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이콥 쉬프 (문서 편집) [목차] == 개요 == '''제이컵 헨리 쉬프'''(Jacob Henry Schiff, [[1847년]] [[1월 10일]] - [[1920년]] [[9월 25일]])는 [[독일]] 태생의 [[유대계 미국인]] 은행가이자 자선 사업가였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을 때의 독일어 이름은 '''야코프 하인리히 쉬프'''(Jacob Heinrich Schiff)로 이후 미국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후 '쿤 로브 사'에 들어갔다. [[월스트리트]]에서의 탄탄한 기반을 바탕으로 그는 당대의 모든 주요한 유대인 이슈와 문제를 쥐고서 [[1880년]]에서 [[1920년]] 사이에 가장 선도적인 유대계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 시기는 이후 ‘쉬프기’라고 알려지게 된다. 이 시기의 주요 이슈들로는 러시아 짜르 치하의 대박해와 미국과 국제적인 [[반유대주의]], 궁핍한 유대인 이민자들의 보호와 [[시오니즘]]의 부상 등이 있었다. 그는 또한 뉴욕의 내셔널 시티뱅크, ‘이퀴터블 생명보험 협회’, ‘웰즈 파고 앤 컴퍼니’, 그리고 [[유니온 퍼시픽|유니온 퍼시픽 철도]] 등 많은 중요한 회사들의 중역이기도 했으며, 많은 부분에서 E.H 해리먼사와 연관이 있었다. [[러일전쟁]]시 당시 일본은행 부총재였던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전쟁 국채(war bond)를 구입한 공으로 훗날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 생애 == 쉬프는 [[184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옛 유대인 가정에서 모세스 쉬프와 클라라 니더호프하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1370년]]부터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한 명망있는 [[아슈케나짐|아슈케나즈 유대인]] [[랍비]] 가문이었다. 아버지 모세스 쉬프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위해 일하는 중계인(브로커)이었다. 쉬프는 프랑크푸르트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861년]] 처음에 고용될 때는 도제로서 은행업과 중계업을 하는 업무를 했다. [[1865년]] 4월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 쉬프는 [[미국]]으로 건너가 [[8월 6일]] [[뉴욕 시]]에 도착했다. [[1866년]] [[11월 21일]] 그는 중계인으로서의 면허를 취득하였고, 벗지 쉬프 앤 컴퍼니 회사에 합류했다. [[1870년]] 9월에는 귀화를 한 [[미국시민권자|미국 시민]]이 되었다. [[1872년]] 벗지, 쉬프 앤 컴퍼니가 없어지자마자, 쉬프는 독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1873년]], 런던 앤 핸세아틱 뱅크의 함부르크 지점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갔다. 이듬 해 28세가 된 [[1874년]], 쿤 로브 사의 에이브러햄 쿤이 뉴욕으로 돌아오라고 그를 초청했고, 그는 그 회사에 입사를 했다. [[1885년|1875년]], 솔로몬 로브의 딸 테레사와 결혼을 했다. 당시 ‘서반구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두 명의 국제은행 가문 중 하나’라고 불린 쿤 로브의 행장에 1885년에 취임했다. 철도, 건설에 투자했고, [[뉴욕]]의 [[펜실베이니아역(뉴욕)|펜실베이니아 역]]이나 [[허드슨 강]] 지하횡단터널 등을 건설했으며, 통신회사, 고무 산업, 식품 가공 분야에도 진출했다. 쉬프는 항상 [[유대인]] 사회에 강한 유대 관계를 계속 가졌고, 자선 형태로 동포를 위해 공헌했다. 예를 들어 [[러시아]]에서 [[포그롬]]으로 고통받는 유대인을 해방하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히브리 유니온 대학을 세워 발전을 도왔으며, 뉴욕 공립 도서관에 유대인 섹션을 만들었다. [[시오니즘|시오니즘 운동]], 미국 적십자, [[컬럼비아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등에도 많은 기부를 했다. 