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영국령 홍콩 (문서 편집) [include(틀:대영제국의 식민지)] ||<-3> {{{#fff {{{+1 '''홍콩'''}}} [br] '''Hong Kong'''[br]'''香港'''}}} || ||<-3> {{{-2 {{{#000,#fff [[대영제국|{{{#000,#fff 대영제국}}}]]의 [[식민지|{{{#000,#fff 식민지}}}]]}}}}}} || ||<-2> [[파일:영국령 홍콩 기.svg|width=150]] || [[파일:영국령 홍콩 국장.svg|width=120]] || ||<-2> '''{{{#fff 기}}}'''[* 1959년부터 사용한 기로 역대 깃발은 [[https://en.m.wikipedia.org/wiki/Flag_of_Hong_Kong_(1871%E2%80%931997)|이곳]]을 참고. 무역을 하는 영국과 중국의 상인과 상선 문장이 오랫동안 들어가 있었다.] || '''{{{#fff 문장}}}''' || ||<-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k-map-colonial.png|width=100%]] || ||<-3> '''{{{#fff 1841년 ~ [[홍콩일치시기|{{{#ffffff 1941년}}}]]}}}''' [br] '''{{{#fff 1945년 ~ 1997년}}}''' || ||<-2> '''{{{#fff 성립 이전}}}''' || '''{{{#fff 반환 이후}}}''' || ||<-2> '''[[청나라|{{{#00386a 청나라}}}]]''' || [[중국|{{{#ffde00 '''중화인민공화국'''}}}]][br]{{{-1 [[홍콩|{{{#!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e82b10; font-size: .8em" {{{#fff '''홍콩 특별행정구'''}}}}}}]]}}} || || '''{{{#fff 언어별 명칭}}}''' ||<-2>[[영어]]: Hong Kong[br][[광동어]]: 香港 (''Hēunggóng'')[br][[중국어]]: 香港 (''Xiānggǎng'') || || '''{{{#fff 면적}}}''' ||<-2>1105.5 km²[* 현 홍콩 특별행정구에서 [[구룡성채]]의 면적을 뺀 넓이.] || || '''{{{#fff 위치}}}''' ||<-2>[include(틀:국기, 국명=홍콩)] || || '''{{{#fff 국가}}}''' ||<-2>[[God Save the King|God Save the King/Queen]] || || '''{{{#fff 수도}}}''' ||<-2>[[중서구|빅토리아 시티]][* [[홍콩 섬]]의 [[항구]]로 현재는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현재는 [[센트럴]]과 [[애드미럴티역(홍콩)|애드미럴티]] 일대를 일컫는 말로 의미가 바뀌었다.] || || '''{{{#fff 정치체제}}}''' ||<-2>[[대영제국|영국]]의 식민지[* 참고로 영국령 홍콩은 1982년 이전까지는 영국 본토에서 파견한 총독이 입법, 사법, 행정을 모두 쥐고 지배하는 체제였지 홍콩 주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근래에 영국이 홍콩 문제에 개입할 때 중국은 이를 들어 비판한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2차대전]] 직후 마크 애이치슨 영 총독이 구상한 이른바 '영 플랜 (시의회를 설치하여 3분의 2를 주민 [[직선]]으로 선출하고, 행정조직 내에 중국계 [[홍콩인]]의 비중을 늘리는 방안이다.)'을 도입하려 하자 중국은 홍콩을 해방시키겠다며 영국을 협박했고, 마지막 총독 [[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이 실시한 민주적 [[개혁]]을 백지화한 걸 보면 [[내로남불]]이나 다름없다.]|| || '''{{{#fff 국가원수}}}''' ||<-2>[[영국 국왕|국왕]] || || '''{{{#fff 정부수반}}}''' ||<-2>[[영국령 홍콩 총독|총독]] || || '''{{{#fff 주요 총독}}}''' ||<-2>존 보우링(1854~1859)[br][[데이비드 트렌치]](1964~1971)[br][[머레이 맥클레호스]](1971~1982)[br][[에드워드 유드]](1982~1986)[br][[데이비드 클라이브 윌슨|데이비드 윌슨]](1986~1992)[br][[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크리스 패튼]](1992~1997) || || '''{{{#fff 언어}}}''' ||<-2>[[영어]], [[광동어]] || || '''{{{#fff 문자}}}''' ||<-2>[[라틴 문자]], [[한자]] || || '''{{{#fff 종교}}}''' ||<-2>[[개신교]] ([[성공회]]), [[중국 신화|중국 토속 종교]],[br][[유교]], [[불교]] || || '''{{{#fff 민족}}}''' ||<-2>[[영국인]], [[광동인]], [[인도인]] 등 || || '''{{{#fff 통화}}}''' ||<-2>[[홍콩 달러]] || [목차] [clearfix] == 개요 == '''[[영국]]령 [[홍콩]]'''(British Hong Kong)은 [[1841년]]부터 [[1997년]]까지 156년 동안 존속했던 [[영국]]의 [[식민지]]이다. [[1997년]] [[7월 1일]]에 [[영국]]이 [[중국]]에 반환하면서 해체되었으며 그 후신이 현재의 [[홍콩 특별행정구]]이다. [[영어]]로는 이 시기를 '''영국령 홍콩'''(British Hong Kong)으로 칭하고, [[중국어]]로는 이 시기를 '''영국 소속 홍콩'''이라는 의미에서 영속향항(英屬香港)[* [[광동어]] 발음으로는 '옝쑥횅겅', [[표준중국어]] 발음은 '잉슈샹강']이라고 한다. 