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목왕후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조선 왕비)] ---- ||<#bf14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인목왕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조선 왕대비)] ---- [include(틀:역대 조선 대왕대비)]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조선 선조의 계비[br]{{{+1 인목왕후 | 仁穆王后}}}'''}}}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min-height: 31px" {{{#!folding [ 존호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광해군조 왕대비[br]{{{+1 소성왕대비 | 昭聖王大妃}}}'''}}}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인조조 대왕대비[br]{{{+1 소성대왕대비 | 昭聖大王大妃}}}'''}}} || }}}}}}}}}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목릉 인목왕후릉.jpg|width=100%]]}}} || ||<-2> {{{#ffd400 {{{-2 목릉 전경}}} }}} || ||<|2> '''출생''' ||[[1584년]] [[12월 15일]]^^([[음력]] [[11월 14일]])^^ || ||[[조선]] [[한성부]] [[중림동|반송방 사저]][br](現 [[서울특별시]] [[중구(서울특별시)|중구]] [[중림동]] 일대) || ||<|2> '''사망''' ||[[1632년]] [[8월 13일]]^^([[음력]] [[6월 28일]])^^ (향년 47세) || ||[[한성부]] [[인경궁|인경궁 흠명전]][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일대) || || '''능묘''' ||[[목릉|혜릉]](惠陵) → [[목릉]](穆陵) || ||<|8> '''재위기간''' ||'''{{{#ffd400 조선 왕비}}}''' || ||[[1602년]] [[8월 29일]] ~ [[1608년]] [[3월 16일]] || ||'''{{{#ffd400 조선 왕대비}}}''' || ||[[1608년]] [[3월 17일]] ~ [[1618년]] [[2월 24일]] || ||'''{{{#ffd400 조선 왕대비 (복위)}}}''' || ||[[1623년]] [[4월 12일]] ~ [[1624년]] [[9월 30일]] || ||'''{{{#ffd400 조선 대왕대비}}}''' || ||[[1624년]] [[10월 18일]] ~ [[1632년]] [[8월 13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연안 김씨]] || || '''부모''' ||부친 연흥부원군 [[김제남]] (延興府院君 金悌男, {{{-3 1562 ~ 1613}}}) 모친 광산부부인 [[광주 노씨]][* [[모주]]의 유래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光山府夫人 光州 盧氏, {{{-3 1557 ~ 1637}}}) || || '''형제자매''' ||{{{#!folding 3남 2녀 중 차녀 [ 펼치기 · 접기 ] 오빠 - 김내(金琜, {{{-3 1576 ~ 1613}}}) 언니 - [[청송 심씨|심정세]](沈挺世)의 처 김씨({{{-3 1581 ~ 1604}}}) 남동생 - 김규(金珪, {{{-3 1596 ~ 1613}}}) 남동생 - 김선(金瑄, {{{-3 1599 ~ 1614}}}) }}} || || '''배우자''' ||[[선조(조선)|선조]] || || '''자녀''' ||{{{#!folding 슬하 1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정명공주]](貞明公主, {{{-3 1603 ~ 1685}}}) {{{#gray 차녀 - 공주(1604 ~ 1604)}}}[* 사산(死産).] 아들 - [[영창대군]](永昌大君, {{{-3 1606 ~ 1614}}}) }}} || || '''전호''' ||효사전(孝思殿)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 '''존호''' ||'''소성'''정의명렬('''昭聖'''貞懿明烈) || || '''휘호''' ||광숙장정정숙(光淑莊定正肅) || || '''시호''' ||'''인목왕후(仁穆王后)'''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인목왕후 어필 칠언시 2.jpg|width=100%]]}}} || || '''{{{#ffd400 보물 제1627호로 지정된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 인목왕후는 [[서예]]에 조예가 깊었으며, 딸 [[정명공주]]도 상당한 명필이었다고 전한다.]}}}'''[*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 소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14대 [[조선/왕사|국왕]] [[선조(조선)|선조]]의 계비이자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의 어머니. 연흥부원군 [[김제남]][* [[중종(조선)|중종]] 대 [[영의정]]을 지낸 [[김전]]의 증손자이며, 권신 [[김안로]]의 종손이다.]과 광산부부인 [[광주 노씨]]의 차녀이다.[* 인목왕후의 언니는 심정세에게 시집가는데, 심정세는 [[명종(조선)|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아버지인 심강(청릉부원군)의 친손자이다. [[인순왕후]]와 인목왕후는 서로를 본 적이 없지만, 법적으로는 (조카)며느리이며 친가로도 연결이 된다.(친가 쪽으로는 직접적인 호칭은 없겠지만 굳이 따진다면 사돈? 어차피 직접 만난 적이 없었기에 호칭 문제는 별개다. 인척 관계라는 것에 의의가 있다.)] [[광해군]]과 [[인조]] 때까지 생존해서인지 흔히 '인목대비'라 불리는 경우가 많은데,[* 심지어 [[미래엔]] 역사 교과서나 [[역사저널 그날]] 같은 전문 프로그램에서도 실수를 했다.] 실제 대비로서의 존호는 '소성대비(昭聖大妃)'였다.[* [[문정왕후]]도 대비 존호는 '성렬대비(聖烈大妃)'지만 '문정대비'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인목왕후나 소성대비라 불러야 맞는다. == 생애 == === [[왕비|계비]] 간택 === 일단 법적 항렬상 [[광해군]]의 [[계모]]이긴 한데, 나이가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렸다.[* 심지어 선조의 서장녀 정신옹주보다 1살 어리고 서차녀 정혜옹주와 동갑이다. 여담으로 인목왕후의 첫째 남동생이 의붓딸 정신옹주의 장녀 서미생과 혼인하였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될 당시의 나이는 19세, 남편 [[선조(조선)|선조]]는 51세, 친정아버지 [[김제남]]은 41세였다. 보통 왕비 간택의 대상이 되는 나이는 13세~16세[* 당시의 [[세는나이]] 기준]였으며, 일반적인 반가 규수도 17~18세에 미혼인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척 늦은 나이였다. 그러나 어차피 [[선조(조선)|선조]]가 재혼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인]]이었던지라, 인목왕후의 나이가 많은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선조는 이미 50살이 넘은 나이였고, 첫 왕비 [[의인왕후]] 박씨는 [[선조(조선)|선조]]의 [[조선/왕사|후사]]를 낳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그래서 '''적자(嫡子)'''를 보려면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바로 [[임신]]할 수 있는 나이의 처녀[* 당시에는 소녀들의 발육이 그리 빠르지 않아, 일반적인 [[왕비]] 간택 나이에 간택된 왕비들은 아직 [[초경]]도 시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를 [[왕비]]감으로 간택했다는 견해도 있다. 