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령 마카오 (문서 편집) ||<-3><:> {{{#FFF {{{+1 '''마카오'''}}}}}}[br]{{{#fff '''Macau'''}}}[br]{{{#fff '''澳門'''}}} || ||<-3><:> {{{#fff [[포르투갈 제국|{{{#fff 포르투갈 제국}}}]]의 식민지}}} || ||<:><-2>[[파일:포르투갈령 마카오 기.svg|width=170]]||<:>[[파일:포르투갈령 마카오 휘장.svg|width=80]]|| ||<:><-2> {{{#fff '''깃발'''}}}[* 이 깃발과 휘장은 '포르투갈령 마카오 정부'의 상징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포르투갈령 마카오 그 자체를 상징하는 깃발과 휘장은 따로 없었고 포르투갈 국기를 그대로 사용했다. [[1988 서울 패럴림픽]]에 참가할 때는 [[:파일:포르투갈 국기.svg|포르투갈 국기]]를 사용했고,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과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1999 마카오 반환식에서는 [[https://commons.wikimedia.org/wiki/Image:Bandeira_do_Leal_Senado.svg|마카오시(市) 깃발]]을 사용하였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서구권 강국이였던 [[대영제국]]으로부터 지배를 받은 옆동네 홍콩은 '[[영국령 홍콩]]' 자체를 상징해주는 깃발이 존재했었으나,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무려 100년 이상이라는 긴 기간 중에 정작 공식적인 행사에서 사용되는 일이 거의 없었고 [[1997년]] [[중국]]에 반환될 끝자락에야 겨우 사용된 케이스라 많이 묻혔다. 1951년부터 1976년까지는 이 깃발을 사용했다. [[파일:포르투갈령 마카오 기(1951-1976).svg.png|width=170]]]||<:>{{{#fff '''휘장'''}}}|| ||<-3><:>[[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79px-Macau-CIA_WFB_Map_%282004%29.png|width=200px]]|| ||<-3><:> {{{#fff '''1557년 ~ 1999년'''}}} || ||<:><-2> '''{{{#fff 성립 이전}}}''' || '''{{{#fff 반환 이후}}}''' || ||<-2> '''[[명나라|{{{#800000 명나라}}}]]''' || [[중국|{{{#ffde00 '''중화인민공화국'''}}}]][br][[마카오|{{{#!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785D; font-size: .8em" {{{#fff '''마카오 특별행정구'''}}}}}}]] || ||<:> {{{#fff '''언어별 명칭'''}}} ||<-2><(> [[포르투갈어]]: Macao/Macau[br][[광둥어]]: 澳門 (''Oumún'')[br][[중국어]]: 澳门 (''Àomén'') || ||<:> {{{#fff '''위치'''}}} ||<-2><(> [[마카오]] || ||<:> {{{#fff '''수도'''}}} ||<-2><(> 마카오 || ||<:> {{{#fff '''정치체제'''}}} ||<-2><(> [[포르투갈]]의 [[식민지]] || ||<:> {{{#fff '''국가원수'''}}} ||<-2><(> 포르투갈 국왕(~1910)[br][[포르투갈 대통령]][br] || ||<:> {{{#fff '''정부수반'''}}} ||<-2><(> [[총독]] || ||<:> {{{#fff '''언어'''}}} ||<-2><(> [[포르투갈어]], [[광동어]] || ||<:> {{{#fff '''문자'''}}} ||<-2><(> [[라틴 문자]], [[한자]] || ||<:> {{{#fff '''종교'''}}} ||<-2><(> [[가톨릭]], [[중국 신화|중국 토속 종교]][* 특히 [[마카오인]]들은 마조(媽祖), [[광둥어]] 발음으로 마조우(Māa Jóu)라는 바다의 여신을 주로 숭배했는데 이것이 마카오의 어원이 된다.] || ||<:> {{{#fff '''민족'''}}} ||<-2><(> [[포르투갈인]], [[광동인]] || ||<:> {{{#fff '''통화'''}}} ||<-2><(> 마카오 [[파타카]] || [목차] [clearfix] == 개요 == 포르투갈령 마카오(Macao Portuguesa)는 [[1557년]]부터 [[대항해시대]] 당시 [[포르투갈 왕국]]이 이 지방에 진출하여 영유권을 행사한다. [[영국]]이 [[홍콩]]을 점유한 것과 다르게 [[포르투갈 왕국]]이 이 지역을 무력으로 [[식민지]]로 삼은 것은 아니고[* 사실 호르헤 알바레스가 이끄는 탐험대가 지금의 [[홍콩]] [[신계(홍콩)|신계]]지역인 튄문, 당시 [[광동성]] 신안현 둔문진에서 행패를 부리다 [[광저우]] 총독이 보낸 수군에 의해 격퇴당하고, [[조총]]과 [[불랑기포]] 등을 압수당한 바 있다. 