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후(기원전 7세기)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고조선 군주)]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60202, #820000 20%, #820000 80%, #660202); color: #ffd400" '''고조선 ?대 단군[br]{{{+1 조선후 | 朝鮮侯}}}'''}}} || ||<|2> '''출생''' ||연대 미상 || ||[[고조선]] 추정 || ||<|2> '''사망''' ||연대 미상 || ||[[고조선]] 추정 || ||<|2> '''재위기간''' ||'''{{{#ffd400 제?대 단군 | 조선후}}}''' || ||[[기원전 7세기]]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 ||--한(韓) / 기(箕)-- || || '''휘''' ||불명 || || '''부친''' ||불명 || || '''모후''' ||불명 || || '''시호''' ||불명 || ||<|2> '''왕호''' ||조선후(朝鮮侯) || ||단군(檀君)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조선 군주로 기원전 7세기에 고조선이 [[제(춘추전국시대)|제]]와 교역했을 당시 재위에 있었던 [[단군]] 또는 [[조선후]]다. 중국의 역사서인 [[위략]] 따르면 [[조선후]](朝鮮侯)가 군주의 칭호로 나온다.[* 중국측에서 일방적으로 부른 것인지 고조선에서 스스로 자칭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단군조선|토착 고조선]]의 기원전 7세기 경에 재위했던 조선 군주([[단군]][* 다만 단군이라는 단어가 가장 처음으로 등장한 때는 삼국유사가 최초로, 단정적으로 당시 고조선의 군주가 단군을 군주의 호칭으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은 추정상 무리가 많다. 당대의 사서가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는게 크지만])로 추정된다. == 활동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62323&cid=40942&categoryId=33374&mobile|관자(管子)]]에 기원전 7세기 초기 [[제(춘추전국시대)|제(濟)]]와 발조선(發朝鮮)이 교역했다고 하며, 제환공이 하나의 표범 가죽을 값지게 받아들여 준 후에야 발조선이 입조했다고 한다. [[고조선]]이 최초로 문헌에서 언급되는 시기이며 이 시기의 고조선 군주는 제나라의 [[제환공|환공]](桓公)과 활동 기간이 겹친다. 문헌에서 고조선 군주가 직접 언급되지는 않으나 여러 오랑캐들 중 한명이란 식으로 뭉뚱그려 언급되고 또한 군주정을 갖춘 오, 월과 동격(同格)으로 기술한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교역을 했다는 사실만 간략히 언급된다.[* 해당 시기 요동반도 동부는 래이라고 칭해지는 이민족들이 남아있었고, 요녕지방과의 교역도 이들을 통해서 해야했다.] 물론 『관자』는 기원전 7세기 경 실존인물 관자의 저술이라고 보지는 않고 그 이후에 관자의 이름을 빌려 저술된 것으로 보지만, 그 내용에는 기원전 7세기의 사실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기원전 7세기에 과연 고대국가로서 조선이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여 단지 종족명이나 지역명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시기 유물[* 청동기는 다수 나와도 국가 형성의 단계라고 확정지을만한 도시 유적이나 왕궁 유적이 요동~한반도 서북부 평안도 지방에서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는다.] 및 사료가 워낙 적고 2000년대 이후의 고고학계에서 요서 지역([[십이대영자]] 문화)를 어느정도 발전된 형태의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보며 이를 고조선이라고 추정은 하고 있으나, 이들이 조선이라는 국명을 당시에 사용했는지 여부가 불확실한지라 정설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 정말 사료가 없다. 이 문단 앞에서 언급된 발조선이 한 단어인지, 발과 조선을 각각 칭한 것인지 조차 의견이 분분한 상황에서 언제 후라는 호칭을 칭했고 군주의 휘가 무엇이고 할게 남아있지 않다. == 청주 한씨 족보 == 청주 한씨 족보와 속기자지에 기록된 기자조선의 왕계보도[* 후대의 숭조작업으로 왜곡되어진 것으로 현재 사학계에서는 '''역사적으로 가치를 두지 않는다.''']에 따르면 이 당시 고조선(기자조선) 군주의 시호는 효종왕(孝宗王)[* 고조선 군주가 처음 칭왕한것은 300년 뒤의 기원전 4세기의 조선후때부터 이기에 기원전 7세기의 고조선 군주가 왕을 칭했을리는 전무하다.][* 속기자지와 청주한씨 족보에 따르면 효종왕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675년~기원전 658년으로 제환공의 재위 기간에 전부 포함되며 효종왕의 제나라 관련 기록으로 보아 제나라,노나라와 교역했다는 선대 군주인 정경왕(貞敬王) 궐(闕)과 함께 기원전 7세기 발조선이 제나라와 교역했다는 관자의 기록이 투영되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휘는 존(存)이라고 하는데 '''근거는 전무하다'''. 한편 20세기 초에는 이와 같은 기자조선의 왕계보도가 일부는 역사로서 수용되기도 했는지 대한제국 시기의 여러 역사 교과서[* 대표적으로 1906년 발행된 중등 역사 교과서인 동국사략과 독립운동가 황의돈이 저술한 대동청사가 있다.]에 효종왕과 효종왕의 치세에 대한 기록[* 효종왕(孝宗王) 존(存)은 선우익(鮮于益)을 제나라에 보내어, 환공(桓公) 강소백(姜小白)의 정치를 관찰하여 범장률(犯贓律)을 제정하였다. 제나라에서 보낸 사신 공손각(公孫恪)을 후하게 예우하였고, 선비(鮮卑) 서백리(西伯里)의 추장, 길리도두(吉利都頭)에게 상을 주었다.][* 1906년 출간된 역사 교과서인 동국사략에 수록된 효장왕의 기록으로 기원전 7세기 고조선이 제나라와 교역했다는 기록을 과장시킨 것으로 보인다.]이 수록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학계에서 [[기자조선]] 자체가 부정되며, 족보는 조작이라는 것이 정설이므로 21세기 기준 이 기록은 인정되지 않는다. == 문헌 == >桓公曰 四夷不服 恐其逆政 游於天下 而傷寡人 寡人之行 爲此有道乎。 管子對曰 吳越不朝 珠象而以爲幣乎。發·朝鮮不朝 請文皮毤【他臥切 落毛也。】服而以爲幣乎。 … (중략) … 一豹之皮 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發朝鮮'''可得而朝也。 … (중략) … 故物無主 事無接 遠近無以相因 則四夷不得而朝矣。 >(제나라) 환공이 말하기를, "사방의 오랑캐가 복종하지 않아, 천하를 거스르는 정치를 하여 과인이 해를 입을까 두렵다. 과인의 행함에 길이 있는가?" 관자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오(춘추시대)|오나라]]와 [[월나라]]가 입조하지 않으면, (그들의) 구슬과 상아를 보물로 대우해 주십시오. '''발조선'''이 입조하지 않으면, 무늬있는 털가죽【발음은 타(他)와 와(臥)의 반절이다. 낙모(落毛)를 말한다.】과 옷을 청하여 보물로 대우해 주십시오. … (중략) … 하나의 표범 가죽을 값지게 받아들여 준 후에야 8000리 밖의 '''발조선'''에게서 입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 (중략) … 물건에 주재하는 바가 없고, 일에 접하는 바가 없고, 멀고 가까운 곳이 서로 관계하는 바가 없으면, 사방의 오랑캐가 입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관자』 경중 갑 편}}}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조선후, version=94, paragraph=4.1)] [[분류:고조선의 군주]][[분류:몰년 미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