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명한(기업인) (문서 편집) 柳明韓 [[1908년]] [[1월 8일]] ~ [[1951년]] [[6월 8일]]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본관은 [[진주 류씨|진주]](晉州)[* 토류계 진천군파 27세 형(馨) 항렬. 맏형 [[유일한]]의 원래 이름이 유일형(柳一馨)이었다.], 자는 대여(大汝), 호는 정일(正一). 창씨명은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博, 유원박).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의 동생이자 [[유특한]] [[유유제약]] 창업주의 형이다. 하지만 독립운동에도 참여한 친형 [[유일한]]의 행보와는 대조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매국노]]'''로 악명을 남겼다. == 생애 == 1908년 1월 8일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재봉틀 장사로 자수성가한 상인 유기연(柳基淵, 1861 ~ 1934. 8. 28)과 [[김(성씨)|충주 김씨]](忠州 金氏) 김확실(金確實, 1873. 5. 22 ~ 1958. 10. 4)[* 김경우(金景禹)의 딸이다. 이후 김기복(金基福)으로 개명했다.] 사이의 6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중화민국]] [[푸단대학 상하이의학원|국립상해의학원]](國立上海醫學院)을 중퇴했다. 1936년 6월 20일 주식회사 유한양행 대주주로 참여했으며 1938년 7월 30일 주식회사 유한양행 이사, 1940년 7월 31일 주식회사 유한양행 부사장으로 각각 선임되었다. 1941년 2월 28일 유한무역 주식회사 전무이사 겸 유한상사 주식회사 이사로 선임되었고 1941년 8월 26일 경성부 종로경찰서를 방문한 자리에서 '''국방헌금 10,000원을 [[일본군 육군]]의 무기 구입비로 헌납'''했다. 1941년 12월 15일 유한양행 긴급 이사회에서[* 개최 이유는 유일한 전임 사장이 일제에 의해 귀국이 불허됐기 때문이다.] 사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41년 12월 27일 경성부 종로경찰서를 방문한 자리에서 '유한 애국기(柳韓 愛國機)' 1대 제작비 53,000원을 [[일본군 육군]]에 헌납했다. 이 가운데 27,000원은 유한양행 명의로, 10,000원은 각각 본인 명의와 만주유한공사 명의로, 5,000원은 유한무역주식회사 명의로, 1,000원은 직원 명의로 모금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제 부문에 수록되었다.''' 이와 같은 그의 친일 행보는 독립운동가이던 형 유일한과 동생 유특한의 분노를 샀다. 유일한과 유특한은 그를 창씨개명한 이름인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博,유원박)' 로 부르며 무시했고, 1951년 유명한이 사망할 때까지 그와 절연하고 지냈다. 이 때 유일한 박사가 한 말이 '''"나는 동생 유명한은 둔 적 있어도 일본놈 야나기하라 히로시라는 놈은 모른다!"'''[* 사실 동생 유특한과 측근 예동식 전무도 '야나기하라 히데타카(柳原英隆)'와 '노무라'라는 이름으로 각각 창씨를 했지만, 유명한과는 다르게 [[와세다대학]] [[법학부]] 유학 허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사례였다. [[윤동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하지 않을 시에는 일본 유학 무산은 당연하고,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유학 때문에 창씨를 하고 부끄러움에 [[참회록]]을 쓴 것처럼 유특한도 자신이 창씨한 것에 대해 형에게 사과했다.][* 다만 웅진출판에서 낸 위인전기 <유일한 이야기>에 따르면, 유일한은 1951년에 동생 유명한이 사고로 죽자 땅이 꺼질 정도로 슬픔을 겪었다고 나왔다. 겉으로는 동생에게 실망을 표하며 모질게 대했지만 동생에 대한 정을 완전히 끊을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3년 9월 27일 유한제약공업주식회사 이사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광복 이후인 1945년 10월 26일 조선약품공업협회 사무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8년 7월부터 1949년 9월까지 제2대 한국제약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급히 형제들인 유일한과 유특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이들은 유명한의 친일 행적을 이유로 그를 무시했다고 한다. 위와 같은 흑역사 때문인지 유한양행은 사사 <유한 오십년(1976)>과 홈페이지 등지에서 그의 친일 행적을 철저히 빼고 일제에 의한 세금탄압만을 크게 언급하고 있다. 해방 후에 유한양행과 유한산업을 운영하는 한편, 일본인이 운영하던 인쇄소를 적산으로 양도받아 고려문화사를 창립하여 해방 후 출판산업에 한 획을 그었는데, 해방 후 [[삼국유사]], [[삼국지]] 등을 번역 출간했으며 대중의 인기를 끌었던 잡지 '민성'과 해방 후 첫 어린이 전문 매체를 발행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노모를 모시고 피난을 갔는데,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다대포를 오가는 선박 조난 사고로 인해 향년 43세로 사망했다.[* 고려문화사에서 함께 일한 조권순 전 유한양행 사장의 증언에 따르면, 유명한은 노모의 건강을 위해 다대포에 거처를 정했다. 이후 다대포에서 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출퇴근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이경훈, <책은 만인의 것>, 보성사, 1993, 412~417쪽).] == 여담 == [[유일한|형]] 하고 [[유특한|동생]]이 모두 깨끗한 기업인으로 이름을 날렸고 특히 [[유일한|형]]은 독립운동에까지 참여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유명한데 반해 유명한은 행보가 이 모양이다보니 형 유일한에게 있어선 [[형만 한 아우 없다]]로, 동생 유특한에게 있어선 [[못된 형과 착한 아우]], [[갈모형제]]의 한 사례가 되었다.[* 정확히는 유일한 남매로선 5남 3녀로, 형제만 보면 5형제다. 다만 유명한 외의 나머지(유중한, 유신한, 유동한 등)는 생애 기록이 적은 편.] 그의 장남은 유승호(柳承昊, 1935 ~ 1995. 9. 23) 전 [[유한킴벌리]] 사장이 있다. == 관련 자료 == * [[http://web.archive.org/web/20190109013236/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4740|한국 100년사의 잊혀진 순간들 3화: 민족기업 유한양행도 '친일행적' 있다(정운현 글)]]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유명한,version=54)]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기업인]][[분류:1908년 출생]][[분류:1951년 사망]][[분류:평양시 출신 인물]][[분류:진주 류씨(토류)]][[분류:해상사고로 죽은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