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문서 편집) [include(틀:대한민국의 주요선거)] ---- ||<-5> '''[[대한민국 지방선거|{{{#fff 대한민국 지방선거}}}]]''' || || [[1991년]] [[3월 26일]]/[[6월 20일]] ||<|2> → || [[1995년]] [[6월 27일]] ||<|2> → || [[1998년]] [[6월 4일]] || || [[1991년 지방선거]] ||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0JYuNW-j0T0)]}}}|| || {{{#fff '''예측조사'''}}} '''{{{#fff 발표 영상}}}''' || ---- ||<-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광역자치단체장 선거 결과''' || || [include(틀:민주자유당)] || [include(틀:민주당(1991년))] || [include(틀:자유민주연합)] || '''[[무소속|{{{#ffffff 무소속}}}]]''' || || '''5석''' || '''4석''' || '''4석''' || 2석 || || '''33.33%''' || '''26.66%''' || '''26.66%''' || 13.33% || ---- ||<-7>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기초자치단체장 선거 결과''' || || [include(틀:민주당(1991년))] || [include(틀:민주자유당)] || [include(틀:자유민주연합)] || '''[[무소속|{{{#ffffff 무소속}}}]]''' || || '''84석''' || '''69석''' || 24석 || '''53석''' || || '''36.52%''' || '''30.00%''' || 10.43% || '''23.04%''' || ---- ||<-9>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광역의회의원 선거 결과''' || || [include(틀:민주당(1991년))] || [include(틀:민주자유당)] || [include(틀:자유민주연합)] || '''[[무소속|{{{#ffffff 무소속}}}]]''' || || '''390석''' || '''335석''' || 94석 || '''151석''' || || '''40.20%''' || '''34.53%''' || 9.69% || '''15.56%''' || ---- ||<-4>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기초의회의원 선거''' || || '''[[무소속|{{{#ffffff 무소속}}}]]''' || || '''4,541석'''[*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는 기초의회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 || || '''100.00%''' || [목차] [clearfix]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무제17.pn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무제9.png|width=100%]]}}} || ||<-2> '''{{{#fff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결과}}}''' || ||<-2> {{{#d82634 ■}}} [[민주당(1991년)|{{{#fff 민주당}}}]] {{{#003990 ■}}} [[민주자유당|{{{#fff 민주자유당}}}]] {{{#1b5b40 ■}}} [[자유민주연합|{{{#fff 자유민주연합}}}]] {{{#808080 ■}}} [[무소속|{{{#fff 무소속}}}]]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회지선광역의원.png|width=100%]]}}} || ||<-2> '''{{{#fff 광역의회 선거 결과}}}''' || == 개요 == [[1995년]] [[6월 27일]] 치러진 [[대한민국]]의 [[전국동시지방선거]]며 투표율은 68.4%를 기록했다. 원래 [[지방자치단체]]장 및 [[지방의회의원]]들의 임기는 4년이었으나,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국회의원 선거]]와 격년마다 교차해서 치르기 위해 첫 선거에 한해서는 임기를 3년으로 하여 1996년 총선 2년 후인 1998년에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치르기로 하고, 이때부터는 임기를 4년으로 하기로 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21600329102002&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4-02-16&officeId=00032&pageNo=2&printNo=15002&publishType=00010|#]][* 그래서 이따금씩 개헌과 함께 단골로 논의되는 사안이 대선, 지선, 총선의 통합인데, 이러한 주장은 지선을 처음부터 일부러 총선과 격년으로 교차시킨 것에서 이유에 비춰보면 당위성이 떨어진다. 이유는 '''2년 간격의 지선과 총선이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이 짙어 그 자체로 강력한 민주적 정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재보궐선거]]를 보면 알 수 있듯, 일반적으로 큰 선거에 묻어가는 선거는 같은 정당을 찍는 줄투표 현상이 심하다. 그래서 총선과 지선을 통합하면 줄투표 현상이 더 심해지고, 양당 체제와 동서 지역갈등도 보수 vs 민주계로 더 공고해질 가능성이 높다. 4년간 중앙(국회)와 지방이 같은 속도로 가면 특정 정당이나 정부에서 민심의 대이반이 일어날 대형사고가 터져도 중앙과 지방에 같은 정당의 사람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어 아무도 건드릴 수가 없지만, 2년 간격으로 교차시키면 사고가 터지고 곧 있을 선거에서 민주적 심판이 가능해진다. 줄투표 현상을 막고 민주적 정당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를 선거 두 번 세 번 하는 혈세 낭비라고 매도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이 대선과 총선 지선을 동시에 하면서도, 하원의원 임기를 2년, 상원의원 임기를 6년으로 하여 중간선거를 강제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 다만, 대통령 임기가 5년인 것 때문에 2로 끝나는 해마다(대선-총선, 혹은 대선-지선) 줄투표가 발생하는 것은 앞으로 고쳐나가야 할 문제이다. 