인목왕후는 혼인한 지 1년이 되기도 전에 [[임신]]하여 [[1603년]](선조 36년) [[6월 27일]] [[정명공주]](貞明公主), [[1604년]](선조 37년) [[11월 24일]] 둘째 왕녀(사산), [[1606년]](선조 39년) [[3월 6일]] 적통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출산했으니, 기대에 부응한 셈이다. [[선조(조선)|선조]]는 첫 왕비인 [[의인왕후]]가 [[불임]]이었던 터라 후사를 보기 위해 [[후궁]]을 여럿 들이며 후궁에게서만 13남 10녀를 두는 왕성한 [[정력#s-3]]을 자랑했으며,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대 국난을 겪자 위급시에 대응하기 위해 스스로 체력을 단련하기도 했다. [[선조(조선)|선조]]가 나이 어린 인목왕후에게 새장가를 들고 1년 뒤의 [[선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603017_001|기사]]에 따르면, 그는 인목왕후와 [[성관계|재미]]를 보느라 [[정력]]에 좋은 탕약을 매일 지어다 먹고 경연도 대충 나갔다. 사관은 이를 비판하면서, "[[선조(조선)|왕]]이 어린 왕비와 노느라 체력적으로 힘들어 병이 나고, [[왕비|국모]]의 자리가 비었다면 [[후궁]] 중의 한 명을 [[왕비]]로 올리면 되는데, 왜 굳이 새로 [[왕비]]를 간택하느냐"면서 줄기차게 비판하고 있다. '군신들을 협박하였다'느니 '위망의 조짐이 한둘이 아니다'라느니 등의 말을 하면서 꽤나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지 고작 2~3년 남짓한 시기에 지나지 않았다. 전후 피폐해진 국토를 복구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왕은 "외롭다"고 징징댄 끝에 나이 어린 여자와 재혼이나 하고, 그러면서 "몸이 허하다"느니 "피곤하다"느니 하는 소리나 계속 늘어놓고 있으니, 사관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편 [[선조(조선)|선조]]와 인목왕후의 가례 당일 마른하늘에 폭우가 갑자기 쏟아져, 사람들이 새 왕비의 [[계축옥사|불행]]을 예측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가례를 딱 치르고 나니 날씨가 청명히 개어 그런 불안감은 단번에 사라졌다. === 왕비 시절 === [[선조(조선)|선조]]의 재혼은 당시에도 무리수라고 생각하는 의견이 많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기준으로는 [[왕비]]가 사망할 경우 새 왕비를 간택하기보다는, 기존의 [[후궁]]들 중에서 한 명을 [[왕비]]로 승격시키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사|왕]]이 재혼하는 게 특별한 게 없는 일이 된 것은 [[후궁]]을 [[왕비]]로 삼을 수 없게 된 [[숙종(조선)|숙종]] 이후의 일이고, 인목왕후 이전의 계비들[* [[현덕왕후]] 권씨, [[안순왕후]] 한씨, [[폐비 윤씨]], [[정현왕후]] 윤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은 [[문정왕후]]만 빼고 모두 [[후궁]] 출신에서 승격한 케이스다. [[장경왕후]]가 사망한 당시에는 [[후궁]]들이 모두 [[인종(조선)|원자]]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을 두고 있던 터라, [[후궁]]을 [[왕비]]로 올릴 경우 원자가 더 이상 적장자가 아니게 되어 정통성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http://sillok.history.go.kr/id/kka_11007026_001#footnote_1|#]], [[인종(조선)|원자]]를 보호하기 위해 간택령을 내려 [[문정왕후|계비]]를 간택한 것이다.[* 원래 [[중종(조선)|중종]]도 새로 [[왕비]]를 간택하기보다는, [[단경왕후]] 신씨를 복위시키거나 아니면 [[경빈 박씨(중종)|경빈 박씨]]를 [[왕비]]로 올리기를 원했다고 한다.] 물론 [[후궁]]이 없었다면 [[왕비]]를 새로 간택해서 뽑아야 했겠지만, 당시 [[선조(조선)|선조]]는 명문가 출신 간택후궁만 2명([[정빈 홍씨]], [[정빈 민씨]])이나 있었다. 그런데도 새로 간택을 한 [[선조(조선)|선조]]의 사례가 오히려 이례적인 것이다[* 다만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세자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가 [[후궁]]인 상태로 죽었는데, [[정빈 홍씨]]나 [[정빈 민씨]]에게도 아들이 있어 이 [[후궁]]들을 [[왕비]]로 간택하면 역시 [[장경왕후]] 때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2왕자였고(1왕자인 임해군은 개망나니로 유명해서 이미 임진왜란전부터 왕세자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간택후궁의 아들들이자 이복동생들과는 대체로 광해군이 10살 이상이나 더 많았고 인빈 김씨를 제외하고는 다른 후궁들은 명문가 출신이어도 조용히 살던 편이라 대신들도 후궁에서 왕비를 뽑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않았다] 인목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은 [[붕당|유생들이 자기들끼리 무리짓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잘 어울리지 않았던 무(無) 당파적 인물인데다, [[연안 김씨]] 가문 자체도 권신 [[김안로]]가 몰락하면서 완전히 기울어 있어 지나치게 세도를 부릴 위험이 적었다. 또한 [[김제남]]의 사돈 심엄[* 심인겸([[인순왕후]]의 친동생이자 동서분당의 시초인 심의겸의 형)의 아들, 심엄의 아들 심정세의 부인이 [[김제남]]의 장녀다.]이 [[정원군]]의 [[동서#s-2|동서]][* [[정원군]]의 부인인 [[인헌왕후|연주부부인 구씨]]와 심엄의 부인이 자매다.]였고 [[광해군]]의 처남 류희발과 인척[* 류희발의 부인이 심엄의 고모다. 이렇게 되면 [[광해군]]과 [[인조]] 역시 실제로는 숙질간이었으며, [[광해군]]의 처가와 [[인조]]의 외가 쪽이 서로 엮여있었단 의미다.]이라, 기존 [[조선/왕실|왕실]] 구성원들과도 큰 충돌 없이 잘 섞일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듯하다. 전체적으로 특별할 것도 없는 [[왕비]]였다. 다만 어린 나이에 [[조선|나라]]에서 [[왕비|가장 높은 여인의 지위]]에 오른데다, [[연안 김씨|친정]]이 쇠락한 집안이다 보니 제대로 된 처세나 정치력을 학습할 여건도 되지 못했다. 때문에 세상물정을 너무 몰라서 처세에 약했다는 점은 있었다. [[선조(조선)|선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인빈 김씨]]는 처세술에 능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인빈 김씨의 차남 [[신성군]]이 유력한 [[왕세자|세자]] 후보였고, [[인빈 김씨|인빈]]은 [[신성군]]을 [[왕세자|세자]]로 책봉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녀는 [[신성군]]을 무반 명가인 [[평산 신씨]]의 일원이자 [[조선]] 최고의 맹장으로 이름 높았던 [[신립]]의 딸과 혼인시켰다. 또한 3남 [[정원군]] 역시 [[서인]] 명문가이자 평산 신씨와 쌍벽을 이룬 무반 명가인 [[능성 구씨]] 집안의 [[인헌왕후|딸]]과 혼인시켜 배경을 든든히 했다. 이외에도 서인 [[정철]]을 쳐내려는 북인 [[이산해]]와 연합하는 등, [[인빈 김씨|인빈]]은 자신의 아들들을 차기 [[조선/왕사|왕]]으로 만들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결국 아들 [[신성군]]이 [[임진왜란]] 도중 피난길에 병사하고 [[광해군]]이 [[왕세자|세자]]로 임시 책봉된 후로, [[인빈 김씨]]는 재빨리 [[광해군]]의 연줄로 갈아탔다. [[임진왜란]] 이후 [[인빈 김씨|인빈]]은 자신의 외조카를 광해군의 [[후궁]]으로 들였고, [[선조(조선)|선조]]와의 사이에서 [[광해군]] 편을 많이 들어주는 등, [[광해군]]과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그래서 의심 많은 [[광해군]]조차 "내가 지금 자리에 있게 된 데는 [[인빈 김씨|서모]](庶母)의 공이 컸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로 사이가 원만해졌다. 그 덕분인지 [[인빈 김씨|인빈]]은 [[광해군]] 즉위 후 괜찮은 대접을 받았고, 그녀의 자손들도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을 제외하고는 옥사에 휘말리지 않았다.[* 다만 [[정원군]]은 그 일로 상심해 [[화병]](울화증)이 나서 죽었다.] 반면 인목왕후는 처세술이 모자랐다. 때문에 [[영창대군]]을 낳자마자 [[선조(조선)|선조]]에게 "[[영창대군|왕자]]를 세자(世子)로 부를 것인지, 아니면 대군(大君)으로 부를 것인지"를 물어보는 경솔한 짓을 했다. 