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건영 (문서 편집)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1961년생 정치인, rd1=이건영(1961), other2=동명의 축구선수, rd2=이건영(축구선수))] [include(틀:제3야전군사령관)] ---- ||<#ff0000> '''{{{#FFF 역임한 직위}}}'''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제5군단장)] ---- [include(틀:역대 한국마사회 회장)]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ff0000)" '''[[제3야전군사령관|{{{#FFF 대한민국 제4대 제3야전군사령관}}}]][br]{{{#fff {{{+1 이건영}}}[br]李建榮 | Lee Geon-yeong}}}'''}}}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건영.png|width=100%]]}}} || ||<|2> '''출생''' ||[[1926년]] [[9월 2일]] || ||[[강원도]] [[영월군]] || ||<|2> '''사망''' ||[[2023년]] [[3월 11일]] (향년 96세) || ||[[서울특별시]] || ||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2충혼당 1층-519실-412호 || || '''본관''' ||[[함평 이씨]][* 판관공파(判官公派) 31세 건(建) 항렬. 함평이씨대동보 권13 73쪽에는 누락되어 있다.] || || '''가족''' ||[[배우자]] 곽춘근, 슬하 2남 2녀 || || '''호''' ||만호(晩湖) || || '''종교''' ||[[천주교]] {{{-2 (세례명 : 안토니오)}}} || || '''학력''' ||제천 송학공립국민학교 {{{-2 ([[졸업]])}}}[br]원산 난곡고등농림학교 {{{-2 ([[졸업]])}}}[br][[포트 베닝|미국 육군보병학교]] {{{-2 (신임장교 지휘참모과정 / 졸업)}}}[br][[육군보병학교]] {{{-2 (대위 지휘참모과정 / 졸업)}}}[br][[육군포병학교]] {{{-2 (고급지휘반 / 졸업)}}}[br][[육군공병학교]] {{{-2 (고급지휘반 / 졸업)}}}[br]미국 육군야전포병학교 {{{-2 (고급지휘반 / 졸업)}}}[br][[버지니아 군사대학|미국 버지니아 종합군사학원]] {{{-2 (졸업)}}}[br]미주리 군사아카데미 {{{-2 (졸업)}}}[br][[육군대학]] {{{-2 (졸업)}}}[br][[마산대학교]] {{{-2 (정치경제학 / 학사)}}}[br][[국방대학교|국방대학원]] {{{-2 (행정학 / 학사)}}}[br][[국방대학교|국방대학원]] {{{-2 (행정학 / 석사)}}} || ||<-2> '''군사 경력''' || || '''임관''' ||[[육군사관학교]] {{{-2 (7기)}}} || ||<|2> '''복무''' ||대한민국 육군[* 군번 11821] || ||[[1948년]] ~ [[1980년]] || || '''최종 계급''' ||[[중장]] {{{-2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제3야전군사령관 || || '''주요 보직''' ||[[제6보병사단|제6보병사단장]][br]주월한국군사령부 부사령관[br][[육군대학|육군대학 총장]][br][[대한민국 육군본부|육군본부]] 기획참모부장[br][[제5군단|제5군단장]][br]국방부 관리차관보[br][[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 차장]] || || '''참전''' ||[[6.25 전쟁]][br][[베트남 전쟁]] || ||<-2> '''의원 경력''' || || '''의원 선수''' ||'''1''' || || '''의원 대수''' ||'''[[제14대 국회의원|14]]''' || || '''최종 당적''' ||[include(틀:신한국당)] || || '''주요 경력''' ||[[통일국민당]] 당무위원회 위원[br][[통일국민당]] 안보위원회 위원장[br]국회 [[국방위원회]] 위원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종교]]는 [[천주교]](세례명: 안토니오)이다. == 생애 == 1926년 9월 2일 [[강원도]] [[영월군]]에서 아버지 이성행(李星行)과 어머니 [[진주 강씨]][* 강성호(姜聲湖)의 딸이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아들 없이 [[요절]]한 큰아버지 이시행(李旹行, 1895. 9. 19 ~ 1924. 5. 6)[* 자는 여구(汝久).]