정치적, 세속적인 [[시오니즘]]에 반대했지만,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정착에 많은 기부를 했고, 하이파 공과대학의 설립도 지원했다. == 러일 전쟁 == [[러일전쟁]] 때 [[일본은행]] 부총재였던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외채 모집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와 활동을 벌였지만, 어느 곳도 공채를 사려하지 않았다. 이미 2년 전에 [[영일 동맹]]이 체결되어 영국 여러 은행에서 500만 파운드의 채권 인수를 어떻게 든 받게했지만, [[바쿠]] 유전의 이권을 획득한 [[영국]] [[로스차일드]]에게 대출을 거절당한다. 제1회 전시 국채 모금에는 1,000만 파운드가 필요했다. 그런 가운데 은행가 만찬에서 옆 자리에 있었던 쉬프로부터 “일본군의 사기가 얼마나 높은가” 등의 질문을 받고, 다카하시가 응답하자 다음날 아침, 500만 파운드의 공채를 쉬프가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1904년]] 5월 일본은 전시 국채를 발행할 수 있었다. 쉬프는 2억 달러의 융자를 통해 일본을 강력하게 자금 지원함으로써, 일본의 승리와 제정 러시아 붕괴의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일본은 3회에 걸쳐 7,200만 파운드의 공채를 모집하였고, 쉬프는 독일의 유대계 은행과 [[리먼 브라더스]] 등에 호소하여 이것도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이 승리를 거두었고, 쉬프는 일부 사람들로부터 ‘유대인 세계지배론’ 을 실제로 옮긴 존재로 간주되게 되었다. 그 이후 쉬프는 다카하시와 친분을 맺었다. 이후 쉬프가 다카하시에 밝힌 바에 따르면 일본에게 융자를 해준 이유는 러시아의 [[반유대주의]]와 포그롬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한다. [[1881년]] 그리고 [[1903년]] 4월, 러시아에서 대규모 포그롬이 일어나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에 대항해서 일어났고, 일본은 신의 지팡이였다”고 [[회고록]]에 적고 있다. [[러일전쟁]] 후 [[1906년]] 쉬프는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아 [[3월 8일]]에 퍼시픽 메일 기선 회사의 ‘만츄리아’([[만주]]) 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3월 25일]]에 [[요코하마]](橫濱)에 도착하여 그랜드 호텔에 숙박한다. [[3월 28일]]에는 [[고쿄|일본 황궁]]을 방문하여,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최고 훈장인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았다. 쉬프는 [[구레시|구레]](吳)를 견학한 뒤, [[5월 3일]], 모지(門司)에서 [[대한제국]] [[제물포]]로 향한다. == 반제정 친볼셰비키 행보 == 쉬프의 [[제정 러시아]] 타도 공작은 철저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전후를 통해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 대출을 확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정 러시아에 대한 자금 제공은 방해를 했다. [[1917년]]에 [[레닌]], [[트로츠키]]에 각각 2,000만 달러의 자금을 제공하여 [[러시아 혁명]]을 지원했다. 그러나 경영자 일족이 쉬프의 족벌이 있었던 퍼스트 내셔널 은행, [[뉴욕]] [[록펠러]]의 체이스 맨해튼 은행, [[JP모건]]과 협조하여 [[소련]]에 대한 대출을 계속하고 있었다. 위와 같은 행보로 인해 국제 유대자본 음모론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미국의 헨리 포드가 자신이 만든 언론을 통해 특히 제이콥 쉬프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유야 어쨌든 일제와 소련공산당을 지원했던 인물로, 한국인 입장에서는 절대 좋게 볼 수 없는 인물. [[분류:1847년 출생]][[분류:1920년 사망]][[분류:미국의 기업인]][[분류:프랑크푸르트 출신 인물]][[분류:독일계 미국인]][[분류:유대계 미국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