이후 [[선조(조선)|선조]]에게 부탁해서 무려 400여 명에 이르는 [[궁녀]]들을 자신의 처소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로 만들었는데, 이 궁녀들 중에는 원래 [[광해군]] 처소에 있던 궁녀가 100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영창대군]]을 마치 [[왕세자|세자]]처럼 차려입히는 실책도 저질렀다. '옷 때문에 유난을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근대 신분제 사회,[* 맥베스에서도 맥베스가 갑자기 코더의 영주로 봉해지자 전령에게 왜 코더의 영주가 살아있는데 자신이 코더의 영주가 되었냐는 뜻으로 "어째서 나에게 빌린 예복을 입히려 하는가?(Why do you dress me In borrowed robes?)"라고 의문을 표한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의복은 당사자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조선]] 왕실도 과거 [[태종(조선)|태종]]이 양위할 때 [[세종(조선)|세종]]에게 옥새와 같이 [[곤룡포]]를 입혀서 보내자 (사전협의가 추측되기는 하지만) 기를 쓰고 반대하던 신하들이 세종의 즉위에 즉시 군소리 없이 따랐다. 또한 훗날 [[삼전도의 굴욕]] 때 항복과정에서 [[홍타이지]]가 처음으로 한 일이 [[명나라]]가 준 의복을 폐기하고 [[인조]]에게 [[청나라]] 의복을 입히게 한 것이다. 나중에 인조도 강빈이 왕비의 의복을 미리 지어 입었으니 반역을 꾀한 것으로 모함을 해서 죽였다. 그리고 옷차림의 문제는 아니나 [[현종(조선)|현종]] 대의 2번의 예송도 실제로 [[효종]]의 왕위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문제였고 이것이 상복 입는 기간 문제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래저래 옷은 중요한 문제였던 것.] 즉, 영창대군을 세자처럼 입힌 건 '세자를 교체시키려 한다'는 의도로 보여 처벌받아도 할 말이 없는 인목왕후의 명백한 실책이었다. 게다가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함께 치부에 힘을 써서 재물을 모으는 데 열중하여 눈총을 사기도 했다. 이를 두고 "[[왕세자|세자]] 교체에 욕심을 두고 한 짓"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후술할 대비 시절에 보여준 행태를 보면 그냥 눈치가 없고 처세술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인조반정]] 이후 [[정명공주]]와 결혼하게 된 [[부마]] [[홍주원]]에게 왕만이 탈 수 있는 어구마를 타게 하여 논란이 되었으나 [[인조]]가 조용히 넘어갔다. 또한 중궁전 소속 [[궁녀|나인]]들이 [[광해군]]의 동궁전 소속 나인들을 핍박하거나 [[광해군]] 앞에서 방자하게 구는데도, 그들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며 내명부 수장으로서 최소한의 측근 관리마저 못하는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인목왕후의 나인들은 입궁한 지 얼마 안 된 인목왕후가 궁 내부 사정을 잘 모른다는 것을 이용하여 온갖 행패를 부렸다. 정작 이 나인들은 [[광해군]]이 즉위한 뒤 [[영창대군]]이 역모에 휩싸이자 너도 나도 있지도 않은 거짓 고변을 하면서, [[광해군]]의 불편한 심기와 [[편집증]]적인 성격을 건드려 의심병을 폭발시키면서 인목왕후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 === 대비 시절 === [[선조(조선)|선조]] [[죽음|승하]] 시점에서도 나이가 너무 어린 탓에(20대 중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1608년]](선조 41년) 10월에 [[선조(조선)|선조]]가 쓰러졌을 때 숨이 가빠지자 [[광해군|세자]]에게 [[양위|전위]](傳位)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조정 내에서 유일하게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탁소북 영수 [[유영경]]이 천부당 만부당하다며 반대하자, 당황한 인목왕후는 [[유영경]]과는 다른 처신을 하였다. >[[선조(조선)|성상]](聖上)께서 병중에 계신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심기 불편하심이 전보다 배나 더하오. 지금 [[선조(조선)|성상]]의 전교(傳敎)를 따르지 않으면 환후(患後)가 더욱 위중(危重)해질까 염려되니, 대신들은 전섭(傳攝)의 명을 따르도록 하오. 인목왕후는 바로 위에 서술된 내용의 교지를 [[언문]]으로 적어내면서까지 [[광해군]]의 지위를 확실히 인정했고, 끝내 [[선조(조선)|선조]]가 [[죽음|승하]]하자 [[광해군]]의 즉위를 바로 다음날로 서두르기까지 했다. 애초에 이미 [[선조(조선)|선조]]까지 사망한 상황에서 아무리 왕대비라지만 지지세력도 없고, 나이도 어린 인목왕후가 모든 당파의 지지를 얻는 [[광해군]]을 이길 방도는 없었다. 대비가 된 이후에도 [[광해군]]과는 껄끄러운 동행이 계속되었다. [[1611년]](광해군 3년) 때 [[영창대군|왕자 이의]]가 마침내 '''영창대군'''으로 봉해졌다.[* 비록 '대군'이 되었지만, 정작 [[선조(조선)|선조]] 살아생전에 대군으로 책봉받지 못했다. [[조선/왕실|조선 왕실]]에서 [[왕자]]들은 보통 10살 전후로 대군/군으로 책봉받는데, [[영창대군]]은 고작 3살 때 아버지 [[선조(조선)|선조]]가 [[죽음|승하]]하면서 아버지에게 직접 책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영창대군이라는 봉호에 대해 "'영창'은 전국옥새에 들어간 글자이니 고치자"고 주장했으나, 당시 대비였던 인목왕후는 "선왕의 뜻"이라고 결사반대하면서 영창대군이라는 봉호를 고집했다. 그외에도 앞서 상술했듯 영창대군을 대군의 법도보다 과하게 (마치 세자처럼) 입히고 행동시켰으며, "인목왕후가 모은 재산이 국고에 모인 것보다 더 많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재산에 대한 부정축재에 열을 올렸다. [[김제남]]을 비롯한 인목왕후의 [[연안 김씨|친정 식구]]들이 재산축재에 심하게 열을 올린 것은 [[임해군]]이 살해당한 이후부터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유영경]]을 비롯한 탁소북이 즉각 숙청되면서 인목왕후를 지지해 줄 세력이 전무해졌고, 인목왕후의 친정아버지인 [[김제남]]도 무당파인데다 정치적 능력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치부에 열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친형인 [[임해군]]도 죽인 [[광해군]]이 정비의 자식인 [[영창대군|이복동생]]마저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후일을 대비하고자 한 행위였지만, 당연히 [[계축옥사]]가 터지면서 [[역적]]으로 몰린 인목왕후의 [[연안 김씨|친정]]은 풍비박산나고 재산도 전부 몰수당했다. ==== '''[[계축옥사]]''' ==== [youtube(xnsPDiliX0c)]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20대 중반의 나이로 [[조선/왕실|왕실]]의 당대 큰어른인 왕대비가 됐지만[* 이때 받은 대비로서의 존호는 소성대비(昭聖大妃). 대중이나 미디어에서는 '인목대비'라는 칭호가 보편적이지만, 그 '''인목(仁穆)'''은 사후에 [[왕비]]로서 받은 [[시호]]다.] 나이가 어리고 [[연안 김씨|친정]]의 세도 약해서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왕사|조선 국왕]] 중에서 최다 [[친국|친국(고문)]] 기록을 가진 [[광해군]]의 [[편집증|편집증적인 의심병]]. 결국 광해군이 즉위한지 5년 째인 [[1613년]]에 광해군의 지지세력인 [[대북]]이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해 [[계축옥사]]를 일으키면서 인목왕후의 삶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진다. 