현재 홍콩특별행정구는 '''홍콩 차이나'''(Hong Kong China)라고도 칭한다. == [[홍콩/역사|역사]] == || [[파일:영국 국기.svg|width=100%]] || [[파일:영국령 홍콩 기(1871-1876).svg.png|width=100%]] || [[파일:영국령 홍콩 기(1876-1955).svg.png|width=100%]] || || 1843~1871[* 이 때는 그냥 영국 국기를 썼다.] || 1871~1876 || 1876~1955[* 1870년대 이전부터 제정된 영국 상인이 중국인들과 장사하는 모습을 담은 Local scene 이라 하는 문장을 넣은 것인데, 1869년에 건의되었다가 채택되지 않았고 1876년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본이 점령한 1941년부터 1945년까지는 금지되었다.] || ||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width=100%]] || [[파일:영국령 홍콩 기(1955-1959).svg.png|width=100%]] || [[파일:영국령 홍콩 기.svg|width=100%]] || || 1941~1945[* [[홍콩일치시기]]에 게양된 [[일장기]].] || 1955~1959 || 1959~1997 || 역대 깃발. [[https://en.m.wikipedia.org/wiki/Flag_of_Hong_Kong_(1871%E2%80%931997)|이곳]]을 참고. === [[영국]]의 [[점령]] === [[영국]]은 [[청나라]]와의 교역을 계속 시도했으며 결국 [[영국 동인도 회사]]가 [[건륭제]] 이후 [[광저우]]에 무역항인 공행을 설치한 후 무역을 해나갔지만 영국의 무역적자가 심화되자 [[마약]]인 [[아편]]을 팔아서[* 아편은 당시 최대 식민지인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 정확히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재배한 것이었다.] 이득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의 아편 중독이 심각해지자 [[1839년]] 청나라 조정의 승인으로 [[임칙서]]가 아편 수입을 금지했고 영국은 여기에서 빌미를 잡아 중국을 공격해 [[청나라]]와 [[영국]] 간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해 [[1841년]] 광저우 남쪽의 작은 어촌이던 [[홍콩 섬]]이 [[영국 해군]]에 의해 함락당했다. 당시 [[영국 해병대]]가 당시에는 광둥성 신안현(新安縣)[* 지금의 [[선전시]].]의 부속 도서였던 현재의 [[홍콩 섬]] 북단에 상륙, 이렇다 할 방어병력도 주민도 없던 무주지인 이 섬을 처음 점령한 후 빅토리아 시티(Victoria City)[* '빅토리아 여왕의 도시'라는 뜻이다.]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현재의 센트럴이 그 곳이다. 이후 [[1842년]]에 체결된 [[난징 조약]]에서 아편전쟁의 전리품으로 정식으로 [[영국]]에 [[할양|양도된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843년]]에는 영국은 빅토리아 시티를 건립할 겸 홍콩 총독부를 홍콩 섬 센트럴에 신설한다. 홍콩 총독부 시스템이 자리잡은 이후에 홍콩 총독은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통치할 권리를 인정받은 홍콩 최고위 통치자로서 권력을 행사했고, 행정 부분은 비선출직 [[각료]]들과 경력직 [[관료]]들에 의해 집행되었다. 애로호 사건으로 [[영국]]이 [[프랑스]]와 합세해 [[청나라]]를 두들겨 팬 뒤 [[1860년]]에 체결된 [[베이징 조약]]으로 육지 부분인 [[구룡반도]]가 영속적으로 영국에 [[할양|귀속된다]]. 처음 베이징 조약에서는 구룡반도 남단과 스톤커터 섬이 할양되었는데 이 구룡반도 남단이 [[한국인]] 비중이 제일 높은 [[침사추이]]와 그 이웃 동네인 야우마테이, 몽콕, 홍함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영국의 육지부분 귀속은 지속되어 [[1898년]]에는 영국은 홍콩과 인접한 북부 섬과 신 행정구역으로 알려진 [[신계(홍콩)|신계]]를 99년 간 [[조차지|조차]]받았다. 이때 신계는 초록택시가 운행하는 현 중국 국경 지대와 구룡반도 북쪽 신구룡을 포함하는 곳으로 이 곳과 구시가지의 경계가 바운더리 스트리트이다. 이후 신계 남부 카이탁에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을 세워서 사실상 이 지역의 조차 협약을 [[사문화]]하고 신계 북부 중국 국경지대만을 반환 대상으로 봐서 택시 색을 신구룡과 다른 초록색으로 지정하고 황무지로 남긴다. [[19세기]]에 홍콩은 '''영국의 주요 무역항'''이 되었고 홍콩은 영국의 물산 집산지로서 활용되는 '''자유무역항''' 및 '''[[중국]]으로의 [[관문]]'''으로 선언되었다.[* 자유무역항 기능은 훗날 [[싱가포르]]가 [[독립]]하자 여기 넘겨준 지 오래고 [[싱가포르]]도 [[두바이]], [[도하]] 등 [[아라비아 반도]]에 차츰 넘겨주고 있다. 중국으로의 관문만은 그 누구도 대체불가라 현재도 잘 활용중이며 오히려 중국의 급성장으로 더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는 중이다.] 이 때 구룡반도-광둥성 광저우 간 [[동철선|철도]]가 개통되었으며 또한 [[영국 학제|영국식 교육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1870년대]]~[[1880년대]] 이후 홍콩은 [[아시아]]의 영국령 중에서 가장 빅토리아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 있어 중국 국내 세력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웠기 때문에 [[군벌/중화민국|군벌]]이고 혁명당원들이고 궁지에 몰리면 홍콩으로 다들 [[망명]]하곤 했다. [[쑨원]]만 해도 멸만흥한 운동을 할 때 [[청나라]] [[팔기군]]의 추적 및 청조의 핍박을 피해 [[미국]]의 [[하와이]]와 영국 영토 홍콩에 와 있었다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의 청조를 멸망시키고 [[한족]]의 민주주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세운다. 