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장수왕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고구려 국왕)] ||<#0000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fbe673 '''장수왕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고구려의 왕자)] ---- [include(틀:역대 고구려 태자)]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00, #000000 20%, #000000 80%, #000000); color: #fbe673" '''고구려 제20대 태왕[br]{{{+1 장수왕 | 長壽王}}}'''}}}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요양 고씨 장수왕 영정.gif|width=100%]]}}} || ||<-2><#000000> {{{#fbe673 {{{-2 요양 고씨가 그린 장수왕의 영정.[* [[중국]] [[하얼빈시]] 요양 고씨 집성촌에 보관되고 있다.[[https://m.cafe.daum.net/greatchosunsa/75XT/1587?listURI=%2Fgreatchosunsa%2F75XT|#]] 이 영정을 그릴 때 요양 고씨 연장자 두 사람의 골상을 토대로 하얼빈 화가가 보고 이를 기준으로 그렸다고 한다.[[https://tadream.tistory.com/2772|#]]]}}} }}} || ||<|2> '''출생[br]{{{-3 (음력)}}}''' ||[[394년]] || ||[[고구려]] [[국내성]] || ||<|2> '''사망[br]{{{-3 (음력)}}}''' ||[[491년]] [[12월]] '''(향년 97세)''' || ||[[고구려]] [[평양성]] || || '''능묘''' ||[[장군총]](將軍塚) (추정) || ||<|4> '''재위기간[br]{{{-3 (음력)}}}''' ||'''{{{#fbe673 고구려의 태자}}}''' || ||[[409년]] [[4월]] ~ [[412년]] [[10월]] {{{-2 (3년 6개월)}}} || ||'''{{{#fbe673 제20대 태왕}}}''' || ||[[412년]] [[10월]][* 당대 고구려인들에 의해 작성된 광개토대왕비에서는 412년 10월에 즉위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삼국사기》를 토대로 즉위년을 계산하면 [[413년]] [[10월]]이 된다.] ~ [[491년]] [[12월]] {{{-2 (79년 2개월)}}}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횡성 고씨]] / 요양 고씨[* 요양 고씨에서는 시조를 장수왕이라 기록하고 있다.[[https://www.donga.com/news/People/article/all/20050929/8232963/1|#]]] || || '''휘''' ||거련(巨連, 巨璉) / 연(璉) || || '''부태왕''' ||[[광개토대왕|광개토태왕]] || || '''형제자매''' ||동생 한 명[* 장수왕 54년에 북위에서 혼인 관계를 요청하자 장수왕은 딸은 이미 출가했다면서 동생의 딸을 대신 보내려고 했다가 중단되었다는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18r_0060_0260&position=-1|기록]]을 봤을 때 적어도 장수왕은 최소 동생 1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 '''태왕후''' ||[[고조다]]의 모후 || || '''자녀''' ||태자 [[고조다]][br]왕자 고공?, 고승우[br]왕녀 1명 || || '''태손''' ||[[문자명왕|고나운]] || || '''종교''' ||[[불교]] || || '''신장''' ||약 165cm 이상[* 고구려인의 평균키가 [[https://m.cafe.daum.net/alhc/51q2/3502?listURI=%2Falhc%2F51q2|165cm]]였는데 장수왕의 외모 기록에서 몸과 얼굴이 컸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장수왕의 키는 165cm 이상으로 추정된다.] || || '''시호'''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 '''[[북위]]''': 강(康) || || '''연호''' ||[[연수#s-4]](延壽)(?), [[연가#s-4]](延嘉)(?)[* 국보 119호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의 '연가'라는 연호가 안원왕, 영양왕 혹은 장수왕의 연호로 추정된다.], [[건흥#s-2.1]](建興)(?)[* 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삼국시대 불상인 건흥5년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에서 쓰인 '건흥'이 바로 장수왕의 [[연호]]로 추정되기도 한다.]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cha.go.kr/1612184.jpg|width=100%]]}}} || || {{{#000000 '''[[충주 고구려비|{{{#fbe673 충주 고구려비}}}]]'''}}}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구려]]의 제20대 [[태왕]].