조작된 옥사에 크게 휘말려 친정아버지 [[김제남]]은 이유도 따지지도 못한 채로 [[사약|사사]]당하고 형제들도 처형당해 친정도 멸문당했으며, 자신의 아들 [[영창대군]]마저 역적의 수괴로 몰려 폐서인이 되어 [[유배]]에 처해지는 것을 눈뜨고 피눈물을 흘리며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김제남]]이 치부를 일삼은 부패한 사람인 것은 사실인데, 이 정도로 죽어야 한다면 조선왕조 500년 간 능지처참 당해야 할 왕실 구성원이 3자리 수는 가볍게 넘어갔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 부패의 끝판왕은 바로 [[광해군]]과 그 대북파 측근들이었다. 광해군 및 측근세력은 '''방납(傍納) 커넥션'''과 연계되어 일선 관리들이 기준치의 최대 100배에 달하는 방납가를 매기는 것을 비호했다.] 끝내 영창대군이 유배를 떠난 지 단 1년만에 증살[* 방에서 뜨거운 열기에 쪄죽음]로 죽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전해 듣는다. 또한 자기 자신도 폐모론에 말려들었다. 이 과정에서 폐모 교지는 내려지지 않았지만 인목왕후는 대비 자리에서 쫓겨나 딸 [[정명공주]]와 함께 [[경운궁 석어당|서궁]]에 5년 동안 강제로 '''유폐(幽閉)'''되었다.[* 정확히는 인목왕후를 경운궁([[덕수궁]])으로 보내 유폐시킨 것이 아니라, 재건된 [[창덕궁]]으로 왕실이 이어한 것이다. 이 때 함께 머물던 인목왕후만 경운궁에 남기고, [[광해군]] 일가는 [[창덕궁]]으로 환궁해 돌아갔다. 이후 [[덕수궁|경운궁]]을 서궁으로 격하시키고 감시병 몇 명 정도만 둔 채 방치하였다.] ==== 폐모론 ==== 인목왕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영창대군|아들]]과 친정 일가를 죽인 [[광해군]]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이 증오와 분노가 어느 정도였냐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후 반정 수뇌부들에게 "이혼(광해군의 이름) [[광해군|부]][[폐세자 이지|자]](父子)의 머리를 가져오라. 그들의 살점을 뜯은 뒤에야 비로소 전교(傳敎)를 내리겠다."고 일갈할 정도였다.] 비록 인목왕후가 처신에 실수는 했지만 [[광해군]]을 밀어내려는 망상을 품진 않았고,[* 광해군 저주 건은 [[계축옥사]] 당시 고명 대신으로 끌려온 박동량이 살기 위해 한 증언이다. 이후 대비전의 상궁 나인들을 고문해 [[목릉]], 즉 [[선조(조선)|선조]]의 능에 저주의 뜻을 담은 물건을 묻었다는 증언을 받아냈으나, 사실 확인을 위해 [[목릉]]을 파헤쳤을 때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했다. 정황상 [[영창대군]]에 이어 인목왕후까지 끝장내려는 [[북인]] [[이이첨]]세력의 모함일 가능성이 높다.] 대놓고 부화뇌동하며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유영경]]과 달리 [[광해군]]의 [[조선/왕사|왕위 계승]]을 지원해 다른 뜻이 없음을 밝혔다. 그런데 [[광해군]]은 본인의 정통성이 탄탄해[* [[왕세자|세자]]로 16년, 게다가 그 사이에는 [[임진왜란|전]][[정유재란|시]]에 [[분조]](分朝)를 성공적으로 이끈 경력이 나름 포함되어 있었다. 이건 [[문종(조선)|문종]]의 [[대리청정|대리 청정]] 못지않은 플러스 요소다.] 별 위험도 되지 못하는 [[영창대군]]을 경계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과 오빠, 남동생들,[*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는데, 가장 어린 남동생 하나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아들 [[영창대군]]을 모두 죽였으며, 겉으로는 대북의 폐모론에 반대하는 척하면서 대비를 폐할 생각이 없는 척 하면서 반대하는 이들은 [[귀양]] 보냈고, 강경책을 편 이들은 벌하지 않았고 폐모론을 주장하는 대북에 계속 힘을 실어주었다. 예를 들어 [[광해군]]이 인목왕후 폐비에 대해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참가한 인원이 전현직 관리 970명, 종실 170명과 도성에 사는 많은 백성들이었는데, 실록에조차 [[이이첨]]이 자파 세력을 동원해 여론 조작을 했다는 것이 명백히 기술되어 있다. 또 폐모론에 반대한 [[서인]], [[남인]] 원로 대신을 [[광해군]]이 다 쫓아내 대북 세력만 남은 상황에서 여론조사를 했으니 당연히 찬성이 높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홍길동전]] 저자 '''[[허균]]'''이 인목왕후를 무척 [[증오]]해서 폐모론에 적극 앞장섰으며, 심지어 '''[[암살]] 기도'''까지 획책했던 것도 유명한 일화. 더욱이 [[허균]]은 "[[영창대군]]은 [[선조(조선)|선조]]와 인목왕후의 아들이 아니라, 민가의 아이를 주워다 왕자로 꾸며낸 것"이라는 과감한 허위 주장도 폈다. 이는 그의 교유 관계 때문이었는데, [[계축옥사]]의 시작이 된 칠서의 옥의 주인공인 박응서, 서양갑 등 [[강변칠우]] 7명과 친밀한 사이였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목왕후를 밟아야 했다. ==== [[경운궁|서궁]] 유폐 ==== 이때 인목왕후의 딸이자 [[선조(조선)|선조]]의 유일한 적녀(嫡女)인 [[정명공주]]가 함께 유폐되었다. [[정명공주]]가 [[옹주]]로 낮춰졌다는 기록은 없다. [[정명공주]] 참조. 유폐되던 당시의 정명공주는 16세로 이미 [[결혼|혼인]]하고도 남을 나이였으나, [[광해군]]이 혼인을 허가하지 않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야 겨우 늦게나마 [[결혼|혼인]]할 수 있었다. 인목왕후와 [[정명공주]] 모녀는 [[경운궁|서궁]]에서의 유폐 생활을 묘사한 [[계축일기]]에 의하면, 의식주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할 정도로 비참하기 그지없게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일화는 [[광해군]]의 악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과장했다는 의견이 주류이다. 다만 인목왕후와 [[정명공주]]의 유폐 생활이 열악했다는 건 엄연히 사실로 보인다. 계축일기에 의하면 [[까마귀]]가 물어다 준 박씨를 먹거나 추운 겨울에 우연히 들어온 면화 씨로 옷을 지었다는데, 이런 게 실제로 가능했을리는 없고 그만큼 생필품과 생활비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살았다는 의미다. 인목왕후는 [[계축옥사|아들과 친정 가족까지 모두 몰살당한]] 이후 소복만[* 간혹 인목왕후가 나오는 사극이나 시대물에서 소복이 아닌 왕비의 적의를 그대로 입고 있는 장면이 그대로 나오는데 고증오류다. [[계축옥사]] 이후로 인목왕후는 자의적으로 소복만 입었고, [[인조반정]] 당시에도 소복차림으로 [[폐위]]교서를 내렸다.] 입고 소식을 하였으며, 폐비 절목에 따라 식사를 위해 궁 안으로 보내지는 어육과 쌀, 물도 모두 거부했다. 인목왕후를 따르던 [[궁녀]] 연이가 외부와 연락을 취했다는 혐의로 모함을 받아 형벌을 받는 등, 인목왕후의 지밀 궁녀나 상궁들을 향한 위협도 서슴치않게 일어났다. 아예 [[광해군]]이 직접 인목왕후를 감시할 궁인들을 선발해 [[경운궁|서궁]]에 보낼 정도로 당시의 정국은 매우 살벌했다. 정작 그렇게 [[광해군]]의 사주로 선발된 [[궁녀|궁인]]들은 박절[* 마음이 답답하고 고생스러움.]한 모습의 인목왕후를 보고 그녀를 성심껏 받들었다고 한다. 급기야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허균]]이 [[광해군]]의 명이라며, 자객을 동원해 [[경운궁|서궁]]을 습격하면서 [[암살]]당할뻔한 위협까지 겪었다. 다만 [[영의정]] [[박승종]]이 식솔들까지 동원해서 [[경운궁|서궁]]을 지키고,[* 이 때문에 인목왕후는 [[인조반정]] 당시 삼창의 처벌을 주장할 때 [[박승종]]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승종]]은 [[인조반정]] 이후 아들과 음독 [[자살]]했다.] 서궁의 숙직을 돌던 [[사헌부]]에서도 인목왕후를 보호했기 때문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아무리 [[폐위]]되었다고 해도 일국의 대비가 [[암살]]당할 뻔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목왕후는 목숨조차 장담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있었다. 또한 [[광해군]]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진사들에게 [[경운궁|서궁]]에 진배를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음에도 진사들이 끝까지 진배를 한 걸 보면, 비록 인목왕후는 공식적으로 폐비로 격하되어 [[경운궁|서궁]]에 유폐된 상태였지만 세간에서는 여전히 대비로 대우받았던 것으로 사료된다.