이후 협상을 통해 알바레스는 마카오로 갔다.], 되려 [[포르투갈 왕국]]이 [[명나라]]의 환심을 사서 영유권을 얻었다. 그 뒤를 이은 [[청나라]]도 서양과의 무역과 무기 수입 등 교섭을 위한 창구[* 청은 포르투갈 대포인 [[불랑기포]]와 네덜란드 캘버린의 중국 버전인 [[홍이포]] 그리고 [[조총]] 때문에 [[영원성 전투]]에서 명과 몽골 연합군에 대패했고 [[누르하치]]도 홍이포 파편에 맞아 전사했다. 청나라는 이후 명나라 항장인 [[홍승주]], 상가희 같은 사람들 및 그들이 데려온 총포 제조법을 익힌 철공들을 이용해서 홍이포 및 불랑기포와 조총을 대규모로 확보한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농성중이던 [[조선군]]은 청군의 홍이포 맹포격에 전의를 상실했고, 결국 [[삼전도의 굴욕|굴욕적인 항복]]을 한다.]가 필요했기 때문에 마카오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후 [[아편전쟁]]의 대가로 [[영국]]이 [[홍콩]]의 영유권을 받아내는 것을 보고 자극 받은 [[포르투갈 왕국]]이 이 지역에 대한 식민지배의 권한을 요구했다. 당시 [[영국]]에 처참히 패배하여 나라가 어수선했던 청나라는 별다른 분쟁없이 이 땅을 포기한다. 당시 포르투갈도 [[아편전쟁]]에 참여할 제스처를 보이자 당황한 청 황제는 당초 조차지가 아닌 근해의 타이파 섬과 콜로안 섬까지 포함시켜 할양해줬다. 이후 이 땅은 [[포르투갈]]의 정식 해외주로 편입된다. [[1849년]]부터 [[1999년]]까지 대략 150년 동안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포르투갈이 자국 영토임을 선언한 것은 [[1849년]]이나, [[청나라]]가 영유권을 인정한 것은 [[1862년]]이다. 다만 이 10여 년의 시간동안 따로 분쟁은 없었다.] 이후 [[1975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해외 식민지 포기선언을 한 포르투갈이 중국 대륙의 새 주인인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 제의를 했다. [[덩샤오핑]]이 홍콩과 함께 [[일국양제]]를 적용해 돌려받기로 합의, [[1999년]] 포르투갈이 [[중국]]에 마카오를 반환하면서 식민지 시대는 끝나게 된다. == 역사 == === 포르투갈의 중국 진출 === [[16세기]] 초 포르투갈 상인들은 중국 대륙과 무역 활동을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당시 중국 대륙을 영유하고 있었던 [[명나라]]와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명나라와의 협상은 순탄치 않았다. 명나라는 포르투갈을 야만적인 해적집단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로부터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고립주의 정책을 견고히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1529년]] 광둥 지방의 순무(巡撫)인 임부(林富)[* 자(字)는 성오(省吾)이며, 복건성 포전현(福建省 莆田縣)출신으로 문신이며, 생몰은 1475 ~ 1541]가 명 정부에 광동, 광서 지역의 재정 확보와 외국과의 교역 증가를 요구했지만 묵살되었다. 그동안 포르투갈은 [[1543년]]경 [[일본]]([[무로마치 시대|당시 무로막치 막부 시대]])과 이어진 해로를 탐색하여 일본 남부의 [[규슈]]와 교역을 개시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중국제 비단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의 규슈까지 중국제 비단을 운송하기 위해 중국 해안에 위치한 확고한 근거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포르투갈령 마카오는 동서양을 잇는 무역기지로서 중외무역이 발달하였고, [[예수회]]의 [[기독교]] 선교에도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고아(인도)|고아]]로부터 [[말라카]]를 경유하여 중국 해안 근처의 합의된 장소에서 중국제 비단을 실어 갔다. 그리고 그 비단을 일본에 매매했고 일본으로부터 주로 [[은]]을 받았는데, [[중국인]]들은 이 은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은을 처분하고 상선들은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를 싣고 다시 말라카를 거쳐 고아로 되돌아가 유럽에 수송하는 중개 무역을 하였다. 