이 과정에서 홍콩 역시 [[중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서 [[1922년 홍콩 선원 파업]]과 1925년의 [[5.30 운동]] 등 중국의 정치적 격변에 수차례 휩쓸리기도 했다. 또한 중국 내부의 [[혁명]]을 저지하기 위한 영국의 기지 역할도 하여서 [[영풍함 사건]], [[광저우 상단 사건]] 등의 사주에 개입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진 [[1941년]] [[12월 8일]]에는 [[일본 제국]]이 홍콩을 침공했다. [[영국군]]은 17일 동안 맹렬한 방어전을 벌였지만, [[크리스마스]]가 되자 방어 병력을 물리친 [[일본군]]은 성 스테판 병원에서 치료 중인 부상병들과 의료인들까지 몰살하고 [[홍콩일치시기|군정]]을 시행했다. 이 때 [[중일전쟁]]에 대한 분풀이 등의 이유로 중국계 홍콩인에 대한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홍콩 경찰]]과 [[홍콩 소방처]]는 해산되고 그 자리는 [[일본 제국 육군]] [[일본 제국 육군/헌병|헌병]]들이 차지했으며 일본 육군 [[헌병]]들은 [[영국인]]에게만 허용되던 [[스타페리]]와 [[홍콩 트램]] 2층에 앉는 등 위세를 부리고 시민들을 위협하기 일쑤였다. 이 땐 영국계 홍콩인 백인들도 일본군의 눈치를 보고 다녔다. [[일본군]]이 뿌린 낮은 가치의 군표는 [[홍콩 달러]]의 기능을 대체했는지라 홍콩의 경제 마비까지 초래했다. 그런 과정에서 [[중국인]]들은 [[중화민국군]]과 연계해 항일 [[게릴라]]를 조직해 저항하기도 했으며 영국군은 [[호주]]로 후퇴한 후 [[미군]]과 함께 [[동남아시아]]를 탈환하고자 여러 격전을 치르고 그 과정에서 차츰 [[미얀마]], [[방글라데시]] 등을 탈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홍콩 전선은 탈환하지는 못했다. 미국도 [[필리핀 제2공화국|필리핀]]을 겨우 탈환했기 때문에 [[미군]]에 비해 수적으로 밀리는 영국군은 별 수 없었다. 결국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영국은 홍콩을 수복했고, 특별군사법정을 열어 일본군에 부역한 [[중국인]]들과 홍콩에서 전쟁 범죄를 자행한 [[일본인]]들을 처벌했다. 이 때 [[중국인]] 5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22명이 투옥되었다. [[일본인]]들은 21명에게 [[사형]]이, 85명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그 외에는 도주하거나 무죄방면되었으며 추가적인 기소는 없었다. === 전후와 사회 변동 === 한편 4대 강국으로 떠오른 [[중화민국]]은 홍콩 반환을 요구하면서 [[영국 정부]]를 압박했지만 영국은 강하게 거부했다. 사실 이때 [[미국]]이 맘대로(...) 홍콩을 [[중화민국]] 즉 중국 [[국민정부]]에 반환하려 했으나 영국의 결사반대로 결국 불발되었고 홍콩은 다시 영국령이 된다. 그러다가 중화민국은 [[1949년]]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에 패배했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자 본토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홍콩으로 도망쳐왔다. 특히 공산주의의 척살대상 1순위였던 [[금융업]]에 종사하는 [[자본가]]들이 많이 도망쳐왔고 그 결과 홍콩 금융업의 발전을 불러왔다. 또한 [[광둥성]]과 [[푸젠성]]에서 고급 [[중국 요리]]를 만들던 [[요리사]]들도 많이 들어왔다. 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 싸구려 [[포장마차]]인 차찬텡에서 자신들이 고급요리를 만들던 실력을 발휘하여 값싸고 푸짐한 요리를 팔기 시작했고, 작은 홍콩 섬에 중국 각지에서 온 요리들이 현지화되어 보급되었다. [[하이난 치킨 라이스]]라 불리는 [[하이난성]]에서 먹는 덮밥 해남계반(海南鷄飯/海南鸡饭)과 얌차라고 불리는 [[딤섬]]이 그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서양식의 [[스테이크]]도 소개되고 영국의 최대 [[식민지]]였던 [[영국령 인도|인도]]에서 [[커리]]도 소개되어 각각 홍콩식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종전 후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홍콩은 의류와 [[주석(원소)|주석]] [[장난감]]을 만드는 제조업으로 유명해졌다. 이때 아직 홍콩은 선진 [[개발도상국]]으로 [[인건비]]가 저렴했다. 이러한 공장이 있던 곳은 주로 [[구룡반도]]의 홍함과 산포콩, [[쿤통구|쿤통]] 일대로 특히 쿤통은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과 가까워서 공항과 연계해서 보세 의류공장이 많이 생겼다.[* 이들은 [[1980년]] 중국의 개방 이후 인건비가 비싸지고 금융업이 홍콩 산업으로 떠올라 중국으로 건너가고 현재는 가내 수공업 수준으로 잔존한다.] 이후로 [[1960년대]]에 들어서 [[대만]]과 [[대한민국]]이 의류업에서 강력한 경쟁자가 되자 [[전자산업]]에 손을 댔다. 