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제천시|제천군]] 송학공립보통학교, [[원산시|원산부]] 난곡고등농림학교, [[육군사관학교]] 제7기 과정을 졸업했다. [[대한민국 육군|육군]] [[장교]] 임관 후에는 [[제6보병사단]] [[사단장]], [[제5군단]] [[군단장]]을 거쳐 1969년 [[주월한국군|주월한국군사령부]] 부사령관, 1976년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관리차관보, 1977년 [[중앙정보부]] [[차장]] 등을 지냈으며, 1979년 2월 [[제3야전군사령부|제3야전군]][[제3야전군사령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해 12월 [[12.12 군사반란]]을 막으려다 실패하고, 이듬해인 1980년 1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육군 [[중장]][* 3군사령관이 원래 [[대장(계급)|대장]] 계급의 보직으로 이건영도 대장으로 진급 예정이었으나, 하나회에 반대하는 바람에 중장인 상태에서 쫓겨났다.]으로 예편당했다. 예편 후 [[국군보안사령부]]에 연행되어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수도경비사령관]] 등과 연락하며 병력 동원 등 조직적인 저항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수사받기도 했으며, 1982년 1월 [[한국마사회]] [[회장]][* 1989년 9월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1가]] [[뚝섬]](지금의 [[서울숲]] 자리)에 있던 경마장을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으로 옮긴 것이 바로 이건영이 한국마사회 회장으로 있을 때 추진한 일이다.]에 취임해 9년간 재임했다. 이후에는 한국마사회 [[고문]]을 역임했다.[* 사실 신군부 측이 비하나회 장교들의 불만을 잠재울 겸 해서 진압군 측 장성들에게 공기업 회장/사장 직이나 국무위원 등을 제안했는데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사례로 [[장태완]] 수경사령관도 예편 이후 전두환 정부로부터 [[한국증권전산]] 회장직을 맡아 꽤 오랜시간 재임했었고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은 반란 이후 오히려 대장으로 진급하여 2군사령관, 합참의장으로 영전했다. 다만 비교적 명예직에 가까웠던 저 둘과 다르게 마사회장 자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각종 이권사업 등에 개입하기 쉽고 업계에서의 영향력도 결코 적지 않은 자리라서 은퇴한 정치인, 장성들이 탐내는 자리이기도 하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국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제6번)에 당선되었으며, 통일국민당에서 안보위원장, 당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가 패하자 이듬해인 1993년 통일국민당을 탈당하고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민주자유당 입당 시 반란군 [[유학성]]과 같은 당에 몸담게 되면서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당시 민자당은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서 민주계가 군부계를 몰아내는 중이었다. 유학성 역시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가 시행되자 --받아쳐먹은게 많은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결국 12.12 관련 사법처리 때 증인으로 나서며 유학성을 비롯한 옛 [[대한민국 제5공화국|5공]] [[신군부]]([[하나회]]) 인사들을 감옥으로 보내는데 일조한다. 하지만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불출마하였다. 2023년 3월 11일 오전 8시 45분에 [[노환]]으로 [[https://m.kwnews.co.kr/page/view/2023031214530400455|사망했다]]. 향년 96세. 유해는 2023년 3월 14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1층 519실에 [[https://www.yna.co.kr/view/AKR20220401145100505|안장되었다]]. == 12.12 군사반란 == * [[https://www.youtube.com/watch?v=HMTQTsPNWYg|육성녹음 1]] * [[https://www.youtube.com/watch?v=khdcZGVm5p4|육성녹음 2]] 1995년 8월, 12.12 군사반란 당시 이건영을 중심으로 한 전화통화 육성 녹음 약 1시간 15분 가량이 조선일보사에 의해 공개되었다. 이 녹음본은 당시 보안사령부에서 감청한 것인데, 비화기[* 말 그대로 비밀스러운 내용을 통화하고자 할 때 쓰는 장치이다.]로 통화한 내용까지도 모두 감청되었다.[* 사실 이 비화기라는게 일종의 [[폐쇄회로]]이므로 [[적군|조선인민군]]은 들을 수 없지만 아군이라면 선 하나만 따면 들을 수 있는 식이다. 