특히 [[2032년]]에는 22대 대선 '''6주 후'''에 24대 총선이 열릴 예정이다.] == 상세 == 국내 '''첫 동시지방선거'''다. 4년 전 [[1991년 지방선거]]는 1960년 이후 31년 만에 부활했지만, 기초의원과 광역의원을 선출한 날이 달랐고, 지방자치단체장은 선출하지 않았다.[* 본래 [[제13대 대통령 선거]] 공약과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 헌법에 따라 [[1992년]] [[6월]]에 단체장 선거를 치를 예정이었지만, 총선 참패로 후유증을 앓은 [[민주정의당]]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제2당의 지위를 누리던 [[평화민주당]]이 이에 동조하면서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 선거''' 공약과 함께 무산되었다.] 더군다나 1990년대 부활 이전의 지방선거도 같은 해에 여러 선거를 치르기는 했지만, 모든 선거 단위를 동시에 치르진 않았다. [[광역자치단체장]]은 15개 [[특별시]]·[[광역시]]·[[도(행정구역)|도]]에서 뽑았다. [[1997년]] [[7월 15일]] 광역시로 승격된 [[울산광역시|울산]]은 광역시가 되면 새로 시장을 뽑는 법에 따라 선거를 해야 했지만,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다음 지방선거]]가 일정이 너무 촉박하여 제1회 선거에서 뽑은 [[심완구]] 경상남도 울산시장([[기초자치단체장]])이 [[https://www.law.go.kr/%EB%B2%95%EB%A0%B9/%EC%9A%B8%EC%82%B0%EA%B4%91%EC%97%AD%EC%8B%9C%EC%84%A4%EC%B9%98%EB%93%B1%EC%97%90%EA%B4%80%ED%95%9C%EB%B2%95%EB%A5%A0/(05243,19961231)|광역시 설치법]] 부칙에 따라 초대 [[울산광역시장]]이 되고 재선거는 없었다.[* 참고로 산하에 있는 기초자치단체([[중구(울산)|중구]], [[남구(울산)|남구]], [[동구(울산)|동구]], [[북구(울산)|북구]], [[울주군]])의 장은 부구청장이나 부군수가 대행으로 맡았다. 이외에도 [[지방의원]]의 경우 광역의원은 [[경상남도의회]]의원 중 종전의 울산시를 지역구로 하는 의원들이 그대로 맡았으며, 기초의원은 종전의 울산시의회의원들이 자신의 지역구에 해당되는 곳의 기초의원을 맡았다. [[김두겸]] 울산광역시장도 민선 1기 경상남도 울산시의원을 지내다가 울산광역시 남구의원으로 신분이 전환됐던 적이 있다.][* 2012년에 출범한 [[세종특별자치시]]는 차기 지방선거인 [[2014년 지방선거]]까지 약 2년 정도 남아서 [[2012년 상반기 재보궐선거]]를 치러 [[유한식]] 초대 시장(세종시 출범 이전까지 충청남도 연기군수로 재직하였으나 세종시장 출마를 위해 사퇴하였다.)에 한해 임기가 2년이 되었다. 그러나 통상적인 재보궐선거가 당선 익일에 바로 임기를 시작하여 당선인 신분을 거치지 않는 것과 달리 세종시는 완전히 신설되는 신규 [[광역자치단체]]라서, 초대 시장의 임기가 2012년 7월 1일부터 시작되어 재보궐선거 당선자들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당선인 신분을 거치는 등 일반적인 재보궐선거와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 개표 결과 == ||<-15> [[광역자치단체장|{{{#ffffff '''광역자치단체장 개표 결과'''}}}]] || ||<-5> [include(틀:민주자유당)] ||<-4> [include(틀:민주당(1991년))] ||<-4> [include(틀:자유민주연합)] ||<-2> [include(틀:무소속)] || ||<-5> '''5''' ||<-4> '''4''' ||<-4> '''4''' ||<-2> '''2''' || || {{{#ffffff 부산}}} || {{{#ffffff 인천}}} || {{{#ffffff 경기}}} || {{{#ffffff 경북}}} || {{{#ffffff 경남}}} || {{{#ffffff 서울}}} || {{{#ffffff 광주}}} || {{{#ffffff 전북}}} || {{{#ffffff 전남}}} || {{{#ffffff 대전}}} || {{{#ffffff 강원}}} || {{{#ffffff 충북}}} || {{{#ffffff 충남}}} || {{{#ffffff 대구}}} || {{{#ffffff 제주}}} || || {{{#003990 문정수}}} || {{{#003990 최기선}}} || {{{#003990 이인제}}} || {{{#003990 이의근}}} || {{{#003990 김혁규}}} || {{{#D82634 조순}}} || {{{#D82634 송언종}}} || {{{#D82634 유종근}}} || {{{#D82634 허경만}}} || {{{#1B5B40 홍선기}}} || {{{#1B5B40 최각규}}} || {{{#1B5B40 주병덕}}} || {{{#1B5B40 심대평}}} || {{{#808080 문희갑}}} || {{{#808080 신구범}}} || ---- ||<-15> [[입당|{{{#ffffff '''무소속 당선인들의 복당'''}}}]] || ||<-6> [include(틀:민주자유당)] ||<-5> [include(틀:민주당(1991년))] ||<-4> [include(틀:자유민주연합)] || ||<-6> '''6''' ||<-5> '''5''' ||<-4> '''4''' || || {{{#ffffff 부산}}} || {{{#ffffff 대구}}} || {{{#ffffff 인천}}} || {{{#ffffff 경기}}} || {{{#ffffff 경북}}} || {{{#ffffff 경남}}} || {{{#ffffff 서울}}} || {{{#ffffff 광주}}} || {{{#ffffff 전북}}} || {{{#ffffff 전남}}} || {{{#ffffff 제주}}} || {{{#ffffff 대전}}} || {{{#ffffff 강원}}} || {{{#ffffff 충북}}} || {{{#ffffff 충남}}} || || {{{#003990 문정수}}} || {{{#003990 문희갑}}} || {{{#003990 최기선}}} || {{{#003990 이인제}}} || {{{#003990 이의근}}} || {{{#003990 김혁규}}} || {{{#D82634 조순}}} || {{{#D82634 송언종}}} || {{{#D82634 유종근}}} || {{{#D82634 허경만}}} || {{{#D82634 신구범}}} || {{{#1B5B40 홍선기}}} || {{{#1B5B40 최각규}}} || {{{#1B5B40 주병덕}}} || {{{#1B5B40 심대평}}} || ---- 선거 결과는 '''[[민주자유당]]의 참패, [[민주당(1991년)|민주당]]의 선전, [[자유민주연합]]의 돌풍'''으로 요약된다.