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강석(1937) (문서 편집) ||<-2> '''{{{+1 이강석}}}[br]李康石 | Lee Kang-seok'''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강석.jpg|width=100%]]}}} || ||<|2> '''출생''' ||[[1937년]][* 1960년 4월 29일 자 [[동아일보]]의 이기붕 일가 자살 기사에 이강석의 당시 나이를 24세로 표기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0042900209103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4-29&officeId=00020&pageNo=3&printNo=11711&publishType=00010|#]] 한국 나이였다면 1937년생이 된다.] [[2월 5일]]|| ||[[경기도]] [[경성부]][br](現 [[서울특별시]])|| ||<|2> '''사망''' ||[[1960년]] [[4월 28일]] (향년 23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무대]][br](現 [[청와대]] 구본관 터)|| || '''본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 '''부모''' ||친부 [[이기붕]], 친모 [[박마리아]][br]양부 [[이승만]], 양모 [[프란체스카 도너]]|| || '''형제자매''' ||누나 이강희[* 중학생 때 요절.], 남동생 이강욱|| || '''신체''' ||약 170cm[* [[파일:이강석, 프란체스카, 이승만,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의 사진.jpg]][br](맨 왼쪽에 있는 사람이 이강석이고, 이강석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프란체스카 도너다.) 이 사진을 보면 150cm로 추정되는 [[프란체스카 도너]]보다 20cm나 큰 키로 추측할 수 있다.]|| || '''학력''' ||[[경기중학교]] {{{-2 (중퇴)}}}[br][[서울대학교 법과대학]] {{{-2 (법학 / 중퇴)}}}[br]육군보병학교 {{{-2 (졸업)}}}|| || '''임관''' ||[[갑종간부후보생]]|| || '''최종 계급''' ||소위 {{{-2 (대한민국 육군)}}}||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인물. [[이승만 정부]]의 국회의장 [[이기붕]]과 [[박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말년에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된 사람이다.[* 입적 이후 [[영애|영식]] 강석 [[소위]]로 호칭되었다. 당대 [[대한뉴스]]에서 확인 가능하다.] == 생애 == [[이승만]]은 [[프란체스카 도너]]와 [[중혼]]하기 전, 본처 박승선과[*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080201&docId=344334639&qb=7J207Iq566eMIOyhseuztA==&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0|출처: 《전주이씨족보》 이승만편.]],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208030118|출처2:쿠키뉴스 박승선 취재1]]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208120041#_DYAD|취재2]]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208180048#_DYAD|취재3]][[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mp.aspx?CNTN_CD=A0002736438|오마이뉴스]] [[https://m.kmib.co.kr/view_amp.asp?arcid=0924162948|국민일보]] [[https://m.hani.co.kr/arti/opinion/column/853857.html?_fr=gg|한겨레]] 1891년 혼인. 쿠키뉴스의 취재 등 여러 언론에 따르면 박승선은 이혼에 합의한 적이 없고 해방 이후 면담 역시 거부되었다. 끝까지 자기가 본부인이며, 다른 이가 있다면 첩이라고 주장했다. 박승선의 주장은 무시당했다. 1912년 이혼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은 이승만 측에 의해 소송을 당해 1949년 6월 4일 혼인 관계와 호적이 말소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방 판결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 여러 언론의 보도로 알려졌고,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362619650808m1071&set_date=19650808&page_no=7|1965년 8월 8일 조선일보 당대 기사]]에서 호적 말소는 법적 소송을 제대로 거치지 않아 시정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http://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600920000036|1960년의 부산일보 9월 20일]] 기사에서는 이승만이 1912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호적에 손을 댄 적이 없으며, 박승선이 이은수를 양자로 맞아 호적상 이승만의 장남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는 박승선이 1912년 이후에도 호적에 부인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봉수란 아들이 있었으나 7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고[* [[https://www.yna.co.kr/view/AKR20151006200200039| 출처 - 연합뉴스 (2015.10.08.) : <역사속 오늘> 25살 연상의 이승만을 사랑한 '호주댁']]], 프란체스카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얻지 못했다. 