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태왕 중 하나로, [[394년]]에 [[광개토대왕]]의 아들로 태어나 [[412년]] [[10월]] 고구려의 20번째 태왕으로 즉위하고 491년 12월 97세를 일기로 승하하며 79년 2개월의 기나긴 재위를 마쳤다. 그의 치세 동안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 국가들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최강국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 시호와 휘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전하는 [[시호]]는 '장수왕'(長壽王)이다. '긴 장'(長), '목숨 수'(壽). 말 그대로 '긴 수명'이라는 뜻이다. 오래 살아서 '장수'라는 시호를 올렸다는 해석이 대세이고, 종종 [[불교]] 용어 '장수'와 연관짓기도 한다. 고구려가 불교를 공인했고,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9개의 절을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주장이다. [[휘]]는 거련(巨連). 단순 한자 풀이로는 '크게 잇는다'는 뜻. 아마도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인 듯 하다. [[중국]]에서는 줄여서 '연'(璉)이라 기록했다. 허나 그때는 [[순우리말]] 이름을 여러 한자로 음차했기에 풀어 읽어서 '크게 잇는다'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북위]]에서는 '강'(康)이라는 시호를 주기도 했다.[[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18r_0060_0710&position=-1|#]] == [[장수왕/생애|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장수왕/생애)] == 평가 ==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가 3대라고 이야기 한다. 고구려의 경우를 [[고국원왕]] 때 한 번 망했다 친 뒤 3대로 빗댄다면 [[소수림왕]]-[[고국양왕]] 시대가 1세대로 무너진 나라를 재건하여 힘을 다시 비축했고, 2세대가 [[광개토대왕]]으로서 비축한 힘으로 주변국을 정복하고 다녔다면 3세대인 장수왕은 넓어진 나라를 다스릴 '''체제를 다시 재구축''' 하고 선대의 과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넓어진 영토, 점점 다시 강해지는 남북조, 고구려의 빈틈을 시시각각 찾고 있는 백제와 신라를 사방에 두고 장수왕은 훌륭하게 문제를 해결한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하며 국내성 주변에서 힘을 길러온 귀족들을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시켰으며 고구려의 체제를 정비했다. 동시에 남쪽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서 남벌을 천명하며 백제와 신라를 제압했다. [*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평양 천도는 훗날 북방계 귀족과(기존 국내성계로 대표되는 요동과 만주 지역에 기반을 둔 세력.) 남방계 귀족 사이의(평양계로 대표되는 한반도 지역에 기반을 둔 세력.) 앙금이 생겨 이내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결국은 연개소문의 쿠데타 및 집권과 고구려 멸망까지 이어지는 씨앗이 되고 만다. 물론, 평양 천도는 남진 정책의 거점화 및 수도방어면에서 국내성보다 더 수월하다는 군사적 이점으로 인해 추진한 것이므로 그러한 파생된 문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가 [[광개토대왕]] 시기에는 세력권 밖으로 나가기는 하였으나 백제와 신라는 최소한 장수왕 당대에는 고구려의 힘에 짓눌려 있었다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다. 또한 요동을 놓고 누대의 원수이던 모용선비의 후예 연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켜 요동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고, 중원 남북조에게는 양면외교를 시행하며 형식상 조공을 주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등한 외교로 남북조, 유연과 함께 4강 체제로 평화를 정착시켰다. 결론적으로 장수왕은, 소수림왕 시기에서부터 천천히 시작해 광개토대왕시기까지 오면서 만들어진 전성기의 국가인 고구려를 편하게 운영했을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보다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시대적 상황에서 집권했다. 