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양군 (문서 편집) [include(틀:다른 뜻1, other1= 이름이 비슷한 종실 출신 관료이자 친일파, rd1=이재극)] ---- [include(틀:대한제국 황실)] ||<#29176e> '''{{{#ffd800 역임 지위}}}'''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귀족)] ---- [include(틀:대한적십자사 역대 회장)]}}} || ---- ||<-2> [[조선귀족|'''{{{#fff 조선귀족 후작}}}''']] || ||<-2>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br]{{{+1 의양군 이재각}}}[br]義陽君 李載覺'''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재각.jpg|width=100%]]}}} || || '''봉호''' ||의양군(義陽君) || || '''성명''' ||이재각(李載覺)[* [[사도세자|장조]]의 현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어진사람 인(儿)'이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정조(조선)|정조]]의 증손인 [[헌종(조선)|헌종]]은 '환('''烉''')'으로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은 '형('''㷩''')'으로 좌우로 밖에 나뉘어 있으며, 초명 '재황(載'''晃''')'에는 '황(晃)'의 밑에 발의 형태로 들어가있다. [[은언군]]의 증손인 [[덕안군]]은 '재덕(載'''悳''')', [[청안군]]은 '재순(載'''純''')'으로 파자하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은신군]]과 [[은전군]]의 증손으로 [[완림군]]은 '재원(載'''元''')', [[완순군]]은 '재완(載'''完''')', [[완영군]]은 '재긍(載'''兢''')', [[흥친왕]]은 '재면(載'''冕''')', [[완은군]]은 '재선(載'''先''')', [[인양군]]은 '재근(載'''覲''')', [[의양군]]은 '재각(載'''覺''')', [[예양정]]은 '재규(載'''規''')'로, 고종의 초명과 마찬가지로 발의 형태로 온전히 들어가있다. [[완평군]]의 둘째 아들 '재현(載'''現''')'은 본가의 양자로 들어가 황실 종친 자격을 잃었지만 이름자에 '儿'은 그대로 있다. 유일하게 [[경은군]] '재성(載星)'이 규칙을 적용받지 않았는데, 서자인데다 작호를 받은 게 굉장히 늦은 시기여서 그런 듯하다.][* 사족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저 중 헌종을 제외하고 장조의 실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저 규칙을 사용하지 않은 이재성 뿐이라는 것이다.(나머지는 전부 입양을 통해 족보상 후손이 된 경우이다.)] || || '''자''' ||윤명(允明) || ||<|2> '''출생''' ||[[1874년]] [[4월 4일]] || ||[[한성부]] 계동 은전궁 || ||<|2> '''사망''' ||[[1935년]] [[5월 11일]] (향년 61세) || ||[[경기도]] [[경성부]] 자택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관료이며 [[일제강점기]]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사도세자]]의 서3남 [[은전군]]의 양증손자이자 [[풍계군]]의 양손자로 아버지는 [[완평군]]이다. == 생애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12-08 06-27-12.jpg|width=100%]]}}} || || {{{#ffd800 '''전통 관복을 입은 의양군 이재각'''}}} || 1874년(고종 11년) [[한성부]] 계동 은전궁에서 [[완평군]]의 3남으로 태어났다. 항렬로는 [[조선]] [[헌종(조선)|헌종]],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동생 뻘이나, 나이는 조카 뻘인 [[순종(대한제국)|순종]]과 동갑이었다. 1891년(고종 28년) 당시로서도 꽤 이른 나이였던 18세에 증광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열리던 임시 과거.]에서 [[진사]]에 급제하고, 1년 뒤 문과별시[* 文科別試,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던 과거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좌비서랑[* 조선 말기의 궁내부 소속 비서감 · 비서원의 관직.]