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보에 작전 (문서 편집) [include(틀:2차 세계대전의 전투 목록(아시아 및 태평양))] Operation Oboe. [목차] == 개요 == [[태평양 전쟁]] 말엽인 1945년 5월~7월에 이루어진 [[연합군]]의 마지막 수륙협동공세작전. 당시 중심전장인 [[일본]] 인근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던 데다 공세의 중심이 [[미군]]도 아니었고[* 영국군과 호주군이 주축이었고 [[네덜란드]]군 일부가 투입되었다.], 전세에 전혀 영향을 끼치 못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 배경 == 1942년 [[남방작전]]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을 순식간에 휩쓴 이래 이 지역은 [[일본군]]의 핵심 전략요충지로 급부상했다. [[태평양 전쟁/배경|애시당초 석유때문에 전쟁을 시작]]한 만큼 일본에게 있어 유일하며 핵심적인 전략자원 수급지역인 동남아시아는 전쟁수행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지역이었다. 특히 [[보르네오]] 섬에는 [[고무]]는 물론이오, 가장 중요한 자원인 [[석유]]가 매장되어 있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곳을, 전세가 뒤집힌 1944년 이후의 연합군이 냅둘 리가 없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전적으로 여기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키나와 전투]]가 지지부진한데 다른 곳에서 활로도 찾고, 곧 있을 [[몰락 작전]] 대비 상륙전 예행연습도 할 겸, 남아도는 전력 활용(…)도 할 겸 해서 킨케이드 제독의 [[제7함대]]를 지원하고, 일본 폭격에서 [[B-29]]에 밀리고 항속거리도 짧아 밀려난 [[B-24]]를 대거 투입하기로 약속했다. == 전개 == 이렇게 실시된 오보에 작전은 크게 3개의 그룹으로 실시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orneo_Campaign_CMH.jpg|width=500]] 우선 오보에(Oboe) 1로 명명된 첫번째 부대가 5월 1일, 보르네오 섬 북동쪽 타라칸 해안에 상륙, 약 2,000여 명의 수비대를 말 그대로 전멸시켰다. 병력교환비는 약 1:10. 패잔 일본군들은 다 내륙으로 도망가 [[브루나이]] 방면으로 향했으나 6월 10일, 오보에 6으로 명명된 두번째 부대가 브루나이에 [[상륙전]]을 단행, 보르네오 섬 수비대의 핵심인 제37군 사령관 바바 마사오의 부대를 완파하고 유전지대와 항만, 도시를 장악했다. 미군 B-24 폭격기들의 압도적 폭격하에 일본군은 요격에 나설 전투기도 없이 신나게 두들겨맞기만 했고, 여기서도 병력교환비 1:10이 재현되었다. 마지막으로 7월 1일, 오보에 2 그룹이 [[셀레베스]] 섬을 마주보고 있는 보르네오 섬 동부 발릭파판에 상륙, 여기서도 일본군은 신나게 털렸고 이로서 연합군은 마카사르 해협의 통행권을 완벽히 장악하고 동남아시아 각지에 분산된 일본군 간의 교통과 통신을 차단시켰다. 오보에 1, 6, 2 3개 그룹의 모든 작전은 8월 1일부로 끝났다. 나머지 패잔 일본군들은 험난한 정글과 산맥을 헤치며 보르네오 섬에서 마지막으로 유지하고 있던 거점인 쿠칭으로 향했으나, 그동안의 막장통치에 분개하던 섬 [[원주민]]들과 [[영국군]] [[게릴라]]들의 협공으로 큰 피해를 입고[* 원주민들은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의해 금지당한 전통 문화인 '머리 사냥'을 다시 재개해서 수많은 일본군들의 모가지가 마구 썰려나갔다.] 강을 건너다 [[악어]]의 식사가 되는 수모를 당하여 최종적으로 쿠칭에 도달한 일본군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작전은 끝났고, 2주 후 일본은 무조건 항복한다. == 진실 == 사실 미국은 전쟁 끝날때까지 보르네오를 내버려두려고 했다. 사실 1945년이 되면 [[일본 해군]]은 바다로 기어나오지도 못하고 있었고 당연히 전략자원의 본토 수송은 꿈도 못꿨다. 게다가 이미 1944년 후반기 미군이 일본 본토와 동남아시아 점령지 해상 교통망의 중간 지점이었던 [[필리핀]]에 상륙, 제해/제공권의 장악으로 일본군이 본토에서 보내는 해상수송은 [[대만]] 이남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나마도 미 해군의 무제한 [[잠수함]]전으로 [[화물선]]이 보이는 족족 침몰당해서, 일본에는 보르네오산 전략자원을 본토로 수송할 화물선조차 남지 않고, 얼마 안되는 화물선마저 [[조선]]과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쌀]]'''을 싣고 오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필리핀 탈환전]]과 [[오키나와 전투]]로 동남아시아-일본 항로는 이미 자연적으로 차단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보르네오 섬에서 석유를 아무리 뽑아낸다 한들 본토로 못 옮기니 냅둬도 그만이었다. 그리고 아주 냅둔 것도 아니고 [[폭격기]]로 가끔 두들겨주기도 했다. 사실 연합군이 보르네오 섬 공략을 계획한 건 정치적 문제였다. 중부 태평양에서 시작된 연합군의 대반격작전 대부분은 모두 다 '''[[미국]]'''이 하고 있었으며 45년 시점에 이르러 [[영국군]]은 [[미얀마]] 대부분을 탈환했지만 여전히 해당 지역에 묶여 있었으며 [[영연방]]인 [[호주군]]은 [[뉴기니]] 섬과 태평양 각 도서에 고립된 일본군 잔당을 상대하고 있었다. 여기에 일본 본토 진공까지 사실상 [[미군]] 혼자 다 하려는 상황이라 영국으로선 매우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미국 혼자 싸워도 일본이 망하는 건 변하지 않지만, 중요한건 일본 항복 이후 태평양-아시아에서의 세력질서와 정치적 지분이었다. 이에 영국은 자국군과 호주군을 주력으로 하고 일부 [[네덜란드군]]을 더한 병력을 주력으로 하는 보르네오 섬 공격 계획을 제안하나, 이마저도 '''미군의 지원이 없으면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온갖 이유를 다 들이댔는데 대표적인 것이 역시 보르네오 섬의 석유수급루트 차단이고, 그 외에 [[필리핀]]을 점령한 미군에의 위협 제거 등등을 거론했고, [[맥아더]]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 당시 독일 항복으로 스포트라이트가 다 유럽에 집중된 반면 오키나와 전투는 지지부진해서 맥아더는 잠시 언론의 무관심을 받는 중이었다.]와 동맹국 배려 차원에서 이를 지원했던 것이었다. 실제 전쟁이 끝나고 약 10년 뒤부터 작전의 핵심이었던 호주 내부에서는 어차피 실행 안했어도 이길 전쟁, 괜히 고집부리고 쳐들어가다 수백명의 애꿎은 젊은이만 희생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분류:1945년 전투]][[분류:태평양 전쟁/상륙작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