주로 [[일본]]에서 부품을 사왔다가 홍콩에서 조립해서 수출하는 방식이었는데, [[1960년대]]에 [[라디오]]가 세계적인 [[대중매체]]가 되면서 한때 홍콩은 세계 1위 라디오 수출 지역이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지만, 업체들의 규모가 영세해서 확장에 한계가 있었던데다가 대만과 한국에서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오일 쇼크]]가 닥쳐오면서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전자산업도 개혁개방 이후로 중국본토로 건너가게 된다. 한편 [[1960년대]] 홍콩은 [[빈부격차]]가 극심했다. 오늘날 홍콩 사회도 빈부격차가 큰 편이지만 당시에는 현재보다 더 계층 격차가 심각하고 하층 [[계급]]의 생활 수준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홍콩 섬]]은 [[롤스로이스]]가 [[택시]] 노릇을 하고, 고급 유럽식 사교클럽이 불야성을 이루며 말 그대로 '''돈이 썩어나는''', 아시아 최고로 부유한 곳인 반면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게다가 [[베트남 전쟁]]까지 겪으며 피난민들이 [[중국 대륙]] 및 [[베트남]]에서 몰려든 [[구룡반도]]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생활 수준이 처참하게 어려웠었다.[* 이 당시 구룡반도 홍콩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박물관이 옛날 시영아파트를 개조한 메이호 하우스(Mei Ho House)에 위치해 있는데, 보면 당시 한국전쟁 전후였던 대한민국보다 못 살았으면 못 살았지, 결코 잘 살지는 못했고 더군다나 주거환경은 더욱 더 처참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홍콩 지하철]]이나 [[자동차]]용 크로스하버 [[해저터널]]이 개통하기 이전에는 [[구룡반도]]와 [[홍콩 섬]]을 오가는 [[교통수단]]이 '''[[스타페리|배]]'''뿐이었다. 그래서 구룡반도와 홍콩 섬의 교류가 극히 적어 다른 나라처럼 따로 국밥으로 놀았다. 여기에 [[홍콩 섬]]에 비해 상당히 낮은 [[구룡반도]] 주민들의 경제력이 더해져 몇몇 홍콩 섬 주민들은 아예 구룡반도 주민들을 [[홍콩인]]으로 취급하지도 않았고, 홍콩 섬에 사는 사람들은 구룡반도에 절대 발도 들이밀기 싫다는 식으로 구룡반도 주민들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에 구룡반도 주민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더불어 빈부격차는 물론이고 [[부정부패]]도 현재는 상상도 할 수 없이 심각했었다. 소위 차값을 주고 받는다는 은어로 통하던 [[뇌물]]은 기본이라서 뇌물을 안 주면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도 하지 않거나[* [[돈]]이 없으면 물도 없다며 소위 물세를 걷었다. 구조대는 중장비 작업비를 받고 구급대는 유류비를 받았다.] [[병원]]에서는 [[의사]]에게 차값을 안 주면 죽든 말든 내버려 두거나, [[취업]]에서 면접관에게 차값을 줘야 합격하는 식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했으며 [[돈 세탁]]도 기승을 부리는 등 여러모로 개판이었다. 당연히 이 때는 [[조세 피난처]]로도 아주 선호받았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지만, 백인들의 중국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우월감도 심각했다. 적어도 민권운동 중이던 당시 미국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단지 백인들의 수가 소수이기 때문에 부딪힐 일이 적었다는 점은 나았지만 말이다. 홍콩의 부정부패는 사실 과거 청나라 시절부터 있었고 19세기 시절에도 당연히 있었다. 청나라는 지역을 불문하고 사회 전체가 뇌물천지였고 홍콩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은 이에 대해 영국식 법치주의의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지만 괜히 건드려서 현지의 유력자들을 자극할 이유가 없으니 모른 체 해주는 방법을 택했다. 영국의 통치가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영국은 현지의 부조리와 악폐습을 적극 퇴치할지, 아님 유력자들과의 제휴를 위해서 방관할지를 택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했는데 여기서도 같은 상황을 마주한 것.[* 인도 제국에서는 사티 금지를 놓고 불타죽을 여자 몇명 구한 대가로 수천만 인도인의 반란을 직면할 이유가 없다는 관용파의 주장 때문에 사티 금지령 선포에만 수십년이 걸렸고 금지령 이후에도 적극 단속에 나서진 않았다.] 홍콩 통치에서도 엄격하게 부정부패를 때려잡아 사회혼란을 마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50년대까지만 해도 홍콩의 관료계층과 홍콩 민중 대다수도 살인, 강간, 강도질이 범죄지 차값 좀 주고받는게 뭐가 범죄냐면서 이를 일상적으로 치부하고 영국인들이 이를 눈감아주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만족하는 상황에 가까웠다. 하지만 홍콩 인구가 400만을 넘어서면서 주택 부족 등[* 홍콩 총독부는 주택 부족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무관심하다가 1950년대에야 대응에 나섰다.] 