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 3세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신성 로마 황제)] || '''카를 3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동프랑크인의 왕)] [include(틀:역대 서프랑크인의 왕)] [include(틀:역대 중프랑크인의 왕)] }}} || ||<-2> '''신성 로마 명목상 황제[br]독일 왕국 카를 왕조 4대 국왕[br]{{{+2 카를 3세}}}[br]{{{+1 Karl III}}}'''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charles the fat.jpg|width=100%]]}}} || || '''제호''' ||카를 3세 (Karl III) || || '''별칭''' ||비만왕 카를 (Karl der Dicke) || || '''출생''' ||[[839년]] [[6월 13일]][br][[바이에른]] || || '''사망''' ||[[888년]] [[1월 13일]] (48세)[br]노이딩겐 || ||<|8> '''재위''' ||[[신성 로마 황제]] || ||[[881년]] [[2월 12일]] ~ [[887년]] [[11월 11일]] || ||[[서프랑크]]인의 왕, [[아키텐]] 국왕 || ||[[884년]] [[12월 6일]] ~ [[887년]] [[11월 11일]] || ||[[이탈리아 왕국(중세)|이탈리아 국왕]] || ||[[880년]] [[3월 22일]] ~ [[887년]] [[11월 11일]] || ||[[동프랑크]]인의 왕, 알레마니아 국왕 || ||[[876년]] [[8월 28일]] ~ [[887년]] [[11월 11일]] || || '''배우자''' ||슈바벤의 리카르디스[br],,(862년 결혼),, || || '''자녀''' ||베른하르트 || || '''아버지''' ||[[루트비히 2세]] || || '''어머니''' ||알트도르프의 엠마 || || '''형제''' ||힐데가르트, 카를로만, 이름가르트, 지셀라, 루트비히, 베르타 || || '''종교''' ||[[기독교]] {{{-2 ([[로마 가톨릭]])}}} || [목차] [clearfix] == 개요 == [[라틴어]]: Karolus III | Carolus III Crasus[br][[독일어]]: Karl III | '''Karl der Dicke''' (Karl III der Dicke)[br][[프랑스어]]: Charles III le Gros[br]카롤루스 3세 | 카를 3세 비만왕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명목상 카롤루스 왕조의 통합 프랑크 왕국 국왕, 신성 로마 제국 제6대 황제, 이탈리아 왕 등을 겸했다. == 생애 == 카롤루스 왕조의 [[동프랑크 왕국]] 초대 국왕인 [[루트비히 2세]](독일왕 루트비히)의 세 아들 중 막내였으며, [[카롤루스 대제]]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왕이 되기 이전 큰형 [[카를로만]]이 아버지에 대항해 일으킨 반란에 참가했으며, 그 대가로 864년 [[슈바벤]] 공작, 라이티아 백작을 얻고 865년 알레마니아 분국의 분봉왕을 거쳤다. 876년 아버지 [[루트비히 2세|독일인 루트비히]]가 사망하자 알레마니아의 왕이 되었다. 879년 병석에 누운 형 카를만(카를로만)으로부터 [[이탈리아 왕국(중세)|이탈리아 왕국]]의 통치권을 위임받았고, 880년 이탈리아를 상속받았다. 881년 교황 [[요안니스 3세|요한네스 3세]]로부터 축성을 받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882년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인 형 청년왕 루트비히 3세가 사망하자 바이에른, 프랑켄, 작센을 차지하고, 동프랑크의 국왕이 되었다. 884년 [[샤를로망 2세]]가 죽자, 5촌 조카의 자리도 가져가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이로써 [[카롤루스 대제]] 이후 베르됭 조약, 프륌 조약, 메르센 조약, 리베몽 조약으로 분열된 프랑크 왕국을 일시적으로 재통일했다'''. 하지만 간질과 뇌졸중 등의 질병으로 제대로 정무를 주관할 수 없었다. 서자 베른하르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황후 슈바벤의 리첼다에게 간통 혐의를 주장하며 폐위시키려 했으나, 리첼다는 온갖 고문에도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고, 리우트바드 주교는 그녀가 무죄라고 선고했다. 일련의 실정들로 인해 여러 귀족들은 물론 교단과도 불화를 겪게 되었다. 특히 886년 서프랑크의 수도 파리에 침공한 바이킹족[* 북게르만계 노르드인]을 돈으로 매수해 돌려보낸 일이 발각돼, 조카 [[아르눌프]]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맏형 카를만(카를로만)의 서자인 아르눌프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영토인 바이에른을 요구했으나, 숙부인 카를 3세가 바이킹을 돈으로 매수해서 되돌려보냈다며 그에게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아르눌프와 동프랑크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서프랑크의 귀족들 특히 라울 등은 아르눌프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반란에 협력했다. 887년 11월 왕을 자처한 아르눌프는 군대를 이끌고 제국의 수도인 아헨에 입성했다. 이어 11월 11일 카를 3세 비만왕은 아르눌프에 의해 개최된 프랑크푸르트 제국회의에서 폐위되었다. 알레마니아로 옮겨간 카를 3세는 노이딩겐에서 888년 1월에 사망했다. 그의 퇴위와 죽음을 기점으로 [[카롤루스 대제]]가 만든 프랑크 왕국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서프랑크의 통치자로도 재위했지만 보통 그는 서프랑크의 왕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이에 따라 [[외드]]의 뒤를 잇는 [[샤를 3세]] '단순왕'이 프랑스의 국왕 샤를 3세로 인정받는다.''' [[분류:신성 로마 황제]][[분류:동프랑크인의 왕]][[분류:이탈리아 국왕]][[분류:서프랑크인의 왕]][[분류:아키텐 국왕]][[분류:로타링기아 국왕]][[분류:부르군트 국왕]][[분류:바이에른의 군주]][[분류:작센의 군주]][[분류:카롤루스 가문]][[분류:폐위된 군주]][[분류:839년 출생]][[분류:888년 사망]][[분류:프라이부르크 현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