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궤 (문서 편집) [include(틀:수말당초 주요 세력)]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33333, #333333, #333333, #333333, #a48252, #a48252, #a48252, #a48252)" '''{{{#fff 수말당초 군웅[br]{{{+1 李軌 | 이궤}}}}}}'''}}} || ||<#a48252> '''[[연호|{{{#ece5b6 연호}}}]]''' ||<(> 안락(安樂, 617년 ~ 619년) || ||<#a48252> '''[[성씨|{{{#ece5b6 성}}}]]''' ||<(> 이(李) || ||<#a48252> '''[[휘|{{{#ece5b6 휘}}}]]''' ||<(> 궤(軌) || ||<#a48252> '''[[자(이름)|{{{#ece5b6 자}}}]]''' ||<(> 처칙(處則) || ||<#a48252> '''{{{#ece5b6 생몰 기간}}}''' ||<(> ? ~ 619년 || ||<#a48252> '''{{{#ece5b6 재위 기간}}}''' ||<(> 617년 ~ 619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수말당초의 군웅이자 단명정권인 이량(李凉)의 유일한 군주이다. 자는 처칙(處則). == 생애 == 무위군(武威郡) 고장현(姑臧縣) 출신으로 집안에 재산이 풍부하여 궁핍한 이들을 구제하여 사람들의 인망을 얻었다. [[수나라]] [[대업]] 연간에는 응양부(膺揚府) 사병(司兵)이 되었다. 수나라는 대업 연간에 들어서면서 [[양제(수)|양제]]가 3차례 실시했던 [[고구려-수 전쟁|고구려 원정]]이 실패하고 갖은 실책으로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런 와중에 금성군에서 [[설거]]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궤는 동향 사람인 조진(曹珍), 관근(關謹), 양석(梁碩), 이빈(李贇), 안수인(安修仁) 등과 모의하여 거병하였고 추대를 받아 맹주가 되었다. 안수인이 오랑캐들을 모아 내원성(內苑城)을 공격하고 입성하자, 이궤는 안수인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호분낭장(虎賁郎將) 사통사(謝統師)와 군승 위사정(韋士政)을 사로잡았다. 이궤는 하서대양왕(河西大涼王)을 칭하고 안락(安樂) 연호를 선포한다. 이때 [[서돌궐]]의 가한 이궐처라가한의 아우인 달도궐설(達度闕設)이 수나라에 귀순하고 회녕천(會寧川)에 주둔하였다가 가한을 자칭하고 이궤에게 귀순하기도 했다. 관근 등의 부하들이 수나라의 관리를 죽이고 그들이 가진 재산을 나누는 것에 대해 건의하자, 이궤는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통사를 태복경(太僕卿)으로 삼고 위사정을 태부경(太府卿)으로 삼았다. 설거가 군대를 보내 이궤를 공격하자, 이궤는 창송(昌松)의 군대를 격파하여 모두 사로잡는다. 이빈이 설거의 포로들을 생매장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이궤는 이빈의 건의를 뿌리치고 이들을 오히려 모두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궤는 이후 장액군(張掖郡), 돈황군(燉煌郡), 서평군(西平郡), 포한군(枹罕郡)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하서5군 땅을 모두 차지한다. 618년, [[당나라]]의 [[고조(당)|고조]]가 설거를 멸망시키고자 사신을 보내 이궤와 제휴한다. 이때 이궤를 사촌아우라고 칭하자 이궤는 매우 기뻐하였고 아우인 이무(李懋)를 보내 입조하여 특산물을 바쳤다. 고조는 이무를 대장군으로 제수하고 양주로 돌려보냈으며, 홍려소경(鴻臚少卿) 장후덕(張侯德)을 사절로 보내 이궤를 양주 총관으로 제수하고 양왕(涼王)으로 책봉한다. 이궤는 대신들을 불러 관작을 받을지 논의하였는데, 조진은 마땅히 [[소찰]]이 양나라의 황제를 칭하며 [[북주]]에 칭신했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당나라에 칭신해야 한다고 건의하였고, 이궤는 조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상서좌승 등효(鄧曉)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며 표문에는 대량(大涼)의 황제라고 칭하였다. 고조는 여기에 분노하여 등효를 유폐시켰다. 이궤는 이후 자신과 함께 거병을 주모한 이부상서 양석을 살해한다. 양석은 이민족의 번성에 대해서 경계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호부상서 안수인과 대립했다. 게다가 이궤의 아들인 이중염(李仲琰) 또한 양석에게 반감을 품었고 결국 안수인이 이궤에게 양석을 무고하여 양석은 살해되었다. 이로 인해 인심은 점점 이궤에게 멀어진다. 게다가 이궤는 하늘에서 천녀를 내려보낼 것이라는 무당의 망언을 신봉하여 누대를 세우고 옥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만큼 이궤는 재산을 낭비했고 이궤의 영역 내에서 기근이 벌어졌음에도 가산이 다해서 기근을 구제하지 못했다. 이때 창고를 열어서 곡식을 진휼하자는 논의가 나오기도 했는데 앞서 이궤가 사로잡았던 수나라의 옛 관리들은 진심으로 이궤를 따르지 않았고 이런 논의를 비난했다. 당나라에서는 안수인의 아우인 안흥귀를 이궤에게 사신으로 보내 이궤를 귀순시키도록 명하였다. 안흥귀가 양주에 도착하자, 이궤는 안흥귀를 좌우위대장군(左右衛大將軍)으로 제수하고 생존하는 방법을 물었다. 안흥귀는 당나라에 귀순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했지만 이궤는 이를 거부한다. 안흥귀는 이궤가 당나라에 귀순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안흥귀와 함께 이궤를 포위한다. 안흥귀의 공격에 설거의 주국(柱國)인 해도의(奚道宜)도 이궤를 포위할 때 가담했다. 해도의는 이전에 강족 병사 3백 명을 이끌고 이궤에게 귀순하여 이궤로부터 해도의를 자사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이궤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이궤를 원망하고 있었다. 결국 공격이 거세지는 가운데 이궤는 옥녀대에 올라 처자와 함께 술자리를 벌인 뒤에 안흥귀에게 사로잡혔고 장안에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19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