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표명렬 (문서 편집) [[파일:external/www.pressian.com/40080825115330%5b4%5d.jpg|width=200]] {{{+1 [[表]][[明]][[列]] }}} [[1938년]] [[5월 25일]] ~ ([age(1938-05-25)]세)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군인]], 활동가. 최종계급 육군 [[준장]]. 본관은 [[신창 표씨|신창]](新昌)[* 심안당파(審安堂派) 19세 렬(列) 항렬.]. == 생애 == 1938년 5월 25일 [[전라북도]] [[김제시|김제군]](現 [[김제시]])에서 아버지 은석(隱石) 표문학(表文學, 1915. 1. 11 ~ 1990. 4)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옥덕(李玉德, 1915. 6. 30 ~ 2004. 10. 15)[* 이두흥(李斗興)의 딸이다.] 사이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http://news.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15012|태어났다]].[* 출처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56833|#]]] [[국민학교]] 4학년 때 아버지의 고향인 [[전라남도]] [[완도군]]으로 이주했다. [[광주고등학교(광주)|광주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18기),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113|졸업하고]] 1989년 [[한양대학교 대학원|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외교안보학]] [[석사]] 학위[* 석사 학위 논문 : [[http://www.riss.kr/link?id=T1146527|中國의 經濟體制改革에 관한 硏究 : 經濟法과 經濟計劃을 中心으로]](중국의 경제체제개혁에 관한 연구 : 경제법과 경제계획을 중심으로, 1989).]를 취득했다. 1958년 육군사관학교(18기)에 입학해 1962년에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고 [[중위]] 복무 중이던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공보정훈장교]]로 근무했다. 이후 [[대만]] 정치작전학교에 파견되어 [[심리전]] 교육을 받은 뒤에는 심리전 전문가로 활동했고, 1985년부터 1987년까지 [[대한민국 육군본부|육군본부]] 정훈감을 지내다가 [[준장]]으로 예편했다. 정훈감 재직시에 독립군 및 광복군 출신 인사들을 육군 사관학교에 데려다가 육사 생도들의 사열을 받게 하는 등 한국군의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앞장 섰다. 반면 일본군, 만주군 출신 장군들에게 "왜 우리는 육사에 초청 안하느냐?"라는 등 대단히 까임권을 받았단다. [[이종찬]] 장군이 챙기고 싶은 인재. 1990년부터 천주교인권위원회 위원을 역임했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되자 지도위원으로 활동했다. 2000년대 들어서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반대했다가 주요 군인단체에서 제명되었다. 그후 [[대한민국재향군인회]]에서 나와 평화재향군인회를 설립했다. 진보성향의 활동 때문에 예비역 장성들 사이에선 평가가 좋지 못하다. 반면 개념 있는 예비역 장성들이라던지 장성급 장교가 아닌 군인 출신들 중 일부는 이 단체를 좋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군납비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줄여서 향군이 저지르는 온갖 군납비리나 매해 국고금을 거액으로 무상지원받은 것에 대한 이용내역에 대하여 보수 언론은 다룬 적이 없고 늘 쉬쉬한다. 당연하지만, [[한겨레]]같은 언론이 여러번 다룬 바 있는데 표명렬 준장도 인터뷰에서 '''"향군이 저지르는 비리에 대하여 이렇게 입을 막으면서 [[방산비리|군납품이 개차반이거늘]] [[우리의 주적은 간부|무능하고 더러운 주적이 뒤에 있는데]] 앞에 있는 주적만 들먹인다"'''고 쓴소리를 했다. 유감스럽게도 [[천안함 피격 사건]] 당시에는 천안함이 북한의 공격으로 격침되었다는 사실을 수구 언론이 북풍몰이를 위해 결과를 무작정 단정해 놓고 억지 주장을 한 것으로 규정했고 이를 [[이적행위]]로 규정했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8000|#]] == 여담 == * 2005년 평화재향군인회를 창설할 당시에 아버지 표문학씨의 [[남조선로동당]] 활동 전력이 문제가 됐었다.[[https://dailian.co.kr/news/view/21747|#]] 전쟁통에 투옥 기록 등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어서 육군사관학교 진학 시에도 [[https://dailian.co.kr/news/view/21747|연좌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 아버지 표문학씨는 [[일제강점기]] 때 [[중앙고등보통학교]](現 [[중앙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해 퇴학당했고, 이후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경성전기학교]](現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에 편입해 졸업 후 전기회사에서 일했다. [[8.15 광복]] 후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해 [[전라남도]] 지역 [[노동조합]] 책임자 등 간부를 역임했고, [[6.25 전쟁]] 당시에는 [[빨치산]] 활동을 했다. 이후 [[조선인민군]]이 퇴각하자 이를 따라 월북하려 했으나 국군에 체포되었고, 대전형무소에 이감되던 중에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유엔군사령부|UN군]] 고문관 역할을 하게 되면서 전향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 협정]]이 체결된 뒤에는 귀향해 농사를 지으며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71202.html|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김제시 출신 인물]][[분류:신창 표씨]][[분류:1938년 출생]][[분류:광주고등학교(광주) 출신]][[분류:육군사관학교 출신]][[분류:한양대학교 대학원 출신]][[분류:베트남 전쟁/군인]][[분류: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