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탈리아 파시즘 (문서 편집) [include(틀:파시즘)] [목차] [clearfix] == 개요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70120_FAS_mussolini.jpg.CROP.promo-xlarge2.jpg|width=100%]]}}}|| || 이탈리아의 [[국가 파시스트당|국가 파시스트당원]]들의 모습. 가운데가 바로 [[베니토 무솔리니]].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파스케스(세로).svg|width=100%]]}}}|| || 이탈리아 파시즘의 상징으로 사용된 [[파스케스]] || >'''Tutto nello Stato, niente al di fuori dello Stato, nulla contro lo Stato.'''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국가에 반항하는 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 파시즘의 교리(조반니 젠틸레) 이탈리아 파시즘(fascismo italiano)[* 영어로는 Italian fascism]는 [[미래주의]], [[사회주의]], 과거의 [[영광]], [[자본주의]] 그리고 [[협동조합주의]] 등에 입각하여 나타난 이탈리아 최초의 [[파시즘]]이며 '''고전적 파시즘'''(fascismo classico)[* 영어로는 classical fascism]이라고도 한다.[* 이탈리아 파시즘을 최초의 파시즘이라 애기하기도 하지만 이미 이전부터 [[원류 파시즘|다른 파시즘은 얼마든지 있었다]]. 소렐이 몸 담갔던 프랑스의 왕당파 단체인 악시옹 프랑세즈,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의 이름을 가져왔던 프루동서클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 역사 == 1914년 [[이탈리아 사회당(1892년)|이탈리아 사회당]]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여부를 놓고 당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노선에 반대하면서 갈등을 빚고 탈당한 [[민족주의]] 성향의 사회당원들은 [[베니토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파시스트 혁명행동이라는 정당을 창당하였다. 전직 이탈리아 사회당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파시즘을 창설하였기 때문에 조반니 젠틸레 등을 위시로 하는 [[국가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 심지어 이탈리아의 일부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특히 [[무솔리니]]는 [[막스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 소유'라는 책을 읽고 정말로 혁명적인 철학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에 빠져들었다. 실제로도 그는 [[에리코 말라테스타]]와 같은 이탈리아의 아나코 코뮌니스트들을 [[독재자]]나 [[전체주의|전체주의자]]라고 말할 정도였었다.] 등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던 이 이탈리아 파시즘은 당시 이탈리아에 널리 퍼졌던 [[미래주의]] 예술을 통한 젊음[* 사실상 미래주의에서 애기하는 젊음은 활력이다. 문제는 이 활력이 과거의 유산을 파괴하고 전쟁을 예찬하는 방향으로 가 버린 것이며 그 외에도 이탈리아 미래주의 예술은 파시즘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특히 무솔리니는 이 미래주의 예술을 자신의 선전에도 잘 써먹었다. 그의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예술(SISISISI라고 적혀 있는 파시즘 당사 등)들은 대부분 이 미래주의 기조에서 나왔으며 특히 미래주의의 창시자였던 마리네티부터가 이 파시즘에 기대를 크게 품기도 하였다.]의 맹신, 사회주의를 통한 [[협동조합주의]][* 이탈리아 파시즘은 가면 갈수록 소렐의 [[생디칼리슴]]에서 좀 더 국가의 영향력을 부여한 형태로 나아갔다. 소렐이 애기한 형태의 생디칼리슴은 아이러니하게도 [[팔랑헤]]당이 직계로 이어받았으며 노동자 자가관리 등을 내세웠다.], 국가의 적극적인 통제, [[군국주의]] 등을 들며 이탈리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탈리아인]]들의 우월함을 강조하고 [[로마 제국]] 시절의 영토 회복을 강조하면서 [[스파치오 비탈레]]를 내세웠다. 그 결과 [[1921년]]에는 이탈리아 의회에서 37석을 확보하였고 [[국가 파시스트당]]으로 발전하였다. [[1922년]], [[로마 진군]]을 통해 국가 파시스트당이 집권하면서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설립되었다. 집권한 국가 파시스트당은 [[일당제]]를 통해 다른 정당들을 하루 아침만에 일개 불법 정치 조직으로 전락시키고 1928년에는 파시즘 대평의회(Gran Consiglio del Fascismo)라는 정부 기구를 만들어 독재 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이 일 이후 파시즘은 기존 보수파 세력과 손을 잡기 위하여 기존 지지세력이던 [[사회주의]]자, [[조합주의]]자, [[미래주의]]자등을 모조리 숙청, 탄압하면서 성격이 변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반유대주의]]적인 정책이 대표적인데 단눈치오로 대표되는 초기 파시즘은 반인종주의적 성격의 민족주의를 주장하였다. 실제로도 마리네티 등의 미래주의자들도 이탈리아의 반유대주의법 제정 당시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36년에는 [[에티오피아 제국]]을 병합했고 1939년에는 [[알바니아 왕국]]을 [[보호령]]으로 만들어 본격적으로 팽창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후 [[이집트 왕국]], [[그리스 왕국]], [[튀니지]] 등을 노리면서 [[제2차 세계 대전]]에 뛰어들었다가 1943년 패전하였고 1945년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마저 무너져 이탈리아 파시즘의 시대는 끝나 버렸다. == 성격 == 이탈리아 파시즘은 원래는 [[인종주의]]나 [[반유대주의]]가 그다지 없었으며 심지어 [[파시스트당]]에는 [[유대인]] 간부도 있을 정도였다. 애초에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부터가 [[무솔리니]]의 롤모델인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인종적 [[단일민족국가]]가 아니었으며 북방 민족[* [[켈트족]], [[게르만족]] 등]과 남방 민족[* 대부분 [[라틴족]]이지만 [[중세]] 시대에는 [[북아프리카]]의 [[마그레브 아랍인|아랍인]]과 [[베르베르인]]도 유입되었다.]이 섞여 형성된 나라다. 그러나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티오피아 침공]]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경제제재를 당하면서 고립되자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하여 이탈리아에게 경제제재를 하지 않은 [[나치 독일]]에 접근하게 되고, [[추축국|나치 독일과의 동맹]]을 위해 인종차별법을 도입하였다. >독일의 [[나치즘]]을 모방한 것들 중에 가장 치욕적인 것은 [[1938년]] 11월에 도입된 인종차별법이었다.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의 [[유대인]]은 [[아리아인]]과의 결혼, 공공부문에의 취직, [[이탈리아/정당|정당]] 가입, 50[[헥타르]] 이상의 [[토지]] 소유를 금지당했다. 이것은 말 그대로 극단의 조치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에 그 어떤 인종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오랫동안 유대인 정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유대인은 대략 4만5천 명 정도로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학자]]와 [[사업가]]로서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이탈리아/사회|이탈리아 사회]]에 거의 완벽하게 동화되었다. 따라서 대부분이 [[이탈리아인]]들이 이 법에 분노를 금치 못했으며 [[가톨릭 교회|로마 가톨릭 교회]]도 이 법을 거부했다. >---- >크리스토퍼 듀건,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332p == 여담 == * [[나치즘]] 등 변형적인 형태의 파시즘이 아닌 정통 이탈리아 파시즘을 이념으로 내세운 정당은 [[산마리노]]의 [[산마리노 파시스트당]]이 있으며 이들은 이탈리아가 파시즘화되자 지리적 특성 때문에 영향을 받아 집권했다. [[오스트리아 파시즘]](오스트로 파시즘)도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다. [각주] [[분류:파시즘/분파]][[분류:이탈리아의 사상]][[분류:이탈리아의 역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