하지만 탁월한 본인의 능력을 활용하여 강해진 고구려의 국력을 바탕으로 '''안으로는 왕권 강화, 밖으로는 주변국 장악'''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으며, 고구려 왕실의 두 원수인 북연 황제와 백제 왕을 주살하여 조상들의 원수도 갚았다. 본인도 장수하면서 강력한 고구려의 국력을 향유한 왕이었다. 실제로 장수왕이 받은 중국 국가들의 시호들과 지위들, 그리고 주변국들의 대접들은 역대 [[한국사]] 군주들 중에서 당연히 최상위라고 할 만하다.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55&categoryId=49615&cid=49615|《삼국사기》 〈장수왕 본기〉]]''' 一年冬十月 장수왕이 즉위하다 二年 동진이 왕을 책봉하다 三年秋八月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이다 三年冬十月 흰 노루를 사냥하다 三年冬十二月 [[국내성]]에 많은 눈이 내리다 八年夏五月 나라 동쪽에 홍수가 나다 十三年春二月 [[신라]]가 사신을 보내다 十三年秋九月 풍년이 들어 왕이 잔치를 베풀다 十四年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五年 [[평양성]]으로 천도하다 二十四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니 북위가 책봉하다 二十四年 북연 왕 풍홍이 도움을 요청하다 二十五年 북위가 북연을 토벌할 것임을 알려오다 二十五年夏四月 북연의 화룡성을 점령하다 二十五年夏五月 북연 왕 풍홍을 데려오다 二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七年春三月 북연 왕 풍홍을 죽이다 二十八年冬十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八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九年 신라가 변방의 장수를 죽이다 四十三年秋七月 신라 북쪽 변경을 침략하다 四十四年 남송에 조공하다 五十一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二年 남송이 왕을 책봉하다 五十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五年春三月 북위가 후궁으로 들일 왕녀를 요구하다 五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七年春二月 신라의 실직주성을 빼앗다 五十七年夏四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八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八年秋八月 백제가 침입하다 五十九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九年秋九月 백성 노구 등이 북위로 달아나다 六十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年秋七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一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一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二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二年秋七月 북위와 남송에 조공하다 六十三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三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三年秋九月 백제 한성을 함락하다 六十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四年秋七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四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五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五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六年 남송에 조공하다 六十七年 백제의 연신이 투항하다 六十八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장수왕의 내정 관련 기록의 거의 전부다. 〈[[광개토대왕릉비]]〉 건립 기사는 《[[삼국사기]]》가 아니라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나머지는 대부분이 북위와 남조에 조공한 기사들이다. 북위에 조공 기록만 25회. 기록의 반이 북위 조공기록이다. 덕분에 일부 역사 애호가들 사이에서 '조공왕'이라는 괴랄한 별명도 있다. 이 부분에서 [[김부식]]의 사대 정책이 드러나는 거 아니냐는 주장도 간혹 나오는데, 그보다는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심히 부실한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글자수라도 채우기 위해 중국 사서 내용을 옮겨 적어야 했다. 