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덕위 (문서 편집)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팽성양공(彭城襄公)[br]{{{+1 劉德威 | 유덕위}}}''' || || '''작호''' ||<(> 등현공(滕縣公) → 팽성현공(彭城縣公) || || '''시호''' ||<(> 양(襄) || || '''성''' ||<(> 유(劉) || || '''이름''' ||<(> 덕위(德威) || || '''자''' ||<(> 상중(尙重) || || '''부친''' ||<(> 유자장(劉子將) || || '''출생''' ||<(> 582년 ~ 652년 || || '''출신''' ||<(> 서주(徐州) 팽성현(彭城縣) || || '''국적''' ||<(> [[수나라|수]](隋) → [[당나라|당]](唐)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대신으로 자는 상중(尙重). == 생애 == 서주(徐州) 팽성현(彭城縣) 출신으로 유자장(劉子將)의 아들이었다. 유덕위는 [[수나라]] 말에 배인기를 따라 회수 동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도적 이청규(李靑珪)를 토벌하였다. 이후 배인기를 따라 [[이밀]]에게 귀순하였는데, 이밀은 유덕위의 명성을 알고 유덕위를 회주(懷州)에 진수하도록 명하였다. 618년, 이밀이 [[왕세충]]에게 패배하고 당나라에 귀순하면서, 유덕위도 이밀을 따라 귀순하여 좌무후장군(左武候將軍)으로 제수되고 등현공(滕縣公)으로 책봉되었다. [[유무주]]가 당나라를 침공할 때 [[배적]]이 개휴(介休)에서 유무주에게 패배하고, [[이원길]]이 병주를 버리고 돌아오면서 당나라에 위기가 닥쳐온 가운데 유덕위는 병주 총관부 사마로 있었는데 결국 유무주에게 사로잡혔다. 유덕위는 유무주로부터 벗어나서 장안으로 돌아와 유무주의 상황을 상세하게 알렸고, 유무주를 토벌한 공으로 팽성현공으로 다시 책봉되었고 검교대리소경(檢校大理少卿)이 되었다. 유덕위는 이후 [[두건덕]]과 왕세충을 토벌할 때 종군하여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전임되고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더해졌으며 평수현주(平壽縣主)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진왕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서 황제로 즉위한 뒤, 유덕위는 대리경(大理卿)과 태복경(太僕卿)을 역임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가 더해졌다. 또한 면주(綿州) 자사를 맡아서 청렴함과 공평함으로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으며, 이후 검교 익주 대도독부 장사가 되었다. 637년에는 다시 대리경이 되었고, 이후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승진하고 검교 옹주 별가를 겸하였다. 643년, 유덕위는 조정의 명으로 제주(濟州)에 머무르며 제왕(齊王) 이우(李祐)를 추궁하려고 했는데, 이우가 권만기(權萬紀)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주에서 이우의 모반을 막으려고 했는데 모친상을 당하였다. 이후 644년에 유덕위는 수주(遂州) 자사로 기용되고 3번 옮겨 동주(同州) 자사가 되었고, 652년에 사망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 유주(幽州) 도독으로 추증되었으며, 양(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582년 출생]][[분류:652년 사망]][[분류:팽성 유씨]][[분류:쉬저우시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