이건영도 이를 몰랐을 리 없으나 휴대폰도 없던 시절 북괴의 위협 가능성을 의식한 상태에서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녹음본은 시간이 지난 뒤 한 기무사 직원이 녹음 내용을 듣던 중 12.12 사태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이 신군부에 저항하여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라'고 말한 것을 듣고 감복하여 이건영 장군에게 녹음 테이프를 넘겼고, 이를 한 일간지 기자를 통해 1995년에 월간조선이 공개한 것이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503100029|#]] 당시 이건영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납치 소식을 듣고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하나회의 불순한 장난(또는 움직임)"'''이라며 분명하게 '''[[반란]]으로 규정'''하여 어떻게든 이를 막으려 했고, 그 와중에 혹시나 생길지 모를 아군간의 교전과 유혈사태, 그를 틈타 남침할 수 있는 북한군 등에 대해 대비하면서, 전방 부대의 병력 동원에 대해서는 철저한 전방 경계 태세 유지와 상명하복의 원칙[* 이건영은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가 유고인 상황에서 [[노재현]] 국방부장관의 명령 없이는 병력 이동을 일체 할 수 없다고 했고(다만 국방장관도 유고시 국방차관이 대신할 순 있다), 실제로 당시 노재현과 합참의장 및 참모차장도 이건영에게 그렇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반란 발생 후 노재현은 도망갔다가 국방부로 복귀 후 신군부에 회유당하면서 이건영의 생각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여담으로 녹음본 마지막 부분에 이건영은 노재현과 [[김용휴]] 국방부차관의 호출로 국방부로 가게 되는데, 이는 보안사에서 이건영을 체포하기 위해 노재현을 이용한 것이다. 이미 이건영 본인도 자기가 거기 가면 안전할 수 있을까라고 자신의 미래를 짐작하지만 상관의 달램과 명령이니 울며겨자먹기로 가게 되고, 얼마 안가 3군사령관직에서 쫓겨난다.]에 의해 움직이는 등 FM 군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반란군을 막기 위해 자신으로써는 나름대로 성의를 다 했던 이건영에게는 '''이미 반란 개시 전에 보안사로부터 체포 명령이 떨어져 있었다.''' 사실 이건영의 행동은 어찌보면 FM이긴 하지만, 이때 전방 부대 병력을 이동시키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너무 융통성이 없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는 등 찬반 양론이 있다. 전방 9사단 예하 29여단 병력이 이미 전부대 일체 출동하지 말라는 자기 명령을 어기고 서울로 오는게 확인되고 있는 마당에도[* 하나회 구창회가 출동 부대 없다는 거짓 보고를 했지만, 육성녹음을 보면 이미 이건영은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보안사의 본인 체포 명령도 어느 순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육본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부탁한 사단급 [[충정부대]] 투입을 사실상 거절했기 때문. 물론 이건영 입장에서 보면 저쪽이 저런다고 이쪽까지 전방 부대를 빼는건 국가안보 해악 행위인데다[* 최악의 경우 하나회가 북한군과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면, 전방 부대의 병력을 빼 올 경우 그야말로 북한군에게 알아서 길을 터 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가뜩이나 연락도 잘 안되던 국방부 장관이 마지막으로 지시한 내용 역시 병력 출동을 금했던 것이라 유혈 사태 등을 고려해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다고 볼 수는 있으나, 그 결과가 쿠데타군의 서울 진입 허용과 군권 장악, 이후의 군부독재 연장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역사적으로 볼땐 너무 단기적인 시각으로만 접근한 거 아니냐는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반란군 서울 진입을 놔둔 결과 '''하루도 안지나 본인부터 반란군에게 끌려가게 된다'''. 이걸 본인의 안위마저 무시한 채 나라 안보부터 걱정했던 것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반란군 세력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건 아닌지는 각자 판단의 몫이다. 