이럴 수 밖에 없는 건 《삼국사기》가 거의 500년쯤 뒤에 쓴 책이고,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고 나서는 후기 고구려와 관련된 사료 대다수가 소실되어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내 기록이 부족하면 《[[삼국사기]]》에서는 당연하게 중국 사서의 기록을 모아서 내용을 채웠다. 당연히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장수왕 관련 기사야 조공으로 기록된 외교 기사만 있을 수 밖에 없다. 《[[신집]]》 5권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국원왕]]대까지의 기록은 그럭저럭 있다. 《신집》은 [[소수림왕]] 때 편찬된 100권의 역사서 《유기》를 5권으로 줄인 것이기 때문에 고국원왕 대까지가 상세하다. 광개토대왕은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 덕분에 기록이 어느 정도 받쳐주는데, '''장수왕 대 기록부터는 전적으로 [[중국]] 기록에 의존해야 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과 관련된 기록을 보더라도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 고구려 기록이 없어서 [[김부식]]이 골머리를 싸맨 흔적이 남아있으며, 민간에서 주도해 만든 《[[삼국유사]]》의 경우에도 [[신라]]의 기록에 비해 [[고구려]], [[백제]]의 기록은 심히 부족하다. == 장수 == [[파일:고구려 장수왕 재위기간.jpg]] 시호인 '장수'(長壽)라는 뜻처럼 매우 오래 산 임금이다. 고대인 기준으로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한 아버지 광개토태왕과 무척 대비되는 부분.[* 전근대 시대에 평균 [[수명]]이 낮았다지만 그건 유아기 사망률과 잦은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고, 성인까지 성장했다면 4~50대까지는 사는게 보통이었다.] 동시대 인물인 [[모두루]]도 '하늘이 이 나라를 어여삐 여기지 않아 (태왕께서 승하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괄호 안은 실제 기록은 아니며 문맥으로 판단한 사항이다.] [[의학]]이 매우 발달한 21세기 현재에도 97세까지 생존하기는 무척 어려우며 5세기 당시의 의학과 평균 수명, 전제군주제의 임금으로서 겪었을 업무 강도까지 고려하면 정말 오래 장수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기록상으로는 157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금관가야]]의 [[수로왕]], 118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태조대왕]] 다음으로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래 산 [[군주]]로 전해진다. 하지만 역사적 모순점이 많고 신화적 기록이 가미되었거나, 혹은 다른 숨겨진 인물의 재위기록이 섞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수로왕이나 태조대왕과는 다르게 장수왕은 교차 검증이 가능한 실증적 재위 기록이 중국 사서에도 존재한다. 게다가 저 두 왕은 수명이 다소 비현실적이지만 장수왕은 현실에서도 간혹 그 나이까지 장수하는 경우가 있기에 일말의 의혹 없이 확실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질적으로 '''[[한국사]]에서 가장 장수했고, 가장 오래 집권한 지도자'''라고 볼 수 있는 셈. 현대 기준으로 봐도 경이로운 건강인데, 오랜 재위와 건강으로 [[찰스 3세|왕세자]] 놀리기가 거의 밈 취급을 받았던 [[엘리자베스 2세]]도 장수왕과 비교하면 1년 단명했고 9년 짧게 재위했다. 게다가 장수왕은 남성이라는 수명적 핸디캡을 안은데다 현대 의학의 도움조차 없이 저런 수명을 누렸으니 더더욱 복 받은 건강을 누린 셈. 5세기 초부터 5세기 말까지가 장수왕의 치세라 사실상 5세기의 고구려는 장수왕의 단독 치세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엄청 길다. 연령이 검증된 인물들 기준으로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조선의 왕은 물론이고 고대에 비해 의학이 발달한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도 장수왕보다 오래 산 지도자는 아직까지 없다.[* 수명이 정확히 알려진 한국사의 정치 지도자 중 장수왕 다음으로 장수한 사람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인 [[윤보선]] 대통령이다(92세).] 원래 후계자였던 태자 [[고조다]]는 부왕이 너무 오래 재위한 탓인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떴고 손자인 문자명왕이 장수왕에게 보위를 이어받아야 했다. 