을 거쳐 1895년(고종 32년) 10월 [[명성황후]]의 장례를 책임질 종척 집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아관파천]] 당시 물밑에서 고종의 [[주한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 피신을 도왔다. === 대한제국기 활동 === 다른 종친들보다 나이가 비교적 어려서 그런지 [[조선|조선국]] 시절보다는 [[대한제국]] 시기에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1898년([[광무]] 2년)에는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의 전작례[* 奠酌禮, 임금이 몸소 제사를 지내는 예.]와 작헌례[* 酌獻禮, 왕이나 왕비의 조상이나 문묘(文廟)에 모신 공자의 신위에 왕이 직접 예로써 제사지내던 예.] 때 축문을 읽어 [[상]]을 받았고 1899년(광무 3년) 8월, 시강원 부첨사[* 侍講院副詹事, 시강원은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이며 부첨사는 시강원의 관리 책임자이다.] 역임 중에는 [[일본]]의 [[황족]]이 한국을 방문할 때 맞이했다. 1899년(광무 3년) 9월 족보 상 고조할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받았다. [[황제]]의 4대손은 황족의 지위를 받는다는 예에 따라 의양도정(義陽都正)에 봉해졌다가 2달 뒤 다시 의양군(義陽君)으로 승격했다. 11월에는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해 이 후에도 여러 번 맡는다. 1901년(광무 5년)에는 3월 명헌태후[* [[헌종(조선)|헌종]]의 계비 [[효정왕후]] 홍씨. 참고로 대한제국의 유일한 태후였다. 흔히 윤대비라 부르는 [[순정효황후]]는 나라 망한 뒤 허울 뿐인 이왕대비였을 뿐.]궁 대부에 임용되어 칙임관에 4등에 서임한다. 이는 훗날 1등까지 올라간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495447593915.jpg|width=100%]]}}} || || {{{#ffd800 [[에드워드 7세|{{{#ffd800 '''에드워드 7세'''}}}]] '''즉위식에 간 한국 사절단. 앞 줄 가운데 사람이 의양군 이재각.'''}}} || 또한 '''한국 황족 최초로 [[유럽]]에 간 기록을 세웠다.''' 1902년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특명 영국 대사에 임명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영국 [[런던]]을 방문하고 [[캐나다]] [[벤쿠버]]까지 거쳤던 것이다. 이 때 [[영국 왕실]]의 배려로 '''한국인 최초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했다.''' 다들 거대하고 웅장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일행 중 한 명은 어찌나 놀랐던지 기념 시까지 남기기도 했다.[* 이 사실은 1910년 이후 잊혀졌다가 1999년 4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방한을 맞아 사절단 중 한 명이었던 이종응의 증손녀 이해남과 남동생 이해석이 오랫동안 집에서 보관해오던 수행 기록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1903년(광무 7년) 1월에는 전선사 제조[* 典膳司. 조선 후기 궁내부에 딸린 관청으로 1895년 기존의 [[사옹원]](司饔院)을 개편한 것이 전선사이다. 제조는 총책임자.]를 겸임하였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는 훈 1등에 서훈되어 태극장을 하사받았으며 이화대수장(李花大綏章)을 거쳐 최종적으로 금척대수장(金尺大綏章)까지 수여받는다. 같은 해 9월에는 군부에서 포를 다루는 부서의 국장을 지냈다. 1905년(광무 9년) 2월에는 종정원경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3월 16일 특파 대사로 임명되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축하 사절단으로 다녀왔다. 5월에는 [[경부선]] 철도 개통식에 참석했고 7월에는 이 무렵 세워진 [[대한적십자사]]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후임은 [[의친왕|의친왕 이강]]이었고 1907년(광무 11년) 4월에 다시 의양군이 맡았다. [[한일병합]] 1년 전인 1909년([[융희]] 3년) 7월에 일본이 대한적십자사를 강제로 폐지하면서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한국 일본 황족 단체 사진.컬러 사진.png|width=100%]]}}} || || {{{#ffd800 '''뒷 줄 왼쪽부터''' [[흥친왕|{{{#ffd800 '''흥친왕 이재면'''}}}]], '''[[완순군|{{{#ffd800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 이재각''', [[영선군|{{{#ffd800 '''영선군 이준용'''}}}]].