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미유 데물랭 (문서 편집) [[분류:혁명 프랑스의 정치인]][[분류:1760년 출생]][[분류:1794년 사망]][[분류:엔 출신 인물]][[분류:파리 대학교 출신]][[분류:참수된 인물]] ||<-2> '''{{{+1 카미유 데물랭}}}[br]Camille Desmoulins''' || ||<-2>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Camille_Desmoulins_2.jpg|width=100%]]}}} || || '''본명''' ||뤼시생플리스카미유브누아 데물랭[br]{{{-1 Lucie-Simplice-Camille-Benoît Desmoulins}}}|| ||<|2> '''출생''' ||[[1760년]] [[3월 2일]]|| ||[[프랑스 왕국]] 피카디 기즈|| ||<|2> '''사망''' ||[[1794년]] [[4월 5일]] (향년 34세) ||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프랑스)|파리]] 콩코르드 광장 [* 당시 명칭은 혁명 광장 (Place de la Revolution).]||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프랑스 왕국)]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28]] [[프랑스 제1공화국]]|| || '''가족''' ||^^'''배우자'''^^ 뤼실 두플레시|| || '''직업''' ||정치인, 기자|| || '''소속''' ||[include(틀:몽테뉴파)]|| || '''서명''' ||<-2>{{{#!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CamilleDesmoulinsSignature.jpg|width=150]]}}} || [목차] [clearfix] == 개요 == >'''"희망의 청색 리본을 달고 무기를 드십시오!"''' > ------ >1789년 7월 12일의 연설에서 시민들의 무장을 호소하며 [[프랑스]]의 [[혁명가]]이자 [[언론인]]이다. [[프랑스 혁명]] 시기 중요한 역할을 해냈으나 [[자코뱅]] 내의 파벌 갈등 때문에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숙청당했다. == 생애 == 1760년 기즈 지역의 [[부르주아]] 가문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아들의 출세를 열망했던 그의 아버지 장 브누아 데물랭은 어린 아들을 [[파리 대학교]] 부설 콜레주 드 루이르그랑으로 보냈고, 여기서 그는 절친한 친구이자 훗날의 정적이 되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와 교제하게 된다.[* 로베스피에르와 데물랭이 정적 사이가 된 것은 그들의 삶 속에서 채 1년이 되지 않는다. 그전까지는 오히려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데물랭의 아들의 [[대부]]가 바로 로베스피에르였으며, ~~가난한 노총각~~ 로베스피에르를 자주 가족들의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한 것도 데물랭이었다.] 처음 그는 변호사가 되고자 했고 실제로 1785년에는 변호사 자격증을 얻는데 성공했으나, 심각한 [[말더듬이]] 증상으로 인하여 때문에 [[언론인]]으로 직종을 바꾸어 활동했다. 이미 학창시절부터 구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로 명성을 떨쳤던 데물랭은 1789년 초부터 달아오르는 혁명의 조짐을 눈치채고 팜플렛 <자유 프랑스>를 저술하는 등 혁명 운동을 지원하였다. 같은 해 3월 프랑스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논의하고자 국왕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개최하였고, 기즈 지방의 [[제3신분]] 대표자 중 일원으로 데물랭은 삼부회에 참석한다.[* 정확히는 아버지가 선출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인하여 카미유가 대신 참석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데물랭은 무명의 언론인에 가까웠으나, 삼부회 안팎에서 데물랭이 보여준 모습에 감명을 받은 [[미라보 백작]]이 그를 발탁하여 자신이 운영하는 신문에 글을 기고하게 하면서 데물랭은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그런데 정작 데물랭 본인은 미라보 백작이 사망한 뒤 그를 폭풍 디스한다. 다만 미라보 백작은 입헌군주국을 주장하는 지롱드파였고 데물랭은 공화정을 주장하는 자코뱅파였기에 정치적 관점으로 인한 대립은 불가피한 일이었긴 하다.] 1789년 7월 12일, [[자크 네케르]]의 파면 소식이 들려오자 그는 팔레 루아얄 광장으로 가 군중들 앞에 섰다. 거기서 그는 군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무장봉기를 선동하는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에 고무된 시민들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냈고 마침내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해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 일로 그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후 언론인으로서 <프랑스와 브라방의 혁명>, <파리 시민들에게 드리는 글> 등을 쓰며 열정적으로 혁명을 옹호했다. 