[* [[명나라]]에서도 인목왕후의 [[폐위]]를 허락하지 않았다.][* 출처: 조선시대 당쟁사 1권 이성무(저)] ==== '''[[인조반정]]''' ==== [[선조(조선)|선조]]와 [[인빈 김씨]]의 5남 [[정원군]]의 아들인 [[인조|능양군]]이 반정군 [[서인]]과 힘을 규합하고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키며 폐쇄되었던 [[경운궁|서궁]]의 문이 열렸다. 사실 처음에는 반정군을 의심하여 "[[정명공주|공주]][* [[당시 21살이었으나 혼인하지 못하고 인목왕후와 같이 [[경운궁|서궁]]에 유폐당해 있었다. 인목왕후는 [[광해군]]이 [[정명공주]]마저 죽일까봐 [[광해군]]에게 [[정명공주]]가 죽었다고 알렸다.]는 죽었다."며 반정군을 믿지 않았지만 [[인조|능양군]]이 오자 그제야 믿었다. '''폐모살제'''로 [[북인]]을 제외한 [[서인]], [[남인]], 지방 [[사림]]의 지지를 상실한 [[광해군]]은 결국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으로 강제로 [[조선/왕사|왕위]]에서 끌려나왔고 인목왕후가 유폐된 [[덕수궁|경운궁 석어당]] 앞에 [[무릎]]꿇리고 인목왕후의 [[폐위]] 교서를 받고 폐위되었다. >'''왕대비의 교서''' >---- >내 비록 부덕하나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아 [[선조(조선)|선왕]]의 배우자가 된 사람으로 >일국의 [[왕비|국모]]가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선조(조선)|선묘]](宣廟)의 [[광해군|아들이 된 자]]는 나를 [[어머니|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해군|광해]]는 참소(讒訴)하는 [[이이첨|간]][[정인홍|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김제남|부]][[광주 노씨|모]]를 형살하고 나의 [[연안 김씨|종족]]을 [[고인|어육]]으로 만들고 >품안의 [[영창대군|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困辱)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 없었다. >이는 대개 [[선조(조선)|선왕]]에게 품은 감정을 펴는 것이라 [[미망인]]에게야 그 무엇인들 하지 못하랴. >심지어는 [[임해군|형]]을 해치고 [[영창대군|아우]]를 죽이며 여러 [[능풍군|조]][[능창군|카]]를 도륙하고 [[인빈 김씨|서모]]를 쳐 죽였고, >여러 차례 [[계축옥사|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 >그리고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2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 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으며, >[[선조(조선)|선왕조]]의 [[이덕형|구]][[이항복|신]][[이원익|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쫓고 오직 악행을 조장하며 >아첨하는 [[궁녀|인아]](姻婭)와 [[내시|부시]](婦寺)들만을 높이고 신임하였다. >인사는 뇌물만으로 이루어져서 혼암한 자들이 조정에 차있고, >돈을 실어날라 벼슬을 사고 파는 것이 마치 장사꾼 같았다. >부역이 번다하고 가렴 주구는 한이 없어 >백성들은 그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도탄에서 울부짖으므로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은 마치 가느다란 실끈과 같았다. >(중략) >[[광해군|광해]]는 천리를 거역하고 인륜을 무너뜨려 >위로는 [[종묘]] [[사직]]에 득죄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었다. >죄악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어떻게 [[조선|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에게 군림하면서 >[[조선/왕사|조종조]]의 천위(天位)를 누리고 [[종묘]] [[사직]]의 신령을 받들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폐위]]하고 적당한 데 살게 한다. [[광해군]]이 폐위되자 인목왕후는 [[서인]]의 추대로 [[대왕대비]]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 때 [[광해군]]의 처분에 대한 교지를 보면 광해군에 대한 인목왕후의 적개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인조실록]]> [[1623년]](인조 즉위년) 4월 11일 경오 3번째 기사의 기록을 보면 "[[광해군]|폐인]]은 천지 사이에서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짓을 하여 [[하늘]]에 죄를 진 자이니 대신과 조정은 '폐주(廢主)'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명령했다. [[광해군]]을 폐주로조차도 취급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인목왕후는 [[인조]]를 직접 만나보고는 "그 전에 이혼 [[광해군|부]][[폐세자 이지|자]]의 [[머리]]를 가져오세요. 그 머리를 씹겠습니다. 그 살점을 씹어야 전교를 내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서인]]은 [[인조반정|쿠데타]]에 성공한 뒤 [[광해군]]을 한동안 [[창덕궁|궁궐]]에 가두고 남겼으나 인목왕후는 처음에는 "[[광해군]]을 [[사약|사사]]시켜야 한다"고 윽박질렀고 이후 "2번 절하며 청한다"고 할 정도로 간절하게 먼 곳으로 [[광해군]]을 [[유배]]보낼 것을 요청했다. <[[인조실록]]> 1페이지와 이를 참고로 기록한 <[[승정원일기]]>에서는 인목왕후의 발언이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머리를 가져오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가 친히 그들 부자의 목을 베겠다"고 더욱 과격하게 쓰여 있다. >不共戴天之讎, 忍之已久, '''願親斫渠父子之頭, 以祭亡靈'''。幽囚十餘年, 至今不死者, 蓋待今日耳, 願得甘心焉。 >“[[불구대천|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오. 참을 만큼 오래 참았으니, '''내가 친히 [[광해군|그]][[폐세자 이지|들]] 부자의 목을 잘라 하늘에 계신 [[선조(조선)|영령]](英靈)께 제사하고 싶소'''. 10여 년을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려서였소. 통쾌히 원수를 갚고 싶소.” >-<[[인조실록]]> 인조 즉위년(1623, 명 천계(天啓)), 3월 13일 계해 1번째기사 >-<[[승정원일기]]> 인조 즉위년(1623, 명 천계(天啓)), 3월 13일 계묘 3번째기사 [[인조반정]] 직후 [[경운궁|서궁 유폐]] 시절의 불안 때문인지 자주 하교를 내려 [[정치]]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려 했다. [[광해군]]의 죄목을 나열한 것 이외에도 도주하다 붙잡힌 [[광해군]]이 [[창덕궁]]에 감금되어 있을 때도 "[[죄인]]들을 속히 궁 밖으로 내보내라"는 독촉을 했으며 [[점술]]가나 [[저주]]에 관련있는 궁인들을 직접 지목해 속히 처벌을 요구했다. [[영의정]] [[이원익]]에게 직접 언지를 내려 [[정권]] 안정을 부탁하거나 [[폐세자 이지]]의 탈출 시도 사건의 처리에 관여하기도 했으며 사저에 머물던 [[인열왕후]]와 그녀의 장남 [[소현세자]]에게 대내로 이어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 [[정명공주]]의 뒤늦은 혼인 ==== 딸인 [[정명공주]]는 [[광해군]] 대에 혼사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경운궁|서궁]]에 죽은 듯이 유폐되어 있다가 인조반정 당시 21살이었다. 보통 10대 중후반에 혼인을 하던 그 당시에 아무리 [[조선/왕사|왕]]의 딸인 [[공주]]일지라도 21살이면 그냥 그 사실만으로 거의 혼삿길이 막히는 수준의 결격 사유이자 노처녀였다. 