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측천무후 (문서 편집) [[분류:측천무후]] [include(틀:역대 무주 황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81818 0%, #313131 20%, #313131 80%, #181818)" {{{#fff '''성신황제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당 황후)] ---- [include(틀:역대 당 황제)] ---- [include(틀:역대 돌궐 가한)] ---- [include(틀: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8E096, #F4EEB0 20%, #F4EEB0 80%, #E8E096); color: #1e1e1d,#2d2f34" {{{#000 '''돌궐 제17대 가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81818 0%, #313131 20%, #313131 80%, #181818); color: #fff" '''무주 초대 황제[br]{{{+1 성신황제 | 聖神皇帝}}}'''}}}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color: #ece5b6" '''당 고종의 계후[br]{{{+1 측천순성황후 | 則天順聖皇后}}}'''}}}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cdn.playbuzz.com/1691d896-c604-4bf0-b4d1-3517a0db9d14.jpg|width=100%]]}}} || ||<|2> '''출생''' ||[[624년]] [[2월 17일]] || ||[[당나라|당]] 이주[br](現 [[쓰촨성]] 광위안시) || ||<|2> '''즉위''' ||[[690년]] [[10월 16일]]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상양궁 전조당[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사망''' ||[[705년]] [[12월 16일]] (향년 81세)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상양궁 선거전[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 '''능묘''' ||[[건릉]](乾陵) || ||<|8> '''재위기간''' ||'''{{{#ece5b6 당의 황후}}}''' || ||[[655년]] [[10월 13일]] ~ [[683년]] [[12월 27일]] || ||'''{{{#ece5b6 당의 황태후}}}''' || ||[[683년]] [[12월 27일]] ~ [[690년]] [[10월 16일]] || ||'''{{{#fff 초대 황제}}}'''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4EEB0; font-size: .9em" {{{#1e1e1d,#2d2f34 '''제17대 가한'''}}}}}} || ||[[690년]] [[10월 16일]] ~ [[705년]] [[2월 22일]] || ||'''{{{#ece5b6 당의 태상황}}}''' || ||[[705년]] [[2월 22일]] ~ [[705년]] [[12월 16일]][* 장례는 황후의 예로 치렀다.]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무(성씨)|무(武)]] || || '''휘''' ||조(照→曌)[* '조'(曌)는 '조'(照)의 [[측천문자]]이다.] || || '''부모''' ||부황 [[무사확|태조]][br]모후 양씨 || || '''형제자매''' ||2남 3녀 중 2녀[* 이복오빠 무원경과 무원상은 무사확의 전처인 상리씨의 아들이다. 언니 한국부인 무씨는 한자로 "韓國夫人"이라고 쓰나, 여기서 韓은 춘추시대 한나라의 땅으로 현재는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웨이난시]] 한청시(韩城市)다. [[대한민국]]과는 상관없는 곳이다.] || || '''배우자''' ||[[태종(당)|태종]], [[고종(당)|고종]] || || '''자녀''' ||4남 2녀 || || '''종교''' ||[[불교]] || || '''신장''' ||167cm[* [[https://www.163.com/dy/article/HM5932RK0553THQJ.html|출처]] 측천무후의 키를 본따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금 전표를 통해 추정한 키이다.] || || '''아명''' ||미랑(媚娘) || || '''존호''' ||천책금륜성신황제[br](天策金輪聖神皇帝)[* [br][[690년]] 성신황제(聖神皇帝)[br][[693년]] 금륜성신황제(金輪聖神皇帝)[br][[695년]] 자씨월고금륜성신황제(慈氏越古金輪聖神皇帝)] || || '''시호'''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 [br][[705년]]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br][[710년]] 천후(天后)[br][[710년]] 대성천후(大聖天后)[br][[712년]] 천후성제(天后聖帝)[br][[712년]] 성후(聖后)[br][[716년]] 측천황후(則天皇后)[br][[749년]]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 || || '''연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천수(天授, [[690년]] ~ [[692년]])[br]여의(如意, [[692년]])[br]장수(長壽, [[692년]] ~ [[694년]])[br]연재(延載, [[694년]])[br]증성(證聖, [[695년]])[br]천책(天冊, [[695년]])[br]등봉(登封, [[695년]] ~ [[696년]])[br]통천(通天, [[696년]] ~ [[697년]])[br]신공(神功, [[697년]])[br]성력(聖歷, [[698년]] ~ [[700년]])[br]구시(久視, [[700년]] ~ [[701년]])[br]대족(大足, [[701년]])[br]장안(長安, [[701년]] ~ [[705년]])[br]신룡(神龍, [[705년]])}}}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sinaimg.cn/40602_1156337_505284.jpg|width=100%]]}}} || || {{{#fff <무후행종도>(武后行從圖), 장훤(張萱), 당나라}}}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종(당)|당고종]]의 계후이자 [[무주(당나라)|무주]] 왕조의 유일한 [[황제]]로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여황제]]이다'''.[* 측천무후 이전에 중국에서 여황제가 된 [[원고낭]](남북조시대 북위 말기)과 [[진석진]](당고종 치세)도 기록에 남아있기 때문에 원고낭과 진석진도 여황제로 보아 측천무후는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나 세 번째 여황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원고낭과 진석진은 정식 황제로 칠 수 없다는 학계 의견이 많은데 전자는 [[남자]]로 둔갑시켜 즉위시킨 사기 즉위였고, 후자는 [[반란]]군 세력이 황제를 자칭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후궁]], [[황후]], [[황태후]], [[황제]], [[태상황제]]를 모두 거친 [[전무후무]]한 존재이고, [[여자]]로서 황제와 태상황제를 한 사람은 중국사 전체에서 측천무후가 유일하다.] 중국사에서 전무후무한 최고의 [[여걸]]이자 괴걸로서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손꼽히는 여[[군주]]이지만 [[유교]] 사상을 가진 후대 역사가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허나 최초니 유일이니 하는 수사가 필요없이 당시까지 이만한 권력의 자리에서 이토록 오랜 기간 권력을 휘두른 여자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통치]]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중국사에 길이 남을 여걸이란 점에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나라]]를 주무른 여자들은 찾아보면 의외로 많았지만 [[여성]] 본인이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 사람은 측천무후가 유일무이했다. 여자가 황제로 즉위했는데도 노쇠할 때까지 아무도 들고 일어나지 못했으며 [[신하]]들의 거사가 성공('''[[신룡정변]]''')한 다음에도 그들의 뜻을 따라 유일의 여자 [[태상황|태상황제]]로서 천수를 다 누렸다는 점에서 측천무후의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중국]] 역대 황제들 중 최고령(67세)으로 제위에 오른 황제이기도 하다. 30세에 [[황후]]가 되어 80세에 죽을 때까지 무려 50여 년을 [[권력]]의 정상에 계속 있었던 것이다. 현대 기준으로 보아도 충분히 장수한 축에 들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하게 오래 살았다. 이름은 '무조'(武照)로 로마자 표기를 할 경우 '''무측천'''(Wu Zetian[* 우 쩌톈])으로 쓴다. 황제 즉위 후 照와 발음이 같은 曌로 개명했다.[* 한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http://hanja.naver.com/hanja?q=%E6%9B%8C|#]] [[측천문자|측천무후가 직접 만든 한자]]다. 황제는 [[피휘]] 문제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자기 이름을 만들거나 아무도 모르는 [[벽자]] 이름을 사용해야 모두에게 편하다.] 시호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 제명은 '''측천금륜대성신황제'''(則天金輪大聖神皇帝), 약칭 '''성신황제'''(聖神皇帝)이다. 그러나 후세의 사가들은 [[유교]]적인 관점에서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이유로 황제로 인정하지 않아 의도적으로 무측천(武則天), '''측천무후''' 등의 명칭을 사용하면서 이러한 명칭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 생애 == === 초기 === [[고조(당)|당고조]] 이연을 도운 [[개국공신]]이었던 [[태원]]군공 [[무사확]]의 [[차녀]]로 태어나서 637년 [[태종(당)|당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 입궁하게 되었다. 당시 후궁으로서 받은 지위는 정5품에 해당하는 '''재인'''(才人)이었으며,[* 제일 높은 품계인 귀비를 포함한 19개의 후궁 품계 중 밑에서 네 번째인 품계인데, 당시 입궁을 앞둔 측천무후의 어머니는 딸이 받은 품계가 낮은 것을 한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종에게서 [[별명]]을 받아 이후 본명보다는 거의 '''무미랑'''(武媚娘)[* 무씨 성의 예쁜이]으로 불렸다고 한다. 당시 성격을 잘 드러내는 일화가 있는데, 태종이 당시 궁궐에 새로 들여온 [[말]]이 하도 사나워서 대장군인 [[울지경덕]]이 몇 번이고 말에서 떨어지자 무재인이 나서서 자신이 저 말을 길들여보겠다고 했다. 태종이 방법을 묻자 >* [[철편]][* 문서에도 설명되고 있지만, 흔히 생각하는 쇠사슬 채찍이 아니라 대나무 모양으로 벼린 쇠막대이다.]