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양구 (문서 편집) [[파일:B1D4DBCB-0462-4EAD-84DE-E158CFCCFEB0.jpg]] 李洋球 [[1916년]] [[10월 14일]] ~ [[1989년]] [[10월 18일]]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기업인, [[동양그룹]]과 [[오리온그룹]]의 창업주.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 호는 서남(瑞南). == 생애 == [youtube(6BiG3OuNZxY)] [[1916년]] [[10월 14일]], [[함경남도(이북5도위원회)|함경남도]] [[함흥시|함주군]] 삼평면 풍서리(현 [[함경남도]] [[함주군]] 신하리) 58번지의 소농가에서 [[부친]] 이교흠과 [[모친]] 김성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1922년에 [[부친]]이 2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해, 어린 시절에는 홀어머니, 형과 함께 함흥으로 이사하여 영신학교를 다녔다. 1931년 졸업 후 상급학교 진학 대신 '함흥물산'이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식료품 도매상에 무작정 취직했다. 사업수완이 뛰어났는지 1938년 식품도매상인 '대양공사'를 세워 준수히 운영했지만, 1941년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기업 강제 청산령으로 정리하고 말았다. 1942년 함흥식량영단에 근무하다가 1945년 8.15 광복 및 남북분단 후 1947년 단신 월남하여 서울에서 과자판매업을 시작, 동양식량공사를 설립하고 수입설탕·밀가루·제과용 원료판매로 전국적인 판매망을 구축하였다. [[6.25 전쟁]] 이전까지 수차례의 회사를 세우며, 떼돈을 벌어 부를 쌓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때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그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납치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고향]]인 [[함주군]]에 수십만평의 토지와 '''1억원'''[* 당시에는 엄청 큰돈이다. 지금 가격으로 친다면 약 '''1조원''']에 가까운 거금도 삼팔선과 [[한국전쟁]]으로 잃어 큰 충격을 받았다. 이양구는 이 일을 금방 잊고 1951년 [[경상남도]] [[부산]]에서 설탕, 소맥분을 수입 판매하는 삼양물산 공사를 설립해 재기에 성공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특수 경기와 생필품 부족이 그에게 재기의 기회를 준 것이다. 1952년 국제시장 화재로 재산이 전소되었으나 이후 사업이 번창하여 '설탕왕'이라는 별칭을 받았다.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설탕을 생산했던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훗날 조홍제의 차남인 [[조양래]]는 그의 회사 밑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1953년 환도하여 풍국제과판매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54년에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한국정당판매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제일제당 설탕을 독점판매하는 한편, 같은 해 삼양제당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54년 제일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56년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과 풍국제과[* 사실 이 회사는 일본인인 사이토가 세운 제과업체인데 해방 뒤 적산기업으로 분류되어 귀속재산이 되었고, 1952년에는 재단법인 승리공사와 제휴해 군납용 건빵을 만들었다.]의 배동환 3명의 공동 출자로 풍국제과를 인수해 동양제과공업주식회사[* [[오리온(기업)|오리온]]의 전신]로 재창립해 오늘날 오리온(옛 동양제과)의 기반을 다졌다. 이를 계기로 [[적산]]기업인 삼척시멘트주식회사[* 일제 시기에는 오노다시멘트 삼척공장이었다.]를 불하받아 [[시멘트]] 사업에 진출하여 이후 동양시멘트공업주식회사로 개칭하였다. 노후시설 교환 등을 통해 한때 시멘트 왕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기반이 제대로 된게 없어서 과자로 돈을 벌어도 적자가 터져 회사까지 위기에 몰릴 정도로 정말 고생이 심했다. 그나마 운이 좋게 건설붐이 불때까지 버텨서 대박을 내는데 성공했지만.] 1960년 동양산업개발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962년 한국경제인연합회를 창립하여 창립위원 및 이사로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한국양회공업협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을 맡고, 한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같은 해 한국 양회공판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66년 동양건설진흥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크리스찬아카데미 이사를 역임하였다. 1967년 동양제과주식회사·동양산업개발주식회사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동양종합공업주식회사와 동양상운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69년 동양도로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이이(조선)|율곡 이이]]의 동상을 사직공원에 건립해 기증하였다. 1970년 한국원자력위원회 부회장에 피임되고, 같은 해 동양내화연화주식회사도 설립하였다. 1971년 동양시멘트공업주식회사의 법정관리로 사장직을 사임했으나 같은 해 12월 법정관리 해제로 다시 회장에 취임하였고, 1972년 동양판매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1975년 동양산업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1976년 동양상선주식회사의 회장에 취임하였다. 1977년 동양종합공업주식회사 회장에 취임하였고, 동양광공주식회사와 동양상운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1985년 일국증권주식회사를 동양증권주식회사로 개명했다. [* 동양그룹 부도 과정에서 [[대만]]의 금융그룹 유안타로 매각 돼 유안타증권으로 또 한번 개명하게 된다.]1987년 동양경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저서로는 1969년 동양철학과 경영론을 담은 『문제와 사색』이 있으며, 1973년 세계여행의 견문과 감회, 세계관 등을 담은 『제헌(濟憲)의 세계』 등이 있다. 수상 경력으로 1966년 모범상공인으로 [[경제기획원]] 장관상과 [[5.16 민족상]]을 받았고, 1981년 제22회 3·1문화상과 1985년 성실납세유공자로 산업포장을 받았으며, 1987년 제14회 상공의 날에 유공상공인으로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83년에는 고혈압으로 인해 와병하며 사위 현재현과 담철곤에게 그룹 경영을 맡겼고, 1989년 10월 18일 73세에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동양그룹은 2016년에 박살났고, 과자쪽은 오리온으로 남아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 가족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한국의 기업 가문)] [[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1916년 출생]][[분류:1989년 사망]][[분류:전주 이씨]][[분류:함흥시 출신 인물]][[분류:실향민]][[분류:동양그룹]][[분류:오리온그룹]]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