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동성 (문서 편집) [include(틀:고구려 요동방어선)]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ilbe.com/4f98668505a25a631a6c614a5b3f0983.png|width=100%]][br][[파일:external/blog-imgs-43.fc2.com/ryoutou030.jpg|width=100%]]}}} || || [[중국]] 요화박물관에 전시 중인 [[요동성]] 복원도.[* 단순 성곽 복원도라서 주변에 논밭을 그려놨고 해자가 없다. 실제로는 저렇게 가까이에는 논밭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고 해자는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goguryeo_seong.jpg|width=100%]]}}} || || 고구려 지도와 요동성의 위치 || [목차] == 개요 == {{{+2 [[遼]][[東]][[城]]}}} [[요동]]에 있던 [[성(건축)|성]] 중 하나. [[고구려]]의 성으로 유명하다.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 [[랴오양]] 시 근방에 위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고구려 음차어로는 오렬홀(烏列忽)이라고 하는데, 대략 '오레골' 정도로 읽혔으리라 짐작된다. == 역사 == [[고구려]]의 성으로 유명하지만, 고구려가 처음 지은 성은 아니었다. 고구려가 지배하기 전에는 [[동연]]의 중요한 근거지이기도 했다.[* 당시 이름은 양평현(襄平縣)의 양평성(襄平城).] 이를 통해 볼 때 아마 [[한나라]] 대 혹은 그 이전 시대에 해당하는 [[전국시대]]에 이미 건설된 성으로 추정되며, 어떤 세력이 가장 먼저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고조선]]이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가능성은 낮다.], 요충지이기에 요동을 지배한 세력들이 돌아가며 유지, 보수해왔던 걸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지배하던 시기 요동성에는 [[동명성왕]]의 사당이 있었으며, 그 안에 동명성왕의 창과 쇄자갑이 모셔져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산을 끼고 건설된 고구려의 여타 성들과는 다르게 평지성이었다. [[후연]]의 4대 황제 소문제 [[모용희]]가 요동성 함락 직전에 '''"요동성에 짐과 황후가 맨처음 입성할 테니 성을 깎아 평지로 만들어라. 그럼 짐이 황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갈 테니 장군과 사졸은 먼저 오르지 말라"'''는 약이라도 빤 것 같은 명령을 내렸다가 점령을 말아먹었던 전적이 있다. 요동지방으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길목에 지어진 성이기 때문에 [[수나라]], [[당나라]]와의 전쟁 이전부터 자주 전투가 벌어지는 등 매우 중요한 성이었다. 특히 수나라와의 2번째 전쟁에서 벌어진 초거대규모의 공성전이 유명하다. 요동성은 [[한나라]] 때부터 상당히 크고 견고한 요새가 축성되어 있었으며,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때 동연이 차지하고 있다가 [[위나라]]에게 멸망한 뒤 고구려가 요동으로 진출하면서 점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연이 멸망할 때 [[사마의]]가 요동을 정벌했는데, 이때 사마의가 "요수와 양평(요동성)을 정벌하는데만 100일이 걸린다"고 했으니 이렇게 본다면 100일 정도인 3개월을 버틴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 그렇지만 사마의의 요동정벌군은 불과 4만명에 불과했던 데 반해, 수나라의 군세는 기록에 의하면 실병력 113만 3,800명에 200만 대군을 자칭했을 정도로 막강한 군세라는 점에서 비교를 불허한다고 할 수 있다. [[당태종]]에게 잠깐 함락된 적이 있긴 하지만, 그 와중에도 집결된 [[당나라]] 본대를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이면서 저력을 보여준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서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 중 하나였다. [[한민족]] 역사상 마지막으로 이 성을 점령했던 때는 [[공민왕]]의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지용수]], [[이성계]]의 요동성 함락 때였다. == 형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kid.chosun.com/2014102802772_3.jpg|width=100%]]}}}|| || 요동성도. [[평안남도 순천시]]에 위치한 요동성총 벽화. || 과거 형태만 추정되었지만 1953년 [[평안남도 순천군]] 용봉리에서 요동성총(遼東城塚)[* 총(塚)은 주인을 알지 못하는 무덤을 뜻하는 단어. 이름이 요동성총인 것은 총내부에 그려진 성벽화 한가운데 "요동성"이라고 씌여져 있어서 이름이 그리 붙은 것이다.] 내에서 성곽도가 발견되면서 형태를 파악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성곽도는 한국사 최고(最古) 성곽도이다.]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고구려]]성 특유의 [[치(건축)|치]]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요동성이 고구려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확정적인 게 아닌 만큼 고구려에 의해서 치성이 설치된 것인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다. 애초에 치는 근본적으로 고구려 특유의 시설이 아니라 웬만한 성이라면 다 갖추고 있는 기본 중에 기본인 방어시설이다. 있던 성을 차지한 거라면, 보강하면서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요동성총은 [[안악 3호분]]처럼 고구려 양식이 아니라 4세기 요양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무덤 양식으로써 존속시기가 비교적 이른 편이다. 논자에 따라서 요동성총의 축조시기를 4세기 전반으로 볼 수도 있고, 5세기 초반으로 늦게 보는 경우도 있다. 만약 요동성총이 만들어진 시기를 4세기 전반으로 본다면 [[광개토대왕]]의 요동 진출 이전에 요동성총의 벽화가 그려졌다는 것이며, 즉 고구려에 의해서 축조된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 이전부터 이미 요충지로 쓰였던 기록이 많기 때문에 정황 증거는 이미 많다.] 요동성 자체도 대략적인 위치는 지금의 [[랴오양|랴오양시]] 도시 중심부라고 보고 있긴 하지만 실물자료가 없기 때문에 고구려 성곽으로써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 조차도 알기 어렵다. 요동성의 높이는 대략 30m가량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마어마한 높이다보니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졌으나 2014년경에 [[풍납토성]]의 성벽 높이가 14m인 것이 확인되면서 요동성의 높이가 어마어마했을 가능성도 함께 올라갔다. 사실 산성이 아닌 평지성이었던 데다가 넓이도 꽤 넓었던 요동성은 어설픈 성벽 높이로는 방어가 쉽지 않았고 충분한 방어력을 보장받으려면 성벽의 높이가 꽤 높아야 했다. [[유럽]]에서도 대포가 도입되면서 성벽의 높이가 낮아졌지만[* 높을수록 대포에 무너지기 쉽기 때문. [[수원화성]]도 이 영향을 받아 기존 한국의 산성들보다 높이가 낮아졌다.] 대포가 없을 시기에는 성벽이 높을수록 유리했고, 산성이 아닌 평지성에서는 더더욱 높은 성벽이 중요했을 것이기 때문.[* 요동성과 같이 평지성인 [[북송]]의 [[카이펑]]도 성벽이 꽤 높은 편이다. 심지어 여기는 삼중벽으로 되있어 철통같은 방비가 가능했다.] [[분류:고구려/건축]][[분류:성채/중국]][[분류:랴오닝성]]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