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지평 (문서 편집) 尹志平 (1169 ~ 1251) [목차] == 설명 == [[전진칠자]] 중 한 사람인 [[구처기]]의 제자이자 [[전진교]] 6대 조사로 자는 태화(太和), 도호는 '''청화자(靑和子)'''. 하북성 창주 출신으로 스승인 구처기가 1219년에 서정을 하던 [[칭기즈 칸]]의 부름을 받아 서역의 대설산의 아무강(지금의 아프가니스탄)으로 갈 때 동행하던 18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1227년에 스승인 구처기가 사망하자 장춘궁 동쪽에 백운관을 지었으며 1229년에는 그 장소에 처순당을 짓고 스승인 구처기의 시신을 매장했으며 묘도광화진인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황제인 [[칭기즈 칸]]의 지지를 얻어 더욱더 전진교의 번영을 가져왔으며 이후에 이지상, 장지경, 왕지탄, 기지성 등의 구처기의 제자들이 조사 직을 계승하는 등 전진교의 용문파는 크게 융성하게 되었다. <북유록>이라는 저서가 있으며 <북유록>에는 [[전진칠자]]에 대한 것들이 있다. == 창작물에서 == === [[사조영웅전]]의 윤지평 === 사조영웅전에서는 [[양강]]의 동문 사제로 등장한 듣보잡 1인이었다. [[몽골]]에 있는 [[강남칠괴]]에게 구처기의 메시지를 전하러 와서, 당시 무공이 별볼일 없었던 곽정을 쓰러뜨리기도 했다. [[황약사]]가 [[황용]]이 죽은 줄 알고 [[강남칠괴]]를 잡아죽이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을 때, [[구처기]]의 명령을 받고 [[곽정]]을 찾아 그 소식을 알리기 위해 우가촌에 나타난다. 마침 [[육관영]]과 [[정요가]]가 [[후통해]]와 싸우고 있을 때라 끼어들어서 후통해를 제압한다. 참고로 그후에 육관영이 곽사숙이라는 말을 썼는데, 윤지평은 "왜 당신은 그를 사숙이라고 부릅니까?"라고 하자 육관영이 아버지와 같은 항렬(황용이 사부의 딸이니 항렬이 같은데 그 정혼자니 역시 항렬이 같다.)이라는 말을 듣고 의아해 했는데, 그 당시 곽정은 [[주백통]]의 아우였으니 윤지평의 사조였다. 주백통이 항렬 여럿 망쳐놨다. 그런데 그 후 육관영이 이곳에 온 사정 이야기를 듣다가 "[[황약사]]가 어쨌다는거요? 그가 [[전진칠자]]보다 강하답니까?"라는 등의 오만한 말을 하며 전진교의 무공을 내세우며 황약사를 무시하다가 황약사 문하인 육관영과 싸움이 붙어버린다. 육관영은 몰아붙였지만 [[완안열]]의 무리가 돌아오자 꼼짝없이 붙들리게 되었는데 마침 그 자리에 황약사가 나타나 살아났다. 하지만 방금 전에 황약사를 욕한 것이 걸려 곤욕을 치르게 되자, 죽을 것을 각오하고 황약사의 눈 앞에서도 꿋꿋하게 욕을 한 것 때문에 그 기개와 배포가 마음에 든 황약사에게 용서를 받고 도망쳤다. 나중에 전진칠자가 [[천강북두진]]을 써서 황약사와 싸울 때, 죽은 담처단 대신에 가진악이 천강북두진의 일각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가진악은 진법을 잘 몰랐으므로 그에게 붙어서 진법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황약사에게 붙잡혀서 지붕 위로 날아가 기절하는 수모를 당했다. [[구처기]]가 칭기즈 칸에게 도를 설법하러 갈 때 몽골로 따라갔다. 그런데 신조협려에서... === [[신조협려]]의 윤지평 === 신조협려에 이르러선 [[전진교]]의 중심인물--이자 성폭행범--이 된다. [[조지경]]의 제자였던 [[양과]]가 탈주하여 고묘에 숨었을 때 [[소용녀]]를 보고 한눈에 반하여 노심초사하다 결국 소용녀가 수련 중 [[구양봉]]에게 점혈당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틈을 노려 '''겁탈'''한다. 