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결과는 민주자유당 5, 민주당 4, 자유민주연합 4, 무소속 2로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가장 많이 승리하긴 했지만 여야로 따지자면 '''5:10'''의 완패. 뿐만 아니라 기초자치단체장에서도 민주자유당 69, 민주당 84를 기록했으며 광역의원 또한 민주자유당 284, 민주당 353으로 열세였는데 민주자유당이 원내 과반수 정당임을 고려하면 완패 수준을 넘어 참패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취임 이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임기 초인 1993년에는 지지율이 '''80%'''를 상회했고, 1994년 상반기까지도 지지율이 50%대에 달했다.] 각종 정책을 밀어붙이던 [[김영삼]]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으로서는 뼈아픈 패배였는데, 취임 2년 반만에 맞은 예상을 뛰어넘는 치명적인 중간 평가로 한동안 정권이 휘청거리게 된다. 광역자치단체장을 놓고 보면 민주자유당은 [[경기도]], [[인천광역시]], [[부산광역시]],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의 경우 이 때는 [[경상남도]]의 기초자치단체였다.], [[경상북도]]에서 이겼고, 민주당은 [[전라남도]], [[전라북도]], [[광주광역시]]에다가 '''[[서울특별시]]'''를 손에 넣었으며, 자유민주연합은 [[충청남도]], [[충청북도]], [[대전광역시]], 그리고 '''[[강원도]]'''에서 승리했다. 나머지 지역인 '''[[대구광역시]]'''와 [[제주도(대한민국)|제주도]]는 무소속이 승리. 철저한 지역 분할 구도가 완성됐다. '''영남-민주자유당, 충청-자유민주연합, 호남-민주당'''. [[1990년]] [[3당 합당]] 이전의 정치 구도로 되돌아간 셈이다. 특히 서울특별시의 결과가 엄청난 화젯거리였다. 선거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까지 [[무소속]] [[박찬종]] 후보가 40%대에 달하는 지지율을 기록하며 여유있게 승리를 거둘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선거 막판에 [[민주당(1991년)|민주당]] [[조순]]에게 역전을 허용하며 2위에 그쳤고 [[국무총리]] 출신의 [[민주자유당]] [[정원식]]은 '''3위'''로 낙선하면서 망신살이 뻗친 것.[* 이 때의 서울특별시장 선거는 진짜 그야말로 '''별들의 전쟁'''이었다. 박찬종은 5선 의원에 제14대 대통령 선거 후보였고, 정원식은 선출직 경험은 없었지만 교육부장관과 국무총리를 했었으며 조순은 초선 의원과 경제부총리를 지냈었다. 셋 다 쟁쟁하지만 특히나 박찬종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거물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보다 경력이 적은 조순에게 패한 것.] 서울특별시 전체는 물론, [[민주자유당]]의 텃밭으로 거듭나는 중이었던 [[강남3구]]에서조차 조순 후보가 앞섰는데, 정계 복귀 전이었던 [[김대중]] 전 총재가 암묵적으로 밀었던 후보로서 저명한 경제학자 출신인데다 중도 성향을 갖고 있기에 상당한 확장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당시 인기있던 [[대만]] 드라마인 [[판관 포청천]]에서 따온 [[포청천]] 시장이라는 콘셉트로 홍보 전략을 세운 것도 승리의 큰 요인. 게다가 민주자유당 타격에 나선 '''[[자유민주연합]]까지 무공천을 선언'''하며 '''조순을 직접 지지'''하는 바람에 기존 민주당 지지층 및 호남 출신들의 표는 물론, 충청 표와 중도 보수 표까지 끌어모을 수 있었다. 또한 박찬종 후보가 막판에 민주공화당 출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거짓말 논란에 휩싸이는 바람에 젊은층 표의 상당수가 조순으로 쏠리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민주자유당에서도 [[1991년]] 당시 (정권의 표현에 의하면) 좌익 용공 대학생들에게 [[한국외대]]에서 밀가루 테러를 당한 당사자[* 자세한 사건 내용은 [[정원식]] 문서로.]라며 보수 표 결집에 나섰으나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부터 아예 3등이었다. (…) 그런 결과 서울특별시 전역에서 조순 후보가 고르게 높은 표를 얻었으며 부재자투표에서는 박찬종 후보가 압도적으로 앞섰다.[* 아무래도 젊은 층(부재자투표 상당수가 군인, 경찰 등이었으니)의 표심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부산시장에 출마한 노무현 역시 젊은 층의 지지를 받았으나 지역 표심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졌다. 어쨌든 박찬종은 예전부터 활동하던 기성 정치인이었지만 여당 내에서의 정풍 운동을 비롯하여 민주화운동, 양김 단일화 촉구 등을 벌였고 정치인 치고는 무균질 정치인 콘셉트로 [[남양유업]] [[우유]] 브랜드인 '다우'의 광고도 찍으며 신선한 이미지로 주목을 받아 젊은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애초에 김대중의 절대 우세 지역인 호남 지역과 김종필의 본거지였던 충청남도이야 그렇다 쳐도 전통적으로 여당 성향인 충청북도와 강원도의 패배, 무엇보다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고작 20.67% 득표로 3위에 그친 것은 너무 처참한 결과였다.