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말갈 (문서 편집) [Include(틀:옥저와 동예)] [include(틀:원삼국시대 한반도 세력)] [목차] == 개요 == 위말갈(僞靺鞨)은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가짜]] [[말갈]]'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서는 [[백제]]와 [[신라]] 초창기부터 '[[말갈]]'이라는 세력과 충돌하는 기사가 여러 번 등장한다. 말갈은 훗날 [[여진족]], [[만주족]]으로 이어지는 [[퉁구스]]계 부족을 의미하지만, 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말갈이 그들이라기에는 초기 백제와 신라의 위치와 세력규모상 말이 안 된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초기 신라는 지금의 경주시, 초기 백제는 서울시 강남구, 송파구 중심으로 한 작은 성읍국가에 불과했는데 만주의 말갈과 이들 사이에는 동예, 옥저, 고구려가 순서대로 버티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한때는 [[일제강점기]]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설의 근거 중 하나로 제시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한반도 중남부에 살던 [[동예]] 등 다른 이질적인 [[예맥]]계 집단을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 정설이 되고 있다. 즉 만주족으로 이어지는 퉁구스 [[말갈]]과는 완전히 다른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맥(貊)이라는 글자가 만맥, 호맥, 추맥, 이맥, 북맥, 예맥, 해맥, 양맥, 갈맥 등 [[동이]]의 완벽한 대체어로 쓰인 탓에 중원의 동쪽 한반도 북쪽에 살던 민족을 전부 “맥”이라는 단일 집단으로 뭉뚱그려 생각한 영향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반도 말갈 동예설은 [[정약용]] 《여유당전서》에서 처음 제기되었고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의 말갈을 각각 강원도 [[영서]]·[[영동]] 지방에 세력기반을 둔 맥계(貊系) 말갈(靺鞨)과 [[동예|예계(濊系) 말갈(靺鞨)]]로 나누어 이해하기도 한다(문안식, 《한국 고대사와 말갈》, 혜안, 2003, 15~198쪽). 한편 이 위말갈도 두 부류로 나눠서 백제를 침공한 말갈을 맥계말갈, 신라를 침공한 것을 예계말갈로 보는 설도 있다.[* 장원섭, 1990, 백제초기 동계의 형성에 대한 일고찰] 다만 위말갈설을 비판하면서, 실제로 만주의 그 실제 말갈인들이 한반도 중북부에 거주했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조이옥, 2001, 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 한반도에서 있었던 "말갈"과 관련된 단어와 연관된 세력이라는 점에서 [[재가승]]과 비슷한 점도 있다. 다만 재가승은 승려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한데다가, 여진-만주족의 혈통이 어느 정도 있되 그렇다고 이들이 여진이나 만주족에 해당되는 건 아니다. 또한 몇몇 반민족주의 성향 및 민족주의 중심 성향이 심하지 않은 사람들도 강원도 등 중부의 위말갈들도 퉁구스계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다만 출토된 유물 등에서는 정작 퉁구스 또는 숙신계 유물이 없었기에 위말갈은 예맥계일 확률이 높다. === 백제본기에서의 등장 === [[백제]]본기에서 말갈은 [[온조왕]] 때 등장하는데 초기 [[마한]]과의 갈등 과정에서 마한의 편을 들면서 맨날 당하는 역할로 [[구수왕]] 때까지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고이왕]] 때부터 말갈은 백제에게 확고히 [[조공]]을 바치게 된다. 이후 말갈의 침략은 기록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때를 기점으로 백제의 확고한 우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 신라본기에서의 등장 === [[신라]]본기에서는 [[혁거세 거서간]]과 [[지마 이사금]], 그리고 [[일성 이사금]] 때부터 [[내물 마립간]] 때까지 말갈의 침략 기록이 다수 나타나는데[* 단, 혁거세 때의 기록은 흔히 후대의 윤색으로 본다. 그래서 말갈의 신라 침략은 대략 신라가 동해안으로 진출하면서부터를 기점으로 본다. 좀 더 나중에 있었던 지마, 일성 때의 말갈 관련 밀고 밀리는 기록은 혁거세 때보다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사건이 설명돼있긴 하지만, 이 역시 신라의 확장이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별로 안 되는 시점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좀 더 나중에 있었던 일인데 이전 시대로 끌어올려졌다는 설도 있다.] 