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채도공 (문서 편집) [include(틀:양서)] [include(틀:남사)]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797e8 0%, #3797e8 40%, #00c499 60%, #00c499)" '''{{{#ece5b6 {{{+1 소량의 장수[br]{{{+1 蔡道恭 | 채도공}}}}}}}}}''' }}} || || '''{{{#ece5b6 작호}}}''' ||한수현백(漢壽縣伯) || || '''{{{#ece5b6 성}}}''' ||채(蔡) || || '''{{{#ece5b6 이름}}}''' ||도공(道恭) || || '''{{{#ece5b6 자}}}''' ||회검(懷儉) || || '''{{{#ece5b6 부친}}}''' ||채나(蔡那) || || '''{{{#ece5b6 출생}}}''' ||? ~ 504년 || || '''{{{#ece5b6 출신}}}''' ||남양군(南陽郡) 관군현(冠軍縣) || || '''{{{#ece5b6 국적}}}''' ||[[제(남조)|남제]](南齊) → [[양(남조)|양]](梁)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제(남조)|남제]], [[양(남조)|양]]의 장수. 자는 회검(懷儉). == 생애 == 채도공은 남양군(南陽郡) 관군현(冠軍縣) 출신으로 [[송(남조)|유송]]에서 익주(益州) 자사를 지냈던 채나(蔡那)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장무가 옹주 자사로 부임할 때, 채도공은 소장무로부터 소집을 받아 주부로 임명되었고, 원외산기상시로 제수되었다. 채도공은 이후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서 월기교위, 후군장군으로 진위되었고, 건무 연간 말에 보국사마, 여남현령을 맡았다. 남강왕 [[화제(남제)|소보융]]이 형주로 부임할 때, 채도공은 다시 소보융으로부터 서중랑 중병참군으로 천거되었고, 보국장군이 더해졌다. 당시 [[제(남조)|남제]]는 동혼후 소보권의 암군 행보로 인해 큰 혼란에 빠져있었다. 남제의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소연이 거병하자, 채도공은 소연 휘하에서 관군장군, 서중랑 자의참군을 맡았다. 501년 소보융이 즉위한 뒤, 채도공은 우위장군으로 전임되었다. 파서 태수 노휴열과 소괴 등이 소연을 공격하자, 채도공은 지절, 독서토제군사가 되어 노휴열과 소괴 등의 공세를 물리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채도공은 공적을 세워서 중령군으로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대신 사지절, 우장군, 사주 자사가 되었다. 502년, 소연은 소보융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양나라를 건국하니, 이가 바로 양나라의 초대 황제인 [[무제(양)|양무제]]이다. 양나라가 건국된 뒤 채도공은 한수현백(漢壽縣伯)으로 책봉되고 평북장군으로 진호되었다. 503년, 위나라의 [[장원영|원영(元英)]]이 의양성(義陽城)을 포위했는데 성안의 군사는 5천을 넘지 못했고 군량은 반년치에 이르렀다. 적이 밤낮으로 쉬지않고 공격하니 채도공은 방향에 따라서 이를 방어했다. 성안의 군사들이 모두 손에 무기를 들고 휘둘러서 100일 전후로 농성하니 위의 군사들이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 머리를 베어 사로잡은 군사의 수는 이로 헤아릴 수 없었고 이에 원영은 군사를 물려 퇴각하려고 했다. 그러나 채도공의 병이 깊어져 몸을 다룰 수 없자 사촌동생 효기장군(驍騎將軍) 채영은(蔡靈恩)과 조카 상서랑(尙書郞) 채승협(蔡僧勰) 및 여러 보좌관을 불러 말했다. >나는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나,도적을 격퇴하고 물리칠 수 없으며,지금 괴로움이 더욱 중해지고,행세는 오래 지탱으로 못할 것이나,너희는 마땅히 죽음으로써 절개를 굳히고,내가 죽은 것으로 남는 한을 가지도록 하지 마라! >---- > 吾受國厚恩,不能攘滅寇賊,今所苦轉篤,勢不支久,汝等當以死固節,無令吾沒有遺恨! 이를 듣던 이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조카 채영은이 주의 일을 대신했으며 성을 지켰다. 양나라는 채도공의 충절을 기려서 그가 맡은 지위는 그대로 둔 채 시중으로 추증하였다. 북위에서도 채도공의 충절을 인정하여 509년에 채도공의 시신을 양나라에 돌려주고 장례를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한편 채도공의 소식을 듣고도 성에 머물러 전진하지 않았던 [[조경종|조경종(曹景宗)]]은 오직 무기를 번득이며 사냥을 즐겼는데 때문에 조정의 중신 어사중승(御史中丞) 임방(任昉)은 조경종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소연은 조경종이 개국의 공이 크다 여겨 묵혀두고 처리하지 않았다. [[분류:양(남조)/인물]][[분류:504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