소용녀는 양과가 그런 줄 알고 있었으나 이후 그 상황을 엿본 조지경이 발설하여 알게 되고 윤지평의 목숨을 노린다. 윤지평은 이 일을 계속 숨기며 전진교와 강호에서 인망을 쌓아 [[왕중양]], 마옥의 뒤를 이어 전진교의 제3대 장교가 되나 조지경의 협박으로 바로 자리를 내놓게 된다. 마침 전진교를 침범한 [[금륜법왕]] 일당과 복수를 하러 찾아온 소용녀와의 삼파전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 소용녀의 목숨을 구해 주고 용서를 빌다가 소용녀의 칼에 맞아 죽는다. 신판에선 소용녀에 의해 칼에 찔린 다음 자신의 죄를 고백한 후 자살한다. 순간의 큰 죄과로 인해 평생을 후회하고 살았으며 나름 심지도 있고 의협심도 있는 인물이었으나 엎질러진 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덕분에 팬들한테 욕을 많이 먹는 인물. 10대 청소년일 때 읽고 이제는 40, 50대가 되어 등장인물 이름이나 줄거리가 가물가물해진 독자들조차 윤지평과 그가 저지른 짓만큼은 잊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소용녀 사건만 아니었어도 그저 그렇거나 오히려 좋은 평가를 받았을 인물인데 그 놈의 한 순간 욕정 때문에... 그나마 몽골에 굴복하지 않은 애국심만큼은 작중에서 나름 고평가되고 본인도 스스로 죗값을 치렀다는 점에서 재평가 아닌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의천도룡기>에서 거의 비슷하게 겁탈죄를 저지른 [[양소]]의 평가가 그럭저럭 괜찮았다는 걸 생각하면 윤지평에 대한 평이 지나치게 가혹한 것일 수 있다.[* 양소의 경우는 피해자인 기효부가 양소를 사랑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희석된 것도 있고, 진영상으로 주인공인 장무기와 같은 명교인 것도 있다. 반대로 윤지평의 진영인 전진교는 조지경과 그 측근을 제외하면 악역이 아니지만 주인공 양과와 이래저래 갈등이 많았기 때문에 주인공 입장에 이입하는 독자들이 좋게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구처기와 마찬가지로 실존인물로 전진교 조사까지 지낸 견실한 도사였는데 이따위 쓰레기 인간으로 묘사한 탓에 당연히 후손들이 조상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김용(1924)|김용]]에게 항의를 했고 결국 신조협려가 개작될 때 '''[[견지병]]'''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된다. 정확하게는 견지병이라는 인물을 따로 만들어서 윤지평의 성폭행 범죄를 죄다 몰아버린 것. 소용녀와 얽히는 게 없는 장면에서는 그대로 윤지평으로 나온다. 하지만 대부분 독자들의 기억 속에 남는 건 여전히 윤지평이다.[* 신조협려가 연재를 시작한 게 1959년이고, 견지병으로 대신시킨 3판이 나온 게 2003년이다. 윤지평의 이미지를 돌려놓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려서 인식이 굳었다.] 그리고 원래는 수석 제자로 임명되었지만 교단 사무에는 관심이 없고 종교 수행에만 심취했다는 설정으로 초반에 하차시켰다. 참고로 이 사람 [[곽정]]보다 두세살 더 많다. 그 나이에 10대의 소용녀(그냥 10대도 아니고 작중 표현에 의하면 '10대 초반의 외모')를 보고 사랑에 빠진걸 보면 아무래도 [[로리콘|로...]] [[분류:금나라의 도사]][[분류:몽골 제국의 도사]][[분류:1169년 출생]][[분류:1251년 사망]][[분류:신조협려의 등장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