또 [[바렌느 배신사건]] 이후부터는 [[루이 16세]]를 폐위와 [[프랑스 제1공화국|공화정 수립]]을 주장했다. 이러한 활동을 거치며 데물랭은 [[자코뱅]]과 인연을 맺었고, 그 중에 [[조르주 당통]]과 매우 가까워졌다. [[국민공회]]가 세워지자 그는 정치 활동과 언론 활동을 번갈아하며 [[지롱드당]]을 비판했으나,1793년 [[자코뱅]]이 권력을 독점하고 공포 정치의 시대가 시작되자 당통이 이끌던 관용파의 일원으로써 자코뱅 내에서도 가장 급진주의적이었던 [[에베르파]]와 [[격앙파]]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793년 12월 데물랭은 <늙은이 코르델리에(Le Vieux Cordelier, 르비외 코르델리에)>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코르델리에 씨라는 필명을 사용하여서[* 코르델리에라는 명칭은 프랑스 혁명 직후인 1790년 봄에 조르주 당통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클럽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로 코르델리에 클럽이라는 명칭은 별명이었고, 이 클럽의 정식명칭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옹호자들의 클럽(Société des Amis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덧붙여서 이 잡지의 편집자가 카미유 데물랭인거는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기 때문에 말이 가명이지 사실상 실명으로 글을 쓴 거나 마찬가지였다.] 공포정치를 청산하고 이상적인 혁명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결국 공포정치를 주도하던 로베스피에르와의 사이는 서서히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1794년 2월에 출간된 <늙은이 코르델리에> 3호판이 이십년 가까이 이어져 온 데물랭과 로베스피에르 사이의 우정을 끝내놓는다. <늙은이 코르델리에> 3호권에서 데물랭은 [[타키투스]]의 글을 패러디하여 작금의 프랑스 상황은 '너무 부자라서, 너무 가난해서, 너무 멜랑콜리해서, 너무 방종해서 반혁명분자가 될 수 있다.'라고 비꼬았다.[* 참고로 원문은 타키투스가 [[티베리우스]] 황제 말년의 공포정치의 희생자가 철저하게 제멋대로였다는 사실을 비판하고자 쓴 글이다.] 에베르 일파에 대한 비난은 묵인했던 로베스피에르이지만, <늙은이 코르델리에> 3호권의 글은 공안위원회와 로베스피에르 자신을 겨냥한 것이 분명했기에 로베스피에르는 이를 묵과할 수 없었고 데물랭에게 자코뱅 클럽에서 [[분서|해당 글을 태우라고]] 명령했지만 데물랭은 아래의 말과 함께 그 지시를 거부한다. > '''Brûler n'est pas répondre''' >----- > 태우는 것은 답이 아니다.[* 이 글은 [[장 자크 루소]]가 원작자이다. 로베스피에르가 루소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루소의 이념에 맞추어서 신생 공화국을 설계하고자 노력했던 점을 고려하면, 데물랭은 "지금 이 정국이 루소가 원하던 그 나라겠냐?"라고 비꼬았던 것이다.] 1794년 2월에 자코뱅 클럽에서 축출된 데 이어, 3월 31일 데물랭은 당통과 함께 부패 및 반혁명의 혐의로 체포된다. [[답정너|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는 재판]]에서 당통과 데물랭을 비롯한 피고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인을 내세울 권리조차 거부당했고, 사형 판결과 같은 날인 4월 5일에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그의 아내였던 뤼실 데물랭 역시도 폭동을 일으켜 감옥에서 남편을 구출하려고 시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고 남편이 처형된 지 8일 후에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덧붙여서 자신의 사형 판결에 대해서는 비교적 담담했던 데물랭이 아내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성을 잃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 울부짖으며 난동을 피워서 간수들이 두들겨 패버려서(...) 진정시켜야 했다.][* 또한 뤼실 데물랭은 별명이 '부드러운 루시'일만큼 유순하고 집에서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성격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당시에도 뤼실 데물랭의 혐의에 대해서는 비웃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결국 [[연좌제|정적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같이 엮어버린 셈인데,]] 당시 프랑스의 공포 정치가 얼마나 미쳐돌아가고 있었던 건지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인 셈.] == 기타 == * 당시 정치인들은 대부분 성으로만 불렸지만, 데물랭은 특이하게도 '카미유' 또는 '카미유 데물랭'으로 주로 불렸다. 데물랭이라는 성의 다른 유명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카미유 데물랭이 당대인들에게 어린애 취급(...)을 받았던 게 이유인 듯.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