으로 때려서 기를 죽인다. >* 그렇게 해서 안 되면 [[철퇴(무기)|철추]]로 후려친다. >*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목을 찌른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태종이 >"그러다가는 말이 죽을 텐데 아무리 사나운 말이라도 죽이는 것은 지나치지 않으냐?" 라고 하자, 무재인은 >"폐하의 장수들은 모두 폐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충신들입니다. 말이 멋대로 날뛰면서 대장군을 다치게 했는데 어찌 말 한 마리를 아끼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이는 태종이 울지경덕을 가볍게 웃음거리로 만들었음을 은근히 비판한 것으로, 태종은 크게 감탄하며 무재인을 존중하게 되었지만 총애하게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훗날 [[고종(당)|고종]]은 아버지가 이 때문에 무재인을 [[처녀]]로 남겨두었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무재인과의 결혼을 합리화하는 이유로 내세웠다. 태종이 붕어한 이후에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장안 인근의 감업사로 출가해서 [[비구니]]로 지내게 되었지만, 태종의 9남인 고종 이치의 명령으로 정2품 '''소의'''(昭儀)[* 이전 품계였던 재인(才人)에서 '''무려 11품계가 올라간 것으로''', 엄청난 신분 상승을 한 것이다. 정2품 소의에서 무품이자 [[황후]]의 바로 아랫자리인 귀비까지 총 3명의 비(숙비, 현비, 덕비)만 존재할 뿐이었다.]로 복귀되어 651년에 황궁으로 [[금의환향]]했다. [[태종(당)|당태종]]의 [[후궁]]이었다가 그 아들 [[고종(당)|당고종]]의 부인이 된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나라]] 황실이 원래 [[선비족]]과 [[한족]]의 [[무천진 관롱집단|혼혈]]이라 북방 유목[[민족]]의 풍습에 익숙했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유목민족들 사이에서는 아들이 아버지 사후에 자기 생모를 뺀 나머지 [[첩]]들을 자기 부인으로 삼거나 [[형사취수제]]를 함이 일상적인 풍속이었다. [[사마천]]은 《[[사기(역사책)|사기]]》 <[[흉노]] 열전>에서 [[중항열]]의 입을 빌어 >"[[전쟁]]으로 먹고 사는 [[종족]]이다 보니 집안의 계통이 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선택" 이라고 설명했는데 그냥 여자를 [[가축]]과 같은 일종의 [[재산]]으로 취급하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다 보니 부자, 형제간 상속 내지 양도가 가능하다고 인식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북방 유목민족의 이러한 풍습은 여성들이 남편에게 시집오면서 가지고 오는 재산 때문이었다. 중국과는 다르게 여성의 [[재혼]]이 가능하기에 가지고 온 재산을 다시 내놔야 했으므로 이러한 불이익을 막기 위하여 생긴 일이었다. 비슷한 예로 [[칭기즈칸]]은 정실 [[보르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정복된 [[부족]] 여성들을 첩으로 삼았는데 칭기즈칸 붕어시 이들 중 일부에게 약간의 재산을 상속해주었을 뿐, 칭기즈칸의 아들들은 이들을 첩으로 삼았다는 말이 없다. 또 유목민은 반대로 여권이 상대적으로 좋기도 했다. 예시로 [[백등산 전투]]에서 위기에 처한 한고조 유방에게, 흉노의 묵돌 선우는 여자에 약하다며 묵돌의 연지(부인)를 설득하자는 주장이 나왔는데, 정작 묵돌은 자기 애첩도 거리낌없이 죽여버린 인간이었다. 그래서 이를 두고 묵돌이 여자에 약하다는 것은 흉노 사회가 여권이 상당히 높았고, 때문에 묵돌 역시도 여자(부인)의 말을 아주 무시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훗날 [[현종(당)|당현종]] 이융기도 자기 아들인 수왕의 여자였던 [[양귀비]]를 [[도교]] 도사로 출가시켰다가 다시 입궁시키는 형태로 후궁으로 삼았다. [[태종(당)|당태종]] 사후 [[비구니]]로 출가했다가 [[환속]]해 [[고종(당)|당고종]]의 후궁이 된 측천무후와 비교하면 [[종교]]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경우이다. 다만 [[양귀비|양옥환]]의 경우에는 도교에 출가하면 이전의 모든 행적들이 다 지워진다는 것을 활용한 측면이 크지만 측천무후의 경우에는 이러한 과거 [[세탁]]을 할 목적으로 [[절(불교)|절]]에 들어 간 것이 아니라 선황의 후궁들 중 자녀가 없는 사람이 절에 들어간 것으로 봐야 한다.] === 대당제국의 황후가 되다 === 이 무렵 [[고종(당)|고종]]의 정후(正后)인 [[폐후 왕씨(당고종)|황후 왕씨]][* [[고조(당)|당고조]]의 누이인 동안공주의 손녀이다.]와 후궁인 [[숙비 소씨]]의 사이에 암투가 있었는데, 왕황후는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해서 당시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무소의를 이용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왕황후와 소숙비를 모두 제거하고 655년 새로운 '''황후'''로 즉위하게 된다. 또한, 황후가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친정이 한미한 것을 탓하며 반대했던 [[장손무기]]나 [[저수량]] 등의 쟁쟁한 원로 대신들을 정치 공작을 통해 모조리 죽이거나 귀양보내며 그 정치적인 능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장손무기와 저수량 등은 선제였던 태종을 따라 국난을 수차례 해결하고 황제 못지 않은 권력을 쥐었던 무서운 인물들이었다. 게다가 나약한 고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그 위세가 가히 황실을 쥐고 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한 자들과 정치적인 대결을 벌여 제거해버린 일은 측천무후의 무서운 정치적 역량을 드러내는 예이다. 정사에 정력적이지 못한 유약한 황제가 장손무기 등의 원로대신을 처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당태종의 후궁으로 오래 황실에 몸 담았던 점, 왕황후와 소숙비의 암투 속에서 황후 자리를 쟁취한 점 등을 보아 황제보다는 무황후가 원로대신을 처리했다고 봐야 한다. 무씨 일족의 대두 역시 아버지 무사확은 이미 사망했고, 이들을 중용한 것은 고종이었다. 그리고 [[무삼사]] 등의 능력은 제법 유능했기에 이들의 임용에 대해서 별다른 반발이 있지도 않았다. 소숙비는 죽기 전에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고양이]]로 태어나겠다. 그래서 [[쥐]]로 다시 태어난 너를 물어 죽여주마!" 라고 무후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때 아무 이유 없이 쥐로 환생할 거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하는 일부 역사가들은, 무후의 생년을 [[쥐띠]] 해에 맞춰 628년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그 때문인지 측천무후가 살아있을 때는 고양이를 황실에서 키우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귀신]]이 되어 복수하겠다!!" 라는 말에 죽인 다음 시체의 사지를 잘라 술독에 담갔다. 일설로는 산 채로 사지를 잘라 술독에 빠뜨려 죽였다고도 한다. 그후에 >"술 취한 귀신이 과연 날 찾아올 수 있겠느냐?" 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덧붙여 고종이 왕황후를 쫓아내고 무후를 황후로 삼은 결정적인 이유는 무후의 어린 딸 [[안정공주]]가 황후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라는데, 과연 왕황후가 정말로 안정공주를 죽였는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후가 황후를 몰아내기 위해 모함했다는 쪽으로 중론이 쏠려 있다. 안정공주는 단순히 [[영아돌연사증후군|유아 돌연사]]했을 뿐이고, 그 시기가 하필 왕황후의 방문 시기와 맞아떨어져 황후가 누명을 썼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무후가 갓난 [[안정공주]]를 목 졸라 죽이고 황후에게 덮어씌웠다는 주장도 있다.[* <[[연개소문(드라마)]]>에서는 아예 '네가 죽어야 내가 황후가 된다' 라며 [[안정공주]]를 살해하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대조영(드라마)]]>에서도 무측천이 황위에 오른 후 "내가 낳은 아이까지 내 손으로 죽여가며 오른 자리다"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측천무후 소생의 자식으로 무후에게 죽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는데 <황대사> 노래로 유명한 [[장회태자]]이다. 측천무후 본인이 죽인 건 아니고 측근이었던 [[구신적]]에게 죽은 것이었다. [[만화]] 《[[고우영 십팔사략|고우영의 십팔사략]]》은 아예 이 설을 채용했다. 하술할 국내 비디오 시장에 나온 적 있고, SBS 방영으로 더 유명한 <일대여황>에서는 자기를 오랫동안 모셨던 시녀가 안정공주를 죽이고 왕황후를 모함하려고 자작극을 꾸몄다가 들통나자 사실대로 말하고 황궁 연못에 투신자살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왕황후는 몰락했다.] === 무주의 황제가 되다(무주혁명) === 정치적으로 정력적인 편이 아니었다는 고종은 무후에게 많이 의존했다고 한다.[* 이것도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데, 통괄적으로 당고종의 생을 보면 아비였던 태종 이세민에 비하여 정력적이지는 못했지만, 그 이세민이 자신의 후계자로 세운 사람이었다. 또한 왕황후의 경우, [[무천진 관롱집단]]의 지지속에 황후에 오른 사람으로 궁으로 복귀한 지 얼마되지 못한 상황에서 무측천이 쫓아낼 힘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종 시기까지 무측천은 황제였던 고종의 최측근 조언자이자 지지자였을 경우가 더 높다고 봐야한다.] 고종의 신임을 얻어 정치적인 힘을 얻게 된 무후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었던 대신 장손무기, 저수량, [[우지녕]]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 공신 가운데 살아남은 건 [[이세적]] 정도였다. 이세적은 농민 출신으로 장손무기와 저수량, 우지녕 등의 관롱귀족이거나 고위문신들에게 배척받았던 사람으로 무측천의 정권 장악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뒤엔 유골이 분쇄되어 바람에 날려지는 형벌을 받지만 이건 손자인 [[이경업]]이 측천무후에 대항하여 모반을 꾸몄다가 진압당했기 때문이다. 656년 측천무후는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당나라)|이충]]'''(李忠, 643~664)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인 '''[[이홍(당)|이홍]]'''을 황태자로 앉혔으나, 그 역시 곧 죽었다. 《[[십팔사략]]》에서는 소숙비의 장녀 의양공주(義陽公主)와 차녀 선성공주(宣城公主)가 유폐되어 시집을 못 간 것을 이홍이 주선하여 보내겠다고 하자, 그것이 측천무후의 심기를 건드려 독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홍의 사후, 당고종과 무후는 크게 슬퍼하며 이홍을 '[[당의종(추존)|의종]](義宗) 효경황제(孝敬皇帝)'로 추존했다. 