[* 일반 시민 자원봉사자가 아이디어를 냈다는 '''서울 [[포청천]]'''이라는 별명과 당시 정계 복귀를 노리던 [[김대중]] 전 총재의 적극적인 지원 유세도 조순 후보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 [[파일:election95 seoul.jpg|width=350&align=center]] ---- 게다가 서울특별시 구청장은 [[서초구]]와 [[강남구]] 두 곳만 민주자유당이 차지했을 뿐 나머지 23곳을 민주당이 장악했으며, [[서울특별시의회]]는 아예 '''122:11'''로 민주당이 싹쓸어버렸다. 서울특별시가 민주당 지지세가 만만치 않은 지역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와 [[제14대 대통령 선거]] 모두 서울특별시에서는 [[김대중]]이 이겼다.] 격차가 너무 컸기에 사실상 김영삼 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이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대한민국의 보수정당|보수 계열 정당]]이 서울특별시에서 압도적으로 참패한 선거 중 하나.[* 반대로 보수 계열 정당이 [[서울특별시]]에서 대승을 거둔 선거라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제17대 대통령 선거]],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2021년 재보궐선거]]가 있다. 다만 역사적으로 보면 서울특별시는 기본적으로 민주당계 우세 지역이긴 했다. 당장 [[2010년대]] 이후 전국 단위 선거에서 보수 정당이 서울특별시에서 우세를 보인 적은 거의 없었다. 정확히 따져보자면 2010년부터 4차례의 지방선거(2010, 2014, 2018, 2022), 3차례의 대통령 선거(2012, 2017, 2022), 3차례의 국회의원 선거(2012, 2016, 2020) 중 보수 정당이 서울특별시에서 이긴 사례는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오세훈]]의 신승과 [[2021년 재보궐선거]] [[오세훈]]의 압승,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 [[윤석열]]의 신승,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오세훈]]의 압승 딱 '''4번'''뿐이었다.] 그리고 이 결과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재현됨을 넘어 신기록을 썼다.[* 서울특별시 구청장 '''24:1''' 그나마도 [[더불어민주당]]이 [[서초구청장]] 후보로 [[이정근]]이 아닌 구의원 출신을 냈다면 이겼을 거라는 얘기가 나왔다. 왜냐면 그 선거에서 서초구 소속 시의원은 더불어민주당이 싹 털어갔기 때문이다.] 민주자유당의 수모는 다른 지역에서도 이어졌는데, 나름대로 텃밭인 대구광역시장조차 구 여권 출신 무소속들에게 밀려나며 4위로 밀려나면서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의 자유민주연합 "녹색 바람"을 예고하였다. 이는 PK 출신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TK를 홀대한다는 정서와 함께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가 일어나 민심 이반이 벌어진 탓으로 보이며, 실제로 경상북도에서도 민주자유당은 [[이판석|무소속 후보]]에게 고작 '''3.61%'''차로 신승했다. 이른바 TK지역에서 '''反민자 非민주 정서'''가 현실화된 것이다.[* 물론 [[3당 합당]] 이후 민주계의 대표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민정계와의 권력 투쟁 끝에 민주자유당의 당권을 잡으면서 반 YS 정서가 퍼진 것이라는게 정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때도 역대 TK의 보수 정당 득표율 중 가장 적은 득표율을 얻었다.] 이 선거 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2일 뒤 누구도 알지 못한 대형참사가 일어난다.''']] 충청북도에서도 [[민주당(1991년)|민주당]]([[이용희(1931)|이용희]], 24.50% 득표)에 밀려 3위(23.29%), 강원도에선 아예 [[최각규]]('''65.82%''' 득표)의 인물론에 밀려 1:1 대결[* [[민주당(1991년)|민주당]] [[이봉모]] 후보가 후보 등록 직전 사퇴했다. 이 후보의 사퇴는 일시적으로 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간 야권 연대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특히 인천광역시, 경기도 등 수도권에서 야권 연대론으로 양 야당간 힘싸움이 두드려졌다. 그러나 결국엔 두 지역 모두 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이 각자 후보를 냈고 그 결과는 자연스럽게 민주자유당의 당선.]에서 더블 스코어의 패배([[이상룡(1934)|이상룡]] 차관, 34.17% 득표)를 당했다. 대구광역시와 대전광역시도 결과가 나빴다. 대구광역시에서는 무소속 문희갑 후보가 36.79%로 당선되고 자유민주연합의 이의익 후보가 22.14%를 득표해 선전할 때, 무소속 후보에게 밀려 조해녕 전 대구시장이 고작 16.87%만을 득표했다(4위). 대전광역시의 염홍철 전 대전시장 역시 고작 20.93%를 득표하면서 트리플 스코어(자유민주연합 63.76%) 패배. [[광주광역시]]에서는 1:1 대결에서 아예 10.28%라는 참담한 득표를 건졌다. 반대로 민주당은 무소속 박찬종 후보가 유력하던 서울특별시장 자리를 조순 후보가 대역전극 끝에 확보하고, 기초자치단체장과 광역의원에서는 민주자유당을 앞서며 당세를 크게 넓혔다. 특히 광역자치단체장 배출에 실패한 인천광역시와 경기도에서도 광역의원과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는 선전해 1당이 되었으며 거기에 더해 대전광역시와 경상북도, 강원도에서도 기초자치단체장을 당선시키기까지 했다.(대전에서는 유성구청장 송석찬, 강원도에서 속초시장 동문성, 경북에서는 포항시장 박기환) 그러나 당 내부적으로 보면 묘한게 [[경기도지사]] 자리를 확보하는데 실패하여 [[이기택]] 전 대표의 입지가 위축되고, 정작 정계 밖에서 활동하던 [[김대중]] 전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의 입지가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야기가 좀 복잡하지만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정계에 복귀는 하지 않았지만 선거유세엔 참여한 김대중 전 이사장은 서울특별시장으로는 조순, 경기도지사에는 [[이종찬(1936)|이종찬]]을 밀었다. 