약 30퍼센트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품목이였기에 엄하게 관리됐고 당연히 소금 밀거래는 사형으로 다뤘다. 이에 대해 소금 밀거래상들 역시 현대의 [[조폭]]처럼 조직을 이뤘는데 그것이 염군의 시초이다.[* 염(捻)이라는 한자가 꼬인 매듭이라는 뜻인데 당시 산동 방언으로 조직이라는 뜻이 있었다.] 또한 염군이 거점으로 삼은 곳은 [[백련교]] 신자들이 난을 일으켰다가 많이 숨어든 지역이었고 여기에 더해서 당대 각지의 반란 진압을 위해 향용(鄕勇)에 징병됐다가 귀향해서 오갈데 없는 빈민이 많았다. 즉 청나라 조정의 삽질에 불만이 많은 피지배 계층의 비율이 높은, 반란이 일어나기 더없이 좋은 조건이였던 것. 또한 당시의 [[태평천국의 난]] 및 각 지역의 혼란은 각 향촌이 자체 무장화를 하도록 만들었고 향촌의 방위를 위하여 각 지역은 염군을 방치 또는 후원하게 된다.[* 화북 지방은 경제적 여건이 강남 지방보다 좋지 않았기에 염군이 없으면 향촌 방위가 힘든 지역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염군은 유적(流賊)[* 일정한 근거지가 없이 무리 전체가 떠돌아다니며 활동하는 도적 집단을 가리킨다. 중국 [[당나라]] 때의 [[황소]], [[명나라]] 때의 [[이자성]]이 바로 대표적인 유적들이다.]의 성격을 띄고 주로 근처의 지주, 부유한 상인, 사당 등을 집중적으로 털었고 수령을 제외한 기병과 보병에게는 2:1의 비율로 재물을 나눠줘서 많은 사람의 가입을 촉진시켰다. 여기에 더하여 [[빈민]]들에게도 재물을 나누어 주니 많은 사람들이 염군에 가입했고 앞서 말한 향촌의 방위 및 염군과의 영합을 위해서 향촌의 지도자나 유력자들 역시 염군을 지원했다. 거기에 특이하게도 염군은 거점을 한군데에 오래 두지 않고 계속 옮겨다녔기에 각 지역의 반란으로 고심하는 청나라의 이목을 적게 끌 수 있었다. 청나라가 마침내 염군을 위협적인 요소로 판단했을 때에는 염군은 이미 초창기의 경제적 문제 해결이나 향촌 방어 등의 목적을 가진 집단에서 벗어나 반정부적 가치를 가진 8만 이상의 반란군으로 변모했고 곧 화북지방은 전장으로 변화했다. == 전개 == 청나라는 당연히 이들을 진압하려 했고 이에 대항해 1852년 2월, 18명의 염군 두목들이 모여 장낙행을 지도자로 선출하였다. === [[장낙행]] 시대 === * [[장낙행]] === 신염군 === * [[장종우]] [[분류:1850년대 사건사고]][[분류:1860년대 사건사고]][[분류:청나라의 역사]][[분류:실패한 쿠데타 및 반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