아들이 부모를 추존하는 일은 흔하지만 부모가 아들을 추존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보기 드문 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황태자가 된 뒤 과로사했다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당시 기록에서 태자 이홍의 건강이 악화되자 고종과 무측천이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무능한 3남 중종 이현을 쫓아내기는 했지만, 죽이려고 한 적이 없었다. 당장에 가장 유력한 후계자인 자기 소생 아들을 죽인다고 다음 후계자로 지명되는 사람이 또 다시 자기 소생이 된다라는 확고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이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후 자신의 차남인 '''[[장회태자|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 《십팔사략》의 기록에 따르면 고종과 한국부인(무후의 언니)의 [[불륜]]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한다. 그 때문이었을까, [[680년]]에 어머니의 숙청에 불만을 품자 폐위되었다. 무후는 3남 '''이현'''(李顯)을 황태자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훗날의 [[중종(당)|당중종]]이다. 이 와중에 672년 당고종이 병으로 인해 정사를 보지 못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대신 정치를 했으며, 675년엔 아예 [[수렴청정]]을 선언했다. 다만 이때까지도 어디까지나 최종 결재권자는 고종이었다. 무측천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면 반대파가 [[재상]]직까지 올라오는 꼴을 놔뒀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고종(당)|고종]]이 붕어한(683) 이후 황태자 이현(李顯)이 [[중종(당)|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중종의 아내 [[위황후]]와 그녀의 친정 아버지 [[위현정]]이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때 중종이 위황후의 친정 아버지 위현정을 시중으로 삼으려다가 신하들이 반대하자 홧김에 >"내가 [[천자]]인데 [[양위|천자 자리를 준다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라는 초대형 헛소리를 내뱉는 바람에 폐위당했다. 이때도 무측천이 자기 아들을 나서서 자른 건 아니고, 재상 [[배염]]이 태후인 무측천에게 황제의 폐위를 먼저 거론하고 이를 추진하는 절차를 거쳤다.(684)[* 배염은 무측천의 반대파 사람으로 훗날 무측천에게 제거될 정도였으니 비밀리에 이를 꾸몄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 중종의 이 발언이 얼마나 정신나간 헛소리인지는 [[중종(당)|중종]] 문서 참조. 무후는 4남인 상왕 '''이단''', 즉 [[예종(당)|당예종]]을 즉위시킨 이후 계속해서 일어나는 반대파들의 저항과 반란을 진압하고 권력을 강화했다. 대표적인 것이 684년, 이세적의 손자인 '''[[이경업]](서경업)이 일으킨 반란이다'''.[* 국성이라서 반란 이후 도로 성씨를 빼앗겼다. 이적의 집안은 거의 박살이 나서 후손 중에는 [[토번]]으로 달아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경업 자신은 바다에서 배를 타고 [[고려]](옛 [[고구려]]땅, [[신라]]일 수도 있다)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경업의 난을 평정할 때 나섰던 장군 중에는 [[백제]] 유민 출신의 번장 [[흑치상지]]도 있었다.] 그리하여 690년, 무후는 예종에게서 황위를 넘겨받아[* 공식적으로는 조정 신료들과 백성들이 무후의 즉위를 하루가 멀다하고 주청하자 예종도 이에 동조해 스스로 제위를 어머니에게 넘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현실은 시궁창]].] 국호를 [[무주(당나라)|주(周)]]로 고치고 수도를 [[시안시|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그래서 이 시대를 '''[[무주]]시대''', 즉위를 '''무주[[역성혁명|혁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측천무후는 [[주왕]]이 정무를 보던 [[명당]](明堂)을 다시 만들어 세우는 등 고대 [[주나라]]와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드디어 남성 중심의 중화제국 역사상 '''최초로 [[여제|여성 황제]]의 시대가 출현한 것이었다.''' === [[공포정치]]와 [[외척]]정치속의 안정된 내치(무주지치) === 무후는 반대파를 매우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했는데, '''사궤'''(四軌)라는 투서함과 [[불량배]], [[건달]]들을 중심으로 한 [[비밀경찰]]인 '''혹리'''(酷吏)들을 바탕으로, 상대의 비리를 먼저 고발하는 사람이 빠르게 승진하는 밀고 정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게 신하들 입장에서는 [[마녀사냥]]이 열리는 수준이라 조정에 출근할 때면 가족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무사히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양 크게 기뻐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나친 고발로 인해 자신의 인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무후는 정적들이 거의 제거되고 제위를 차지하자 사냥개 역할을 하던 ~~[[예조프]]~~ 내준신과 삭원례 등의 혹리들을 차례로 없애 이들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던 백성들에게 환호를 받는다. 그야말로 [[토사구팽]]이었다. 친정 가문인 무씨들은 그야말로 세도를 누렸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전한]] [[여후]] 이래 최초였을 정도였다. 측천무후가 [[조카]]인 [[무승사]] 및 [[무삼사]]에게 제위를 넘겨주려고 말은 했지만 '조카가 당신 제사를 안 지내줄 텐데? 믿을 건 아들뿐'이라는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사실 무승사, 무삼사가 황제가 되고 싶어서 설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측천무후가 중종을 폐위한 이유가 가족주의인데 무씨가 황제가 되면 무후의 자식들은 숙청당할 것이 분명했다. 이때 측천무후가 자기 자식들이 죽는 꼴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무씨가 제위에 오를 경우 일어날 반란에 대한 염려는 덤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고 한다('''무주의 치'''). 혹자는 무후가 다스린 시기의 내치는 당태종의 [[정관의 치]]에 버금가며 이후 현종때 맞이한 [[개원의 치]]를 불러오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북주]](北周)-[[수나라|수]](隋) 제국 관롱집단들보다는 넒어졌지만, 여전히 협소한 범위의 [[문벌귀족(중국)|문벌귀족]] 집단으로 정계의 고위직을 독점하던 현상을 해소하고, 수나라 시기 시범적으로 도입되던 [[과거 제도]]를 점차 확대시행하여 당나라 후기에 이르면 과거 급제 출신들이 주류를 차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삼채|당나라의 도자기]]가 그 특징을 확립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심지어 이 시기에 [[여권]]이 크게 신장되어 [[일처다부제]]가 실시되기도 했었는데, 거대 제국들 중에서 이런 사례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또한 인재를 아끼는 모습이 보이는데, 무후 시절 '초당 4걸'에 들 정도로 걸출한 문인 낙빈왕이 <토무조격>(討武曌檄)이라는 격문을 지어 이경업 거병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무후를 혹독하게 비판한 글을 읽고 이 글을 누가 지었느냐고 물어보았다. 낙빈왕이 썼다는 말을 듣자 재상에게 >"왜 진작에 이 사람을 나에게 추천해 주지 않았나? 이런 인재를 내가 기용해 주지 않았으니 반란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지!" 라며 낙빈왕의 재능을 아까워했다고 하며, 낙빈왕이 죽은 뒤에도 그의 작품을 모아 엮도록 했다. 즉위 후에도 [[적인걸]], [[장간지]] 같은 뛰어난 재상들이 등용되기도 했다. 한국과의 관계를 보면 신라의 제31대 [[신문왕]]이 《예기》(禮記)와 더불어 문장으로 본받아 쓸 만한 것을 요청하자 담당 관청에게 명령하여 《길흉요례》(吉凶要禮)의 사본을 제작하고, 《문관사림》(文舘詞林) 가운데 모범으로 삼을 만한 글들을 골라 뽑아 50권으로 엮어서 보내주었다고 한다. 신라에서 온 왕자 김인문이 [[694년]]에 사망했을 때는 부음을 듣고 수의와 관작을 보낸 뒤 김인문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그의 영구를 신라로 호송하도록 명령했으며, 또한 702년 제32대 [[효소왕]]이 붕어한 것을 전해듣고 애도 차원에서 2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효소왕의 왕제로 뒤를 이어 즉위한 왕자 김융기[* 당현종 이융기의 이름과 같다고 해서 나중에 '흥광'으로 고치기는 했는데, [[성덕왕]]이 즉위했을 때는 아직 당현종이 즉위(712)하기 이전으로 임치군왕 시절이었다.]에게 효소왕의 계승을 승인한 것도 측천무후였다. === 신룡정변과 마지막, 그리고 역사의 전설 속으로 === 하지만 699년 이후 [[장역지]], [[장창종]] 등 측근 관리에 실패해 폐단이 발생했으며, 705년 말년에 측천무후가 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당 황실의 충성파들이 '''[[신룡정변]]'''을 일으켜 그만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압박을 넣게 된다. 이에 무후는 당시 황태자로 있었던 아들 이현(중종)에게 양위했고, 무주는 1대만에 멸망하며, 당나라 농서 이씨 황실이 복벽했다. 놀라운 것은 보통 비정상적으로 제위에 오른 사람이 퇴위하면 죽음을 면하기 어렵고 측근들도 숙청되는 게 보통인데, 이때는 신하들이 거사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측천무후에게 당을 부활시키고 [[태상황|태상황제]]로 물러나면 더이상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한 것이었다. 이는 무후가 이미 병이 깊어서 오래 살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측천무후가 당중종과 당예종의 모후이며 당현종의 친조모라는 점이 가장 컸다. 아무리 측천무후가 당을 멸망시킨 역적이라지만, 당나라 부활 이후 황제들이 전부 고종과 측천무후의 직계였다. 무후에게 그 이상의 처벌을 가한다면 신정권이 친어머니를 핍박한 패륜아 취급을 받는 것은 물론이요, 이후 황제들이 대대로 역적의 자손이 되어 정통성 시비까지 벌어지는 빌미가 될 수 있었으니 처단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또 측천무후가 순순히 물러나준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본인이 제 발로 물러났는데 이후에 누가 무주 재건을 외치겠는가. 