그러나 이기택은 자신이 당대표라며 [[장경우]]를 밀었고, 이러한 경기도지사 후보 선출 과정에서 폭력 사태와 후보 매수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결과는 [[민주자유당]] [[이인제]]의 당선.[* 여담으로 이 이인제가 훗날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의 제1공신(…)이 되니 역시 역사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로도 당내 갈등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고, 이런 갈등은 [[김대중]]의 정계 복귀 선언에 대한 찬반 논란까지 부르며 결국 김대중이 정계 복귀 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다음 해인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계는 [[새정치국민회의|2개의]] [[통합민주당(1995년)|정당]]이 따로 놀게 되었다. 결과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문서로. 한편 이 선거에선 [[노무현]]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이 부산광역시장 후보에 출마하여 2위로 낙선하기도 했다. 노무현 후보는 선거전 초반 지역주의 타파와 인물론을 기치로 내세워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유지했으나, 정작 정계 밖에 있던 김대중 전 아태재단 이사장이 '''지역 등권론'''[* '''모든 지역이 동등한 권리를 나눠갖고 각자의 권리를 바탕으로 수평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이 요체인 발언이었으나, 사실상 속내는 영남에 맞서 호남+충청 연대를 하자는 것 아니냐며 꺼져가던 지역 주의를 다시 활활 피웠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에 화답하듯 민주자유당에서 막 쫓겨나듯 탈당한 김종필은 충청도가 핫바지냐는 일명 '''충청도 핫바지론'''(…)을 들고 나오며 지역 감정을 부채질했다.]을 들고 나오자 부산광역시 보수표[* 구체적으로 따진다면 50대와 60대에서는 그야말로 처참하게 밀렸고 30대와 40대층에서도 밀리면서 낙선했다. 그나마 20대층에서는 노무현이 크게 앞서기는 했지만 아무리 청년 유권자층이 많았다해도 역부족이었다.]가 결집하는 바람에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제대로 [[팀킬]]한 셈인데 이에 열받은 노무현 후보 캠프측에선 이런 지역 등권론을 공개적으로 [[디스]]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부영]], [[김정길(1945)|김정길]]의 선거 유세장 발언 중엔 '''DJ와 JP는 권력욕에 눈이 멀었으며 정계에서 퇴진시켜야 한다'''는 극딜 수준의 발언도 있었다. 그만큼 김대중의 지역 등권론이 불러온 후폭풍이 여러 의미로 대단했던 셈. 결국 이 둘은 선거 후 김대중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 민주당에 남았고, 이부영은 이듬해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의 유일한 민주당 당선인([[강동구 갑]])이 되었다.][* 이후 김대중에 대한 반감 등으로 [[이부영]], [[제정구]] 등은 조순 전 서울시장과 함께 1997년 한나라당 창당에 합류하게 된다. 다만 [[노무현]], [[김정길(1945)|김정길]] 등은 한나라당에 가지 않고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게 된다.] 전라북도에서는 거꾸로 민주자유당 강현욱 후보가 지역 등권론에 발목을 잡히며 초반의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민주당 유종근 후보에게 참패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호남에서 민주자유당 득표율은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면) 아주 낮진 않았다.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에서는 20%~30%의 여당 고정표가 꼬박꼬박 나왔고, 전라북도에선 지역구에 따라서 당선권에 상당히 근접하기도 했다. 특히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전라북도에서 2명의 당선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각각 영남, [[부울경]]에서 선전하는 모습을 당시의 민주자유당이 각각 호남, 전라북도에서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강현욱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간판을 내걸고 군산시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자 호남 유일의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었던 강현욱은 1999년 말 탈당해 이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였으며, 호남의 보수 성향 인사들 대부분이 새정치국민회의로 떠나버렸다. 여기에 당의 호남에 대한 전략적 무관심마저 겹치면서 한나라당 시기에는 두 자리수 득표율을 올리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전락했다.] [[경상북도]], [[경상남도]], [[대구광역시]]에서는 기초자치단체장 가운데 무소속 당선인이 제일 많았다. 특히 [[포항시]]에서 [[민주당(1991년)|민주당]] [[박기환(정치인)|박기환]] 후보가 32.37%의 득표로 [[민주자유당]] [[최수환(정치인)|최수환]] 후보(24.42% 득표)을 수월하게 꺾고 당선되는 등의 파란이 빚어졌다.