결국 모든 노력이 실패하고 반란군에 가담한 부하들의 배신 등에 의해 군복을 벗게 된 이건영은, 강제 예편 후 54일간에 걸쳐 보안사의 강압 수사를 받게 된다. 수사 중인 12월 24일 국방부에 의해 발표된 이건영의 혐의는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과 연락하면서 병력동원 등 조직적인 저항을 기도했다."'''는 것이었다. 허나 위의 육성녹음을 들으면 알겠지만, 아군간에 교전이 생기면 안 된다면서 반란군의 진압을 위해 병력이동을 요청하는 장태완의 의견에 반대하면서까지 병력이동을 막은 사람이 이건영이다. 한마디로 '''이건영의 혐의는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 하나회에서 날조한 것.''' 물론 하나회는 정승화, 장태완, [[정병주]] 등에게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없는 혐의를 만들어 숙청했다. 이건영은 이 당시의 일에 대해서 스스로 완전히 정리하지 못했는지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민주화가 된 이후에 다른 이들과 달리, 당시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평하거나 회상하는 일을 극도로 꺼려왔다. 1995년 보안사 감청 녹음 기록이 공개되었을 때도, 각 언론사의 취재와 인터뷰 요청이 빗발쳤으나 "책임자로서 12.12 군사반란을 막지 못 해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는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753961|사과]]를 한 것이 전부[* 이것도 KBS가 제주도에서 휴가중이던 이건영을 찾아가 갑자기 인터뷰를 요청해서 이뤄진 것이지 정식 인터뷰 요청은 모두 거절하고 짧은 서면 입장만 냈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5/nwdesk/article/1958318_30705.html|#]]]이다. 참고로 이 녹음본 중 당시 [[제9보병사단]]장 [[노태우]]의 불법 군사행동을 막기 위해 제9보병사단 [[참모장]] [[구창회]][* 구창회는 육사 18기로 [[하나회]] 멤버이다. 12.12 군사반란 당시 9사단 30연대장으로부터 삼송리까지 병력을 이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보고를 받은 이건영이 확인차 구창회에게 연락하자, 구창회는 연대 출동 지시는 없다며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상관에게 '''거짓 보고'''를 했다. 참고로 이때 30연대의 이동을 지시한 것은 사단장 노태우였다. 이후 구창회는 노태우 정권에서 자신이 속인 이건영의 마지막 보직인 3군 사령관(대장)까지 지냈다가, 문민정부의 하나회 숙청으로 군복을 벗었다.] [[대령]]의 거짓 보고를 받는 통화 내용은 [[MBC]] 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의 해당 에피소드에도 등장한다. == 선거 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전국구]] || [include(틀:통일국민당)] || '''3,574,419 (17.37%)''' || '''당선 (6번)''' || '''초선'''[* 93.2.20: 통일국민당 탈당, 93.6.24: 민주자유당 입당] || == 대중매체에서 == * 2005년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차윤회가 연기했다. *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영화)|서울의 봄]]에서는 이건영을 모티브로 한 '고재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배우 [[박원상]]이 연기했다. 분량은 많진 않은 편으로, 장태완을 모티브로 한 이태신(정우성)이 병력 지원을 요청하지만, 영화상 좀 각색했는지 부대 지휘관들이 자기 말을 따르지 않는다며 최선을 다해보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제14대 국회의원/전국구)]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함평 이씨]][[분류:영월군 출신 인물]][[분류:1926년 출생]][[분류:2023년 사망]][[분류:제14대 국회의원]][[분류:통일국민당 국회의원]][[분류:민주자유당 국회의원]][[분류:신한국당 국회의원]][[분류:군인 출신 정치인]][[분류:육군사관학교 출신]][[분류:버지니아 군사대학 출신]][[분류:한국마사회 회장]][[분류:대한승마협회 회장]][[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분류:전두환 정부/인사]][[분류:박정희 정부/인사]][[분류:12.12 군사반란/관련 인물 및 단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