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아힘 키르슈너 (문서 편집) [include(틀:2차 세계대전/전투기 에이스 11~20위)] [[파일:Joachim Kirschner.jpg]] [목차] == 개요 == '''요아힘 키르슈너(Joachim Kirschner : 1920년 6월 7일~1943년 12월 17일)''', 제2차 세계 대전에 활약했던 [[독일 공군]]의 슈퍼 [[에이스(전투조종사)|에이스]] 조종사이다. == 입대와 개전 ==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인 1920년 6월 7일에 [[작센]]주의 뢰스니츠(Lößnitz)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석 달 전에는 공화국의 전복을 시도한 [[카프 반란]]이 벌어지는 등 [[제1차 세계 대전]] 패배의 여파와 충격 때문에 그 시대상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많은 독일 [[에이스(전투조종사)|에이스]]들이 유소년 시절부터 [[글라이더]] 조종을 통해 비행 감각을 연마했던 경력이 있지만, 요아힘 키르슈너는 비행과는 전혀 관계없는 평범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그렇지만 요아힘 소년이 13살 때인 1933년 1월 30일에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쥐면서 그의 장래는 군인으로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요아힘 키르슈너는 19세가 되던 1939년 8월 26일에 [[독일 공군]]에 입대했는데, 그가 공군 훈련소에 있을 때 [[폴란드]] 침공 작전이 개시되었다. 개전과 함께 조종사 훈련 과정은 대폭 짧아졌고, [[드레스덴]] 비행학교에서 1년 간 전투 비행 훈련을 수료한 그는 [[하사]] 계급장을 달고 첫 자대인 [[JG 3]] 우데트 비행단에 배치되었다. == 손쉬운 상대 == 우데트 비행단이 [[러시아]]에서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가한 것은 1941년 6월 22일부터였다. 신참이었던 키르슈너 하사는 윙맨 역할 맡으면서 한동안은 단독 격추에 나설 수 없어 전공을 쌓을 수 없엇지만, 1942년 5월 21일에 집중사격을 가해 쌍발 폭격기 [[일류신]] DB-3를 공중폭발시키면서 처음 피맛을 보았다. [[독소전]] 초기 대부분의 독일 전투조종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수한 교관들에게 단련을 받은 요아힘 키르슈너 또한 순조롭게 격추댓수를 늘려나갈 수 있었고, 이듬해인 1942년 12월에는 51기 격추의 전공을 인정받아 [[독일 십자훈장|독일 황금십자장]]과 이어서 [[https://blog.naver.com/naljava69/220410039719|공군 명예컵]]을 수여받을 수 있었다. 요아힘 키르슈너의 일일 최다 격추 기록은 8대로, 1943년 4월 27일의 교전에서 거둔 전과였다. 그가 독일 공군에서 37번째로 100대 격추를 달성한 것은 1943년 4월 27일이었는데 그는 전시 진급으로 중위가 되었다. == 영광의 절정 == 키르슈너 중위는 1943년 7월 5일에 150대 격추에 도달했다. 8월 2일에는 170대째 격추로 인하여 라슈텐부르크의 볼프산체로 소환받아 총통으로부터 직접 [[철십자 훈장|곡엽기사철십자장]]도 받게 되었고, [[대위]]로 승진하게 된다. 그러나 12월 17일에 [[크로아티아]] 남부에서 5기 편대 구성으로 오후에 작전을 나간 그는 7대의 [[P-47|P-47D]]와 6대의 [[P-40]]으로 구성된 미군과 뉴질랜드 공군의 혼성 비행편대와 마주쳤고, 곧 치열한 공중전이 펼져쳤다. P-47들은 키르슈너 대위가 탄 [[Bf109]]G-6를 집중적으로 노렸고, 마침내 그는 미 육군항공대 제57전투비행단 소속의 썬더볼트에게 격추되었다.[* 이 날 그를 격추한 것은 스핏파이어였다는 설도 있지만, 나중에 전투일지의 대조로 인해 그 설득력을 잃었다.] 미군의 전투보고서를 종합해보면 이날 교전에서 독일 공군은 2대의 Bf 109와 2대의 [[슈토르히]] 관측기를 잃었다. 워런 쇼(Warren L. Shaw) 중위와 에드워드 리빙(Edward A. Liebing) 중위, 그리고 찰스 리프(Charles C. Leaf) 소위와 휴 발로(Hugh G. Barlow) 소위의 전과였는데 이중에 한 명이 요아힘 키르슈너를 격추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 부당한 죽음 == 메트코비치(Metković) 상공에서 무사히 낙하산 탈출에 성공한 키르슈너는 운수가 트였나 했지만 지상에 주둔하고 있던 제29 헤르체고비나 저격사단(Hercegovačka udarna divizjia)[* 정규군이 아닌 [[파르티잔]]이었다.]에 의해 생포되었다. 마침 [[슈투카]] 급강하폭격기에게 폭격을 얻어 맞고 독일군과의 전투로 수십 명의 전우가 죽어 분노와 증오심이 극에 달해있던 이들은 사로잡힌 독일인 조종사를 [[전쟁범죄|정당한 재판이나 심문 절차도 밟지 않고 총살에 처해버렸다.]] 그의 시신은 사로 잡힌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흐라스노(Hrasno Donje)에 매장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3세였다. == 서훈 == * 공군 최전선비행 황금기장 * 공군 명예컵 (1942년 12월 21일) * [[독일 십자훈장|독일 황금십자장]] (1942년 12월 3일) * 2급 [[철십자 훈장]] (1942년 1월 27일) * 1급 철십자 훈장 (1942년 4월 12일) * 기사철십자장 (1942년 12월 23일) * 곡엽기사철십자장 (1943년 8월 2일) [[분류:에이스 파일럿]][[분류:1920년 출생]][[분류:1943년 사망]][[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