[* 3년 뒤 치러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였던 [[신정]] 후보가 [[한나라당]] [[전광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뒤에는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4]][[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번]][[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선]][[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거]]를 거치면서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대구광역시, 경상북도권의 기초자치단체장이 안나오다가 마침내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20년 뒤]]인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더불어민주당]] [[장세용]] 후보가 [[자유한국당]] [[이양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다.] [[안동시]], [[상주시]], [[군위군]], [[칠곡군]] 등에서는 아예 민주자유당 후보가 나오지 못해 무소속 리그가 벌어졌으며, [[구미시]]의 [[김관용]] 후보조차도 자유민주연합과의 대결에서 35.1%대 33.9%의 신승을 해야했다. 경상남도에서도 [[창원시]], [[마산시]] 등에서 무소속 시장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남해군]]에서는 [[무소속]] [[김두관]] 후보가 불과 '''37세'''의 나이로 당선되면서 민선 최연소 단체장의 기록을 세웠다.[* 김두관은 이후 [[경상남도지사]], [[양산시 을]] 국회의원까지 지내게 된다.] === [[광역자치단체장]] === ==== [[서울특별시장]] ==== ||<-4> [[서울특별시|{{{+1 [[파일:구 서울특별시 휘장(백색).svg|width=23px]]}}}]] [[서울특별시장|{{{#ffffff {{{+1 '''서울특별시장'''}}}}}}]] || ||<|2>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 '''정당''' || '''득표율''' || '''비고''' || ||<|2> {{{#ffffff {{{+5 '''1'''}}}}}} || [[정원식|{{{#373a3c,#dddddd 정원식}}}]](鄭元植) || 1,001,446 || 3위 || || [include(틀:민주자유당)] || 20.67% || 낙선 || ||<|2> {{{#ffffff {{{+5 '''2'''}}}}}} || '''[[조순|{{{#373a3c,#dddddd 조순}}}]](趙淳)''' || '''2,051,441''' || '''1위''' || || [include(틀:민주당(1991년))] || '''42.35%''' || '''당선''' || ||<|2> {{{#ffffff {{{+5 '''3'''}}}}}} || {{{#373a3c,#dddddd 박홍래}}}(朴弘來) || 25,054 || 5위 || || [include(틀:친민당(대한민국))] || 0.51% || 낙선 || ||<|2> {{{#ffffff {{{+5 '''4'''}}}}}} || {{{#373a3c,#dddddd 고순복}}}(高順福) || 10,488 || 7위 || || [include(틀:통일한국당(1995년))] || 0.21% || 낙선 || ||<|2> {{{#ffffff {{{+5 '''5'''}}}}}} || {{{#373a3c,#dddddd 김명호}}}(金明豪) || 9,992 || 8위 || || [include(틀:무소속)] || 0.20% || 낙선 || ||<|2> {{{#ffffff {{{+5 '''6'''}}}}}} || [[김옥선|{{{#373a3c,#dddddd 김옥선}}}]](金鈺仙) || 17,728 || 6위 || || [include(틀:무소속)] || 0.36% || 낙선 || ||<|2> {{{#ffffff {{{+5 '''7'''}}}}}} || [[박찬종|{{{#373a3c,#dddddd 박찬종}}}]](朴燦鍾) || 1,623,356 || 2위 || || [include(틀:무소속)] || 33.51% || 낙선 || ||<|2> {{{#ffffff {{{+5 '''8'''}}}}}} || {{{#373a3c,#dddddd 정기용}}}(鄭基用) || 6,156 || 9위 || || [include(틀:무소속)] || 0.12% || 낙선 || ||<|2> {{{#ffffff {{{+5 '''9'''}}}}}} || [[황산성|{{{#373a3c,#dddddd 황산성}}}]](黃山城) || 97,709 || 4위 || || [include(틀:무소속)] || 2.01% || 낙선 || ||<|3> '''계''' || '''선거인 수''' || 7,438,025 ||<|3> '''투표율'''[br]66.18% || || '''투표 수''' || 4,922,210 || || '''무효표 수''' || 78,840 || ---- {{{#!folding [서울특별시장 구별 개표 결과 보기] ||<-6> {{{#ffffff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구별 개표 결과'''}}} || ||<:> '''정당''' ||<:> [include(틀:민주자유당)] ||<:> [include(틀:민주당(1991년))] ||<:> [include(틀:무소속)] ||<:> '''격차''' ||<:> '''투표율''' || || '''후보''' ||<:> [[정원식|{{{#ffffff '''정원식'''}}}]] ||<:> [[조순|{{{#ffffff '''조순'''}}}]] ||<:> [[박찬종|{{{#ffffff '''박찬종'''}}}]] ||<:> '''(1위/2위)''' ||<:> '''(선거인/표수)''' || || '''득표수[br](득표율)''' ||<:> '''1,001,446[br](20.67%)''' ||<:> {{{#ffffff '''2,051,441[br](42.35%)'''}}} ||<:> '''1,623,356[br](33.51%)''' || '''+428,085[br](△8.84)''' || '''66.18%''' || || '''종로구''' ||<:> 21.87% ||<:> {{{#d82634 45.09%}}} ||<:> 29.47% ||<:> △15.62 ||<:> 66.45% || || '''중구''' ||<:> 23.47% ||<:> {{{#d82634 44.11%}}} ||<:> 29.05% ||<:> △15.06 ||<:> 