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치성 (문서 편집) [목차] == 개요 == 尹致晟.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군인이자 기업인이다. == 생애 == 1875년 [[충청남도]] [[아산시|아산군]]에서 태어났다. [[해평 윤씨]]로, 사촌형이 [[윤치호]], 동생 중 1명이 [[윤치영]]이며, 형들 중 1명인 [[윤치소]]는 제4대 [[대한민국 대통령]]인 [[윤보선]]의 아버지였다. 1894년에 [[청일전쟁]]에 종군했다가 1895년 관비 유학으로 [[게이오기주쿠대학]]에 가서 공부했고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해 1900년 11기로 임관했다. 동기로는 [[노백린]], [[어담]], [[김관현]] 등이 있다. 1900년에 [[대한제국군]]으로 복귀해 기병소위로 [[특별임관]]했다. [[육군무관학교]]에서 기병교관으로 근무했다. [[을사조약]] 당시에 이를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으나 막지는 못 했다. 그후 기병부장(중장)까지 진급했다가 [[경술국치]] 이후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에 기업인을 지내다가 평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중추원 참여를 권유받았으나, 거절하였다. 1936년에 세상을 떠났다. == 기타 == 4남 4녀를 두었고 대부분 [[언론인]], [[학자]] 등이 되었는데, 특이하게도 차남 윤달선은 [[조계종]] [[승려]]가 되었다. [[윤치호]]를 필두로 대부분 [[개신교]]로 [[개종]]한 이 집안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정작 윤치호와도 잘 왕래하고 지냈다고 하며, 개인적으로도 학식과 인품이 뛰어났다고 한다. 더욱 골 때리는 건 [[광복|해방]] 이후엔 [[환속]], [[결혼]]하여 자식을 6명([[아들]] 3, [[딸]] 3)이나 두었단 거다(…). 환속 이후에도 [[불교]]계의 존경을 받았으며, 집안이 ㅎㄷㄷ했기 때문에 [[이승만]] 앞에서 독설을 날린 적도 있다고 한다. 윤달선의 법명은 혜천이고, 당호는 포산 또는 포산당이다. 그래서 포산당 혜천으로 많이 불린다. 고교시절 [[수영]]선수였다. 고등학생 때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불가에 귀의해 [[만공]]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러다가 먼저 환속한 김광영이란 여신도(보살)의 소개로 그녀의 딸과 결혼하면서 저절로 환속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한국 불교]]는 [[일본 불교]]의 영향을 받아 대처승(기혼승)이 많았으므로, 그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해방이 되면서 대처승 배척운동이 벌어지고 [[조계종]]을 위시한 비구[* 독신 남성 승려. 독신 여성 승려는 [[비구니]].] 세력이 주류를 차지하자, 대처승들이 이에 반발해 세운 종파가 바로 [[태고종]]이다. [[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1875년 출생]][[분류:1936년 사망]][[분류:아산시 출신 인물]][[분류:해평 윤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