이기붕과 이승만은 같은 [[전주 이씨]]에[* 두 사람은 모두 [[태종(조선)|조선 태종]]의 후손으로 35촌 간이다.(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 [[이기붕]]은 [[효령대군]]의 17대손)] 같은 정당의 정치가로서 친분이 있었으므로, 1957년 이승만의 83세 생일에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사실 이 입양은 당시 민법상 장남은 타인의 양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무효였다.[* [[의용민법]] 제111조에 규정되어 있었으며, 이 조항은 이후 민법이 제정되면서 제875조(직계장남자의 입양금지)에 규정되었다가 1990년에 [[민법]] 개정으로 삭제되었다.] 거기다 항렬로도 이강석은 이승만의 손자뻘이기에 차라리 이승만의 죽은 아들이였던 이봉수의 양자로 입양되던가 아니면 아들뻘인 이기붕이 직접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기붕은 나이로든 항렬로든 이승만의 아들뻘[* 이기붕의 아버지이자 이강석의 할아버지인 이낙의와 이승만은 동갑내기였다.]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세간에서는 이기붕이 자식 팔아 출세하려 한다고 말이 많았다. 차남을 양자로 보내는게 당연한 것인데[* 물론 이것도 오늘날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대를 이을 장남을 보냈으니 권력에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승만의 양자이자 [[대한민국 국회의장|민의원의장]] 이기붕의 아들이었으니 이강석의 권력이 얼마나 컸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 빽으로 [[서울대학교]] 법대에 편입하였으나, 학생들이 등교 거부를 하는 등 거세게 반발[[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7041100239203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7-04-11&officeId=00023&pageNo=3&printNo=10748&publishType=00020|#]]하여 결국 중퇴하였고, [[육군사관학교]]에 재입학 하였으나 관절염 때문에 중퇴 후 [[갑종간부후보생]] 제도로 [[대한민국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강석의 권력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어느 청년이 이강석을 사칭한 [[가짜 이강석 사건]]을 들 수 있다. 당시 이강석이 시내에서 헌병을 구타하고 난동을 부린 적이 많았는데도 [[언론통제|보도 한 번 안 되었다고 한다]]. [[가짜 이강석 사건]]으로 법정 공판이 열렸을 때는 이승만 정권에 진저리를 내던 대중들이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 법정 안에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들어차서 의자가 부서졌고, 심지어 판사 전용 출입문에까지 방청객들이 들어차서 판사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나오다 법복이 찢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의 권력을 조롱한 피의자 강성병의 진술에 방청석이 환호했다는 후문도 있다. 1960년, [[이기붕]]이 부정 선거를 주도하다가 [[이승만]] 대통령까지 하야하고 [[4.19 혁명]]이 끝나갈 무렵인 4월 28일, 친아버지 이기붕, 친어머니 [[박마리아]], 동생 이강욱 등 [[존속살해|온 가족을 총으로 쏴 죽인 뒤]] 자신도 자살했다. 이강석이 어떤 심정으로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가족들 전부가 같이 죽기로 합의하고 죽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훗날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강석의 시신에서 머리와 가슴에 총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스스로 머리에 한 발, 가슴에 한 발 쏘았다는 뜻인데,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되어 타살론이 나왔다. 타살론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곽영주]]가 이기붕 일가를 살해하여 국민여론을 달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막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기붕 일가가 죽기 전에 담화를 통해 하야를 발표했던 상태라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곽영주는 이 일이 있고 얼마 안 가 사형당해서 사실 확인도 불가능하다.