즉 위의 조건에 측천무후가 순순히 퇴위하여 뒤에 벌어질 불씨가 없어지니 이들도 부담없이 측천무후를 살려주었다고 볼 수 있다. [[파일:d01373f082025aaf425f4392f9edab64034f1a7d.jpg|width=400]] 그래도 권좌에서 쫓겨났다는 충격이 컸는지 그해 말 측천무후는 >"[[황후]]의 예로서 [[장례]]를 치르고, 묘비에 한 자도 새기지 말라." 라는 유언을 남긴 채 붕어했다고 한다. 측천무후가 왜 자신의 비석에 아무런 글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지를 두고 '내 삶에 대한 평가를 모두 훗날의 역사에 맡긴다.'는 겸허함으로 보는 해석과 '내 공적은 너무도 커서 이런 작은 비석 따위에 다 새기기도 모자란다.'는 자뻑으로 보는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있다. 어쩌면 둘 다를 노렸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겸손한 척하면서 자뻑하는 '무자 공덕비'는 측천무후의 전유물은 아니었고, 중국 [[역사]]상 몇몇 인물(대표적으로 명신종 [[만력제]])도 남겼다. 또한 자신이 모함해 죽인 폐후 왕씨 일가를 복권시키라고 [[태자]]에게 간청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나는 이 나라의 [[황제]]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도 한다. 아무튼 측천무후의 유언에 따라 측천무후의 묘비에는 [[글자]]가 없는데 그래서 '무자비'(無字碑)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중국]]의 소설가 [[샨사]]는 측천무후의 무자비 앞에서 [[소설]] 《측천무후》를 구상했다고 한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9412092&memberNo=33180239|측천무후 관련 포스트]] == 평가 == >치세와 난세는 시세요, 존재와 멸망은 형세이다. 만일 걸주(桀紂)가 임금의 자리에 있다면 아무리 요임금(堯)이 10명 있다고 하여도 능히 다스리지 못하고, 만일 요순(堯舜)이 임금의 자리에 있다면 비록 걸왕이 10명 있다고 하여도 능히 어지럽히지 못한다. 여자가 겁이 많은 사내를 부리고, 적당한 때를 타서 세력을 얻고, 또한 백성의 생명을 가볍게 다스리기에 족하여, 방종하게 불의의 위세를 행사하였다. 무릇 무씨가 칭제한 해를 보고 있자면, 탁월한 재주를 지닌 자가 많았고, 가족과 헤어짐에 괴로워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으며, 조정의 위기에 분하여 주먹을 쥐었지만, 선제의 은혜에 능히 보은하지 못하며 임금의 자식을 지켰다. 이윽고 무고한 이들이 모함을 당하고 목을 내밀어 주륙되었으며, 천지를 삼태기로 삼았으니, 과거가 어찌 편안하였는가? 슬프구나! 옛날 여자의 참언은 옛날에 해악을 칭했고, 짐승과 같은 이의 독은 대대로 재앙을 낳는다. 무후는 적자의 지위를 빼앗을 때, 목구멍을 바짝 조르고 갓난아이들의 숨통을 끊었으며, 죄인의 시체를 젓갈에 담그고 후비의 뼈를 잘게 부수었으니, 그 부도덕함이 매우 심하였고, 또한 간사한 자가 여자의 상태를 강샘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치에 바른 언론이 널리 퍼지고 그 시대의 올바른 인물이 나왔다. 처음에는 비록 부인이 전권을 맡았지만, 종국에는 능히 아들에게 정권을 돌려주고, 세간에 떠도는 말이 위원충의 죄를 바로잡았고, 교묘한 언사가 적인걸의 마음을 위로하였고, 시헌을 높이고 총신을 억누르며, 충언을 듣고 혹리를 주벌하였다. 임금의 뜻이 있었구나, 임금의 뜻이 있었구나! >---- >나라와 백성에 재앙을 끼치는 여자가 얼굴을 바꾸고, 태자궁에 태자가 창성하였다. 어찌 창천이 되어, 이런 기허(夔魖)를 낳았는가? 제위를 강탈하고, 황거를 더럽혔다. 요사스러운 흰 머리가 다하니, 어떻게 아랫사람의 형편을 굽어 살폈는가. >---- >{{{#!wiki style="text-align: right" 《[[구당서]]》}}} === 내치의 경우 === 사실 측천무후 역시 몇몇 여성 지도자들처럼 붕어한 후 반대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긍정적인 면은 거의 감춰지고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 무후에 대해서는 영 부정적인 인상이 매우 강하다. 가장 큰 이유는 잔인한 [[숙청]]과 [[공포정치]]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롱집단]]의 위력을 강조하는 이들에 따르면 무후의 잔인함은 자신의 성격보다도 당시 시대 상황이 무후의 성향과 맞물린 선택이었다는 주장도 상당하다. ==== [[관롱집단]]의 위험성 ==== 관롱 세력의 위협을 강조하는 이들에 따르면, 애초에 [[남북조시대]]부터 이어져온 거대 세족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고, 당제국은 모양새만 한족 국가인 사실상의 호한 연합 정권[* 그나마도 비중은 '호'쪽, 즉 선비족이 더 높았다.]으로서 세워진 것이었다. 애초에 당 왕조의 전신이었던 [[수나라|수]] 왕조가 허망하게 무너진 결정적인 이유가 [[당(통일왕조)|당나라]]를 건국한 [[당고조|이연]]을 위시로 한 [[관롱집단|거대 세족]]들의 반발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세족을 숙청하는 일은 당 왕조의 흥망이 걸린 중대사였다. [[정관의 치]]라고 추앙받는 태종 이세민의 시기에도 장손무기 등을 위시로 한 세족들의 힘은 여전히 강력했다. 이들을 속칭 '''무천진 군벌'''이라고 부르는데, 명신으로 칭송받는 [[위징]]조차 그런 세력들과 인척을 맺으며 신경을 쓸 정도였다. 태종 말년부터 당나라의 정치 체계가 문란해지기 시작했으며, 정관의 치에도 불구하고 중원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으며, 생산력 또한 [[문제(수)|수문제]] 시절의 [[태평성대|개황성세]]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면이 있었다. 이건 당태종이 잘못한 게 아니라, [[수양제]]가 워낙 제대로 말아먹은 탓에 수습이 안 된 것이었다. 게다가 고종 또한 강인한 성격이 못되어, 측천무후에게 숙청과 부패의 척결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숙청이 피비린내난다고 하지만 제왕에게 요구되는 점에는 비정함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국]] 이후 [[수성]]에 있어 왕조의 안정을 위한 질서를 다잡아야 한다는 걸 상기하자면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 시점에 강인한 성격의 측천무후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어찌보면 결국 더러운 일을 자기가 다 맡아쓴 셈이다. ==== 고종의 무후 기용설 ====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의 고종의 역할에 대해서 [[재평가]]를 하는 이들도 많다. 실제로 고종이 체력적으로 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런 세력도 없는 측천무후가 고종의 협력관계 내지는 동조없이 무천진 군벌을 등에 업은 황후 왕씨를 몰아내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는 것 때문에 측천무후가 고종을 쥐고 흔든 것이 아니라 조선의 [[숙종(조선)|숙종]]과 [[장희빈]]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고종 입장에서 무천진 군벌 정리를 위해서 측천무후를 기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한국사에서 비슷한 예가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명성황후]]이다. 그러나 나름 국가 시스템을 정비하고 민생을 안정시킨 측천무후를 외척 세도의 탐학과 외세 줄타기로 국가 멸망으로 이끈 명성황후와 암군인 조선 고종에 비유하는 건 무리이다.] 실제로 무천진 군벌 축출은 측천무후의 입궐과 거의 동시에 이뤄지기 시작하는데, 이때는 측천무후가 자기 앞가림하기 바빴던 시절이다. 그리고 고종이 살아 있는 동안 측천무후는 절대 주도적으로 나선 적이 없는 것도 분명하다. 다만 고종의 경우는 워낙 체력이 약해서 수시로 쓰러졌기 때문에 사실상 고종과 측천무후의 협치에 가까웠는데, 사실 이것도 [[수문제|수나라 문제]]가 보여준 장면이었다. 수와 당 초기처럼 북방 계통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을 때나 종종 보이는 모습이다. 이후 고종이 상관의를 통해 무후를 폐위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상관의가 잘리고 무후가 고종을 협박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도 고종이 무후의 목줄을 부여잡은 것이지 어디까지나 최고 권력은 고종에게 있었다. 더욱이 고종이 그 당시 골골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황권의 진공 상태를 고려한 조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무후는 이후 고종에게 한동안 허리를 굽혔다. 게다가 고종 시기에도 측천무후의 포지션은 어디까지나 현명한 황후이자 보조자에 불과했던 탓에 고종의 첩들을 자신이 화가 난다고 죽일 만한 세력이 아니었으며, 결정적으로 죽였다는 첩들 외에도 고종에게는 여러 첩들이 존재했다.[* 무후가 죽였다는 첩 혹은 고종의 여인들은 폐황후 왕씨, 숙비 소씨, 한국부인 무씨, 위국부인 하란씨로 왕씨, 소씨는 무후가 황후로 책립되는 과정의 정쟁에서 제거되었고, 한국부인, 위국부인은 무후의 언니, 조카로 고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이것이 [[간통|통정]] 관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도리어 고종의 자식을 낳은 유씨, 정씨, 양씨 등은 살해당하지 않았다.] 고종 사후에야 여러 남첩들을 들였으나 그들이 정국을 쥐고 흔들만한 권력을 소유했다는 증거는 그다지 없다. 다만 무측천 재위 말년에 통치력이 쇠퇴한 시점부터는 이들 남첩들이 궁중을 장악하면서 점차 입김을 늘려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숙청]]의 불가피론 ==== 이런 입장에서 보면 측천무후는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청나라]]의 제5대 세종 [[옹정제]]처럼 특권 계층의 권리와 힘을 숙청을 통해 제어하며,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끌어올리고, 동맥 경화 현상을 보이는 기존의 주류 세력을 대신하여 신진 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매력없고 잔혹하며 그 시대에 인정받기 힘들고, 주류층과 권신들에게 군주에 대한 인기를 크게 상실하게 만드는 일이었지만 국가를 위해서라면 누군가는 반드시 해주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군주들이 등장하면 그 뒤에 반동으로 너그럽고, 인자한 군주가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군주의 시대에 [[태평성대]]와 이후의 몰락이 오가게 되는데 당현종은 자기 대에 성세인 개원지치와 난세인 천보난치가 공존하는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사실 현종도 측천무후의 손자가 아니랄까봐 자신의 반대파였던 큰어머니 위황후와 [[사촌]]인 [[안락공주]]를 위시한 위씨 일족, 할머니의 무씨 일족, 고모인 [[태평공주]]와 그녀의 세력을 싹 숙청한 전례가 있어 마냥 너그럽고 인자한 타입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당제국의 사실상의 창건자가 태종이고, 고종 시절부터 무후가 통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후는 실질적인 당제국의 제3대 황제가 된다. [[조선]]의 경우 [[조선 태조|태조]] 이성계가 [[창업군주]], [[조선 정종|정종]] 이방과를 징검다리라고 치면 실질적으로는 제2대째인 [[태종(조선)|태종]]이 숙청과 [[사병]] 철폐 등으로 왕권을 강화시키고 제3대째인 [[세종대왕]]이 조선의 기틀을 잡은 것이 된다. 