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외젠 들라크루아 (문서 편집) ||<-2> '''{{{+1 외젠 들라크루아}}}[br]Eugène Delacroix'''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Félix_Nadar_1820-1910_portraits_Eugène_Delacroix.jpg|width=100%]]}}} || || '''본명''' ||페르디낭 빅토르 외젠 들라크루아[br](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 실제 발음은 '페흐디낭 빅토흐 외젠 들라크화'에 가깝다.]|| ||<|2> '''출생''' ||[[1798년]] [[4월 26일]]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6]] [[프랑스 제1공화국]] 샤랑통생모리스[* 현재 [[일드프랑스]]에 위치한 '생 모리스'다.] || ||<|2> '''사망''' ||[[1863년]] [[8월 13일]] (향년 65세)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7]] [[프랑스 제2제국]] [[파리(프랑스)|파리]]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프랑스)] || || '''묘지''' ||파리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 || '''신장''' ||[[단신|142cm]][* [[https://astrotheme.com/heights/4'8|증거]]] || || '''직업''' ||[[화가]] || || '''사조''' ||[[낭만주의]] || [목차] [clearfix] == 개요 == >'''들라크루아의 팔레트는 프랑스의 위대한 팔레트다. 그만큼 풍부한 색채를 사용한 화가는 없다. 우리는 모두 들라크루아를 통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 >[[폴 세잔]] [[프랑스]]의 화가. '''19세기 낭만주의 예술의 최고 대표자'''로 손꼽히는 화가이다. 그의 라이벌로 불리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앵그르]]가 신고전주의의 완벽함을 추구했다면 들라크루아는 외곽선의 명료성과 세밀하게 본을 뜬 형태보단 그들의 색과 운동에 대한 강조에서 영감을 얻었다. == 생애 == 1798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샤랑통 생 모리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름 있는 외교관[* 19세기 초 프랑스의 전설적인 외교관 [[탈레랑]]이라는 추측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이었지만 들라크루아가 7살 때 사망했다. 어머니는 유명한 궁정 가구업자의 딸이었다. 어려서부터 예술을 사랑하는 집안 분위기에 따라 음악과 연극, 고전 등에 관심을 가졌으며, 8살 때 리세 앵페리알에 입학했다. 1814년 어머니가 사망하여 누나 집에서 살다 1815년에는 숙부의 소개로 유명한 화가인 게랭 남작의 제자가 되었다. 이듬해에 [[파리 보자르]]에 들어갔고, 이 시기에 루브르 미술관에 드나들면서 루벤스와 제리코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1819년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1791년 ~ 1824년)^^의 작품《[[메두사]]호의 뗏목》을 보고서 결정적으로 낭만주의를 신봉하게 되었다.[* 실제로 제리코와 들라크루아는 게랭 밑에서 배운 선후배 관계로 들라크루아는 제리코에게 금전적 지원을 받기도 했다.] 이어 1822년에는 처음으로 [[낭만주의]] 그림인《[[단테]]의 작은 배》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단테]]의《'''[[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으로 [[미켈란젤로]]와 루벤스를 떠올리게 하는 비애감이 살아 있는 작품이다. 들라크루아는 1824년 그리스 독립 전쟁에 공감하여《키오스 섬의 [[학살]]》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키오스 섬에서 그리스 인들이 투르크 인들에게 대량 학살당한 사건을 그린 것으로 1824년에 파리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1827년《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을 발표했고, 이어 1830년 파리에서 일어난 [[7월 혁명]]에 동참했으며,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렸다. 들라크루아는 1832년 프랑스 정부 사절단에 끼어 모로코를 방문했는데, 그 방문 후 그의 그림에서는 색채를 효과적으로 쓰는 법과 붉은색과 녹색, 푸른색, 오랜지색을 적절히 배합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귀국 후 1834년에 완성한 《알제의 연인들》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와 같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레데리크 쇼팽]]과 [[조르주 상드]]와도 친분이 있어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상드의 아들인 모리스 디드방을 가르치기도 했다. 1835년부터 1861년까지 들라크루아는 많은 수의 대형 벽화를 제작했으며, 작품에 몰두하다 건강을 해쳐 1863년 세상을 떠났다. == 작품 == || [[파일: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jpg|width=400px]] ||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iberty Leading the People) || == 여담 == * 키가 유난히 작은 편인데, 당시 웬만한 단신도 150은 넘는 것에 비해 142cm밖에 되지 않았다. 옛날 사람이라 작다고 보기엔 그때 당시 프랑스 여성 평균 신장보다도 10cm는 더 작은 키이다. * 프랑스 1970년대 100프랑 지폐에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모델로 선정되었다. [각주] [[분류:프랑스의 화가]][[분류:1798년 출생]][[분류:1863년 사망]][[분류:낭만주의 화가]][[분류:화폐의 인물]][[분류:발드마른 출신 인물]][[분류:파리 보자르 출신]][[분류:페르 라셰즈 묘지 안장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