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문서 편집) [include(틀:스미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2> '''제58,59대 미합중국 연방하원의원[br]{{{+1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br]William Randolph Hearst'''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WilliamRandolphHearst.jpg|width=100%]]}}} || ||<|2> '''출생''' ||[[1863년]] [[4월 29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 ||<|2> '''사망''' ||[[1951년]] [[8월 14일]] (향년 88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베벌리힐스]]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미국)]|| || '''직업''' ||[[언론인]], [[기업인]], [[정치인]] || || '''신체''' ||191cm|| || '''학력''' ||[[하버드 대학교]] {{{-2 ([[중퇴]])}}} || || '''정당''' ||[include(틀:민주당(미국))] {{{-2 (1884년~1904년,1914년~1934년)}}}[br][include(틀:공화당(미국))] {{{-2 (1934년~1951년)}}} || || '''부모''' ||[[아버지]] 조지 허스트 [br][[어머니]] 피비 허스트 || || '''배우자''' ||매리언 데이비스 || || '''자손''' ||조지, 윌리엄 주니어, 존, [br] 랜돌프, 데이비드, 퍼트리셔 레이크 || || '''서명'''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William_Randolph_Hearst_Signature.png|width=200]]}}} || [목차] [clearfix] == 개요 ==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 1863년 4월 29일– 1951년 8월 14일)는 미국의 미디어 그룹 [[허스트 커뮤니케이션즈]]의 창업주다. 국내에선 '미국의 신문왕'으로 알려져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 [navertv(43994770)] || ||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08부 - 미국. 자유의 국가의 비밀과 거짓中'''[* 2018년 2월 10일 방영.][* 영상 매체의 탄생 이후 전세계 기록 보관소에서 발굴한 영상으로 비밀과 거짓으로 뒤덮인 "자유의 나라" 미국에 주제를 맞춘 NHK의 다큐.] || == 생애 == ||<:>[[파일:external/mstartzman.pbworks.com/pulitzer%20and%20hearts.jpg|width=100%]]|| ||<:> 퓰리처와의 경쟁을 풍자한 만평.[*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황색언론]]을 풍자한 캐릭터인 옐로 키드(Yellow Kid)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출생으로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1887년 아버지가 소유하던 《이그재미너》를 경영하면서 신문계에 진출했다. 1895년 뉴욕의 《모닝 저널》을 인수해 《저널 아메리칸》으로 바꾸고 또 다른 신문왕 [[조셉 퓰리처]]의 《월드》와 경쟁했다. ||<:>[[파일:external/www.americanhistoryusa.com/yellow-journalism-spanish-war.jpg|width=100%]]|| ||<:>뉴욕 저널에 보도된 메인호 폭파 사건.|| >Destruction of War ship Maine was the work of an enemy. >메인호 폭파 사건은 적의 음모였다. >---- >$50,000 Reward for detection of the perpetrator of the Maine outrage! >메인호 사태의 가해자 제보 보상 5만 달러! 신문자 《뉴욕 저널》(New York Journal)의 사주를 하면서 행동 언론이라는 아이디어를 통해서 스스로 뉴스를 생산하고 기사화하는 방법을 고안하였으며, 1895년 [[미국-스페인 전쟁]]을 부추기는 기사를 선정적으로 게재하여 전쟁을 촉발시켰다.[* 사실 메인 호의 침몰 원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원인만 무성하다. 미국이 공동 조사를 거부해서 결성된 스페인 단독 조사단은 탄약실 유폭으로 결론냈고, 미국 내에서도 보일러 과열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됐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뉴욕 저널이 주장한 적(스페인)의 선제공격이 원인이었을 가능성은 낮다는 게 중론이다.] 