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이전부터 사는 게 힘들다고 자살 기도를 여러 번 했던 적이 있으므로 수면제 치사량을 복용하고 먼저 자살했고, 나중에 이강석이 권총 두 자루를 준비하여 머리와 가슴에 각각 대고 쏘았다고 보기도 한다. == 대중매체에서 == * 1968년 제작, 1989년 개봉한 영화 <[[잘 돼 갑니다]]> - 한성[* 1944년생 배우. 본명은 김길남.]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드라마)|제1공화국]]> - [[길용우]][* 길용우는 이강석이 [[말(동물)|말]]을 타는 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처음 [[승마]]를 배웠는데 이후 여러 [[사극]]에 출연하면서 이를 유용하게 써먹었다고 한다.] * 1989년 [[KBS]] 미니시리즈 <[[무풍지대(드라마)|무풍지대]]> - [[오대규]][* 일가족 집단 자살 장면은 총쏘는 장면만 스틸컷으로 대체되었다.] * 1993년 [[KBS1]] <다큐멘터리극장 '귀하신 몸' > - 신용규 * 1998년 [[SBS]] 정치 대하드라마 <[[삼김시대(드라마)|삼김시대]]> - 손민우 >[[이승만 정부|이승만 정권]] 12년의 종말, 그리고 그 2인자 [[이기붕]] 일가의 집단자살. 그것은 [[인생무상]] 바로 그것이었다. 한때는 [[자유당]] 2인자로서 권세와 영화를 한손에 쥐고 흔들었던 이 일족의 비참한 죽음을 과연 누가 생각인들 할 수 있었을까? > >그런데 이 비참한 죽음에는 또 다른 일설도 없지는 않다. 이기붕 일가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사살'''됐다는 풍문이 그것이다. 즉 당시의 [[경무대]] 경호책임자 [[곽영주]]가 하야한 대통령을 위해 국민여론을 무마시키려는 의도에서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는 설이 그것이다. > >'''그러나 이를 확인하는 일은 [[역사학자|현대 사가들]]의 많은 노력이 필요하리라 여겨질 뿐 확인할 길은 없다.''' > >어쨌든,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정부와 [[자유당]]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이어 [[허정]] 과도정부가 들어선다. >---- >122화. [[https://youtu.be/k64P0QHu5Kc?t=1774|이기붕 일가의 집단자살]] 직후 나온 [[나레이션(야인시대)|나레이션]]의 대사 [include(틀:야인시대 합성물 등장인물)] * 2003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 - 이재현[* 학생 시절 동생인 이강욱과 함께 귀가하는 장면으로 첫 등장한다. 이후 새해가 되어 [[이승만]]에게 [[이기붕]] 일가가 새해 인사들 하는 장면에서 이승만의 마음에 들어 이강석을 양자로 달라고 하는데 이기붕은 갑자기 이야기를 들어 혼란한 와중에도 둘째 아들을 양자로 들일 것을 권유하나 이승만은 "이강석을 말한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없는 얘기로 하자"며 화를 냈고 이기붕은 마지못해 이를 승낙한다. 작중 [[서울대학교]] 입학 관련은 나레이션에서만 언급됐고 [[가짜 이강석 사건]]은 등장하지 않는다.][* 양자로 들어간 이후 한동안 등장하지 않다가 이승만이 [[최인규]]를 질책하던 장면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 때는 [[육군]] 소위가 되어 있었다. [[4.19 혁명]] 직후 독기를 품고 [[권총]]에 탄환을 하나 하나 집어넣으며 [[https://youtu.be/n7-TlHKXcKk|"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 라고 결심한 후 결국 권총으로 가족들 모두를 사살하고 자신도 그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강석에 대한 [[에피소드]]가 생략되다 보니, 권력을 등에 업고 날뛴 망나니보다는 이래저래 휘둘리다가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려 온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은 인물로 묘사된다. 이강석이 가족을 사살하는 씬은 드라마에서는 비극적인 장면으로 묘사되지만 [[심영물]]에서는 [[https://youtu.be/cji7K4xsAIc?t=63|이승만의 방귀 앞에 가족 전체가 집단 질식사하는 식으로 합성된다.]] 총을 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인지 [[https://www.youtube.com/watch?v=F75Or0Uwd-c&t=86s|누군가를 고자로 만들기도 하며]], 아예 집행인으로 등장하여 '''[[이기붕(야인시대)|자신의 아버지]]'''를 [[https://youtu.be/Svy39OlZzCI?t=350|총으로 쏴 폭8시키기도 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강석, version=152, paragraph=1)][[분류:한국의 대통령 자녀]][[분류:전주 이씨 효령대군파]][[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1937년 출생]][[분류:1960년 사망]][[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자살한 인물]][[분류:총기에 죽은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