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제프 슈미슈틱 (문서 편집) [[분류:1905년 출생]] [[분류:1985년 사망]] [[분류:오스트리아의 축구선수]] [[분류:SK 라피트 빈/은퇴, 이적]] [[분류:오스트리아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분류: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 [[분류:오스트리아의 축구감독]] [[분류:FK 아우스트리아 빈/역대 감독]] [[파일:Josef Smistik.jpg]] || 이름 || 요제프 "페피" 슈미슈틱[br](Josef "Pepi" Smistik) || || 생년월일 || [[1905년]] [[11월 28일]] || || 사망년월일 || [[1985년]] [[11월 28일]] || || 국적 || [[파일:오스트리아 국기.png|width=28]] [[오스트리아]] || || 출신지 || [[빈(오스트리아)|빈]] || || 포지션 || 하프백 || || 신체조건 || 183cm / 76kg || || 등번호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소속팀 || '''[[SK 라피트 빈]] (1926-1937)'''[br]ESV 슈타들라우 (1938-1940)[br]FAC (1940-1941)[br]크렘저 SC (1941-1945) || || 국가대표 || 39경기 / 2골 (1928-1936) || || 감독 || FC 샤프하우젠 (1952-1956)[br][[ FK 아우스트리아 빈]] (1958-1959)[br]FC 샤프하우젠 (1964-1965) || [목차] == 생애[*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 === 선수 생활 === ==== 클럽 ==== 슈미슈틱은 그의 형제 프란츠와 함께 그의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어린 시절에는 FC 슈타들라우 클럽에서 뛰었다. 그러다 1926년에 [[SK 라피트 빈]]의 공격수였던 카를 본드라크에 의해 라피트 빈에 입단하게 된다. 슈미슈틱의 입단 첫 해부터 소속팀 라피트 빈은 ÖFB-컵 우승과 미트로파 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하지만 미트로파 컵 결승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AC 스파르타 프라하|스파르타 프라하]]에 2게임 동안 합계 3대7로 패했다. 이듬해에도 라피트 빈은 미트로파 컵 우승에 다시 도전했지만 이번엔 헝가리의 [[페렌츠바로시 TC]]에 1차전에서 1대7로 깨박살이 났다. 슈미슈틱은 2차전에 출전하지 않았다. 결국 라피트 빈은 1930년에 스파르타 프라하를 상대로 복수에 성공하며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또한 이 시기의 라피트 빈은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오스트리아 1부 리그]]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팀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슈미슈틱 역시 1931년부터 팀의 주장으로 좋은 활약을 선보였다. 이 기간동안 라피트 빈은 3차례의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우승을 기록했고 1937년을 끝으로 라피트 빈을 나와 고향팀 슈타들라우를 포함한 여러 팀을 거쳐 1945년에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 ==== 슈미슈틱은 1928년 5월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국가대표팀 첫 경기를 치렀고 3대0으로 오스트리아가 승리했다. 1931년 오스트리아는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스코틀랜드]]에 5대0의 대승을 거두면서 비영연방팀으로서 최초로 패배를 안겼다. 오스트리아는 다음 상대인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을 적지인 [[베를린]]에서 무려 6대0으로 박살을 내놓았고, 홈에서 열린 리턴 매치에선 5대0으로 또 대파하며 6대0의 결과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그 외에도 오스트리아는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벨기에]]를 6대1,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를 4대0으로 크게 이기면서 유럽 대륙팀 중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오스트리아를 사람들은 분더팀이라 불렀으며, 슈미슈틱은 주장으로 대표팀을 이끌었다.[* 다만 월드컵 본선에서 대표팀 주장은 [[요한 호르바트]]였다.] 오스트리아는 1933년 4월부터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이탈리아 월드컵]] 이전까지 10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하는 강력한 포스를 보였고,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혔지만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8강 이후#s-2.1|준결승전]]에서 호스트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의 [[엔리케 구아이타]]에게 일격을 맞으며 탈락했다. 월드컵 이후 슈미슈틱은 대표팀 경기 기록에 7경기를 추가했으며 통산 39경기의 출전 기록을 남겼다. === 감독 생활과 그 이후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선수에서 은퇴한 슈미슈틱은 1952년 스위스의 샤프하우젠에서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다. 1958년에는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오스트리아]]의 [[FK 아우스트리아 빈]]에서 잠시 감독 자리를 맡았고, 샤프하우젠에서 한 시즌 감독을 맡고 난 이후엔 볼프룸(Wolfrum)이라는 주류 회사에서 [[운전기사]]로 일했다. 말년의 슈미슈틱은 [[파킨슨병]]에 걸려 투병했으며 80번째 생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고향인 슈타들라우에 있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뛰어난 기술과 훌륭한 시야를 바탕으로 한 롱패스가 장기였던 하프백. 또한 소속 클럽과 분더팀의 주장으로 활약하며 리더십도 뛰어난 선수였다. == 뒷이야기 == * 고향팀 슈타슬라우에서 뛸 때 후배였던 [[에른스트 오크비르크]]의 포지션을 공격수에서 하프백으로 바꾸도록 설득한 인물이 바로 슈미슈틱이다. 슈미슈틱은 오크비르크의 포지션 변경 이후 자신의 노하우를 상당히 전수해주었고 그를 바탕으로 오크비르크는 50년대 유럽 최고의 하프백으로 성장했다. == 수상 == === 클럽 === *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오스트리아 1부 리그]] 우승 3회: 1928-29, 1929-30, 1934-35([[SK 라피트 빈]]) * ÖFB-컵 우승 1회: 1926-27(SK 라피트 빈) * 미트로파 컵 우승 1회: 1930(SK 라피트 빈)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준우승 3회: 1927-28, 1932-33, 1933-34(SK 라피트 빈) * ÖFB-컵 준우승 2회: 1928-29, 1933-34(SK 라피트 빈) * 미트로파 컵 준우승 1회: 1926-27, 1927-28(SK 라피트 빈) === 국가대표 === * 중유럽 컵 우승 1회: 1931-32 * 중유럽 컵 준우승 2회: 1927-30, 1933-35 [각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