민중의 불만을 자극하는 사회 문제들이 누적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많은 홍콩의 상점주들은 가난한 시민들을 상대로 해적판이나 밀수품을 팔면서 연명해왔는데, 이러한 짝퉁 판매는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되지도, 그렇다고 합법화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오로지 일선에서 단속하는 경찰의 자비에 의존했다. 당연히 경찰의 자비는 차값 제공의 대가로 나왔고, 뇌물을 낼 여력도 없는 사람들의 사업체는 폐쇄당했다. 따라서 경찰이 곧 부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으며 오로지 기업체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홍콩 총독부의 통치 역량에 대한 시민적 분노는 누적되었다. 여기에 60-70년대부터 홍콩의 경제적 성장이 여타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수준을 넘어서기 시작했으며, 전통적 중국식 관세제도를 넘어선 선진적 영국 행정을 전면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대중적 요구가 높아졌다. 이들은 아예 영국 본국에 홍콩 개혁을 호소하면서 홍콩 총독부를 압박했다. 그리고 홍콩을 단순히 피난처나 돈 벌로 잠시 들른 곳으로 여긴 구세대가 아닌, 홍콩을 자신의 집이자 고향으로 여기는 신세대가 성장하면서 기존에 영국이 사용하던 통치 방식이 쓸모가 다했다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0년대의 대중항쟁 사건들이 터지면서 일부 부패한 기업가와 관료들과의 타협만으로는 홍콩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1966년]], 당시까지만 해도 [[홍콩 지하철]]도 없고 크로스하버 터널도 없어서 [[홍콩 섬]]-[[구룡반도]] 간 연락을 [[스타페리]]가 독점하던 시절, 페리 요금이 인상되자 이에 대항해 비폭력 [[시위]]가 일어났다. 홍콩 총독부가 이 항의시위를 탄압하자 어렵게 살던 [[구룡반도]]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시위가 [[폭동]]으로 격화된다. 주로 조던 로드나 [[침사추이]] 등 구룡 일대에서 일어났으며 이때 [[홍콩 버스]]도 [[폭리]]를 취하다 표적이 되어버려 구룡반도의 [[버스회사]]인 KMB도 공격당했다. [[중국인]]들이 벌이는 대대적 폭동에 홍콩 총독부는 당황해서 [[홍콩 경찰]] 소속 기마경찰들을 투입해 얼른 진압해 버린다. 이때만해도 기마경찰을 빼고 전문적인 폭동진압부대가 없어서 대개 순찰경관들이 나무로 만든 [[진압방패]]와 [[진압봉]]을 들고 진압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1969년]] 전문적인 폭동진압용 [[경찰기동대]]인 PTU대가 창설되고 [[1976년]]에는 PTU대 예하로 SDU소대 즉 대테러 [[경찰특공대]]가 [[대테러부대]]로 창설되었다. 반환 이후에는 1당독재 국가인 중국 정부의 홍콩에서의 독재가 널리 알려지고 있지만 사실 영국 정부 역시 썩 민주적으로 홍콩을 통치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부유층이 아닌 약자들과 그들을 대변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이 없지 않았다. 다만 영국이 아예 홍콩에 대한 민주적인 통치를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고, [[제2차 세계 대전|2차대전]] 직후 마크 애이치슨 영 총독이 이른바 '영 플랜 (시의회를 설치하여 3분의 2를 주민 [[직선]]으로 선출하고, 행정조직 내에 중국계 [[홍콩인]]의 비중을 늘리는 방안이다.)'을 도입하려 하였으나, 중국이 홍콩을 해방시키겠다며 영국을 협박해 무산되었다. 또한 이 와중에 몇몇 [[홍콩인]]들은 홍콩의 사회 문제를 영국 식민지 체제의 폐단으로 보고 그 해결책을 [[중국 본토]]의 [[문화대혁명]]에서 찾고자 했다. [[1960년대]] 중국 본토에서 [[문화대혁명]]이 발생하자, [[중국 공산당]]의 사주로 [[홍콩 공회연합회]]가 중심이 되어, 문혁에 호응하는 젊은 [[청년]]들과 빅토리아항 부두[* [[1980년대]] 항만 시설을 [[구룡반도]] 북서부 콰이충으로 옮기기 전까지 빅토리아항이 주요 항만 역할을 했다. 현재 [[마카오]]로 가는 [[페리(선박)|페리]]가 드나드는 슌탁센터도 이 빅토리아항에 있다.]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1967년]]에 [[67폭동|67 구룡폭동]]이 발생했다. [[영국 정부]]는 이 때 [[긴급조치]]법을 만들었고, 홍콩 당국은 이 폭동을 긴급조치법을 통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에 [[중국]]이 크게 반발하여 홍콩 [[홍위병]]들에 대한 배상과 사죄를 요구하자 홍콩 당국은 이를 가차없이 거절했고 흥분한 대륙 홍위병들이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영국령 홍콩 정부로 하여금 사회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에 따라 [[1974년]] [[염정공서]]가 세워지고 계좌 개설을 어렵게 해 놓는 한편 신설 염정공서가 검은 돈을 전부 적발해내 [[돈세탁]]을 더이상 할 수 없게 하였다. [[조세피난처]] 노릇도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1976년]] 크로스하버 터널 개통, [[1979년]] [[홍콩 지하철]] [[쿤통선]][* 그땐 쿤통에서 침사추이, 몽콕을 거쳐 센트럴로 연결되는 식이었다.] 개통, 소방훈련학교 및 경찰훈련학교 설립, 부패 경찰관 전원 해고와 구속수사 및 신임 경찰관 대거 채용, 영국 본토의 반부패 전문가 초빙, 공중위생을 높이는 클린 홍콩 운동 등을 벌이며 말 그대로 홍콩의 질적 선진화가 이루어지게 되고 빈부격차도 많이 해소된다.