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요제프 베렌브로크 (문서 편집) [[분류:독일 국방군/인물]][[분류:독일 연방군/인물]][[분류:에이스 파일럿]][[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1920년 출생]][[분류:2004년 사망]] [[파일:Franz-Josef_Beerenbrock.jpg]] '''프란츠-요제프 베렌브로크(Franz-Josef Beerenbrock : 1920. 4. 9~2004. 12. 13)''' [목차] == 대공포 부대에서 ==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인 [[1920년]] 4월 9일, "운하의 도시"로 불리는 [[베스트팔렌]]주의 다텔른(Datteln)에서 태어났다. [[나치]]당이 모든 정권을 손에 넣은 후 새로 제정한 징병 연령인 18세가 된 프란츠는 [[1938년]]에 [[루프트바페]]에 입대하여 신병훈련소를 나와 10월 1일에 [[대공포]] 부대에 배속되었지만, 이왕 [[공군]]에 온 바에야 조종사가 되겠다고 마음 먹고 전출 신청서를 냈다. [[1939년]] 봄부터 루프트바페의 혹독하면서도 체계적인 조종사 훈련을 받게된 베렌브로크는 [[하사]] 계급장을 달고 [[1941년]] 3월자로 제51전투항공단([[JG 51]]) 제12비행중대에 보충 병력으로 편입되었다. 그로부터 석 달 후인 6월 24일에 [[소련]] 공군의 [[투폴레프]] SB [[폭격기]] 편대를 발견하고 끈질기게 추격해 2대를 격추한 것이 그의 첫 전과였다. 부대원들은 그를 치하하고 신참의 첫 격추를 축하해주었지만, 그렇다고 말단 비행병인 그에게 교전권이 우선적으로 주어지기에는 까마득한 상관들과 날고 기는 선임 조종사들이 너무 즐비했다. == 신들린 격추 행진 == [[카를-고트프리트 노르트만]](Karl-Gottfried Nordmann : 78기 격추) 대위의 윙맨으로 복무하던 그는 7월까지 자신의 스코어를 13대로 늘려놓았다. 그제서야 윙맨을 이끌 자격을 얻고 자유 요격 권리를 갖게 된 그는 8월에 제4중대로 이적했고, 곧바로 교전에 임하면서 8월 30일까지 한달간 무려 40대나 격추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상사(계급)|상사]]로 승진한 베렌브로크는 10월 6일에는 2기를 더했고 그 전공으로 [[철십자 훈장|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2월 6일까지 그의 격추 기록은 50대가 되어 있었지만, 베렌브로크 상사의 활약은 그후로도 계속되었다. 베렌브로크는 [[1942년]] 8월 1일에 단 하루만에 9대를 격추하면서 독일 공군 파일럿을 통틀어 15번째로 100기 격추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정예 부대인 JG 51에서도 그 무렵 기준으로는 톱건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하루에 9대 격추로부터 이틀 후인 8월 3일에 [[총통]]에게 불려간 그는 곡엽기사철십자 훈장을 받으면서 그 자리에서 [[소위]]로 승진하게 된다. == 첫 피탄이 마지막 == 지휘관이 되기에 충분한 전투력을 인정받은 그는 11월에 [[중위]] 계급장이 주어지며 JG 51 제10비행중대장이 되었다. 11월 9일, 숫적으로 우세한 소련의 전투기 편대에 달려든 그는 난전 끝에 3대를 격추시켰지만 타고 있던 [[Bf 109]]F-2(W.Nr. 6779)의 냉각기에 피탄 당해 소련 영토 안에 추락했다. 동체 착륙을 시도해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는 즉시 기체를 버리고도주했지만, 얼마 안가 소련 병사들에게 사로잡혀 전쟁 포로가 되었다. [[독소전]]에서만 참전한 프란츠-요제프 베렌브로크 중위의 출격횟수는 그때까지 약 400회, 격추수는 117대를 헤아리고 있었다. == 포로 생활 == 그는 나머지 전쟁 기간 동안 포로 [[수용소]]에서 보내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는 [[소련군]] [[형무소]]로 끌려갔다. 그가 다시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은 것은 그로부터 4년 반이나 지난 [[1949년]] 12월에 서독 국경을 통해서였다. 그렇지만 베렌브로크는 그와 마찬가지로 수형 생활을 했던 다른 조종사들 - [[에리히 하르트만]], 하요 헤르만 등 - 과는 달리 이례적으로 빨리 풀려난 것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짧은 형기만 채우고 돌아온 [[헤르만 그라프]]가 그랬던 것처럼, 프란츠 베렌브로크에게도 의혹의 눈길이 쏟아졌지만 그는 무엇 하나 밝히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 배신자의 낙인 == [[1955년]] 1월 1일, 재건된 독일 연방군에 재입대한 프란츠 베렌브로크는 다시 사관학교 생도를 거쳐 서독 공군에 부임했다. 그렇지만 이미 동료와 과거 전우들 사이에서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 있던 그는 진급 대상에서 늘 제외되기 일쑤였다. 결국 공군에서 일찌감치 제대한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의 옆 고장인 뮌스터로 돌아가 군 관련 행사와는 거의 인연을 끊고 살게 된다. 오랜 세월이 흐른 [[1990년]]에 베렌브로크는 그간의 긴 침묵을 깨고 회고록을 출판했지만, 그 책 어디에서도 베렌브로크 자신이 소련에 협조했다는 고백이라든가 형기가 대폭 줄어든 이유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이렇게 과거와 단절된 삶을 살던 그는 [[2004년]] 12월 13일에 84세의 나이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 서훈 == 2급 [[철십자 훈장]] (1941년 7월 3일) 1급 철십자 훈장 (1941년 7월 18일) 기사철십자 훈장 (1941년 12월 21일) [[독일 십자훈장|독일 황금십자장]] (1942년 6월 17일) : JG 52 제4비행단 부사관으로서는 첫 수상자 곡엽기사 철십자훈장 제108호 (1942년 8월 3일) [include(틀:2차 세계대전/전투기 에이스 67~84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