이후 미국 17개 도시에서 일간지를 매수 및 창간하고 INS 통신사와 출판사, 3개 방송국을 자기 손에 두어 거대한 언론 제국을 형성하였고 현재에는 [[조셉 퓰리처]]와 함께 [[황색언론]]의 기수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신문사의 재정 관리는 규모에 비해 부실한 편이었고, [[대공황]] 시기 큰 타격을 받는다. [[1951년]] [[베벌리힐스]]에서 사망한다. == 정치 행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허스트1906.jpg|width=100%]]}}} || || '''1906년 뉴욕 주지사 선거 허스트 포스터''' || 허스트의 정치 행보는 [[1898년]] 메인함 격침 사태에서 [[윌리엄 매킨리]]의 강경 대응을 촉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그는 [[미국 민주당|민주당]]에 입당해 [[뉴욕주]] 연방하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된다. 그의 [[미국 내셔널리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초기 정치 사상은 자신의 배경과 달리 [[진보주의]],[[대중주의]]에 가까웠다. 반[[부패]],노동권,일 8시간 근무를 주장하고 [[트러스트]]에 대한 통제도 지지했다. 진보주의자 허스트는 자신의 언론 제국을 아낌없이 이용하여 민주당 진보파,노동계층의 유력 후보로 자리잡았다. [[19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경선에도 도전했지만 [[앨턴 B. 파커]]에게 밀려 낙선한다. 하원의원 임기 후 뉴욕시장 선거,뉴욕 [[주지사]] 선거[* 상대는 이후 [[19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후보,연방대법원장인 [[찰스 에번스 휴즈]]]에도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한다. 뉴욕시장 낙선 이유는 태머니 홀[*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톨릭]] 신자들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유명한 태머니 홀 회원에는 [[앨 스미스]]가 있다.]이라는 정치 조직 때문이었다. 허스트는 반 태머니 홀 개혁 후보로 출마했지만 조직력에서 밀려 두번 다 패배하고 말았다. 연이은 선거 패배 후에는 보수화되어 [[고립주의]],반 [[국제연맹]] 주장을 한다. [[대공황]]이 터지자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의 후보로 뽑힌 [[프랭클린 D. 루즈벨트]]를 지지했지만[* 경선에서는 [[존 낸스 가너]]를 지원해 [[캘리포니아주]] 대의원이 그를 지지하게 했다.] 루즈벨트의 진보좌파적 [[뉴딜]] 정책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미국 공화당|공화당]]으로 전향하고 1936년에는 [[알프 랜던]]을 지지한다.[* 1924년 대선 민주당 후보인 [[존 W. 데이비스]], 1928년 대선 민주당 후보인 앨 스미스도 랜던을 지지했다. 다만 이들은 공화당에 입당하진 않았다.] 이 과정에서 허스트는 친노동 진보 언론이라는 평판과 인기를 잃는다. 이 와중에 [[나치당]]의 총선 승리를 [[반공주의]]의 승리라고 축하하고 [[아돌프 히틀러]]를 옹호한 흑역사도 있다. == 소속 정당 == || '''{{{#ffffff 소속}}}''' || '''{{{#ffffff 기간}}}''' || '''{{{#ffffff 비고}}}''' || || [include(틀:민주당(미국))] ||1884 - 1904 || 입당 || ||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D98236; font-size: .9em" [[지방자치단체(정당)|{{{#000 '''지방 자치'''}}}]]}}} || 1904 - 1906 || 창당 || ||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2B84B; font-size: .9em" [[독립당(1906)|{{{#000 '''독립당'''}}}]]}}} || 1906 - 1914 || 창당 || || [include(틀:민주당(미국))] || 1914 - 1934 || 복당 || || [include(틀:공화당(미국))] || 1934 - 1951 || 입당[br]사망 || == 선거 이력 == || {{{#ffffff '''연도'''}}} || {{{#ffffff '''선거 종류'''}}} || {{{#ffffff '''선거구'''}}} || {{{#ffffff '''소속 정당'''}}} || {{{#ffffff '''득표수 (득표율)'''}}} || {{{#ffffff '''당선 여부'''}}} || {{{#ffffff '''비고'''}}} || || 190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2> [[뉴욕 주|뉴욕]] 11구 ||<|2> [include(틀:민주당(미국))] || '''26,953 (69.07%)''' ||<|2> '''당선 (1위)''' || '''초선''' || || 1904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26,255 (59.33%)''' || '''재선''' || || 1905 || 뉴욕시장 선거 || [[뉴욕시]] ||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D98236; font-size: .9em" [[지방자치단체(정당)|{{{#000 '''지방 자치'''}}}]]}}} || 224,929 (37.16%) ||<|2> 낙선 (2위) || || || 1906 || 미국 주지사 선거 || [[뉴욕주|뉴욕]] ||<|3>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2B84B; font-size: .9em" [[독립당(1906)|{{{#000 '''독립당'''}}}]]}}} || 691,105 (46.62%) || [* 독립당-민주당 단일 후보] || || 1909 || 뉴욕시장 선거 || [[뉴욕시]] || 154,187 (25.88%) ||<|2> 낙선 (3위) || || || 1910 || 미국 부지사 선거 || [[뉴욕주|뉴욕]] || 60,286 (4.21%) || || == 여담 == 키는 191cm로 [[장신]]이다. 