여기서 나오는 말갈은 신라 북부와 접한 지금의 [[강원도]] 지방의 [[동예]]일 확률이 높다. 전성기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강원도 지역에서 신라와 국경을 접하면서 초기 신라와 부딪히는 말갈 기록도 사라진다. 이후 신라가 [[진흥왕]] 이후 전성기를 맞아 고구려를 북쪽으로 몰아낸 뒤부터 다시 말갈과 접점이 생기고 말갈과 관련된 기록이 나타나지만 이 말갈은 신라 초기 시절의 위말갈이 아니라 고구려의 직간접적 통제를 받던, 지금의 함경도 및 그 이북 지역에 살던 퉁구스계 말갈인에 대한 기록이다. == 국왕 목록 == || 국가 || 칭호 || 휘 || 재위기간 || 비고 || || 예 || 예군(穢君) || [[남려]](南閭) || ? ~[br]기원전 128년 ||[[기원전 128년]] 가을, [[위만조선]]이 [[임둔국|임둔]], [[진번국|진번]], [[예맥]] 등 주변 소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반발하여 위만조선을 배반하고 자신 휘하의 28만의 사람들과 함께 [[전한]] [[요동군]]에 귀속함. || || 예 || 부조예군(夫租薉君) || ? || ? ~ ?[br](BC 1세기) ||[[낙랑군]] 동부도위 부조현(夫租縣: 지금의 [[함흥시]]) 출신 토착 군장으로, [[기원전 1세기]]경 낙랑군 조선현(朝鮮縣: 지금의 [[평양시]])에 묻힘. 서기 [[30년]] 낙랑군 동부도위의 폐지 이후, [[동예]]와 [[옥저]]는 군장사회로 자립하다 [[고구려]]에 복속됨. || || 맥 || 추장 || [[퉁구스/인물#s-4|소모]](素牟) || ? ~[br]기원전 1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등장하는 위말갈의 추장. 위말갈을 [[춘천]] 맥국(貊國)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기원전 1년]], 칠중하([[임진강]]) 전투에서 [[백제]]국에 사로잡혀 [[마한]]왕에게 압송되었음. || || 맥 || 거수(渠帥) || ? || 서기 40년경 전후 ||서기 [[40년]] 9월, 영[[동예]](嶺東濊)의 화려현(華麗縣) 및 불내현(不耐縣) 사람들이 [[신라]] 북쪽 국경을 침범하자 맥국(貊國)의 거수가 곡하(曲河) 서쪽에서 이들을 물리침. 신라 [[유리 이사금]]이 기뻐하며 맥국과 친교를 맺음. || || 예 || 파단국왕(波但國王) || ? || ? ~[br]서기 50년 ||서기 [[50년]]경, [[실직국]]에 정복당하여 멸망. 훗날 [[고구려]] 파단현(波旦縣)을 [[신라]] [[경덕왕]]이 해곡현(海曲縣)으로 바꾼 것을 보면 '파단'국은 '바다'의 나라로 유추할 수 있음. || || 예 || 예국왕 || ? || 서기 60년경 전후 ||서기 [[60년]]경, 예국([[강릉시]])이 실직국([[삼척]])을 공격하자, [[실직국]] [[안일왕]]이 [[울진군]]으로 피난 감. [[강릉]] 예국과 [[삼척]] [[실직국]], [[울진]] 파단국은 '창해 3국'으로 불림. || || 예 || 실직국왕 || [[안일왕]][* [[울진]] 지역에서는 '애밀왕'이라 불리기도 한다.] || ? ~[br]서기 104년 ||[[실직국]](지금의 [[삼척시]])의 마지막 국왕으로, 서기 [[50년]]경 파단국(波但國)을 공격하여 정복함. || || 맥 || 맥국왕 || 가리(加里) || ? ~ ?[br](기원후) ||[[춘천]] 맥국의 왕으로, 난리를 피해 [[강원도]] [[정선군]] [[가리왕산]] 속에 머물렀다는 구전이 있음. || || 맥 || 추장 || [[퉁구스/인물#s-4|나갈]](羅渴) || 258년경 전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등장하는 위말갈의 추장. 위말갈을 [[춘천]] 맥국(貊國)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258년]] 말갈 추장이 [[백제]] [[고이왕]]에게 말 10필을 조공하였다고 기록됨. 친[[낙랑군]] 및 반[[백제]] 성향을 유지해오던 위말갈이 조공한 이후 [[백제]]와 말갈의 오랜 전쟁도 소강 상태로 돌아섬. || || 예 || 예백(穢佰) || ? || 3세기 후반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신광면에서 발견된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佰長) 도장을 사용한 예족 수장. 중국 [[서진]]으로부터 동인(銅印)을 받음. 예백이 북쪽에서 활동하다 이곳에 묻혔을 가능성과 당시 해당 지역에서 활동하다 이곳에 묻혔을 가능성이 제기되는데, 후자일 경우 [[동예]]가 활동한 최남단 지역이 경주에 근접한 [[포항시]] 북구 신광면까지였음을 알 수 있음. 전자일 경우, [[북명]](北冥, [[강원도]] 및 [[함경도]] 동해안)사람이 [[신라]] 왕에게 바쳤다는 예왕지인 기록 사례처럼 북쪽에서 남하한 사람들에 의해 취득한 도장일 수도 있음. ||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예맥, version=192, paragraph=8)] [[분류:옥저와 동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