가뜩이나 늦은 [[결혼|혼인]]을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던만큼 인조반정 사흘만에[* [[공신]] 책봉은 물론 [[인조반정|반정]] 자체의 뒷수습도 안 끝난 시점이다. [[광해군]]이 [[유배]]조차 떠나지 않은 상황.] [[부마]] 간택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명공주]]가 당시 기준으로는 혼기를 지나도 한참 지난 노처녀였다 보니 [[나이]]가 비슷한 부마감들은 죄다 이미 [[결혼]]까지 했거나 최소한 [[약혼]]은 한 상태에서 집안 사정상 혼례만 치르지 못했던 수준이고, 약혼조차 안 되었을 정도면 [[남자]]에게 정말 심각한 [[하자]]가 있는 경우였다. 이미 결혼한 사람더러 무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주를 하자있는 남자에게 시집보낼 수도 없으니, 약혼까지 한 사람들이라 해도 예외없이 부마 단자를 내도록 했고, 그 중 조모의 3년상으로 혼인을 미루고 있던 18살 [[홍주원]]의 약혼을 물려버린 다음 [[부마]]로 간택했다고 한다. [[인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권 [[정통성]]을 세워주는 대의명분인 인목왕후를 우대하여 [[정명공주]]의 혼례를 호화롭게 치러주었으며, 그 뒤에도 계속해서 [[홍주원]]의 품계를 높여주거나 [[정명공주]]에게 [[땅]]이나 [[재산]]을 하사하는 등 후대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암태도 소작쟁의|소작 분쟁이 이어진 암태도]]도 당시 정명공주가 받은 땅의 일부로, 현대로 치자면 [[서울특별시/강남|강남]] 호화 [[아파트]]와 [[명품]] 살림을 신분을 이용하여 낙하산에 [[공짜]]로 준 셈이라 당연히 많은 [[논란]]이 있었다. 당시 [[신하]]들은 "주상(主上)께서 [[백성]]을 [[사랑]]한다면 이럴 수가 없습니다. [[정명공주]]와 [[왕실]]에 내리는 개인적인 일에 집착할 수가 있습니까. 정히 주고 싶으시다면 [[인조|왕]] 개인 자산에서 주십시오."라고 말할 정도로 크게 비판받았음에도 [[정명공주]] 모녀를 크게 대우했다. 인목왕후는 딸과 늦게야 결혼한 [[홍주원|사위]]를 총애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위에게 오직 [[조선/왕사|임금]]만이 탈 수 있는 어구마까지 내려줬다가 비판받은 적도 있었다. [[인조]]는 재위 초기 발생한 [[이괄의 난]] 때 나름대로 챙겨주던 [[흥안군]]이 냅다 [[이괄]]에게 달려가 합류한 이후, [[조선/왕실|왕실]]의 [[방패]]가 되어야 할 [[종친]]들의 추가적인 이반을 막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정명공주]]에 대한 우대도 그 중 하나였으며, [[조선/왕사|정통성]] 문제로 인목왕후에게 납작 숙여야 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 죽음 === 인목왕후의 [[건강]]이 날로 좋지 않자, [[인조]]는 인목왕후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녀의 사위 [[홍주원]]의 품계를 1~2단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목왕후는 [[아이러니]]하게도 [[1632년]](인조 10년), 그토록 증오하던 [[광해군]]보다 빨리 세상을 떠났다. [[사망|승하]] 2년 전부터 더운 [[날씨]]면 병이 악화되었음과 병세를 종합하면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나이 불과 48세로 당시 기준으론 나름 수명을 누린 편이나 조선의 역대 왕대비 중에서는 단명한 쪽이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50세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왕대비들은 [[대왕대비]]까지 모두 다 합쳐도 [[인순왕후]], [[인목왕후]], [[명성왕후]], [[선의왕후]], [[철인왕후]]로 겨우 5명 뿐이다. 그리고 대왕대비 중에서도 인목왕후만큼 단명한 쪽은 [[안순왕후]] 밖에 없고, 안순왕후조차도 50대에 세상을 떠났기에 인목왕후는 조선의 역대 대왕대비 중 가장 단명한 대왕대비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손자뻘인 [[인조]]와 증손자뻘인 [[소현세자]]가 번갈아가며 인목왕후의 [[간병]](병 수발)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목왕후 사후 무리하게 초상을 치르던 [[인조]]의 건강이 안 좋아지는데, 인조는 이것을 '[[정명공주]]의 [[저주]]'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 일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정명공주는, 인조 재위 기간 중 쥐 죽은 듯이 엎드려 조용히 살게 된다. 사실 전후 관계를 따져보면 [[저주]]는 핑계에 불과한데, [[인조]]는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로 강제 집권하여 정통성과 명분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왕대비로 추봉된 인목왕후에게 굽혀야 했다. 그래서 인목왕후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정명공주]]에게도 온갖 특혜를 부여했던 것. 그런데 인목왕후가 사망하자 이용 가치가 떨어진 정명공주를 압박하기 위해 누명을 씌웠다고 봐야 할 것이다. == 가계 == * '''친정([[연안 김씨]])''' * '''아버지 :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 어머니 : 광산부부인 [[광주 노씨|노씨]](光山府夫人 盧氏) * 오빠 : 김내(金琜) * 올케언니 : 부인 [[초계 정씨|정씨]](夫人 鄭氏) * 언니 : 부부인 [[연안 김씨|김씨]](府夫人 金氏) * '''형부 : 심정세(沈挺世)'''[* 심정세의 고모할머니가 [[명종(조선)|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이다. 또한 심정세의 이모는 [[정원군]]과 결혼해 [[인헌왕후|연주군부인]]이 되어 [[인조|능양군]]을 낳았다. 즉, 심정세와 [[인조]]는 이종사촌 관계. 따라서 인목왕후에게 [[인조]]는 의붓손자이자 자기 형부의 이종사촌이 된다.] * '''남동생 : 김규(金珪)'''[* [[달성 서씨]]의 규수와 혼인했다. 이 [[달성 서씨]](인목왕후의 올케)의 어머니가 바로 [[선조(조선)|선조]]와 [[인빈 김씨]]의 딸 [[정신옹주]]다.] * 올케 : [[달성 서씨|서미생]](徐楣生) * 남동생 : 김선(金瑄) * '''시가([[조선/왕실|전주 이씨]])''' * '''시조부 : [[중종(조선)|중종]] 이역(李懌)''' * '''시조모 : [[문정왕후]] [[파평 윤씨|윤씨]](文定王后 尹氏)''' * '''시아버지 : [[명종(조선)|명종]](明宗) 이환(李峘)''' * '''시어머니 : [[인순왕후]] [[청송 심씨|심씨]](仁順王后 沈氏)''' * '''배우자 / 자녀''' * '''남편 : [[선조(조선)|선조]](宣祖) 이균/이연(李鈞/李昖)''' * '''장녀 : [[정명공주]](貞明公主)'''[* [[조선]] [[장조(조선)|장조]](사도세자)의 비인 [[혜경궁 홍씨|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5대조 직계조상이다. [[홍주원]]과 [[정명공주]]의 5대손인 [[헌경왕후|혜경궁]]은 시아버지인 [[영조]]와는 12촌, 남편인 [[사도세자]]와는 13촌 고모-조카 관계가 된다. 순서는 [[정명공주]]+[[홍주원]]→홍만용→홍중기→홍현보→[[홍봉한]]→[[혜경궁 홍씨]] 순이다.] * '''사위 :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 * 차녀 : 공주 - 사산(死産)[* 1604년 선조 37년 11월 17일 인시 사산] * '''장남 :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 추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강화도|강화 교동도]]에 유배되어 위리안치형을 당했고 끝내는 8~9살 되는 어린 나이에 초가집 안에서 증살(방바닥 온돌 아궁에 불을 계속 지펴 뜨거운 열기에 쪄 죽는 일) 된다.] == 평가 == 개인적으로는 크게 특별한 능력없이 평범한 [[왕비]]에 지나지 않았으나, 정국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처신을 잘못했다는 평가는 사실이다. 