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덕궁 관물헌 (문서 편집) [include(틀:창덕궁)] [include(틀:조선 왕궁의 동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관물헌'''}}}[br]{{{-1 昌德宮 觀物軒}}}}}}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관물헌,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783년]] 이전 {{{-1 (창건 추정)}}}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_집희(관물헌).jpg|width=100%]]}}} || || {{{#gold ''' 관물헌[*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13887&ccbaKdcd=13&ccbaAsno=0122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덕궁 성정각]] 동북쪽에 있는 건물이다. == 이름과 현판 == '관물' 뜻은 '만물(物)을 보고(觀) 그 이치를 깊이 연구한다'로, [[중국]] [[북송]]의 사상가 소옹(邵雍)의 〈관물편〉에서 인용했다. 《[[동궐도]]》에는 '유여청헌(有餘淸軒)'이란 이름으로 나와 있으며 이는 '넉넉하고 맑은 마루'란 뜻이다.[[http://www.opini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808|#]] 그런데 정작 [[현판]]의 [[글씨]]는 '관물헌(觀物軒)'도, '유여청헌(有餘淸軒)'도 아닌 '집희(緝熙)'이다. 1864년(고종 1년) 1월에 13살[* 만 11세.]이었던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직접 쓴 것이다. '계속하여(緝) 밝게 빛난다(熙)'는 의미로,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소년]] [[왕]]이 앞으로 [[국가]]를 잘 이끌어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듯 하다. 어릴 때 쓴 글씨라서 그런지 현판 글씨 치고는 서툴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성인들도 저 정도 못 쓰는 사람 많다.-- 참고로 [[경희궁]]의 [[동궁]] 중 아예 정식 이름이 [[경희궁 집희당|집희당]]인 [[건물]]이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집희.jpg|width=100%]]}}} || || {{{#gold ''' 고종이 직접 쓴 '집희(緝熙)' 현판[* [[https://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newsItemId=155672781§ionId=ocp&pageIndex=11&mn=NS_01_02&strWhere=&strValue=&sdate=&edate=|사진 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 - 창덕궁》: 〈성정각 권역〉.]]] '''}}} || == 역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관물헌.png|width=100%]]}}} || || {{{#gold ''' 《동궐도》에서 묘사한 관물헌 일대 '''}}} || 건립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정조(조선)|정조]] 때에는 존재했던 듯 하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711026_001|#]] 정조는 이곳에서 [[신하]]들을 자주 만나고 [[문신]]들을 [[시험]]보게 했다. 이후 [[효명세자]]도 [[경전]]과 [[역사]]를 [[공부]]하는 곳으로 활용했고[[http://sillok.history.go.kr/id/kwa_11304003_001|#]], [[헌종(조선)|헌종]]은 몸이 불편할 때 여기서 진료를 받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xa_11505014_001|#]] [[고종(대한제국)|고종]]도 즉위 초 많이 사용했으며, [[섭정]]이던 [[흥선대원군]]이 [[궁]]에 들어올 때 주로 이용했다. 1874년(고종 11년) 3월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여기서 태어났다.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 때는 [[개화파#s-4|급진개화파]]가 본거지로 사용했으며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명성황후]]를 데려다 잠시 머물게 하기도 했다. 개화파가 이 곳을 고른 이유는, [[창덕궁]] 내에서도 꽤 높은 곳에 있고, 또한 좁아서 [[청나라]] [[군대]]가 와도 방어하기 쉬울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덕혜옹주]]가 1919년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승하 이후 1925년 [[일본]] 유학 전까지 [[귀인 양씨|어머니]]와 함께 이곳에서 살았다. == 구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관물헌 내부.png|width=100%]]}}} || || {{{#gold ''' 관물헌 동쪽 방 내부 '''}}} ||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동, 서에 [[방]]이 각각 2칸 씩 있고 가운데에 [[대청]]이 2칸이며, [[마루|툇간]]이 남, 북면 가장자리에 있는 [[구조]]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관물헌 다락.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관물헌 동칸 뒤편1.png|width=100%]]}}} || || {{{#gold ''' 관물헌 다락 '''}}} || {{{#gold ''' 관물헌 동쪽 퇴간 뒤면 '''}}} || 동쪽 칸 끝에 반 칸을 뒤로 물려 퇴간을 달았고, 서쪽 칸 끝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반 칸을 물려 [[다락방|다락]]을 달았다. 단 동쪽 퇴간는 다르게 전면을 나무 판으로 막았다. 동쪽 퇴간 뒤면은 창과 머름 아래에 벽이 있는 형태이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공포]]는 초익공계의 몰익공 양식이며 [[기둥]]은 네모나게 깎아 세웠다. [[단청]]은 모로단청[*A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으로 하여 절제된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기와]]를 쌓은 뒤 그 위에 [[치미|취두]]만 올리고 [[용두]]와 [[잡상]]은 놓지 않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관물헌 굴뚝.png|width=100%]]}}} || || {{{#gold ''' 관물헌 굴뚝 '''}}} || 건물 뒤편에 붉은 [[벽돌]]로 쌓은 서양식 [[굴뚝]]이 있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덕궁 성정각, version=61, paragraph=4.2)] [[분류:창덕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