이러한 무역은 포르투갈에 큰 이익을 남기며 [[1640년]]까지 계속되었다. === 포르투갈의 마카오 식민경영 === 포르투갈 상인들은 해적질이 아닌 클린한 무역 활동으로 [[명나라]] 정부로부터 신뢰를 얻었고 또 당시 명나라의 황제 [[가정제]]는 [[불로장생]]에 집착해 채향사(採香使)들을 시켜 방방곡곡에서 [[용연향]]을 구하게 했는데, 전세계에 연락선이 있는 포르투갈 상인들은 용연향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어 황제의 환심을 샀다. [[1555년]] [[광둥성]]에 속해 있던 [[마카오]] 섬에 근거지를 확보하였다. 마카오는 원래는 섬이었는데 [[주강]]의 퇴사 토적으로 해안선이 매워져 현대에는 반도가 되었다.[* 이 토사 퇴적은 중국 쪽의 병크 때문에 계속되어서 조만간 마카오 반도 쪽 외항은 배가 못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 있고 그래서 반환 후 조그만 암초였던 코타이를 간척해 남쪽의 타이파 섬과 합체한 후 항만시설을 옮겼다. 겸사겸사 [[카지노]] 관광단지 및 [[마카오 국제공항]], 코타이 신도시 등도 세우게 된다.] [[포르투갈인]]들이 진출하기 이전 마카오는 단지 조그마한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마카오 해변가 모서리에는 어민들이 바다의 여신 마조(媽祖)를 위해 건립한 천후성모고묘(天后聖母古廟)가 있어서 마각묘(媽閣廟)[* 아마(A-Má) 묘, 아마 사원이라고도 한다.]라고도 불렸다.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온 이후 이 마각묘의 '마각(媽閣)' 두 자가 [[광둥어]] 발음(ma5 gok3) 때문에 현재의 마카오(Macau)로 알려졌다. [[1557년]]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에 확정된 거주지를 설립하고, 중국의 내륙지방과 정규적인 상업교류를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광둥에서 비단구입을 허락받는 등 중국 본토와 관계를 더욱 확대했다. 마카오 식민경영 초기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가 속해있는 [[광둥성]] 당국에 소정의 [[공과금]](公課金)을 납부하고 중국 상급 관리청의 통제를 받았다. 대략 매년 은 5백 민(緡)을 납부하였다고 한다. [[광동인]]들은 [[포르투갈]]의 마카오 식민지배가 장차 야기하게 될 문제점[* [[포르투갈]] 및 [[스페인]]을 시점으로 한 유럽 열강의 러시. [[18세기]]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19세기]] 중후반에 [[아편전쟁]]과 [[청불전쟁]] 등으로 현실화가 되어 [[베이징]]까지 털렸다.]을 염려했지만, 중국 조정이 마카오의 상황에 대해 얼마나 파악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여간 중국은 마카오까지는 인정해줬지만, 마카오 이후로는 수백 년 간 서양인들에게 이런 창구를 추가로 더 내주려 하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마카오에 욕심을 냈지만 포르투갈인들의 결사항전으로 패배하고, 대신 [[대만 섬]]을 거점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정성공]]에 의해 쫓겨난다. [[광동인]]들도 마카오가 포르투갈의 무역기지 역할을 하면서 이익을 보았으므로, [[광둥성]]은 포르투갈로부터 소정의 공과금을 받았고 [[비단]]을 더 많이 수출할 수 있었다. 또한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통해 중국의 외국무역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게 되었고 해당 지역의 해적 통제에도 도움을 주었던 듯하다. 이후 마카오에서는 비단과 은이 교역되면서 부유층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 마카오는 [[향신료]], [[목화]], [[도자기]], [[구리(원소)|구리]], [[화약]], [[금]] 등도 수출입되었지만, 비단과 은에 비하면 비중이 크게 뒤떨어져 갔다. 마카오의 경제가 활성화되자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포르투갈인들만으로는 수가 부족하여 광동 출신의 [[중국인]]들[* 주로 [[객가]]와 [[치우차우]], [[광동인]]들이다.]이 채용되었다. 이들은 처음에 마카오 밖에 주거지를 두고 일하였으나, [[16세기]] 후반에 가면 마카오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급증했고 일부는 부유층이 되었다. 포르투갈은 당시 무역활동뿐만 아니라 [[가톨릭]]과 협력하여 선교활동도 했다. 