67.16% || || '''용산구''' ||<:> 23.01% ||<:> {{{#d82634 41.18%}}} ||<:> 32.32% ||<:> △8.86 ||<:> 65.80% || || '''성동구''' ||<:> 20.36% ||<:> {{{#d82634 44.01%}}} ||<:> 31.97% ||<:> △12.04 ||<:> 66.04% || || '''광진구''' ||<:> 19.23% ||<:> {{{#d82634 43.04%}}} ||<:> 34.41% ||<:> △8.63 ||<:> 66.05% || || '''동대문구''' ||<:> 20.68% ||<:> {{{#d82634 41.84%}}} ||<:> 33.90% ||<:> △7.94 ||<:> 66.30% || || '''중랑구''' ||<:> 19.41% ||<:> {{{#d82634 40.56%}}} ||<:> 36.11% ||<:> △4.45 ||<:> 65.33% || || '''성북구''' ||<:> 20.64% ||<:> {{{#d82634 43.60%}}} ||<:> 31.97% ||<:> △11.63 ||<:> 66.06% || || '''강북구''' ||<:> 18.71% ||<:> {{{#d82634 45.20%}}} ||<:> 31.35% ||<:> △13.85 ||<:> 64.39% || || '''도봉구''' ||<:> 19.11% ||<:> {{{#d82634 42.16%}}} ||<:> 35.34% ||<:> △6.82 ||<:> 66.21% || || '''노원구''' ||<:> 19.62% ||<:> {{{#d82634 41.12%}}} ||<:> 35.59% ||<:> △5.53 ||<:> '''67.51%''' || || '''은평구''' ||<:> 19.69% ||<:> {{{#d82634 43.27%}}} ||<:> 33.48% ||<:> △9.79 ||<:> 65.49% || || '''서대문구''' ||<:> 20.89% ||<:> {{{#d82634 44.64%}}} ||<:> 30.88% ||<:> △13.76 ||<:> 66.73% || || '''마포구''' ||<:> 21.11% ||<:> {{{#d82634 42.83%}}} ||<:> 32.60% ||<:> △10.23 ||<:> 66.23% || || '''양천구''' ||<:> 20.37% ||<:> {{{#d82634 41.80%}}} ||<:> 34.52% ||<:> △7.28 ||<:> 67.35% || || '''강서구''' ||<:> 22.11% ||<:> {{{#d82634 39.64%}}} ||<:> 34.69% ||<:> △4.95 ||<:> 66.57% || || '''구로구''' ||<:> 18.78% ||<:> {{{#d82634 41.60%}}} ||<:> 35.48% ||<:> △6.12 ||<:> 65.98% || || '''영등포구''' ||<:> 20.60% ||<:> {{{#d82634 41.89%}}} ||<:> 34.31% ||<:> △7.58 ||<:> 65.96% || || '''동작구''' ||<:> 21.31% ||<:> {{{#d82634 43.72%}}} ||<:> 32.08% ||<:> △11.64 ||<:> 66.23% || || '''관악구''' ||<:> 18.15% ||<:> {{{#d82634 '''48.30%'''}}} ||<:> 30.32% ||<:> △'''17.98''' ||<:> 66.79% || || '''서초구''' ||<:> 23.96% ||<:> {{{#d82634 38.46%}}} ||<:> 35.35% ||<:> △3.11 ||<:> 66.26% || || '''강남구''' ||<:> '''25.27%''' ||<:> {{{#d82634 38.65%}}} ||<:> 33.29% ||<:> △5.36 ||<:> 65.70% || || '''송파구''' ||<:> 21.27% ||<:> {{{#d82634 41.84%}}} ||<:> 33.83% ||<:> △8.01 ||<:> 66.09% || || '''강동구''' ||<:> 20.33% ||<:> {{{#d82634 39.79%}}} ||<:> '''36.47%''' ||<:> △3.32 ||<:> 66.44% ||}}} ==== [[부산광역시장]] ==== ||<-4> [[부산광역시|{{{+1 [[파일:부산직할시 휘장.svg|width=23px]]}}}]] [[부산광역시장|{{{#ffffff {{{+1 '''부산광역시장'''}}}}}}]] || ||<|2>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 '''정당''' || '''득표율''' || '''비고''' || ||<|2> {{{#FFFFFF {{{+5 '''1'''}}}}}} || '''[[문정수|{{{#373a3c,#dddddd 문정수}}}]](文正秀)''' || '''885,433''' || '''1위''' || || [include(틀:민주자유당)] || '''51.40%''' || '''당선''' || ||<|2> {{{#FFFFFF {{{+5 '''2'''}}}}}} || [[노무현|{{{#373a3c,#dddddd 노무현}}}]](盧武鉉) || 647,297 || 2위 || || [include(틀:민주당(1991년))] || 37.58% || 낙선 || ||<|2> {{{#FFFFFF {{{+5 '''3'''}}}}}} || [[김현옥|{{{#373a3c,#dddddd 김현옥}}}]](金玄玉) || 169,653 || 3위 || || [include(틀:무소속)] || 9.84% || 낙선 || ||<|2> {{{#FFFFFF {{{+5 '''4'''}}}}}} || 배상한(裵相漢) || 20,008 || 4위 || || [include(틀:무소속)] || 1.16% || 낙선 || ||<|3> '''계''' || '''선거인 수''' || 2,658,224 ||<|3> '''투표율'''[br]66.22% || || '''투표 수''' || 1,760,404 || || '''무효표 수''' || 38,014 || ---- 부산광역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만큼 민주자유당 지지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였는데, 민주당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출마한 [[노무현]]이 높은 인지도를 기반으로 한때 민주자유당 후보 문정수와 박빙 승부를 벌였다. 