반면 [[수문제]]는 제1대 황제로서 굉장한 업적을 이룩하고 태평성대를 이끌었지만 제2대 [[수양제]]가 나라를 말아먹어서 박살난 것을 생각해보면 측천무후의 숙청을 통한 공포정치는 시대의 필수적인 요구라고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측천무후가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는 말도 사실과 다르다. 무후의 권력은 고종 사후에도 신하들에게 여러 번 도전을 받아야 할 정도로 절대권력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황후나 태후라는 위치를 최대한 부각시켜야 권력 유지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측천무후에게는 정치적인 배경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고종과의 연계가 되지 않으면 그나마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훗날에야 절대권력에 걸맞은 권력을 쥐게 되나 그 시기는 700년 즈음으로 무후 통치기의 말년 중의 말년에 해당되는 시기였다. 또한 혹리들도 고종이 붕어한 683년부터 즉위하는 690년까지만 활동했을 뿐, 즉위 직후에 대부분 숙청했으니 측천황제의 시대가 "공포정치"라는 것은 좀 거리가 있다. 게다가 측천무후를 까는 또 한 가지의 요소인 "음탕한 년" 혹은 "요녀"로써의 이미지도 과장된 것이 많다. 특히 측천무후가 죽였다고 하는 사람이 공식 기록상에서는 살해된 후에도 버젓이 활동하는 기록이 남아있는 등 여러 사료를 교차비교를 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 ==== [[과거 제도]]와 비(非) [[관롱집단]]의 양성 ==== [[과거 제도]]의 완성이자 황권의 강화책인 '''전시'''를 역사상 최초로 시행한 것도 측천무후였다. 측천무후는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방식인 과거 제도의 전시 시도와 더불어, 인재 등용을 위한 여러 가지 파격적인 제도를 제시하여 시행했다. * 첫째, 스스로를 추천하는 '''자거'''(自擧) 제도를 처음으로 열었다. 이 제도가 시행됨으로써 천하의 인재들이 출신을 불문하고 모두 능력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추천했고, 합격하면 바로 채용되었다. * 둘째, '''무거'''(武擧) 제도를 시행하여 유능한 [[무관]]을 선발했다. * 셋째, '''시관'''(試官) 제도를 시행하여, 관리의 소질을 보증할 수 있도록 했다. * 넷째, 측천무후는 사회 최하층까지 사람을 보내 인재를 선발했다. 하층에서도 당나라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가 여럿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다섯째, '''제과'''(制科)를 개설하여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재를 선발했다. * 여섯째, 관원들이 유능한 인물을 추천하는 것을 장려했다. 이때 뽑혀서 측천무후의 친위집단이 된 것이 '''북문학사'''(北門學士)였다. 원래 관리가 궁궐에 입궐할 때,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하는 궁궐 남문으로 입궐하여 정사를 논하는 것이 원래 예법이었는데, 북문을 통해 몰래 측천무후의 정치적인 브레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칭하는 단어가 바로 '북문학사'였다. 더불어 훗날 [[개원의 치]]로 칭송받는 [[현종(당)|현종]]의 치세를 이룩하게 한 기본적인 시스템과 [[요숭]], [[송경]] 등의 인재 풀은 사실상 측천무후가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위 계승에서 [[태평공주]]가 아닌 현종을 지지한 게 바로 이 신진 비관롱집단이었다. 이런 면에서 측천무후는 최소한 용인과 정치력 자체는 발군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만 전시는 당중종의 복벽으로 폐지되는 바람에 전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북송]]시대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 비판 === 측천무후는 비교적 성공적인 내치에 불구하고, 외치에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정확히는 당제국의 최대 강역을 이룩한 고종 사후부터가 문제였다.[* 대체로 고종 시기 [[백제]] 및 [[고구려]]의 멸망도 무후의 공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백제 멸망의 경우, 무후가 완전히 전면에 나서기 이전이었다. 도리어 무후는 고구려 원정에서 고종의 친정을 반대하며 반전 여론 혹은 고종의 대외 정책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입장을 취했다. 고종이 군사적인 해결을 선호한 반면, 무후는 외교적인 해결을 선호했다고 한다.] 무후의 시대는 북방 민족과 수많이 싸웠지만 대체적으로 영향권과 영토가 크게 축소되는 양상을 보였다. 서쪽의 [[토번]](티베트)에는 [[가르친링]]으로 대표되는 대당 강경 정권이 들어서면서 하서의 패권을 두고,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며 [[대비천 전투]], 승풍령 전투, 인식가 전투, 소라한산 전투 등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682년 [[돌궐]] 제2제국([[후돌궐]])이 [[힐질리시가한|골돌록]][[가한]](일테리시 카간)에 의해 부활했으며, 691년에는 [[묵철가한]](카프간 카간)이 즉위해 [[쿠차]]와 사주([[돈황]])의 ([[안서도호부]])를 위협했다. 한창 때는 [[하북]]은 커녕 [[산동]]까지 털리는데도 손을 쓰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이진충의 난|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1차에 180,000명의 대군을 투입했다가 황장곡 전투에서 깔끔하게 괴멸되었고, 2차로 300,000명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력으로는 진압을 못해서 돌궐 제2제국의 지원을 받아 겨우 진압했다. 그나마 698년에 돌궐 제2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곧바로 동북방의 거란족과 [[해족]]이 재독립하며 [[요동]]과 [[요서]]의 통제력을 상실한 걸 보면 진압한 이후의 통제조차 혼자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약해졌다는 의미가 된다. 거란의 반란을 틈타 나라를 세우겠다며 이주하던 [[대조영]]을 추격했지만 [[천문령 전투]]에서 대패하여 그토록 많은 인력과 물자를 갈아넣어 간신히 멸망시킨 고구려가 [[진|발해]]라는 이름으로 재건되는 것을 지켜보는 처지가 되었다. 군사적인 실패의 이유도 그녀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관롱집단을 숙청하던 와중에 [[정무정]][* 돌궐 전선에서 활약했으나 서경업의 반란에 연좌되었다는 무고를 받고 군중에서 처형당했다. 그 결과는 대돌궐 방어선의 와해였다. 돌궐군은 출전할 때마다 정무정의 사당에 기도를 드리고 출전했다.], [[왕방익]][* 안서 4진을 되찾은 명장이었으나 왕황후의 일족이라는 이유로 유배되던 와중 사망했다. 그 결과는 서역을 토번에게 다시 빼앗겼다.], [[흑치상지]] 등의 양장들이 숙청당한 부작용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무측천 일가가 군사적으로 무능했다.[* [[이진충의 난]]때 이게 드러나고 말았다.] 대표적으로 무측천의 조카인 [[무삼사]]와 하내왕 [[무의종]], 건안왕 [[무유의]], [[설회의]] 등이다. 먼저 무삼사의 경우, 영주 반란 제1차 진압군 파견 당시 유관도안무대사에 있었다. 선봉인 조인사와 장현우, 마인절 몽땅 포로가 된 뒤 연비석과 종회창의 군대가 몰살에 가까운 대패를 당하자 황급히 장안으로 도주했다. 무의종의 경우에는 낙무정 산하의 거란군이 조주에 있는 것을 보고 싸우지도 않은채 상주로 달아났고, 조주가 거란군에게 도륙당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참모가 진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물자를 버리고 도망친 것은 덤이다.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전당문》에 있는 [[장열]]의 기록과 《자치통감》에 이 사실이 그대로 나와 있다.] 무유의의 경우에는 그의 소속이었던 청변도행군대총관 [[왕효걸]]이 죽는 등 악재가 있었다.[* [[진자앙]]의 <[[등유주대가]]>가 창작된 배경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소굉휘가 왕효걸에게 지원을 해주지 않아 왕효걸이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은 무삼사가 군대를 모집할 때는 거의 모이지 않았고, 이현이 군대를 모집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심지어는 북송 시기 거란, 즉 [[요나라]]가 강대해진 것이 무측천 때문이라는 과장도 나왔다. 다만 이런 사태의 책임을 측천무후 한 명에게 모두 떠넘김은 부당하다. 태종과 고종의 치세에 당나라는 한족 문화 국가로서[* 엄밀히 말해 건국 집단은 선비족 출신이지만, 성격을 따지자면 한족 문화권 국가라 봐도 무방하다.] 최대 판도를 구축하고, 이민족들을 기미체제로 편성했다. 하지만 이들 이민족들이 완전한 야만족도 아니고 돌궐, 고구려 등 국력이 통일 중국에 미치지 못한다 한들 중국에 맞선 강력한 국가를 이룬 적이 있는 이들이었다. 비록 당군에 패배하여 기미체제 속에 편입되었지만, 기미체제가 불안정해지면 얼마든지 독립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역량이 있었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기미체제의 불안정한 조짐은 다름아닌 당고종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측천무후가 이를 막지 못했긴 했지만, 측천무후 한 사람의 책임만은 아니었다.''' 측천무후의 긴 치세는 여러 문제점을 남겼는데 새로 뽑힌 신진 집단이 측천무후의 개인 숭배를 위해 사용되었으며 후계를 튼튼히 할 수 없었다는 여제의 태생적인 한계 탓에 측천무후 사후 당나라는 다시 한 번 계승 문제로 혼란에 시달려야 했다.('''[[경룡정변]]''', '''[[당륭정변]]''', '''[[선천정변]]''') 더구나 토지제도인 [[균전제]]와 이를 기반으로 한 [[부병제]]가 고종 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해서 측전무후 때 완전히 붕괴되었는데 외치의 실패는 이런 결과일 뿐이다. 