마카오에 거주하게 된 [[중국인]]들의 상당수는 이러한 서방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영향을 받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또한 [[성당]] 몇 곳이 건립되었고 포르투갈인들과 통혼하는 사람도 늘어나 혼혈인도 증가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1576년]]에는 동아시아 최초로 주교가 나왔다. [[1594년]] [[12월 1일]]에는 [[예수회]]의 건의로 성 바오로 학원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한국]] 최초의 [[신부(성직자)|신부]]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와 목상이 안치된 마카오의 성 안토니오 성당도 이 시기([[1558년]]- [[1560년]]) 지어졌다. 중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고 [[대만섬]]의 [[동녕 왕국]]을 말려죽이기 위해 강력한 해금령을 내리자 마카오도 타격을 입을 뻔했지만 [[강희제]]의 신임을 받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덕분에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마카오의 위상은 갈수록 약해졌다. 마카오는 수심이 얕아 [[대항해시대]] 초반의 범선은 드나들 수 있었지만 근대 이후의 거대한 배들이 정박하기는 힘들었다. 포르투갈이 근대로 가면서 삼류 열강으로 떨어지며 본국과의 상업도 심각하게 쇠퇴했다. 물론 결정타는 옆에 [[영국령 홍콩]]이 세워진 것이었지만 그 전에도 마카오는 이미 한참 내리막을 타고 있었다. 근세 마카오가 번영했던 지정학적 배경 자체가 [[나가사키시|나가사키]]-마카오-[[말라카]]-[[고아(인도)|고아]]-[[호르무즈]]-남동부 아프리카 해안요새-기니 해안-포르투갈 본토를 연결하던 [[포르투갈 제국]]의 거대한 [[인도양]]-[[동태평양]] 무역망 전체에서 연결점으로 성장한 것인데, [[17세기]] 들어가면서 일본, 말라카, 호르무즈, 몸바사 등 중요 거점이 하나하나씩 신흥 [[네덜란드]]에 함락당하거나 토착 세력에게 축출당했는데 마카오 혼자서 뭐 어찌 번영을 유지할 여간이 없었다. [[1842년]] [[영국]]이 [[아편전쟁]]을 통해 [[청나라]]를 박살내자 서양 열강들이 청나라를 점점 호구로 보기 시작하고 청나라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해 수많은 이권을 뜯어냈다. 포르투갈도 이에 편승해 [[1851년]]과 [[1864년]]에 원래 마카오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던 [[무인도]]인 타이파와 콜로안을 점거하고 [[1887년]]에 청나라와 베이징 조약을 맺어 마카오를 정식으로 포르투갈 영토로 삼았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수많은 피난민들이 마카오로 몰려든다. 그래서 원체 인구가 적은 이 곳의 사람들의 90%는 본토 출신으로 채워져 버린다. 이들은 [[19세기]] 이전부터 원래 마카오 반도에 살던 사람들과는 같은 [[한족]]이지만 구분이 되게 되었다. [[마카오인]]들은 [[광동인]]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광동어]]에 [[포르투갈어]]를 섞어 쓰는 등 자신들이 얼마나 '''서양화'''되었는지를 과시하는 등의 행동들을 했으나 이웃 [[홍콩]]과는 달리 갈등이 크진 않았다. 어차피 마카오 자체가 인구가 너무 적어 이들 대륙인이 없으면 뭐가 안 돌아가는 곳이라 그랬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국]]에 속한 영국과 달리 포르투갈이 일단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영국령 홍콩]]과 [[광저우]]가 [[일본군]]에 점령되었을 때도 마카오는 무사했는데, 이때 해당 지역의 피난민이 몰려와 인구가 잠깐 증가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 제국]]은 근처의 [[영국]] 식민지 [[홍콩]]과 [[프랑스]] 식민지 [[베트남]]을 점령한 뒤에도 굳이 마카오는 공격하지 않았고[* 다른 포르투갈 식민지인 [[동티모르]]는 점령을 했지만, 동티모르에 [[호주군]]과 [[네덜란드군]]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동티모르를 점령할 때 포르투갈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포르투갈은 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은 동티모르를 점령하는 선에서 끝냈다.] 그 결과 마카오는 홍콩과는 달리 일본에 딱히 나쁜 감정은 없다. 그렇지만 이 포르투갈도 만약을 대비 국경에 [[수병]]들을 배치하고 포대의 방어력도 점검하는 등 전쟁 준비를 안 한 것은 아니다. 당시 포르투갈은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정부 하에서 일본에 우호적인 편이었기에 마카오를 통해 일본에 [[석유]]를 팔기도 했었고, 이 때문에 [[미군]]의 [[폭격]]을 받은 일도 있었다. [[일본 제국]] 역시 [[중화민국]]을 압박하기 위해 마카오 영사관을 설치하고 중국인의 항일 활동을 감시했고, 물론 중국인들의 일제 인사에 대한 습격도 있었다. [[중일전쟁]]이 종결된 이후 [[장파쿠이]]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이 마카오를 포위하고 마카오 무력 회수를 시도하였으나 마카오 식민당국이 마카오 내부의 반포르투갈 운동을 진압하는 한편 영국을 통해 마카오에서의 [[중국국민당]] 활동 합법화 등을 제시하자 해결되었다. 