근데 [[큰 머리|대두]]여서 그렇게 안보인다.(...) 아들들도 비슷한 키의 장신인데 아버지처럼 대두여서 비율이 영 좋지 않다.(...) 세기의 영화라고 평가받는 《[[시민 케인]]》에서 풍자되기도 했으며, 그로 인하여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시민 케인에 대해 엄청난 훼방을 놓게 되었다. 결국 《[[시민 케인]]》은 현대의 극찬과는 달리 흥행도 실패하고 그해 [[아카데미상]] 9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갔으나 각본상만을 수상하는 데에 그쳤다. 당시의 제작 과정을 담은 영화 《[[맹크]]》가 2020년에 개봉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허스트 역은 [[찰스 댄스]]가 맡았다.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에드워드 G. 로빈슨]] 주연의 《Five Star Final》(1931)는 당시 신문사들의 행태를 비판한 작품이다. 제목은 별 다섯 개를 "Final(최종)"이라는 단어와 함께 1면에 박은 신문 판본을 뜻하며, [[제1차 세계 대전]] 시절 신문업계에 도입된 서체 이름이기도 하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이 영화를 자신에 대한 개인적 공격으로 여겨 산하 발행 매체들을 통해 해당 영화를 폄하했고 극장주들이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도록 크게 압박했다. 때문에 이 영화는 프로듀서가 공식적으로 크레딧에 기재되지 않았다. 하지만 방해와 달리 흥행에 성공해[* 310,000달러 예산에 820,000를 벌었다.] 방해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제작사 카즈머팔리턴 픽처스를 통해 [[클래런스 브라운]]이 연출하고 [[라이어널 배리모어]]가 주연한 《Looking Forward》(1933)를 적극 지원했다. 영화 제목은 같은 해 [[프랭클린 D. 루스벨트|프랭클린 D. 로저벨트]] 대통령이 발간한 책에서 따온 것이었는데 대통령 본인의 사용 허가를 받아낼 수 있도록 힘쓰기도 했다. 《[[007 네버 다이]]》의 종반부에도 극중 악당이자 미디어 재벌인 엘리엇 카버가 허스트의 사례를 들먹이며,[* 미국-스페인 전쟁을 앞두고 허스트가 사진기자에게 "자네가 사진을 찍어오면, 난 전쟁을 일으키지"라고 말했다는 내용.]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참고로 네버다이의 메인 악역 카버는 현존하는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을 빗댄 캐릭터라는 평을 받았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는 그가 건설한 거대한 [[허스트 캐슬]]이 자리잡고 있다. [[라디오]]가 고가품이던 1920년대에 허스트의 지하실에는 세 대의 라디오가 놓여있었다고 하다. 당시의 라디오는 주파수를 튜닝하기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아예 각 방송국 주파수에 맞춰놓은 라디오를 들여놓은 것. ~~돈지랄의 끝판왕~~ 이 당시의 라디오는 요즘으로 치면 초대형 커브드 OLED TV급 위상의 물건이라 일반 가정에서는 [[할부매매|할부판매]]로 구입했다. 실제로 1920년대에 할부판매가 활성화된 것이 바로 라디오와 세탁기의 보급 때문이었다. 돈이 많다보니 온갖 예술품도 사다 모았는데 이에 관해 웃기는 일화도 있다. 하루는 한 예술품을 언론에서 보고 살려고 하니 이미 사갔다는 말에 그걸 사고자 탐정을 고용해 찾게했다. 이 탐정은 해외까지 오고가며 1년 가까이 고생하다가 돌아왔는데 허스트에게 으르렁거렸다. 왜 그러냐고 하자 마지막에 그걸 산 사람이 바로 허스트였다는 것! 그가 창고를 찾아보니 그 예술품이 먼지 투성이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앗! 시리즈]]의 '미술이 수리수리'에서 이 일화를 소개할 때는 그의 저택인 [[허스트 캐슬]] 한 구석에 포장도 안 뜯은 채 처박혀 있었다고 나오며, "어쨌거나 소유주를 찾았으니, 흥정은 잘 했을까?"라고 놀리면서 에피소드를 마무리짓는다.] [[찰리 채플린]]과 영화제작자 타머스 H. 인츠[* Thomas H. Ince. 1880 - 1924.]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도 있는데 [[찰리 채플린]]이 허스트의 정부 매리언 데이비스와 불륜 관계였고, 한창 검열삭제(혹은 키스)중에 허스트와 사람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들켰다고 한다. 격분한 허스트가 두 사람에게 총을 쐈는데, 그만 총알이 빗나가서(!) 엄하게 옆에 있던 타머스 H. 인츠가 맞았다는 설이 있어서 실제로 곤혹을 치렀다. || [[파일:pattyhearst1.png|width=400]] || || 퍼트리셔 허스트 || 손녀 퍼트리셔 허스트는 극좌파 테러리스트인 [[공생해방군]]에 납치되었다가 그들과 같이 행동하기도 했다. [[분류:미국의 남성 기업인]][[분류:미국의 언론인]][[분류:1863년 출생]][[분류:1951년 사망]][[분류:샌프란시스코 출신 인물]][[분류:미국 민주당 소속]][[분류:미국 공화당 소속]]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