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도재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李道宰 [[1848년]]([[헌종(조선)|헌종]] 14) ~ [[1909년]]([[융희]] 3) [[9월 25일]] [목차] [clearfix] == 개요 == 구한 말 [[관료]], [[정치가]]. [[본관]]은 [[연안 이씨|연안]](延安), [[자(이름)|자]]는 성일(聖一), [[아호]]는 심재(心齋), 운정(篔汀),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대한제국]] 때 [[내부|내부대신]], [[외부|외부대신]], [[학부(대한제국)|학부대신]] 등을 역임했다. [[개화파#s-4|급진개화파]]이지만 [[고영희]], [[박중양]], [[이규완(1862)|이규완]] 등과 달리 한일 강제 병합에 반대했고 [[이완용]], [[송병준]] 등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의해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강제로 폐위되자 [[박영효]], [[남정철]]과 고종에게 폐위를 압박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후에는 친일파로 전향했던 박영효, 남정철과 달리 '''친일파로 전향하지 않은 채''' [[1907년]]에 총리대신 [[이완용]]의 모함으로 박영효와 함께 나문정죄 당하여 [[1909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생애 == [[1848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이명익(李溟翼)의 아들로 태어나, 이후 증 우의정 이건익(李健翼)에게 입양되었다. 젊을 때에는 강위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무예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한다. 1879년([[고종(대한제국)|고종]] 16) 식년 [[생원|생원시]]에 3등 45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79_035867|입격하였고]], 33세가 되던 [[1880년]] [[음서]]로 [[무관]]직에 천거되어 관직에 나아갔다. 2년 후인 [[1882년]](고종 19)에는 생원으로 별시 문과에 병과 14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82_014187|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종6품)에 제수되었다. [[1883년]],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나가 당시 수령에 의해 누명에 씌어져 살해, 수탈, 고문 등의 피해를 받던 백성들을 구제해 백성들이 고마운 마음으로 바위에 그의 공적을 쓴 어사암이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아직까지 남아있으며, [[1884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진압 작전에 참전해 [[갑신정변]]을 진압했다. 이후 경상좌도암행어사, 동부승지, 참의군국사무, [[이조(조선)|이조]] [[참의]], [[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냈다. 1886년 호군에 재직중 [[개화파#s-4|사대당]][* [[청나라|친청]] 성향의 온건개화파 세력으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홍집]]과 [[김윤식(조선)|김윤식]], [[박제순]], [[신기선]] 등이 있다.]에 의해 [[고금도]]로 [[귀양]]을 갔고, [[1894년]] [[개화파#s-4|개화당]](급진개화파) 정부가 수립되며 풀려났다. 이 후 전라감사로 돌아와 그가 유배 당시 보던 섬사람들의 고충을 기억해 강진, 해남, 영암으로 흩어져 있던 섬들을 묶어서 섬사람들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그게 지금의 [[완도군]]이다. 즉 이 조치는 행정구역 신설이라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천년 동안 억압받던 섬사람들의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이에 완도 사람들은 고금도에 그를 기리는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전라도]] 감사로 파견되어 [[김개남]]을 사로잡아 전주 초록바위 위에서 처형시키고, [[전봉준]]을 생포했다. [[군부|군부대신]], [[학부(대한제국)|학부대신]] 등을 역임했지만 [[단발령]]이 내려지자 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다시 철도원 총재, 학부대신, [[내부|내부대신]] 등을 역임했다. [[1904년]]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사람들을 모아 농광회사를 설립하고 '황무지 개척은 일본인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906년]]에 그동안의 공적으로 태극장을 서훈받았다. [[1907년]], 시종원경으로 있을 당시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의 퇴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하여 어전회의가 개회되자, [[질병]]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동년에 수학원장이었던 이도재가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된 후 칙임관 1등에 서임되었다. [[이완용]] 내각에 의해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자 [[박영효]], [[남정철]] 등과 [[평양]]에서 올라온 시위대 제2연대의 지원을 통해 [[7월 20일]], 고종의 양위식 날 [[이완용]]을 비롯한 고종의 양위를 결정한 관료들을 전부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됐고 결국 체포되었다. 이후 다시 시종원경과 칙임관 1등에 서임되었으나, [[조중응]]이 고종의 양위식에 이도재가 질병 등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할 것을 아뢰어 탄핵을 받았고, 1909년 9월 25일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A_A03_08A_12A_00030_2015_005_XML|타계하였다]]. 이에 [[순종(대한제국)|순종]]이 몹시 애통해하며 장례 물품을 지원해주었다. == 여담 == 현재 육군박물관에서 [[부장#s-2.1]] 이도재 예복을 보관 및 전시 중인데 국가등록문화재 제 553호로 1897~1907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제국]]의 예복이다. 이 예복은 운정 이도재가 입었던 것으로 대한제국의 예복이라는 상징적인 가치 뿐만이 아니라 보존 상태, 디자인, 색상 등 보존 상태가 뛰어나 보존 가치가 더욱 높다. [[전라남도지사|전라남도 관찰사]] 재직 중이던 1906년 6월 19일, 조정의 명령으로 [[전라북도]] [[순창군]]에 주둔한 [[최익현]]의 의병진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광역시|광주군]]에 주둔한 [[대한제국군 진위대]]를 파견한 바 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군대를 파견할 당시 순창군 경내에 주둔만 하고 의병과 교전을 일절 하지 말라고 칙령을 내렸고, 혹시라도 교전을 한다면 승리를 거둔다한들 [[참형]]에 처할 것이라고 엄하게 단속해두었기에 광주군에서 파견된 진위대는 최익현 의병진과 교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도재의 강직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http://db.history.go.kr/id/sa_001r_0050_0030_0040|매천야록 제5권 崔益鉉의 被執]] == 둘러보기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군부대신)]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내부대신)]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농상공부대신)]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법부대신)]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외부대신)]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학부대신)] ---- [include(틀:급진개화파)]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연안 이씨]][[분류:조선의 문관]][[분류:대한제국의 인물]][[분류:급진개화파]][[분류:1848년 출생]][[분류:1909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