이미 [[광해군]]이 버젓이 [[왕세자|세자]]로 있는 상황에서 [[선조(조선)|선조]]가 [[광해군]]을 멀리한다는 이유만으로, [[왕세자|동궁]]을 업신여기는 중궁전 소속 나인들을 제어하지 못해 측근관리조차 못하는 허술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계축옥사]]에서 인목왕후와 그녀의 아버지 [[김제남]]이 [[의인왕후]]의 무덤에서 저주 행위를 했다는 진술이 나오는데, 사관은 대비측 인물이 (의인왕후 무덤에서 저주를 한 건 아니지만) '''[[공빈 김씨]](광해군의 생모)의 무덤에서 저주를 한 것은 사실이라고''' 기록했다. 조선 시대에서 저주는 매우 끔찍한 범죄였으며, 특히 왕실 일원에 대한 저주는 미수에 그치더라도, 들키는 즉시 주범부터 공범까지 죄다 '''멸족'''으로 대응할 만큼 극형으로 처벌했다. 이런 어마무시한 짓을 주변인들이 저지르는 걸 방관 내지 말리지 못했다는 건 인목왕후가 주변 관리에 상상초월할 정도로 무능했고, 마찬가지로 저주에 가담한 친정 가족과 측근들 역시 인목왕후에 버금갈만큼 처세술과 정치적 능력 모두 떨어졌다는 걸 의미한다. 그나마 무능해서 이러한 만행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좀 나은데, 의인왕후나 공빈에 대한 저주를 일부러 방관했다면, 광해군이 계축옥사에서 인목왕후의 친정을 거의 멸문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편집증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일견 이해가 된다. 인목왕후의 행적상 정말 무능해서 측근들의 저주 행위를 몰랐을 가능성도 크지만, 그래도 명색에 왕실의 큰어른인 왕대비와 그 친정가문이 아랫사람의 전횡도 제대로 통제 못하는 모습은 좋은 모양새가 아니며, 더 나아가 방관한 것으로 오해를 살 위험이 크다. 또한 전임인 [[문정왕후]] 윤씨나 후임인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 같은 정치력이 없었고, 처세술도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런 면모는 [[인조]]의 [[인조반정|반정]] 전후로도 고쳐지지 않았다. 당장 [[광해군]]이 [[폐위]]되자마자 "[[광해군]]과 [[폐세자 이지]]의 머리를 갖고 오라. 그들의 살을 씹어먹기 전에는 책명을 내리지 않겠다"거나 "[[이이첨]]과 유희분을 친국한 뒤에 책명을 내리겠다"고 하는 등, 자신은 한 일이 전혀 없는데도 자기 한이 먼저 풀려야 [[인조]]를 [[조선/왕사|왕위]]에 올려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인조반정|반정]] 주역들이 말린 뒤에야 자신이 감정적이었음을 인정한다. 이후에도 상기한 사위 [[홍주원]]의 예시에서 보듯, 조정의 큰 어른이라기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생각이 짧으며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면모를 너무 많이 비춘다.[* 이것 때문에 인목왕후의 평가는 조선 최악의 [[눈치 없는 새끼|눈새]]로 귀결되는 편이다.] 물론 그나마 [[유영경]]을 무시하고 [[광해군]]의 즉위를 인정하긴 했지만, 친정 집안의 세가 약하고 나이도 어렸던 탓에 대비가 된 이후에도 권위가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절대왕조국가 [[조선]]에서 [[조선/왕사|왕위 계승]]에 휩쓸린거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중대사항이었는데 인목왕후의 부족한 처세술이 [[선조(조선)|선조]] 말기 [[조선/왕실|왕실]] 내부의 권력 투쟁과 결합해서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선조가 인목왕후 소생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광해군]] 핍박의 수단으로 쓰지 않았거나 [[광해군]]이 [[편집증]]적인 의심병에 의해서 조성한 살벌한 공안 정국이 아니었거나, 본인이 욕심 or 한심한 처세를 하지 않았다면 그냥 [[조선/왕실|왕실]]의 어른으로 대접 받으며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다. 어찌보면 [[선조(조선)|남편]]을 잘못 만나서 불행한 인생을 산 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래 [[선조(조선)|선조]]와 [[광해군]]은 [[조선/왕사|왕위]]를 둘러싸고 정적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서 아들 [[영창대군]]이 [[선조(조선)|선조]]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한 게 1번째 불행이었고, 조정과 재야의 지지를 두루 받으며 권위가 막강했음에도 끝없이 [[계축옥사|옥사]]를 일으킨 [[광해군]]의 [[편집증|의심병]]이 2번째 불행이었다. 10년 넘게 [[왕세자|세자]]위에 머무르며 [[임진왜란|전]][[정유재란|란]] 때 훌륭하게 [[분조]]를 이끌었다는 훈장달고 [[선조(조선)|부왕]]이 위협을 느껴 따져 보면 말도 안 되는 [[명나라]]의 승인까지 거론하며 견제했던 [[광해군|세자]]가 권위가 약할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막강한 권위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스스로 자기 살 까먹고 조정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행동을 재위 기간 내내 저질렀다. 엄밀히 말해 정략에서는 다음 왕 [[인조]]보다 못했는데, [[인조]]는 [[이괄의 난]]과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도 재위 후반기 정국을 자기 뜻대로 이끌어가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반론도 많은데 다른 사람도 아닌 [[조선/왕사|국왕]]인 [[선조(조선)|선조]]가 직접 [[명나라]]까지 들먹이며 [[광해군]]의 권위를 흔들었고 그 결과 [[정인홍]]이 목숨 걸고 [[선조(조선)|선조]]에게 [[양위]]하라는 상소문까지 올려 조정에 난리가 나는 와중에, [[선조(조선)|선조]]의 [[사망|승하]] 직후 [[유영경]]이 [[조선/왕사|후임 국왕의 교체]]를 시도하며 [[선조(조선)|선조]]의 유지를 빼돌려 감춰버리는 [[반역]]에 가까운 조선사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정도로 선조 말기 [[광해군]]의 [[왕세자|세자]] 지위는 심각하게 흔들렸다. 여기에 인목왕후의 고의였거나 관리 능력의 부족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철이 없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궁인들이 광해군을 공공연히 무시하는데도 제어하지 못하고, 본인도 법도를 어기고 영창대군을 세자처럼 예우하며 부정축재를 일삼은 인목왕후의 한심한 처세까지 겹치면서 그녀에 대한 평도 만만치않게 안 좋다. [[광해군]]이 인목왕후에게 저지른 짓은 잘못이지만 [[영창대군]]만큼은 왕권 강화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의견도 나올 정도. 실제로 영창대군을 가지고 그토록 광해군을 핍박했던 선조조차 자신이 죽으면 광해군과 그의 지지세력들이 영창대군을 죽일 게 너무 자명했던지라 어떻게든 후폭풍을 막아보려고 했던건지, 승하하기 직전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이의를 네가 지켜야 된다"'''라는 간절한 유언을 남겼지만 당연히 광해군은 그 유언을 정면으로 어기며 [[계축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조선]] 후기에는 <[[계축일기]]> 등을 통해 '어린 나이에 [[선조(조선)|늙은 왕]]에게 [[결혼|시집]] 가 [[붕당 정치|당쟁]]에 휘말려 [[선조(조선)|남편]]과 [[영창대군|아들]]을 잃은 가련한 왕비'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조선왕조실록]] 연구를 통해 선조말기 [[선조(조선)|선조]]와 [[광해군]]의 정치적 갈등과 그 과정에서 인목왕후의 실책이 드러나고[* 다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선조 말기에 보여준 행태는 누가 봐도 정말 명백한 실책이었다.] '광해군 긍정론'의 역풍을 받아 실 복수심에 매몰되어 [[인조]] 정권의 권위 확립에 이용당했다느니 하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 제도사와 정치사 중심으로 [[광해군]]의 거품이 조금씩 가라앉으면서 반대로 인목왕후에 대해 지나치게 옹호하는 말들도 나오는 편.[* [[인터넷]]발 '광해군 긍정론'은 '광해군 긍정론'을 집대성한 한명기 교수의 견해와도 차이가 심하게 난다. 