같은 고구려의 왕들인 [[태조대왕]], [[신대왕]], [[차대왕]][* 그러나 이들은 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래도 20년쯤 뻥튀기되었어도 90세에 죽었다고 봐야 하는 태조대왕 등을 볼 때 장수한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 등이 믿기 힘든 긴 수명으로 이름이 높고 [[미천왕]], [[고국원왕]], [[문자명왕]] 등도 3~40년에 달하는 재위 기간을 자랑하며 [[안장왕]], [[안원왕]], [[영양왕]], [[영류왕]], [[보장왕]] 등도 [[환갑]]쯤은 가뿐히 넘기는 것을 보면 [[고구려]] 왕가 자체가 장수하는 [[가문|집안]]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장수는 [[유전자]]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기 때문이다. 군주의 수명은 [[국가]]의 존망을 좌지우지하는 요소이고 군주는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국가의 상징이기 때문의 군주의 생존은 그 자체로 의의를 갖는다.[* 민족문제와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오랫동안 재위하고 있어서다. 그리고 그가 사망하자 큰 혼란이 벌어졌던걸 보면..] 거기다가 장수왕은 이렇게 70년 넘게 재위하였음에도 명군으로서 삶을 마감했다. 오래 산 것도 모자라 그 기간 동안 명군의 행적만 보였으니 고구려 입장에서는 복 받은 일이다. 더불어 그의 이름값으로 인해 다른 장수하는 군주들에게도 그런 별명이 붙고 있다. == 여담 == * 외모 평가가 드문 《[[삼국사기]]》에서 장수왕의 외모에 대해 몸과 얼굴이 크고 잘 생겼다며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18r_0060_0010&position=-1|기록]]하고 있다. == 대중매체에서 == [[고구려]] 왕조에서 아버지 [[광개토대왕]] 다음가는 업적과 유명세를 자랑하고 상당히 오래 재위하여 고구려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의외로 대중매체에서 다뤄진 적이 거의 없는데 기록이 많지 않아서 그런 듯 하다. 장수왕 본인이 부왕 때 미친듯이 팽창하던 국가의 [[왕자]]로 태어나 즉위한 뒤 대내외로 패권을 휘둘렀던 [[사기캐]]라 주인공 [[캐릭터]]를 만들기 쉬운 인물은 아니다. 차라리 이 무서운 인물을 대해야 했던 [[백제]]나 [[신라]]의 입장에서 극강의 [[최종 보스]] 역할이면 모를까. 그래서 앞으로도 장수왕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만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38세에 사망했지만 대중매체에서 죄다 [[광개토대왕/기타/오늘날#s-2|늙은 모습]]으로 나오는 아버지 광개토대왕과는 달리 장수왕 본인은 97세까지 장수했지만 대중매체에서는 죄다 젊은 모습으로 나온다. * [[형민우]]의 만화 〈[[태왕북벌기]]〉에서는 마지막 권에서 어린 시절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무술]]을 수련하면서 이후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모습으로 잠깐 등장하고 끝. * 2007년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는 기하의 소생으로 나오며 광개토태왕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다보니 아역으로만 출연했다. 배역은 [[정윤석]]. 당시 이름은 '''아직이'''인데 아직 이름이 없다고 해서 수지니가 아직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 2011년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는 응당 등장할 것으로 여겨졌으나 끝까지 안 나왔다. 배역은 커녕 언급조차 없다. * 게임 〈[[천년의 신화]]〉에서는 고구려 [[영웅]]으로 등장한다. 양쪽에 뿔이 달린 투구를 쓰는데 모델링이 영 괴악해서 대머리처럼 보이며 투구뿔도 얼마 안 남은 머리카락으로 착각해 헤이하치 컷인 줄 아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정작 초상화는 중세 프랑스 왕족을 연상시키는 머리스타일에 곱상한 얼굴이다. 전차를 몰고 활을 쏘는 영웅 유닛으로 현혹술을 통해 적을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 덧붙여 다른 나라는 왕이 현혹술을 가지고 있는데 고구려만 유일하게 태자가 현혹술을 쓰고 있다. 목소리가 [[나카오 류세이]]와 비슷하다. * 2017년 [[KBS]] 드라마 〈[[한국사기]]〉에서는 영화 [[관상(영화)|관상]]에서 마지막 장면의 [[한명회]]를 연기한 배우 우상전이 연기했다. 노년의 장수왕 모습이 대중매체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장수왕)] ---- [include(틀:한국사의 역대 연호)] ---- [include(틀:고구려 왕실)] [각주] [[분류:장수왕]]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