부병제가 붕괴하자 군사적인 약화를 극복하기 위해 [[현종(당)|당현종]]은 대대적인 군사개혁을 실시했으니 바로 군진체제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번진]](藩鎭)과 [[절도사]]가 등장하고, [[안사의 난]]이 일어나며 당 왕조는 서서히 중당(中唐)에서 만당(晩唐)으로, 나아가 [[오대십국시대]]로 접어들었다. == 가계 == * 부: [[무사확]] * 모: 양씨 * 언니: 한국부인 * 여동생: 무씨 * 남편: 태종 * 남편: 고종 * 아들들 * 장남: [[이홍(당)|의종 경황제]] * 차남: [[장회태자]] * 3남: [[중종(당)|중종 화황제]] * 4남: [[예종(당)|예종 흥황제]] * 딸들 * 장녀: [[안정공주]] * 차녀: [[태평공주]] 가족사가 조금 복잡한데 아버지인 무사확과 전처인 상리씨 사이에서 나온 형제 두 명인 무원상과 무원경이 있었고, 이후 무사확과 양씨가 재혼해 언니인 한국부인[* 이름이 한국부인인 것이 아니라 직위명이다. 본명은 불명이다.]과 여동생인 무씨가 있었다. 어머니 양씨는 수나라 관덕친왕 양웅의 조카딸이자 시안공후 양사달의 막내딸로 명문가 출신이었다. 훗날 무측천이 황후가 되자 '영국부인'에 봉해졌다가 죽은 뒤 '노국부인'으로 봉해져 시호를 받았고, 함양에 안치되었으며 무측천이 이미 죽은 아버지를 '태원군왕'으로 봉하면서 어머니를 그곳의 왕비로 올렸다. 고종과 측천무후의 아들들은 어머니에게 눌려 있었던 탓에 이후에도 기를 잘 펴지 못한건가 싶을 정도로 황제답게 혼자 정권을 쥐고 있었던 시간이 길지 않은 편이다. 장남인 '''이홍'''의 경우, 일설에 의하면 어머니의 뜻을 자주 거스르다가 독살당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차남 '''이현'''의 경우, 역시 어머니에게 밉보였다가 쫓겨났다. 3남 중종 '''이현'''은 예전부터 유약했다고 하며 복위한 뒤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정사를 처리하는데 아내 [[위황후]]에게 의지했다. 이런 아들들에 비해 중종의 딸이자 측천무후의 손녀인 [[안락공주]]나 측천무후의 막내딸인 '''[[태평공주]]'''는 권력욕이 강했다고 한다. 안락공주는 어머니 위황후와 손을 잡고 자기 친아버지인 중종을 [[만두]]로 독살했을 정도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태평공주는 성격이나 재능면에서 측천무후와 닮은 점이 많아서 측천무후가 특별히 아꼈다고 한다. 그러나 태평공주가 중종보다 자기가 황제에 어울린다며 황태녀의 자리를 요구하자 >"네가 뛰어나다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러나 또 여자가 황제가 되려면 신료들을 또 다시 대숙청해야 할텐데 나도 그렇게 황위에 올랐지만 그건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세도는 남아 있어 4남 예종 '''이단'''이 복위한 건 여동생 태평공주와 후에 [[현종(당)|현종]]이 된 아들 이융기 덕이 크며 예종이 재위한 동안은 거의 태평공주가 정국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예종이 건강에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이융기에게 빨리 선위한 것도 이런 정국을 뒤집어엎기 위함이었다.] 측천무후의 판단은 적중하여 태평공주는 결국 나중에 황제로 즉위한 조카와 암투를 벌이다가 져서 자신은 물론이고 일파까지 대숙청당했다('''[[선천정변]]'''). == 야사 == * 유명한 관상가인 원천강이 무사확의 집에 들렀다가 갓난아기였던 무측천을 보고 봉황의 목과 용의 눈을 지닌 귀한 상이며 여자아이라면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다만 이 이야기는 현실성이 떨어지는게 당장 황제인 이세민이 무씨가 이씨를 멸문시킨다는, <여주무왕> 예언 때문에 전혀 관련없는, 능력있는 장군을 누명 씌워 죽였을 정도로 전전긍긍했는데 무려 무씨 집안에서 [[황제]]의 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면 불보듯 뻔하게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주무왕>이 아니더라도 무사확 일가는 반역죄로 꼬투리를 잡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당태종이 이 <여주무왕>의 예언을 결정적으로 확신했던 것은 그녀가 커서 궁으로 들어온 뒤 이순풍으로부터 <여주무왕>에 대한 풀이를 듣고 난 후였다. 즉 이미 손쓸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주무왕>에 대한 풀이를 해준 이순풍 역시 이미 그가 궁에 있고 대세 역시 <여주무왕>에게 있으며 이 이상 <여주무왕>을 찾아내 죽일 경우, 오히려 태종의 자손들이 다시 태어난 그에게 멸문당할테니 더 이상 그(녀)를 찾지 말라고 했었다. 더 자세하게는, 지금 <여주무왕>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죽여도 그 운명을 지닌 사람이 다시 환생할 것이며, 그때는 더 젊고 혈기방장한 상태이기 때문에 숙청에 있어서 자비를 베풀 가능성이 없지만, 지금 살려 두면 나이가 좀 있는 상태에서 권력을 잡게 되므로 숙청의 정도가 약해질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로 인해 측천무후는 죽임을 당하는 대신 감로사로 가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다만 이 <여주무왕>에 관련된 설 자체가 밑에 이군선 이야기와 더불어 야사라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은 금지다.] * 의도하진 않았지만 무후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인물이 한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당태종 당시 좌무위장군을 역임했던 이군선(李君羨)이었다. 능력있는 인물이었는데도 화주자사로 강등된 뒤 반역죄로 죽었는데 바로 <여주무왕>의 예언과 더불어 그의 이력 때문이었다. 그는 낙주(洛州) 무안(武安) 출신으로 아명이 '오낭'(五娘)이었으며, 군벌 유무주(劉武周)를 토벌해 무련현공(武連縣公)에 봉해져 황궁의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을 수호했다. 그런데 그의 이력에 '무'(武')자가 많고, 아명에 '낭'(娘)이 들어가는 바람에 당시 <여주무왕>의 예언을 전전긍긍하던 당태종에게 찍혀서 <여주무왕>으로 지명되어 죽었다. 훗날 그의 가족들이 탄원을 올려 이군선은 명예회복이 되었고 관직까지 돌려받는데, 얄궂게도 이군선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사람이 <여주무왕>의 당사자였던 측천무후였다. 다만 이 이야기가 단지 야사일 뿐이라는 말도 있다. * 용수나무에 얽힌 일화가 있다. 측천무후가 어느 날 [[가마(탈것)|가마]]를 타고 산책을 나갔을 때, 비가 갑자기 엄청나게 쏟아져서 시종들이 모두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때 측천무후는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거대한 용수나무를 보고 비를 피했다. 그때 무후는 용수나무 앞에 향을 피우고 >"어느 날 뿌리가 마르고 손님이 주인이 되리라." 라는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진짜 이씨 왕조 대신 무후가 황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측천무후는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후 모든 사찰에 용수나무를 심고 받들라 명했다고 한다. 용수(龍樹) 즉 용화수나무에 담긴 [[불교]]적인 의미와도 관련이 깊다. [[불경]]에 따르면 [[미륵보살]]이 마지막 부처로써 용화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용화수나무 아래에서 설법을 세 번 함으로써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 불교를 숭상했던 측천무후 자신이 미륵의 화신임을 강조하고자 내세운 프로파간다 가운데는 《대운경》이라는 불경에 >"미륵의 화신인 정광천녀(淨光天女)가 중생을 구제한다." 라고 언급한 부분도 있었는데, 《대운경》을 토대로 여자로서 즉위한 자신의 위치를 정당화하고, 나아가 필연적인 일로 굳히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대운경》을 전국에 뿌리면서 각 지역마다 '대운사'라는 절을 새로 짓게 했으며, 이 제도는 일본에 전해져서 [[쇼무 덴노]](제45대)의 '고쿠분지' 건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유명한 [[도다이지]]도 그러한 고쿠분지였다.] 측천무후의 즉위나 통치를 반대했던 세력(특히 유학자)에서는 측천무후가 자기의 통치를 위해 아예 [[위경]] 하나를 새로 지어냈다고까지 몰았고, 오늘날에는 《대운경》 자체는 위경이 아니라고 보는 반론도 나와 있다. 아예 가짜 경전을 지어냈든 원래 있던 경전의 내용을 끌어온 것이든 측천무후가 불교를 자신의 정치에 끌어들여 입지를 굳히려고 한 것만은 틀림없다. * 측천무후의 [[성욕]]이 엄청나 [[남총|남첩]] 3,000명을 뒀었다는 [[하렘]] 드립도 있는데, 측천무후를 포함한 여성 권력자 관련 [[섹드립]]은 이런 식으로 비상식적인 드립이 많다. 측천무후 후대인 손자 현종에게도 [[첩]] 40,000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거의 동시대의 기록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을 봐서는 기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현종의 후궁 40,000명 운운은 《[[신당서]]》 <환관지>에 있는 "개원 연간에는 궁빈이 40,000여 명이 있었다."라는 구절에 근거하는데, 《신당서》를 쓴 [[구양수]]의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5245|말장난]]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현종에 대해서 이런 비판이 가능했다면, 측천무후에 대해서는 더한 소리가 불가능하지 않다.] * [[당나라]]의 [[태종(당)|태종]]이 [[신라]]의 [[선덕여왕]]을 두고 >"[[여왕]]이 통치한다" 며 조롱하더니 정작 자기들은 여제가 나온 것에 더해 나라 이름도 잠깐 갈아엎어졌음을 보면 재미있는 아이러니이다.[* 더군다나 선덕여왕은 엄연히 전대 진평왕의 공주로서 즉위한 것이지만, 측천무후는 비록 황후였긴 해도 엄연히 당나라의 황족인 농서 이씨와는 전혀 별개 집안의 사람이었다.] == 여담 == * 측천무후는 '''[[미각]]이 뛰어났다고 한다'''. 재위 시절 중, 민가에서 엄청나게 큰 [[무(채소)|무]]가 나와서 그녀에게 진상했을 때, 측천무후는 황실 [[요리사]]에게 무를 이용한 요리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요리사는 무를 채 썰어 녹두 가루를 묻혀 볶은 후, [[오징어]], [[새우]], 살코기를 넣어 측천무후에게 바쳤다. 이 요리를 그녀가 '''가연채'''(假燕菜)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식습관과 연관이 깊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비타민]]과 [[무기질]]이 많이 들어있는 식품을 많이 섭취했으며, [[꽃]]으로 만든 음식을 즐겨 먹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측천문자]]'''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는데, 완전 다른 문자를 만들어낸 게 아니고 그냥 한자의 제작 원리에 따라 만든 글자, 즉 한자 몇 개를 더 만든 셈이다. 