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 (문서 편집) [include(틀:만주의 역사)] [include(틀:일본 제국의 대외 전쟁)] ||<-3> [[파일:external/fight.ganriki.net/c120515.jpg|width=70%]] || ||<#FF6347> ||[[1918년]] 당시 일본 영토||<|3> '''{{{#000080 숫자}}}'''는 상륙 [br]또는 점령한 날짜 || ||<#FF7F50> ||일본군 점령지역|| || {{{#800080 ←}}} ||일본군 진로|| [[러시아어]]: Японское участие в Сибирской интервенции [[영어]] Japanese intervention of Siberia [[일본어]]: シベリア出兵 [목차] == 개요 == [[일본 제국]]이 [[1918년]]부터 [[1925년]]까지 [[러시아]]의 영토인 [[시베리아]] 및 [[극동]] 지방을 차지하기 위하여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의 편을 들어 개입한 사건. == 상세 == [[협상국]]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일 제국]]과 단독으로 강화를 맺으려던 [[소비에트 러시아]]를 막기 위하여 파병하였고 타 협상국과 달리 일본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주 전선에 개입하지 않았으므로 약 8만여 명의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리 세묘노프]] 같은 군인들은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고 일본은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명목 하에 시베리아 영토를 정복할 목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일본군]]을 진군시켰으며 더 나아가 [[사할린]] 북부를 점령하고 [[만주 횡단철도]]와 [[연해주]] 동해안, 심지어 [[바이칼 호]]의 [[이르쿠츠크]] 내륙 깊숙히까지 점령했다. [[알렉산드르 콜차크]]의 군대가 무너지자 서구 협상국은 시베리아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고 판단하고 [[그리고리 세묘노프]] 같은 [[친일]] 군벌들을 [[배신]]하고 러시아 내전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그러나 일본은 협상국 철수 후 적군이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수하지 않았는데 시베리아 점령지에서 전후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후 협상국이었던 미국의 견제와 외교적 압박, 준비되지 않은 시베리아 주둔으로 인한 병력 손실과 사기 저하, [[니콜라옙스크 사건]]과 같은 파르티잔의 저항으로 인해 [[1922년]] [[사할린]] 북부를 제외한 러시아 점령지에서 모든 군대를 철수했으며 1925년 [[사할린]] 북부[* 당시 사할린 남부는 일본의 식민지인 [[일본령 가라후토|가라후토]]였다.]에서도 완전히 철수했다. 70,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시키고 4억 3859만 엔이란 거금을 전비로 지출했으나 3,000~5,0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얻은건 하나 없으니 결론은 일본 제국의 명백한 실패로 끝난 사건이다. ||[youtube(D6TYodVvII8)]|| || 1922년 시베리아에게서 철수하는 일본군 || == 영향 == 이후 연해주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볼셰비키와 협력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볼셰비키가 초기에 영향력 확대를 위해 범세계민족해방을 기치로 세계 각지의 식민지 독립운동 세력에게 자금을 지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가 생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https://web.archive.org/web/20210118095041/http://contents.nahf.or.kr/id/NAHF.iswm.d_0001|시베리아 출병에 참가한 일본군의 상당수가 현지 여성을 강간하다가 7개 사단 중 1개 사단 인원에 해당하는 수가 성병에 걸려]] 전투력이 저하되었고[* [[콘딜로마]] 같은 성병의 경우 사람마다 내성이 다른데 러시아인들에게는 대체적으로 면역이 있어 큰 문제가 안 되던 성병의 상당수가 일본 군인은 면역이 없는 경우가 많아 문제가 된 것이다. 성행위로 감염되는 질병의 종류가 한두가지가 아닌데 굳이 매독 같은 심각한 성병이 아니더라도 감염으로 인한 요도염 같은 것만 걸려도 전투력이 저하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당시에는 [[항생제]]도 없었거니와 [[음경|민감한 부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수술하는 방법이 지금만큼 발달하지는 못했을 테고.] 이후 일본군은 이를 교훈 삼아(...) 위안부를 운영하게 되었다. 일제의 시베리아 철군에는 병력 손실 및 사기 저하, 대중의 전쟁 피로와 같은 이유도 있었지만 일본의 태평양 지역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던 미국의 외교적 압박과 국제 여론도 큰 영향을 끼쳤다. 즉 미국과 일본은 이 시기부터 서로를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 같이 보기 == * [[러시아 내전]] * [[자유시 참변]] * [[시베리아 내전]] * [[그리고리 세묘노프]] * [[니콜라옙스크 사건]]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러일관계,version=74)] [[분류:1918년/사건사고]][[분류:1919년/사건사고]][[분류:1920년대 사건사고]][[분류:다이쇼 시대/사건 사고]][[분류:러시아 내전]][[분류:레닌 시대]][[분류:소일관계]][[분류:러일관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