[* [[1971년]]부터 [[1982년]]까지 재임한 25대 총독 [[머레이 맥클레호스]]의 업적으로 역대 [[홍콩 총독|총독]] 가운데 홍콩의 발전을 가장 크게 이루어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이름을 딴 트래킹 코스도 있을 정도로 [[홍콩인]]의 평가가 좋다. 다만 재임시절 영국에서는 [[비난]]을 받았는데 홍콩의 사회적 [[인프라]]를 짓느라 영국의 [[예산]]을 엄청 당겨다 써서 중국에 돌려줄 식민지에 예산을 퍼준다고 여야의 비난을 받았다.] [[1978년]]에 [[중국]]이 경제 개혁안을 시작했을 때, 홍콩은 중국 본토에 투자되는 외국 자금의 주요 공급원이 되었다. 이듬해 경제특구가 홍콩 바로 북쪽에 있는 [[선전시]]에 건립되었고, [[재정]]과 [[금융]] 분야에서 계속해서 영향력이 커지면서 홍콩의 [[산업]]은 [[제조업]]과 [[섬유]]에서 점진적으로 [[서비스]] 업종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홍콩이 [[선진국]]에 진입하며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되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홍콩이 된다. 사실 홍콩도 꽤 격세지감이 커서 [[노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전벽해 식으로 모든게 바뀌었다.[* 이는 [[홍콩 영화]]를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1950년대]] 및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홍콩에서 촬영되었던 [[이소룡]] 주연의 영화에서의 홍콩과 [[1980년대]]~[[1990년대]] 홍콩 영화 전성기 시대의 홍콩을 비교하면 충격적일 정도다. [[1975년]]을 기점으로 5년 간 현재 홍콩의 기틀이 거진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 [[홍콩 반환|반환]]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59574185bb35030a49690457.jpg|width=100%]]}}}|| 홍콩 총독부 측은 1920년대 중화민국 시절에 신계 지역의 조차를 영구할양으로 전환해보려고 시도했으나, 중국의 혼란과 영국 본국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끝내 무산되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과 협상하려고 해도 영국이 1950년에 중국을 그저 승인했을 뿐 정식 외교관계는 1970년대까지 수립되지 못해서 본격적인 협상 역시 불가능했다. [[1979년]] 25대 [[영국령 홍콩 총독|홍콩 총독]] [[머레이 맥클레호스]]가 후속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 무역부장의 초청에 따라 [[베이징]]을 방문, 중국 측에 조차 문제의 해결을 부탁했지만 중국은 이를 묵살하였고 다만 이후 홍콩의 중요성과 홍콩 제도에 대한 존중의 의사를 수차례에 걸쳐 밝혔을 뿐이었다. 이러한 시도의 최종판으로 1981년에 대만을 염두에 두고 일국양제를 선포하였다. 따라서 본격적인 협상은 1982년 대처 내각 시절에야 이루어졌다. 영국은 홍콩의 주권만 반환하고 통치권을 유지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30-50년 정도 영국령 홍콩을 존속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영국의 이러한 제안에 중국은 큰 반감을 보였으며, 덩샤오핑은 "만일 중국이 1997년 홍콩을 회수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중국의 지도자와 정부도 중국인들에게 떳떳하지 못할 것이며, 더 나아가 전 세계에 대해서도 떳떳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만일 회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중국정부는 만청정부이며, 중국의 지도자는 [[이홍장]]인 것을 의미한다."라고 할 정도였다. 중국공산당 측은 홍콩에 대한 영국의 영유권은 모두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신계 조차기간 99년에도 역시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한 적이 없었다. 1997년에 반드시 반환이 된다고 아등바등하고 있던 것은 영국이었으며 중국은 당장 반환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당장 반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더 일찍 반환이 될 수도, 더 나중에 반환이 될 수도 있다는 유연한 태도였다. 따라서 영국과 중국 협상장에서 중국 측은 주권과 행정권을 교환하자는 대처의 요구에 대해서 완고하게 전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으며, 99년의 조차 기간에도 의미를 두지 않아서 반드시 1997년에 반환되어야 한다는 입장도 아니었다. 즉 중국과 일전을 각오하고 홍콩에 엉덩이를 붙이든가 깔끔하게 모두 돌려주든가 2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14개월 간 22차례에 걸친 협상 끝에 결국 영국은 홍콩 전역을 깔끔하게 반환하는 것에 동의, 1984년 9월 26일 리처드 에반스 주중 영국대사와 저우난 중국 외교부 부장이 [[영중공동선언]]에 합의하였다. 