이들 문자는 기존 한자보다 획수가 더 많고 복잡한 경우가 많아서 측천무후 시기가 끝난 뒤로 사멸해갔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를 참조. * 스스로를 [[노자]] 이이의 후손을 자처하고 [[도교]]를 숭상한 당나라와 달리 측천무후는 '''[[불교]]를 숭상했다'''. 이에 한 몫을 거든 건 그녀의 내연남인 풍소보로, [[미륵]] 신앙을 이용해 측천무후를 떠받들었다. [[파일:/20120517_104/seejaelee_1337206380172rJeAj_JPEG/OPDkUhiBLt_e_RTPsKA8Jg.jpg]] 실례로 [[낙양]] 근처에 있는 [[룽먼석굴]]의 대불은 측천무후의 얼굴을 본따 만들어졌다고 한다. 위의 초상화와 비교해보자. 확실히 위압감이 느껴진다. * 불경을 읽을 때 해당 불경을 찬미하기 위해 서두로써 읽는 '''<개경게>'''(開經偈)는 측천무후가 직접 지었다고 한다. > 無上甚深微妙法 (무상심심미묘법) 무상(無上)의 깊고도 깊은 미묘한 법은 > 百千萬却難遭遇 (백천만겁난조우) 백천만 겁이 지나도 다시 뵙기 어려워라. > 我今聞見得受持 (아금문견득수지) 나 지금 듣고 보고 받아 지니고자 하오니 > 願解如來眞實義 (원해여래진실의) 바라건대 여래께서 진실한 뜻을 풀어 주옵소서. * 유달리 문자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여, '''명칭을 갈아치우는 것을 상당히 즐겼다'''. 3성 6부를 근간으로 하는 [[당나라]]의 관제는 그대로 두고 이름만 바꾸는가 하면 정적들의 성씨를 나쁜 뜻의 글자로 고치기도 했다. 보통 황제들의 [[시호]]는 한 글자 또는 두 글자가 일반적이었으나 무후가 집권하면서 고조와 태종, 고종의 [[시호]]를 대폭 늘리는 바람에 '''시호 인플레가 벌어져 [[당나라]]부터는 부득이 [[묘호]]나 [[연호]]로 황제를 통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15년도 채 되지 않는 재위기간 동안 [[연호]]를 14차례나 바꾸어 역사가들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는 큰 재미를 못보다 보니, 재미있게도 '''최초의 [[판다]] 외교를 시도한 인물로서 알려져 있다'''. 측천무후는 두 마리의 판다를 일본에 선물로 보냈다. 요동([[발해]]), 동([[신라]]), 서([[토번]]), 북([[돌궐]])까지 당나라의 군사 영역이 크게 축소되다 보니, 동부의 신라와 발해를 견제함과 동시에 외치의 안정을 취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나라]]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방향이라고 할 만한 북쪽에는 [[돌궐]] 제2제국, 서쪽에는 [[토번]], 동북-동해에 이르는 영역에는 [[발해]]-[[신라]]가 들어서는 상황이었다. 이들이 제각기 한꺼번에 당나라를 견제하기 시작한다면, 연이은 참패로 군사적인 역량이 꺾인 당나라로서는 그 큰 땅덩어리가 도리어 악재로 작용하여 사방의 국경 지대가 공중 분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괜히 그 자존심 높은 중국의 황제가 [[일본]]에게 다급한 화친 의사를 보낸 것이 아니다. [[https://news.joins.com/article/19670407|#]] * [[한국]]에서 그녀에 대해 안 좋은 평을 한 최초의 인물은 고려 중기의 [[김부식]]이었다. 심지어 조선 초기의 [[권근]]은 >"[[당태종]]이 [[선덕여왕]]을 왕으로 임명했기에 측천무후가 [[중국]]에 나왔다" 고 비난했다. 사실 좀 알고 보면 권근의 이야기가 웃긴 셈인데, 맨 처음에는 당태종이 오히려 사람을 보내어 대신 통치하도록 하려고 했고, 측천무후가 황제에 오른 것과 당태종은 큰 관계가 없다.[* 굳이 들자면 측천무후를 후궁으로 들인 것,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비난하는 것도 뭣하다. 여기에 이미 중국에서는 [[3세기]] [[위(삼국시대)|조위]]에서 현 일본의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를 왕으로 인정한 바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중국 입장에서는 [[신라]]나 야마타이나 제후국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즉 중국 입장에서는 신라나 야마타이나 다 자기 아래로 보였다는 건데 측천무후가 바보도 아니고 중화의 황제가 되고 싶으면서 제후국이 하는 것을 예시로 들었다는 것은 체면상 맞지가 않다. 진짜 선례를 찾아내서 하려고자 했다면 중국의 역사를 이 잡듯이 뒤져서 비슷한 사례를 들었을 것이다. 사실 당태종은 비웃음을 당할 만도 한 게 신라에 여왕이 있다고 비웃은 전력이 있는데 이후 2대만에 여성 황제가 등극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생판 남도 아니고 바로 자기 후궁이었다. 그것도 이미 입궁해서 바로 옆에서 이런 말들을 들었을 시점이다.][* 다만 측천무후가 살던 7세기에 이웃나라인 [[야마토]](일본), [[신라]](한국), [[동여국]](티베트), [[참파]](베트남)에서 계속 여왕이 나타났고, 중국 민간에서 여황제를 자칭한 [[진석진]]까지 나타났기 때문에 측천무후가 이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 측천무후 이후로 [[중화권]]에는 [[서태후]] 등 실권자를 제외하면 공식적으로 여성 최고 지도자가 나오지 않다가, 2016년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이 집권함으로써 무려 1,311년만에 공백이 깨지게 되었다. * '관중 18릉'이라고 하는 당나라의 자연적인 산을 능침으로 만들었는데 기록으로는 [[5대 10국]] 시기의 온도가 건릉을 제외하면 모두 도굴했다고 하며, 건릉을 탐사해본 결과 도굴되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 * 현재로서는 [[안정공주]]나 태자 이홍의 사망이 측천무후의 짓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지만, [[위키백과]]에서는 아예 정설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어서 받아들이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 [[간다효]] 같은 전문성 없는 자칭 역사 유튜버는 물론, 심지어 전남대 사학과 이성원 교수처럼 나름 전공자라는 대학 교수마저도 [[벌거벗은 세계사]]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마치 정설인 것마냥 소개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이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정도로 무고하지는 않더라도[* [[장회태자]]의 경우는 실제로 측천무후 자신이 명령한 건 아니더라도 측천무후가 보낸 구신적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상 측천무후가 분명히 그의 죽음에 일조했다.] 측천무후로서는 억울할 법하다. == 대중매체 == * 여성으로 황제까지 등극한 파란만장하고 극적인 인생을 살아온 그녀기에 그녀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정말 많다. === 영화 === ==== <무측천>(武則天, 1939) ==== ==== <[[적인걸]]> 시리즈 ==== * [[서극]] 감독의 영화 <[[적인걸]]> 시리즈 * 1편 <통천제국>[* 국내명은 <측천무후의 비밀>로 개봉을 했다.]: [[황제]] 즉위 직전으로 나오는데, 많은 반발을 무릅써가며 여인의 몸으로 황제가 되려는 이유가 나온다. 주류 [[귀족]]과 달리 아버지 [[무사확]]은 부자였다가 [[수당교체기]] 때 [[고조(당)|줄]]을 잘 잡아서 벼락 출세를 했고 [[문벌귀족(중국)|문벌귀족]] 중에서 역사가 짦아서 귀족 사회에서 최하층에 속했다.[* 《은하영웅전설》의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과 [[안네로제 폰 그뤼네발트]] 남매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귀족이라고 해도 재력이 풍부하거나 권력이 대단한 귀족이 있으면 [[가난]]한 귀족도 있기 마련이다.] 무측천은 10대 초반에 화려한 [[황궁]]에 들어와서 그 곳에서 벌어지는 궁중 암투에서 발버둥치며 살아남으려고 하다가 서서히 [[권력]]을 탐하게 되어간다.[* 2편 <신도해왕의 비밀>과 3편 <4대 천왕>에서 권력욕을 가진 것이 본격적으로 나온다.] 황제인 [[고종(당)|남편]]이 [[건강]] 문제로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가 없자 국정에 관여하여 영향력을 강화하다가 남편 사후 [[중종(당)|자]][[예종(당)|식]]들마저[* 다만 중종은 결격 사유가 확실해서 갈아치울 때 당시 조정의 고위층들이 황태후와 같이 퇴위시키는데 동의했다. [[판빙빙]]의 드라마 <[[무미랑전기]]> 1화와 마지막화를 보면 [[정변]]이 일어났을 때, 어머니께 구국의 결단을 했다고 하며 정변 세력들과 같이 어머니를 만나다가 망신만 당하고 도망치자 정변의 주요 인물인 [[재상]] 장간지가 한탄하면서 "[[이(성씨)|이씨]] 강산도 끝났구나"라는 한탄을 할 정도의 겁쟁이였다. 여기에 무측천 하면 빠지지 않는 [[위황후|위씨 며느리]]의 대화와 행동을 보면 마누라에게 잡혀살고 [[공처가]] 기질이 보일 정도인데 이러한 경향은 실제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온다. 결국 처음부터 황제가 될만한 재목이 아니었던 것이다.] [[꼭두각시]]로 만들고 마침내 황제가 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1편 후반부에서 보인 [[눈물]]을 보면 무측천도 욕심이 있든 없든 결국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최종적으로 [[괴물]]이 되어버린 구중궁궐이 만든 희생양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양조위]]의 부인 [[유가령]]이 배역을 맡았는데, 황후와 황태후을 이미 거쳤고 이제 제왕이 되기 직전인 상태의 포스를 장난아니게 보여준다. * 2편 <신도해왕>: 남편 고종이 아직 살아있어 황후였던 시절의 모습으로 나온다. <신도해왕>의 엔딩 후 짤막하게 나오는 [[에필로그]]에서 적인걸 일행에게 차를 대접하고 차를 다 마시자 해독제를 가져오라는 장면이 나오는데[* 쿠키 영상 비슷하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나오는 장면인데 임팩트가 상당하다. 적인걸 일행은 먹으면 괴물로 변하는 독약에 얽힌 사건을 해결한 후 궁궐로 불려가 차를 대접받게 된다. 괴물로 변하는 독약이 측천무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혹시 그 차에도 독약이 들어있을까봐 마시지 않고 망설이다가, 측천무후가 자기를 못 믿는 거냐고 묻자 어쩔 수 없이 마신다. 측천무후는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아랫사람에게 "해독제를 가져와라."라고 명령하고, 적인걸 일행은 한꺼번에 '역시!'라는 표정을 짓는다.] 의심이 보통이 아닌 정도를 넘어 신뢰를 전혀 하지 않는 수준에 이른 것을 보여준다. === 드라마 === ==== <[[일대여황]]> ==== ||[[파일:external/a1.att.hudong.com/01300000258678123596047186381.jpg|width=100%]]|| || [[1985년]] 대만 드라마 <일대여황>에서의 측천무후 || * 드라마 <[[측천무후|일대여황]]>[* 한국에서는 <측천무후>로 비디오 발매가 되었는데 비디오 발매 당시인 80년대에는 국내 비디오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인기가 없었으나 90년대 중반 SBS에서 방영한 이후 큰 인기를 얻어 비디오 시장에서 상당히 흥행했다.]