그리고 [[국공내전]]으로 또 한 번 대규모 난민들이 마카오에 들어온다.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자 포르투갈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점령을 우려했으나 서방과의 정면 대결을 바라지는 않던 중국은 이곳을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포르투갈의 영유권을 존중했다. 하지만 중국은 포르투갈령 마카오에 대해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는데, 예를 들면 [[1952년]] [[https://zh.wikipedia.org/wiki/%E9%97%9C%E9%96%98%E4%BA%8B%E4%BB%B6_(1952%E5%B9%B4)|관갑 사건]]을 통하여 마카오 외곽의 [[포르투갈군]] 군사 초소를 모조리 점령하였다. 이렇게 포르투갈의 무역기지이자 [[동아시아]] 선교의 전초기지로 활용되었던 포르투갈령 마카오는 본국의 법 개정에 따라 [[1951년]] [[식민지]]에서 해외주로 전환되었다. 당시 중국은 아직까지 [[개발도상국]]이었고, 홍콩을 보유한 영국은 [[5개의 눈]]으로 넘사벽 [[천조국]]인 '''[[미국]]'''과 동맹이어서 중국 따위는 신경도 안 썼으나 포르투갈은 이미 약체로 전락한 지 오래였으며, 식민지 전쟁을 통해 [[인도]]에 고아를 빼앗기고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에서도 [[소련]]을 등에 업은 현지인 게릴라에게 밀려 패퇴 중이었다.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홍위병]]들이 야금야금 들어와 점령을 시도했으나 포르투갈이 아무리 약체화되었어도 이런 오합지졸 민간인들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어서 군을 동원해 방어에 성공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마카오에서도 [[마오주의]]를 가르치는 학교들이 늘어나고 [[중국공산당]]을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당시 [[반공주의]]가 강렬한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포르투갈령 마카오 정부 역시 반공주의적 입장을 취하며 이들을 탄압하다가 [[1966년]]에 12.3 사건같은 중국계 주민들의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일로 굴욕을 당한 포르투갈령 마카오 정부는 반공 색채를 누그러뜨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던 본국의 방침도 무시하고 마카오의 친중공 중국인들을 정계에 들이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교류하며 중국국민당의 활동을 금지하는 등 친중공 성향을 보였다. 사실상 이 일로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더 이상 주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평가할 정도.[[https://books.google.co.uk/books?id=kebmyB-5-IYC&lpg=PA121&dq=Lo%20Shiu-hing%20(December%201989).%20%22Aspects%20of%20Political%20Development%20in%20Macao%22.%20The%20China%20Quarterly&pg=PA34#v=snippet&q=de%20facto&f=false|출처]] [[1974년]] 포르투갈 정부는 [[카네이션 혁명]] 이후 모든 원거리 [[식민지]]를 자진해서 포기하기로 했다. 당시 마카오 역시 반환하기로 했는데, 정작 중국이 거부했다. 사실 중국 입장에서는 당시 영국이 홍콩 전체의 반환을 거부하고 [[신계(홍콩)|신계]] 외곽만 반환한다고 했기 때문에 이래저래 협상이 길어졌고, 결국 중국은 홍콩에 관한 문제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포르투갈과 중국은 마카오를 '중국 땅이지만 포르투갈 정부가 행정권을 행사하는 곳'으로 해석하는 데 합의하여[*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부터 포르투갈령 마카오와 [[영국령 홍콩]]에 대해 '중국 땅(주권)이지만 영국/포르투갈이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주권과 치권은 불가분이므로 반드시 반환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포르투갈은 [[1974년]]에 중국의 이러한 입장을 인정한 것이다.] 