[br]'''앞 줄 왼쪽부터 [[아리스가와노미야|{{{#ffd800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순종(대한제국)|{{{#ffd800 '''순종황제 이척'''}}}]], [[다이쇼 덴노|{{{#ffd800 '''요시히토 황태자'''}}}]], [[영친왕|{{{#ffd800 '''의민태자 이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2b9c4c1-cef1-4b6b-a406-3d6b004c4328.jpg|width=100%]]}}} || || {{{#ffd800 '''[[1909년|{{{#ffd800 '''1909년'''}}}]] [[순종(대한제국)|{{{#ffd800 '''순종'''}}}]]이 순행에서 돌아와 [[창덕궁 인정전|{{{#ffd800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친일 관료들과 기념촬영한 사진.[br]중앙은 순종. 오른쪽으로 의양군 이재각, '''[[민병석(1858)|{{{#ffd800 '''민병석'''}}}]], [[조중응|{{{#ffd800 '''조중응'''}}}]], [[김윤식(조선)|{{{#ffd800 '''김윤식'''}}}]], [[이지용|{{{#ffd800 '''이지용'''}}}]], [[조민희(1859)|{{{#ffd800 '''조민희'''}}}]]''', 고희성. 순종의 뒤는 '''[[이병무|{{{#ffd800 '''이병무'''}}}]], [[윤덕영|{{{#ffd800 '''윤덕영'''}}}]]. '''순종의 왼쪽으로''' [[이토 히로부미|{{{#ffd800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ffd800 '''이완용'''}}}]], [[임선준|{{{#ffd800 '''임선준'''}}}]], [[고영희|{{{#ffd800 '''고영희'''}}}]], [[송병준|{{{#ffd800 '''송병준'''}}}]], [[박제순|{{{#ffd800 '''박제순'''}}}]].}}} || 이후 육군 참장(陸軍參將)과 민간 단체인 상공근무사(商工勤務社)의 회장을 맡았으며 1908년([[융희]] 2년)에는 계산학교 교장 직을 역임했다. 1909년(융희 3년) 1월에 [[순종(대한제국)|순종]]이 [[대구광역시|대구]], [[부산광역시|부산]], [[마산]] 등을 시찰할 때 옆에서 모셨다. 1910년(융희 4년) 8월에 종1품에 가자되었으나 얼마 뒤 [[경술국치|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그도 황족의 지위를 잃는다. === 일제강점기의 행적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운현궁 친족 단체 사진.컬러 사진.png|width=100%]]}}} || || {{{#ffd800 '''운현궁에서 친척들과 함께. 왼쪽부터''' [[흥친왕|{{{#ffd800 '''흥친왕 이재면'''}}}]], [[영선군|{{{#ffd800 '''영선군 이준용'''}}}]], [[완순군|{{{#ffd800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 이재각'''. '''전부 [[친일인명사전|{{{#ffd800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들이다.'''}}} || 이후 이재각은 '''다른 왕족들처럼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걷는다.''' 일본에게서 [[조선귀족]] [[후작]](侯爵) 작위와 은사 공채 16만 8천원을 받았으며 일본은 이재각에게 특별히 일본군 육군 소장 대우를 하여 제복과 호위 무관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후에 다른 왕족들처럼 [[왕공족|이왕가(李王家)]] 내의 많은 행사들[* 선원전 봉사나 왕릉 제사 등]에 참여하며 그럭저럭 잘 살았는데 말년에는 [[도박]]으로 재산을 거의 다 잃고 가난하게 [[http://gyeongju.dmook.co.kr/gallery/view.asp?seq=194207&path=&rpage=67|보냈다.]] 그러다 1935년 5월 11일 [[경성부]] 자택에서 향년 61세로 사망했다. == 여담 == * '대통령 소속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 위원회'에서 펴낸 《친일 반민족 행위 관계 사료집 4 - 조선귀족과 중추원》에서 인용한 일본인들에 의해 작성된 [[조선총독부]] 비밀문서 《조선귀족약력》에 따르면, 아내 유씨가 [[콜레라]]에 걸린 걸 관내 경찰관이 발견하였고 경기도 위생과에서는 그래도 명색이 귀족인 부인의 체면을 중시해서 따로 치료하려 했는데, 이재각은 자신은 알지 못하고 병은 자신이 처방할 수 있다며 마음대로 약을 먹였다고 한다. --[[유체이탈 화법|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처방을]]-- 더군다나 환자인 아내를 완전히 남처럼 대하면서 자신은 병을 피해 첩의 집에 머물렀다고.