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긍하 (문서 편집)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조긍하.jpg|width=100%]]}}} || || '''성명''' ||조긍하([[趙]][[肯]][[夏]])|| || '''본명''' ||조중하(趙重夏) || || '''출생''' ||[[1919년]] [[8월 16일]]|| || '''사망''' ||[[1982년]] [[1월 28일]] (향년 62세)|| || '''가족''' ||아들 조동완, [[조동진]], [[조동익]][br]딸 조동희|| || '''데뷔''' ||《[[황진이(1957)|황진이]]》(1957)||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 상세 == 1919년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으로 일본에서 음악학교를 나와 음악 활동을 하다가 사진과 영화 쪽으로 영역을 넓혀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1957년 《[[황진이(1957)|황진이]]》로 감독 데뷔했다. 이 영화에서 [[도금봉]]을 발탁해 스크린에 데뷔시키고 '도금봉'이란 예명도 지어주었다고 한다. 1959년 연출한 《[[곰(영화)|곰]]》으로 [[대종상]]의 전신인 문교부 [[대종상#우수국산영화상|우수국산영화상]]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다. 1960년 [[황순원]]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과부》를 연출했다. 이 작품으로 [[신영균(배우)|신영균]]과 이민자가 스크린 데뷔했다. 소설 〈과부〉는 1962년 [[신상옥]] 감독과 1978년 [[조문진]] 감독에 의해 두 차례 더 영화화됐다. 미국 영화의 번안작인 《[[육체의 길]]》을 1959년과 1967년 두 차례 연출했다. [[육체의 길(1959)|1959년작]]은 11만여명의 관객으로 당해 한국영화 흥행 순위 3위를 기록하면서 크게 성공했고, [[육체의 길(1967)|1967년작]]도 67,000명으로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공교롭게 원작 영화인 《[[육체의 길|The Way of All Flesh]]》도 1927년 처음 만들어지고 1940년 리메이크되어 두 차례 만들어진 바 있다. 1967년작에서 [[김승호(1918)|김승호]]의 오줌싸개 막내아들 역으로 당시 6살이던 [[이승현(1961)|이승현]]을 아역으로 발탁해 데뷔시켰다. 이승현은 아역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다 [[고교얄개]] 이후 하이틴 스타로 부상했다. 1961년에는 [[레 미제라블]]을 번안한 《쟌발쟌》을 연출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과정을 담은 정치 풍자 영화 《[[잘 돼 갑니다]]》는 1968년 당시에는 촬영까지 무사히 마쳤으나 영화 개봉 하루 전에 [[중앙정보부]]에 의해 [[국도극장]]에 걸린 간판이 내려갔다. 이후 문제가 된 내용을 개작했지만 결국 필름을 강제로 압수당해 상영은 불발됐고, 20년 후인 1989년에 와서야 개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한 채 흥행은 실패했다. 극영화는 1973년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가 마지막 연출작이며, 1974년 문화영화 2편을 더 찍었다. 아들 [[조동진]]과 [[조동익]], 딸 조동희가 모두 음악인이다. [[분류:1919년 출생]][[분류:1982년 사망]][[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 영화 감독]][[분류:경북고등학교 출신]][[분류:풍양 조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