언젠가 반환이 이루어져야 하는 데는 양국이 입장의 일치를 보였고, 포르투갈 정부도 이에 근거해 [[1976년]]부터 마카오를 특수 영토로 지정해 마카오 정부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이양했다. 또한 이에 앞서 [[1974년]]에는 마카오 주둔 [[포르투갈군]]을 철수시켰으며, [[1999년]] 중국 반환으로 인해 [[인민해방군]]이 진주하기 전까지는 군대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979년]] [[포르투갈]]이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함에 따라 마카오 반환 의견이 대두되었고, 영국이 전향적으로 홍콩 전체를 반환하고 중국이 [[특별행정구]]로 관리하기로 결정한 [[1984년]] [[중영공동선언]] 이후 포르투갈 정부는 [[1987년]]에 또 다시 반환 의사를 표명하였는데 이번에는 비로소 중국이 받아들임으로써 [[1987년]] [[3월 26일]]에 홍콩과 유사한 [[일국양제]]의 논리로 마카오를 중국에 반환함을 규정한 [[중국-포르투갈 공동선언]]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마카오는 [[1999년]] [[12월 20일]]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었다. [[마카오 반환|마카오 반환식]]. 2년 전 홍콩에서도 유사한 의식을 치렀다.\ [youtube(cZ_E2BPghbc)] === 반환 이후 ===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 사태 이후로 중국이 일국양제를 지킬 의지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으나, 사실 포르투갈과 영국 모두 이런 문제점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영국은 끝까지 개입하려고 들었고 포르투갈은 현실을 인정하고 포기했을 뿐이다. 다만 그렇다고 아주 손 놓고 지켜만 본 건 아니라서 [[1999년]] 포르투갈은 반환 이전 합법적으로 마카오에 거주하던 주민 전원에게 [[포르투갈]] 국적을 부여해[* [[홍콩]]과는 달리 British National (Overseas) 같은 명목상의 국적이 아니라 정식 포르투갈 국적이기 때문에 지금도 마카오 인구 상당수는 포르투갈 국적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이들의 자손 또한 포르투갈인들이다. 수백 만의 인구를 가진 홍콩과 달리 당시 마카오의 인구는 몇 만명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이 그냥 묵인한 것. 영국 BNO 국적과 달리 정식 국적으로 인정되기에 그 자녀에게도 출생신고 또는 1999년 이전 부모의 마카오 귀화와 동시에 포르투갈 국적이 부여되기 때문. 대표적으로 [[김한솔]]의 경우인데, [[김정남(북한)|부모]]의 포르투갈령 마카오 귀화에 따른 수반취득으로 [[김한솔]] 또한 포르투갈 국적을 얻게 된 바 있다.] 중국이 일국양제를 지키지 않을 경우 해당 지역의 주민들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물론 영국과 마찬가지로 포르투갈 정부 또한 마카오의 일국양제를 침해하면 개입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명시하였으나 그 개입권한이라는 게 마카오 거주 포르투갈인과 포르투갈 자본 철수가 전부다. 따라서 중국 정부가 [[홍콩 보안법]] 비슷한 마카오 보안법을 실행하고 있음에도[* 물론 마카오에서는 홍콩처럼 대놓고 반대파를 잡아 족치는 수준은 아니지만, 사실 영향력이 크지 않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어서 하지 않는 것이다.] 일국양제를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사실 포르투갈의 인구 구조도 심각한 상황이라 오히려 중국이 스스로 사고를 쳐 줘서(...) 중국과의 관계를 상하게 할 것 없이 합법적으로 마카오인들을 데려오는 게 더 이득이기도 하다.] == 참고 문헌 == * Roderich Ptak, 申龍澈 (1985). 포르투갈 極東貿易의 成衰. 동양사학연구, 22, 135-158. * 이경규 (2013). 동양근대사 수업활용을 위한 중국의 세계 문화유산 조사 연구. 동아인문학, 25, 185-210. == 관련 문서 == * [[마카오]] * [[포르투갈 제국]] * [[명나라]] * [[식민지]] * [[예수회]] * [[영국령 홍콩]] * [[바스쿠 조아킹 호샤 비에이라]] [[분류:포르투갈의 식민지]][[분류:과거의 속령]][[분류:마카오의 역사]][[분류:중국의 조차지]][[분류:1999년 해체]][[분류:포르투갈-중국 관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