(...) 이에 보다 못한 경찰관은 귀족 체면이고 뭐고 따지지 않고 급히 병원으로 옮겨 일반 환자들과 함께 수용했다고 [[http://gyeongju.dmook.co.kr/gallery/view.asp?seq=194207&path=&rpage=67|한다.]] * 위의 출처에 따르면, [[의친왕]]과 자주 술자리를 가졌는데 정작 술은 마시지 않았다고 [[http://gyeongju.dmook.co.kr/gallery/view.asp?seq=194207&path=&rpage=67|한다.]] * [[경상남도]] [[진주시]] 뒤벼리 암벽[* 진주 8경 중 하나이다.]에 의양군 이재각, 이재현[* 안내판에 적힌 이재현의 한자 이름이 '李載現'으로 되어있는데 이재각의 친형과 이름이 같다. 그 사람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성기운]]의 이름이 80cm 가량 크기의 한자로 깊이 새겨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 암벽에 이들의 이름이 쓰여 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독립운동사료연구가 추경화씨가 이들의 친일 행적을 찾아내면서 알려졌는데, 발견 당시 광복회 등 애국보훈단체에서는 새겨진 이름을 지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시민들은 그것 또한 --흑--[[흑역사|역사]]이기에 그대로 두고[* 다만 없애지는 않은 대신 가려놓았다.], 대신에 그 앞에 이 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1999년 12월에 세워놓았다. 하지만 2018년 10월 낙서로 골탕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경찰에 수사의뢰를 [[https://news.v.daum.net/v/20181010144202548|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진주 뒤벼리 입구 안내판.jpg|width=100%]]}}} || || {{{#ffd800 '''진주 뒤벼리 암벽 앞에 있는, 이재각, 이재현, 성기운이 친일파임을 알리는 안내판'''}}} || * 이재각이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의 별장 정원에서 사고가 터진 적이 있었다. 1923년 5월 20일 [[종로]] [[삼청동]] 이재각 후작 별장 정원에서 조선 미술 공장에 다니던 20살 최수만과 그의 친구 22살 박도환을 포함[* 요즘 기준으로는 나이 차이가 나면 친구 먹는 게 어색하지만 당시만 해도 2살 차이 정도는 친구로 지내는 게 당연했다.], 서너 명의 청년들이 장난치다 최수만이 박도환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날은 일요일이라 이들이 모여 놀고 있었고 박도환이 공기총을 든 최수만을 보고 총을 좀 빌려달라고 해 가져갔는데 그 총을 함께 놀던 김갑덕이란 사람에게 주고 최수만에게는 너한테 다시 줄 필요 없다며 도발하자 서로 툭툭치며 장난치다 몸싸움으로 번졌고(...) 한참 싸우던 중에 박도환이 갑자기 숨을 가쁘게 쉬다 죽은 것. 최수만은 즉시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약 20일 만에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3052100209203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3-05-21&officeId=00020&pageNo=3&printNo=996&publishType=00020|석방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12-08 06-45-43.jpg|width=100%]]}}} || || {{{#ffd800 '''이재각 별장에서 일어난 사고를 다룬[br]1923년 5월 21일 자 〈동아일보〉 기사'''}}} || == 후손 == 군부인 유씨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그리고 [[늦둥이|50살이라는 지금으로써도 상당히 늦은 나이에 이름을 모르는 후처 사이에서 아들 이덕용(李德鎔) 하나만 보았다.]] 자세한 내용은 [[이덕용]] 문서 참조.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 인명 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는 그의 후작 작위를 습작 받은 아들 이덕용도 포함되어 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분류:대한제국의 황족]][[분류:전주 이씨 은전군파]][[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조선귀족 후작]][[분류:1874년 출생]][[분류:1935년 사망]][[분류:대한적십자사 회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