과 <[[태평공주|일대공주]]>[* 국내에서는 <태평공주>로 비디오 발매가 되었는데 <일대공주>에서는 측천무후와 그녀의 딸이자 주인공인 태평공주를 반영자가 1인 2역으로 연기했다. 비디오 발매시 전작의 인기에 편승할 요량으로 SBS에서 방영한 <측천무후>의 반영자가 어머니 측천무후와 딸 태평공주의 1인 2역의 연기를 한다고 예고편에서 상당히 홍보하며 표지에도 전작 측천무후의 샷을 넣는 등 홍보를 적극적으로 하여 <태평공주>도 한국에서 상당히 흥행했다.][[https://blog.naver.com/ilsunjo/70000878419|#]]에서 보여준 [[넘사벽]]의 측천무후의 포스로도 유명하다. <신조협려>에서 보여진 것과 달리 여기서는 그야말로 순수한 소녀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국 냉정하고 정치적인 여자로 바뀌는 과정을 200% 잘 보여주었다. 특히 옥좌에 앉은 저 포스는 가히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포스. 이 이전과 이후에 측천무후 역할을 맡았었던 풍보보(馮寶寶), [[류샤오칭|유효경(劉曉慶)]], 가정문(賈靜雯), 귀아뢰(歸亞蕾) 등과 비교해도 인기가 있는 편이다. 단, 한국 한정으로 반영자의 <측천무후>가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중화권에서 다른 배우들을 압도할 정도로 인기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실제로 측천무후를 연기한 이들은 당대에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었으며 고르게 인기가 많았다. 다만 반영자가 주연한 <일대여황>이 최초로 측천무후를 다룬 드라마라서 인지도가 가장 높다. 우측의 링크는 역대 측천무후 드라마와 주연 여배우들의 소개와 인기에 대한 소개이므로 참고할 것. [[https://kknews.cc/history/3x96ge3.html|#]] 또한 2014년 [[판빙빙]]이 측천무후를 연기한 <[[무미랑전기]]>의 경우, 연출 기술의 발전, 배우들의 외모 및 연기력, 고증 등이 종합적으로 인정받아 중화권을 넘어 한국에서 인기가 가장 많은 측천무후 드라마는 판빙빙이다. 우측의 링크의 중국 언론에서 역대 무측천 배우들을 비교하며 분석을 했는데 판빙빙을 최고의 여배우로 선정했다. [[https://ent.yxlady.com/201502/681350.shtml|#]] 이러한 인기를 인정받아 판빙빙은 2017년 당대 최고의 측천무후로 선정되어 최초로 측천무후를 연기한 반영자와 한 무대에 올랐다. [[https://www.sohu.com/a/123734454_431106|#]] * 이는 상단의 링크에도 소개된 중화권 제도 언론의 기사를 전제로 내용으로 하면 중화권 내에서 측천무후를 맡은 반영자의 인기는 최초의 측천무후를 연기한 것으로 인지도가 있는 정도는 아니다. 단, 기사에서도 반영자의 <측천무후>를 본 세대에서는 여전히 반영자의 <측천무후>를 최고로 치기도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오히려 해당 기사들에서는 반영자 전후로 측천무후를 연기한 배우들인 [[류샤오칭|유효경(劉曉慶)]]과 귀아뢰(歸亞蕾), 가정문(賈靜雯), [[판빙빙|범빙빙(范冰冰)]]을 비교했으나 반영자의 연기력을 다른 여배우들보다 높다고 평가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1대 측천무후 여배우를 한 공로를 높게 평가했다. 오히려 [[류샤오칭|유효경(劉曉慶)]]은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받아 1995년 드라마 <무측천>과 2006년 <일월능공>[* 한국에서는 <여황제 무측천>으로 2009년 [[CHING]]에서 방영했다. 1994년 드라마 <칠협오의>에서 [[전조(칠협오의)|전조]]를 연기한 초은준이 무측천의 조카 하란민지로 출연.][[https://baike.baidu.com/item/%E6%97%A5%E6%9C%88%E5%87%8C%E7%A9%BA/4746556|#]]에서 측천무후를 두 번 맡았다며 크게 호평했고, 귀아뢰(歸亞蕾) 또한 [[금마장]]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연기파 배우라 인기가 높다고 평가했다. [[https://zh.wikipedia.org/wiki/%E5%BD%92%E4%BA%9A%E8%95%BE|#]] 이중에서 여배우의 외모와 연기력과 중화권 내 시청률을 근거로 최고의 측천무후로 평가된 여배우는 [[판빙빙]]이었다. 단, 가정문(賈靜雯)이 연기한 측천무후도 배우의 외모와 연기가 좋아 인기가 있었다고 평가했으나 지나친 각색으로 측천무후를 선역으로만 미화했다고 비판을 받았다. 이는 <무미랑전기>도 마찬가지였다. [[https://www.zhihu.com/question/27949415/answer/38778872|#]] <일대여황>의 속편급인 <일대공주>에서의 연기도 한국에서 인기가 많았다. 어머니와 딸의 1인 2역[* [[측천무후]]와 딸 [[태평공주]].]을 한다는 것을 [[캐치프레이즈]] 삼아 예고편 및 비디오 표지 등에 SBS에서 방영한 <측천무후>의 반영자가 딸 태평공주도 연기한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해서 한국에서 상당히 흥행했다. ==== <[[연개소문(드라마)|연개소문]]>(2006) ==== 배우 장은비가 연기했다. 그러나 극 중 후반에 나오는데다가 비중이 별로 없다. 그냥 별 거 없는 [[악녀]]인데 사실 [[한국 사극]]의 조연 측천무후는 중국 문화권의 주연 측천무후와는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무조'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는 주 원인이다. ==== <[[대조영(드라마)|대조영]]>(2007) ==== || [[파일:당나라측천무후1.jpg|width=100%]] || [[파일:당나라측천무후2.jpg|width=100%]] || || [[당고종]]의 황후 시절 || 황제 즉위 이후 || * 2007년 [[KBS]] 드라마에서는 배우 [[양금석]]이 연기했다. [[측천무후(대조영)]] 문서 참조. ==== <[[무미랑전기]]>(2014) ==== [[파일:external/moviepic.manmankan.com/1654_7124.jpg|width=400]] 측천무후를 [[주인공]]으로 한 [[판빙빙]] 주연의 <[[무미랑전기]]>가 중국 후난 TV에서 방영되었다. 포스나 아름다움은 뒤쳐지지 않고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만 측천무후의 일대기보다는 궁중 암투와 [[로맨스]]에 중점을 두어서 사람 보기에 따라서 스토리가 진부할 수도 있다. 복장 관련해서 특히 위의 [[포스터]]를 보면 [[기모노]] 아니냐는 생각이 들법도 한데 사실 저 포스터상의 복장이 당대의 복장이라 비슷하게 보일 뿐으로 반일 감정이 강한 중국에서 [[일본]] 전통복을 [[중국]] 전통복으로 하는 [[무리수]]를 둘 리는 없다. <무미랑전기>는 제작비의 대다수를 인테리어나 의복에 투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고증]]을 거쳤으며 [[당나라]]는 개방적이던 [[문화]]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몸을 싸매는 스타일과 달리 [[지위]]가 높을수록 화려하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었다고 한다. 얇은 비단천으로 몸을 가린 하늘하늘한 복식의 형태였는데 <무미랑전기>를 보다 보면 은근히 눈이 즐겁다.(...) 모든 [[한푸]]가 이렇지는 않고, 한푸라도 시대마다 [[나라]]별로 스타일은 조금씩 다른데 유난히 당나라 복식이 노출이 심한 편으로 너무 고증을 잘 살렸다가 [[중국/문화 검열|중국의 과잉]] [[검열]]에 걸려서 송출이 중단되거나 얼굴만 클로즈업되어 [[방송]]되는 사태가 벌어진 적도 있다. 고증에 맞지 않는 것은 당시 [[귀걸이]]를 안 했는데 드라마에서는 한 정도다. ==== <[[호텔 델루나]]>(2019) ==== 2019년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의 과거 배경이 측천무후의 통치 기간으로 등장한다. 정확히는 [[대조영]]이 동모산에 [[발해|새로운 국가]]를 세우던 시기이다. 안타깝게도 배경적인 요소인지라 측천무후 본인은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 소설 === ==== 《여황 측천무후》 ==== [[서양]]권에서는 중국계 여류 소설가인 [[샨사]]가 쓴 [[소설]] 《여황 측천무후》가 히트를 치면서 명성이 특히 커졌다.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측천무후는 그야말로 [[먼치킨(클리셰)|먼치킨]]이다. 그 포스가 가히 [[태종(당)|당 태종]]도 말아먹을 기세이다. [[한국]] 소설로는 [[경향신문]]에서 연재했던 유현종의 《낙양성의 봄》이 있다. 같은 [[작가]]의 《패왕별희》와 마찬가지로 찐한 [[베드신]]이 자주 나와서 재미가 쏠쏠하다. ==== 《[[역사를 만든 여왕 리더십 시리즈]]》 ==== 6권, 시즌 2의 첫 여왕 주연으로 등장한다. 실제 역사하고는 달리 후궁 책봉 이전부터 '미랑'이라는 이름이다. 이치 황제와의 결혼, 황후 등극까지가 배경으로, 현대의 냉정한 철혈군주 이미지는 나오지 않고, 유년기의 긍정적이고 활당한 성격의 캐릭터로 나온다. ==== 《강신무》 ==== 서반석 작가의 퓨전 판타지소설 《강신무》 2부 장안편의 보스로 나온다. 단, [[서태후]]의 요소와 [[요괴]]라는 설정이 붙어있다. === 게임 === ==== <[[문명 시리즈]]> ==== * <[[문명 2]]>: 마오쩌둥과 함께 중국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 <[[문명 5]]>: 전작의 [[진시황]]과 [[마오쩌둥]]을 밀치고 [[중국]] 문명의 [[문명 5/등장 문명/중국|지도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세종대왕(문명 5)|세종대왕]]에 버금가는 발더빙으로 비판받았다. * <[[문명 6]]>: [[진시황]]에 밀려 초기에는 등장하지 못했으나, 이후 명성조 [[영락제]]와 함께 [[문명 6/등장 문명/중국|중국 문명]] 리더 패스 추가 지도자로 확정되었다. ==== <[[Fate/Grand Order]]> ==== [[무측천(Fate 시리즈)|4성 어새신]]으로 출현했다. ==== <[[도미네이션즈]]> ==== 측천무후의 머리 장신구가 유물로 등장하며 유니버시티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유니버시티/황후 측천무후)] ==== <[[삼국지 14]]> ==== || [[파일:측천무후 삼국지 14.jpg|width=400]] || || 삼국지 14 || [[코에이]]의 게임 <[[삼국지 14]]>에서 '무조'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무지정매 순으로 43/38/88/83/78이며 개성은 허실, 책사, 안력, 악명, 오만이고 전법은 짐독, 도발, 혼란이다. === 만화 === [[일본]]의 판타지 만화 [[마녀대전]]에서 [[잔다르크]]와 대전했다. == 같이보기 == * [[중국사/여성]] * [[중국 3대 악녀]] * [[고종(당)|당 고종]] * [[태종(당)|당 태종]] * [[무주(당나라)]] * [[측천문자]] * [[여황제]] * [[이리니]] * [[고황후 여씨]] * [[소태후]] * [[서태후]] * [[무미랑(무미랑전기)]]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 [include(틀:신당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