한명기 교수는 공과를 엄연히 구분해서 외치를 제외한 내치 대부분을 과오로 평했다. 그의 저서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를 펼친 군주'라는 부제와 달리 1/3 정도는 영건 사업, 옥사, 수탈을 들어 비판하는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권력에 가까이 가서도 안 되었고 권력을 쥐어서도 안 되었던 소시민적 깜냥과 짧은 지혜를 갖춘 평범한 인간이 지나치게 강한 권력을 가까이 하며, 스스로도 감당 못할 욕심을 품고 [[계축옥사|훗날의 결과]]를 생각치 않고 안일하게 처신했다가 비극을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차라리 전임자인 [[의인왕후]]가 광해군이 즉위 때까지 살아서 본인이 애초에 [[왕비]]가 되지 않았거나, 아들을 낳지 않았거나, [[선조(조선)|선조]]가 더 오래 살아서 자기 생각대로 [[영창대군]]을 [[조선/왕사|왕위]]에 올리거나, [[광해군]]이 세월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선조(조선)|선조]]를 이겨내고 도그마에서 벗어났다면 차라리 좀 더 행복했을 수도 있었을 인물. 비록 정치적으로 식견이 부족했고 처신이 안일했지만, 대비라는 존재로서 당시와 조선 후기에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당장 [[북인]]을 제외한 [[서인]]과 [[남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당파들이 [[광해군]]에게 등을 돌려 일어난 [[인조반정]]의 원인도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 같은 명재상들이 대비인 인목왕후의 폐모에 반대하다가 실각하고 대부분 [[유배]]를 당해 그곳에서 죽은 것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 == 대중매체에서 == === 소설 === 인목왕후 또는 그 밑의 나인 혹은 딸 [[정명공주]]가 작성했다고 추정되는 고전소설 <계축일기>에서는 완벽하게 선량한 피해자로 등장해 악당 [[광해군]]과 교활한 [[김개시]]의 온갖 핍박을 이겨내고 마침내 [[인조반정]]으로 대비의 자리를 되찾는 인생 드라마를 찍는 듯이 묘사된다. <[[계축일기]]>는 소설이라 궁중문학으로서의 가치는 높으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처럼 당대 정치사를 연구하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낮다. ==== [[광해의 연인]] ==== [[광해군]] 시대를 다루고 있는 [[네이버]] 웹소설/네이버 웹툰 [[광해의 연인]]에도 등장한다. 극중 이름은 김인아. 8살 때 [[임진왜란]]을 맞아 가족과 함께 [[함경북도]] [[회령군]]으로 피난을 갔다가 아버지 [[김제남]]의 손을 놓쳤는데, 혼자 헤매다가 [[왜군]]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인아를 [[광해군]]과 김영찬이 구출해준다. 인아는 다시 아버지께 돌아갔고, 무사히 성장하여 이후 [[선조(조선)|선조]]의 계비, 즉 [[광해군]]의 새어머니가 된다. [[광해군]]에 의해 구출된 이후로 인아는 항상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았고, 그를 연모해왔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로는 자신이 아들(적통 대군)을 낳으면 [[광해군]]을 해치게 될 수도 있다는 현실에, 늘 노심초사하며 불편해한다. 그래서 첫 [[임신]]을 했을 때도, 태중의 아이가 [[공주]]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소원대로 첫째 아이는 딸([[정명공주]])이었으나, 이후 아들([[영창대군]])도 낳게 된다. 인아를 [[왜군]]에게서 구해주었던 김영찬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어서 영찬 또한 시간여행을 즐기곤 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시기의 [[조선]]으로 왔고, 인아를 구해주고 죽게 된 것. 영찬의 딸 김경민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아버지를 찾으러 조선으로 왔고, [[궁녀]]가 되어 인목왕후의 곁에 있게 된다. 인목왕후는 경민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호감을 느껴 경민에게 잘 대해주고, 종종 중궁전으로 경민을 불러 다과를 함께하며 담소를 나누곤 한다. 경민이 [[정원군]]과 함께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와 보니, [[하성군|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해 있었으며, 인목왕후는 [[왕비]]에서 [[대비]]가 되어 있었다. 소성대비(인목왕후)는 경민을 자신의 외가([[광주 노씨]]) 어른인 노수눌(盧守訥)의 [[양녀]]로 입적시킨 후, 노경민이 광해군의 [[후궁]]으로 입궁할 수 있도록 해준다. === 드라마 === * 1986년 KBS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회천문, 남한산성)>에서는 배우 [[권재희(배우)|권재희]]가 연기했다. * 1995년 KBS 드라마 <[[서궁(드라마)|서궁]]>에서는 배우 [[이보희(배우)|이보희]]가 연기했다. * 1999년 MBC 드라마 <[[허준(드라마)|허준]]>에서는 배우 [[홍은희]]가 연기했다. * 2000년 KBS 드라마 <[[천둥소리]]>에서는 배우 [[이현경(배우)|이현경]]이 연기했다. * 2003년 SBS 드라마 <[[왕의 여자]]>에서는 배우 [[홍수현]]이 연기했다. [[광해군]]을 사사건건 괴롭히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 2013년 MBC 드라마 <[[구암 허준]]>에서는 배우 [[서이안]]이 연기했다. 적통대군을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상상임신|위태]]를 하였고 이를 [[허준]]이 정확히 파악했다. 이에 인목왕후는 "내가 강건하니 언제든 회임을 할 수 있다는 말이 큰 위로가 되었소"라며 씁쓸한 미소를 보였고 [[선조(조선)|선조]] 또한 안타까워한다. 이로부터 4년 후에 [[영창대군]]을 낳게 된다. * 2014년 KBS 드라마 <[[왕의 얼굴]]>에서는 배우 [[고원희]]가 연기했다. * 2015년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배우 [[신은정]]이 연기했다. 시종일관 자신의 자식들인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걱정한다. 다만 [[광해군]]에 의해 [[연안 김씨|친정 가문]]과 [[영창대군|아들]]을 전부 잃은 뒤 복수심에 불타 올라 딸인 [[정명공주]]와 달리 [[인조반정]]을 찬성하는 모습도 보인다. * 2019년 tvN 드라마 <[[왕이 된 남자]]>에서는 배우 [[장영남]]이 연기했다. 실제 인목왕후가 아닌 인목왕후를 [[모티브]]로 삼은 인물로, 광해군의 대역을 맡은 주인공 하선을 괴롭히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물론 그렇다고 위의 드라마들처럼 광해군을 미화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본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왕실 인물들 대부분이 사악하게 등장하며, 딱 중전과 영창대군 정도가 좋게 그려진다. * 2019년 KBS 드라마 <[[조선로코 녹두전]]>에서는 배우 [[오하늬]]가 연기했다. === 영화 === * 1962년 영화 <인목대비>에서는 배우 [[조미령(1929)|조미령]]이 연기했다. == 참고 문서 == * [[광해군]] * [[광해군일기]] * [[경운궁]] * [[덕수궁 석어당|경운궁 석어당]] * [[계축옥사]] * [[계축일기]] * [[김제남]] * [[동구릉]] * [[선조(조선)|선조]] *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 [[영창대군]] * [[유영경]] * [[의인왕후]] * [[이덕형]] * [[이원익]] * [[이이첨]] * [[이항복]] * [[인경궁]] * [[인조]] * [[인조반정]] * [[인조실록]] * [[임해군]] * [[정명공주]] * [[정인홍]] * [[허균]] * [[홍주원]] [[분류:조선의 왕비]][[분류:연안 김씨]][[분류:조선의 서예가]][[분류:1584년 출생]][[분류:1632년 사망]][[분류:서대문구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