1984년 12월 19일 베이징에서 영국 측 대표인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중국 측 대표인 [[자오쯔양]] 중국 [[중국 총리|국무원 총리]]가 서명, 1985년 5월 27일 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6월 30일부로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영국령 홍콩 정부는 반환 문제가 해결된 [[1984년]]부터 [[1997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민주적 정치개혁을 해놓았다. 구의회를 주민 [[직선제]]로 바꾸고 [[국회]] 격인 입법국에 일부 [[보통선거]] 선출 의석을 마련했다. 저런 [[개혁]]이 하나 하나 있을 때마다 중국은 공동선언 위반이라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중영공동선언은 중국에 홍콩의 현행 체제를 유지할 것을 규정했는데, 중국은 '현행'의 의미를 선언 발효 시점인 [[1984년]] 혹은 그 이전으로 본 반면 영국은 반환 시점인 [[1997년]]으로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영국 측은 공동선언 제4조 "과도기 기간 중 영국이 홍콩의 행정관리를 책임지고 경제적인 번영과 사회 안정을 유지하며, 중국은 이에 협력한다"라는 대목을 두고 홍콩의 정치개혁을 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이런 영국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면 영국의 보수 세력] '민주주의를 도입할 거면 미리 했어야지 그동안 비민주적으로 통치를 해 놓고 중국에게 반환할 때가 되니깐 정치적 목적으로 민주적 개혁을 하냐'[* 오늘날 중국 본토와 홍콩의 친중 세력이 민주화 인사들을 비판할 때 자주 사용하는 논거이기도 하다. 민주화 인사들이 홍콩의 민주주의를 지키자면서 [[유니언 잭]]을 들고 [[God Save the Queen]]을 부르며 [[영국]]을 찬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모순이라는 것. 즉 "니들이 그렇게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 자꾸 영국을 끌어들이는데, 정작 그 영국령 시절의 홍콩이 민주적이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는 비아냥도 있었다. 물론 민주적 개혁 자체는 옳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사실 홍콩의 민주개혁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일본군의 점령으로 실추된 영국의 권위를 만회하기 위해[* 천하의 대영제국이 아시아인들에게 졌다는 사실에 장제스를 포함한 중국인들에 동남아시아 전역이 발칵 뒤집힐 정도였다. 장제스는 홍콩 함락 이후 공공연하게 영국의 홍콩 지배에 어깃장을 놓기 시작했고 리콴유 등 식민지 지식인들도 유럽인 지배자들을 영원히 있을 존재들이 아닌, 수틀리면 몰아낼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홍콩인들을 완전히 영국화하여 홍콩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1950년대에 한번 추진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무산되었고 패튼 총독 때 다시 추진된 것. 그리고 영중공동선언에 따라 [[1997년]] [[7월 1일]] [[자정]]에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여 홍콩 [[특별행정구]]가 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 [[홍콩/군사|군사]] == [[홍콩/군사]] 항목에서 주홍콩영국군 문단 참고. == 의의 == [[영국]]의 [[홍콩]] 지배는 오늘날 세계 최고의 무역항 중 하나인 홍콩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자유항(自由港)이라는 이미지가 구축된 것도 영국 지배 시기 부터였다. [[영국]]은 홍콩을 [[호주]]나 [[캐나다]], [[뉴질랜드]], [[싱가포르]]처럼 자국 영토의 연장으로서 건설했었고 그래서 극소수인 [[영국인]]뿐 아니라 [[중국인]]들의 생활 수준에도 신경을 좀 썼다. 그 덕에 [[홍콩 섬]]은 엄청난 후광을 봤다. 물론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광둥성]]에서 피난민이 내려와 [[구룡반도]]의 생활환경이 나빠지고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하지만 [[홍콩 섬]]에 사는 오리지널 [[홍콩인]]들의 생활 수준은 원래부터 높은 편이었다. 구룡반도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롤스로이스]]가 홍콩 섬에서는 [[1905년]]부터 보이는가 하면 [[아시아]]에서 다섯 번째 [[도시철도]]에 해당하는[* [[교토시|교토]], [[베이징시|베이징]], [[나고야시|나고야]], [[한성부|한성]]에서 전차가 먼저 개업했으므로 홍콩 트램은 5번째이다.] [[홍콩 트램]]도 홍콩 섬에서는 [[1904년]] 이미 개업했다. 어쩌다가 홍콩을 거쳐 유럽이나 미국 등에 다녀온 [[일제강점기]] 당시 상류층들은 [[홍콩 섬]]의 부유한 생활상과 [[일제강점기|조선]]에서는 물론 [[일본제국|일본]]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진귀한 유럽제 물건들이 일상품으로 쓰이는 풍경에 놀랐다.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배 동안 선진적인 행정제도가 홍콩에 잘 안착되었고, 효과적인 [[공무원]] 및 [[홍콩 경찰]] 등 치안유지 제도와 사회기반 시설, 높은 [[시민의식]], 친절한 공무원 및 공공 서비스 종사자들 등을 자랑한다. 