이후 [[김대중]]의 '''지역등권론'''과 보수 표심 결집으로 격차가 벌어지기는 했으나, 37.58%의 득표율라는 의미 있는 득표율을 거두며 '''바보 노무현'''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1960년대 '''불도저 시장'''으로 이름을 날린 [[김현옥]] 전 시장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9.84%의 득표율을 올렸다.[* 김현옥은 서울시장 이전에 부산시장 경력이 있다.] ==== [[대구광역시장]] ==== ||<-4> [[대구광역시|{{{+1 [[파일:대구광역시 휘장(일제강점기~1996)_White.svg|width=20px]]}}}]] [[대구광역시장|{{{#ffffff {{{+1 '''대구광역시장'''}}}}}}]] || ||<|2>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 '''정당''' || '''득표율''' || '''비고''' || ||<|2> {{{#ffffff {{{+5 '''1'''}}}}}} || [[조해녕|{{{#373a3c,#dddddd 조해녕}}}]](曺海寧) || 175,749 || 4위 || || [include(틀:민주자유당)] || 16.87% || 낙선 || ||<|2> {{{#ffffff {{{+5 '''2'''}}}}}} || [[이의익|{{{#373a3c,#dddddd 이의익}}}]](李義翊) || 230,668 || 2위 || || [include(틀:자유민주연합)] || 22.14% || 낙선 || ||<|2> {{{#ffffff {{{+5 '''3'''}}}}}} || '''[[문희갑|{{{#373a3c,#dddddd 문희갑}}}]](文熹甲)''' || '''383,272''' || '''1위''' || || [include(틀:무소속)] || '''36.79%''' || '''당선''' || ||<|2> {{{#ffffff {{{+5 '''4'''}}}}}} || 안유호(安有鎬) || 29,617 || 5위 || || [include(틀:무소속)] || 2.84% || 낙선 || ||<|2> {{{#ffffff {{{+5 '''5'''}}}}}} || [[이해봉|{{{#373a3c,#dddddd 이해봉}}}]](李海鳳) || 222,409 || 3위 || || [include(틀:무소속)] || 21.35% || 낙선 || ||<|3> '''계''' || '''선거인 수''' || 1,663,614 ||<|3> '''투표율'''[br]63.97% || || '''투표 수''' || 1,064,253 || || '''무효표 수''' || 22,538 || ---- 당시 여당인 보수 정당 후보가 '''4위'''로, 그것도 보수의 심장이라 불리는 대구광역시에서 낙선한 유일한 사례이다. [[문희갑]]도 물론 보수 성향 쪽 인물이긴 하지만 1995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에 따른 [[김영삼]]의 대구광역시 홀대론으로 인해 반 민자당와 반 YS 구도가 형성되며 무소속 문희갑 후보에게 몰표가 나온 것. ==== [[인천광역시장]] ==== ||<-4> [[인천광역시|{{{+1 [[파일:인천광역시 휘장(?-1996)_white.svg|width=25px]]}}}]] [[인천광역시장|{{{#ffffff {{{+1 '''인천광역시장'''}}}}}}]] || ||<|2>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 '''정당''' || '''득표율''' || '''비고''' || ||<|2> {{{#ffffff {{{+5 '''1'''}}}}}} || '''[[최기선|{{{#373a3c,#dddddd 최기선}}}]](崔箕善)''' || '''383,965''' || '''1위''' || || [include(틀:민주자유당)] || '''40.81%''' || '''당선''' || ||<|2> {{{#ffffff {{{+5 '''2'''}}}}}} || [[신용석(정치인)|{{{#373a3c,#dddddd 신용석}}}]](愼鏞碩) || 298,544 || 2위 || || [include(틀:민주당(1991년))] || 31.73% || 낙선 || ||<|2> {{{#ffffff {{{+5 '''3'''}}}}}} || [[강우혁|{{{#373a3c,#dddddd 강우혁}}}]](康祐赫) || 258,175 || 3위 || || [include(틀:자유민주연합)] || 27.44% || 낙선 || ||<|3> '''계''' || '''선거인 수''' || 1,551,925 ||<|3> '''투표율'''[br]62.02% || || '''투표 수''' || 962,552 || || '''무효표 수''' || 21,868 || ---- 민자당 후보로 출마한 [[최기선]] 후보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비서 출신으로 1993년~1994년에 관선 인천직할시장을 역임한 바 있었다. 94년 9월 인천 북구청 세금비리 사건으로 불명예 퇴진한 것이 약점이었지만 민주당 신용석 후보와 9%p 격차를 기록하며 초대 민선 인천시장에 당선되었다. ==== [[광주광역시장]] ==== ||<-4> [[광주광역시|{{{+1 [[파일:광주광역시 휘장(1987~2000).svg|width=23px]]}}}]] [[광주광역시장|{{{#ffffff {{{+1 '''광주광역시장'''}}}}}}]] || ||<|2>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 '''정당''' || '''득표율''' || '''비고''' || ||<|2> {{{#ffffff {{{+5 '''1'''}}}}}} || [[김동환(1932)|{{{#373a3c,#dddddd 김동환}}}]](金東桓) || 53,817 || 2위 || || [include(틀:민주자유당)] || 10.28% || 낙선 || ||<|2> {{{#ffffff {{{+5 '''2'''}}}}}} || '''[[송언종|{{{#373a3c,#dddddd 송언종}}}]](宋彦鍾)''' || '''469,570''' || '''1위''' || || [include(틀:민주당(1991년))] || '''89.71%''' || '''당선''' || ||<|3> '''계''' || '''선거인 수''' || 822,880 ||<|3> '''투표율'''[br]64.82% || || '''투표 수''' || 533,393 || || '''무효표 수''' || 10,006 || ---- {{{#!folding [광주광역시장 구별 개표 결과 보기] ||<-4>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광주광역시장 구별 개표 결과''' || || '''정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