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투지경선 (문서 편집) [[분류:군 용어]] [목차] 戰鬪地境線, Boundary. == 개요 == 각 부대별 전투와 방어, 책임 구역을 뜻하는 군사 용어로, 지경선으로도 부른다. 또한 이를 보려면 [[군대부호]]를 어느정도 알고 봐야 한다. == 상세 == [[파일:백석산전투=_=고지위치.jpg]] [[백석산 전투]] 전투지경선.[* 참고로 연대별 담당 면적이 왜 천차만별이냐면, 8연대가 주공, 3연대는 조공, 5연대는 조공+들러리(...)이기 때문.] [[https://www.warmemo.or.kr/front/militaryInfo/searchView.do;jsessionid=1B25F60BB23D317CECD61F85AA1549FD|참고자료]] 전투지경선은 부대 전력(+동원가능 전력까지 포함)과 임무, 지형 등등에 따라 상급 부대에서 지정, 조정하며 전방/후방/측방 전투지경선으로 구분된다. 또한 대부분 도로나 하천 등 식별하기 용이한 대상을 기준으로 그어지며, 고지와 능선 등 전투에 중요한 지형지물은 분할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며, 상대 부대 전투지경선을 침범시 작전에 지장을 주거나 [[아군 오사]] 등 충돌을 야기할 수 있기에 해당 혹은 상급 부대의 허락이나 협조가 필요하며, 최소 이러이러한 이유로 왔다며 통보라도 해주어야 한다. 당연한 소리지만 전투지경선의 설정이 적군의 행동까지 구속하지는 않는다. 아니, 양쪽 경계면의 경계방어가 허술하면 이 경계선을 침입 경로로 활용하기도 한다.[* 한국전쟁 초반 낙동강까지 밀렸을 때 이뤄진 [[영천·신녕전투|안강-기계 전투]]에서 적들은 이 경로로 침입을 시도했다.[[http://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695277|#]]] 또한 옆에서 일어난 상황에 따라 우리 작전도 차질을 빚을 수 있기에[* 예를 들어 인접 부대의 진지를 적들이 피탈해 우리 방향으로 총구를 조준한다든지.] 내 담당 구역 아니라며 상급 부대에서 이리가라, 저리가라 할 때까지 기다리는건 융통성 없는 행위이다. 게다가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이 전투지경선을 유연하게 변경하는 다영역 작전이 부상하고 있다.[[http://www.bizhankook.com/bk/article/18780|#]] == 이와 관련된 사례 == === [[6.25 전쟁]] === 어찌된 일인지 [[제7보병사단|7사단]]과 [[유재흥]] 관련된 게 많다.[* 참고로 유재흥은 개전 초기 7사단장이기도 했었다.] * [[안강-기계 전투]] 당시 북한군 12사단은 운주산의 국군 17연대와 18연대에 각각 공격을 가해 반응 유무로 전투지경선을 파악한 뒤 이를 따라 1개 소대를 운주산 정상부까지 침투시켰지만, 그곳에 있던 연대본부 경계병들이 이를 발견해 장교들과 위생병, 통신병, 헌병 같은 비전투 병사들과 같이 교전을 벌여 격퇴시켰다. * [[원산 전투]] 당시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도사단]]과 [[제3보병사단|3사단]] 간 전투지경선 구분이 애매해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과 3사단 26연대장 이치엽 대령은 여왕산 산록에서 서로 옥신각신했고, 이는 원산 선봉 입성의 문제로도 번졌으나 1군단장이 공동 입성으로 합의하라 해서 수습되었다. * [[평양 탈환작전]] 당시 [[제7보병사단|국군 7사단]]은 '평양 선봉 입성은 국군이 되어야 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대로 평양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7사단 내부에서도 유엔군 전투지경선을 멋대로 바꿔도 되냐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유재흥 2군단장은 '일단 평양부터 따고 보라' 며 일축했고, 그 결과 해당 방면으로 진격하던 [[제1보병사단|국군 1사단]]과의 충돌, 대립으로 이어졌다. * [[현리 전투]] 직전 유재흥이 지휘하는 [[제3군단|국군 3군단]]은 오마치라는 고개로 후방과 연결되었다. 하지만 오마치는 인접 미 10군단 예속 국군 7사단의 영역이었고,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이 3군단 경계 병력 배치를 완강하게 거부해[* 유재흥은 육본과 미 8군 사령부에도 중재를 요청했으나 전자는 묵묵부답에 후자는 알몬드의 손을 들어주었다.] 패주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 [[피의 능선 전투]] 와중 피해가 커지자 미10군단장은 서쪽 [[백석산 전투|백석산 전선]]의 국군 7사단에게 전투지경선을 넘어 피의 능선 554 고지를 점령하라고 명령해 8연대와 대전차대대가 미2사단 작계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대전차대대가 전투지경선을 넘어 피의 능선 전투에 가세하였다. 또한 직후 본격화된 백석산 전투에서도 우측의 미 2사단이 1024고지를 빼앗겨 7사단 3연대의 우측방이 위협받자, 전투지경선 너머로 [[예비대]]를 보내 이를 탈환한 뒤 미군에게 인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