영국은 비교적 민주적이고 청렴한 정부를 구축하여 [[중국]]에 반환했기 때문에, 홍콩특별행정구 정부가 이를 승계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식민지배를 받았음에도 영국에 대한 [[홍콩인]]들의 감정은 나쁘지 않다. 지금의 특별행정구 체제보다 비교적 더 좋아한다.[* 영국 초창기 식민지배 시절에는 [[인종차별]] 및 의사소통에서 문제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만 맥리호스 이후에 이러한 것들은 개선되었다.] 젊은 세대는 매우 좋아하고. [[일본군]]의 [[점령]]에서 벗어난 이후 취임한 21대 총독부터는 뭔가 하나쯤은 홍콩 사회에 긍정적인 업적을 남겨왔고, 비록 영국령 홍콩 정부는 완전한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치를 허락한 적은 없지만 그와는 별개로 67 구룡폭동 이후로는 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해 사회를 개선하려는 노력[* 빈부격차 해소, [[영국인]]과 [[중국인]]의 [[차별]] 해소, 부패 척결 등등]을 해왔으며 [[언론자유지수]]도 크게 상승했고 미진했던 [[민주화]]도 [[1980년대]] 이후로는 그럭저럭 이뤄놓고 떠났다. 역대 [[홍콩 총독|총독]]들은 부임할 때마다 스스로 [[광둥어]]식 [[이름]]을 짓는 [[전통]]이 있었다. 비록 홍콩의 상류층 사이에서는 영어를 더 많이 쓰긴 했지만 나름대로 식민지인들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은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홍콩 경찰]]의 [[백인]] 간부들 역시 [[광동어]]를 배워서 구사하며 [[현지화]]를 강조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면서 그 당시 총독과 고위 관리들을 감금하는 등 [[일본군]]으로부터 영국 총독부가 핍박을 받은 역사 때문에, 비록 총독과 식민지인 관계지만 일본군 점령 하에서 같이 고생한 사이라는 미묘한 [[감정]]도 있다. 이 때 명목상 [[호주]]로 후퇴한 홍콩 총독부는 계속 [[우표]]를 찍어냈는데 [[영국 왕실]]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영국인]]과 [[중국인]]이 힘 합쳐 항일투쟁을 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들을 담았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많은 [[중국 대륙]] 출신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들어왔고, 이는 홍콩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시기 들어온 [[중국 대륙]]인 이민자들은 대부분 부패가 만연했고, 홍콩에서도 [[중국 본토]]에서 했던 것과 동일하게 [[뇌물]]을 주고 받았다. 주로 민간 영역에서 문제가 빈발하며 [[염정공서]]가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겉으로는 [[일국양제]]를 고수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내심 공산당은 홍콩의 민주주의적 자치를 불쾌해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말하는 일국양제는 정치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홍콩 보안법|국가보안법]], [[애국주의]] 교육 등을 실시하는게 그 골자이다. 홍콩에서는 홍콩인들의 강력한 반발로 실시되지 못했으나 마카오는 실시 중이다.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구역이고, 홍콩 [[행정부]]와 [[사법부]]는 [[홍콩인]]들이 자체적으로 구성하는 만큼 굳이 [[민주주의]]까진 필요 없고 어느 정도 [[중국화]]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게 [[중국 공산당]]의 일관된 입장이다. 그 때문에 [[서방]]이나 홍콩 [[민주파]]의 민주화 요구를 징징거림으로 일축하며 '''일국양제를 지속할 것이며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늘 강조한다. 때문에 [[홍콩인]]들과 [[중국 대륙]] 출신 [[중국인]]들은 서로에 대해 상당한 불만이 쌓여있고 이것이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 및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는 이유가 되었다. 민주화 시위에서 꼭 등장하는 것이 [[유니언 잭]]과 영국령 시절 식민지 깃발이다. 중국의 특별행정구보다 '''[[차악|영국의 식민지가 더 낫다는 것]].''' 아예 중국 본토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홍콩인]]들도 있다. 이들은 기존 민주파와 다르게 본토파라고 불리며 세력은 그리 크지 않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나름의 세력을 갖고 있었으나 홍콩보안법으로 와해되어 사라졌다. 더 자세한 것은 [[홍콩 독립운동]] 문서를 참조할 것. == 참고 문서 == * [[홍콩]] * [[대영제국]] * [[청나라]] * [[식민지]] * [[홍콩 독립운동]] * [[포르투갈령 마카오]] * [[중영공동선언]] * [[홍콩 반환]] * [[영국령 홍콩 총독]] [[분류:영국령 홍콩]]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