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재우 (문서 편집) [include(틀:송사)] ||<-2> {{{#ece5b6 '''{{{+1 남송의 명장[br]{{{+1 畢再遇 | 필재우}}}}}}'''}}} || || '''{{{#fff 성}}}''' ||필(畢) || || '''{{{#fff 이름}}}''' ||재우(再遇) || || '''{{{#fff 자}}}''' ||덕경(德卿) || ||<:>'''{{{#ece5b6 시호}}}''' ||<(> 충의(忠毅) || || '''[[주군|{{{#fff 주군}}}]]''' ||[[영종(남송)|송영종]] || || '''[[국적|{{{#fff 국적}}}]]''' ||남송(南宋) || [목차] [clearfix] == 소개 == 畢再遇, 1148?~1217? 자는 덕경(德卿)으로, 본관은 연주(지금의 산동 연주)이며, 임안 서계 사람. 남송의 명장이자 무의대부 필진[* 고종 시기 명장 [[악비]](岳飛)를 따라 북송(北宋)의 팔릉을 호위하고 강(江)·회(淮) 지역을 지켜 무의대부(武義大夫)로 관직 생활을 했다.]의 아들. 시호는 '충의(忠毅)'. == 생애 == === 장군 문후 === 그는 일찍이 음보로 관직에 나가 처음에는 시위마군사하에 속하였다. 그는 무예가 뛰어나서 2석 7두의 활을 당길 수 있고, 반대편 손으로 1석 8두의 활을 당길 수 있으며, 도보로 2석, 말을 타고 2석 5두를 쏠 수 있었다고 한다. 순희(淳熙, 1174년-1189년) 연간, 용력으로 중군에 이름을 날려 효종에게 전포와 금전을 특별히 하사받았다. === 사주에서의 전투 === 개희 2년(1206년) 4월, [[권신]] [[한탁주]]가 북벌을 일으킬 때 곽예[* 곽예는 스스로를 [[제갈량]]에 견주었으나, 금군이 내려오자 [[장강]]으로 도주하고 만다.] 밑에서 무의대부로 있었고, 통제 진효경 등과 함께 사주를 공격하였다. 필재우가 새로 뽑을 결사군을 선봉으로 뽑아달라고 부탁하자 곽예가 그에게 87명을 주었다. 초무사는 진병 날짜를 정했는데, 이를 들은 금군이 이를 듣고 시장을 폐쇄하고 성문을 막아 대비했다. 필재우가 간하였다. >적들은 우리가 진군할 날짜를 이미 알고 있사옵니다. 우리가 기이한 방법으로 이겼으니 하루라도 빨리 진군해 불의에 떨었어야 했사옵니다. 진효경은 허락하였다. 필재우는 사졸들을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고 충의로 격려하여 사주로 진군하였다. 사주에는 동서 두 도시가 있는데, 필재우는 영을 내려 전기와 배, 노를 오른쪽에 배열해 놓고 서성을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급산(急山)에서 곧장 동성(東城) 남쪽 모퉁이로 올라가 먼저 성벽 위로 올라가 수백 명의 적을 죽이고 금군은 크게 패하자 성을 지키는 사람들은 북문을 열고 달아났다. 동성이 함락된 후에도 서성은 굳게 지켜졌고, 다시 대장기를 들고 크게 소리친다. >대송의 필 장군이 여기에 있다. 너희들은 중원의 유민이니 빨리 와서 귀순하라. 곧 회평지현(淮平知縣)이 헌성(獻城)을 바치고 투항하여 사주(泗州)의 두 성을 모두 송군이 점령하였다. 곽예는 장병을 위로하고, 어보자사아패를 필재우에게 수여했으나, 필재우는 이를 사양했다. >국가는 황하 이남에 81주가 있는데, 지금 사주 두 성을 탈환하면 자사의 벼슬을 얻는다면 앞으로 무엇을 하사할 것이옵니까? 더구나 조정에서 오는 아패를 몇 개 얻을 수 있사옵니까? 그는 완강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얼마 후에 환위관으로 임명되었다. === 위명을 떨쳐 금을 진동시키다 === 곽예는 이여익(李汝翼)과 곽탁(郭卓)이 숙주(宿州)를 공격하여 진효경(陳孝慶) 등을 보내 이들을 접대하게 하였고, 필재우에게 480명의 기병을 앞세워 서주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필재우가 홍현에 이르러 곽탁(郭卓)·이여익(李汝翼)의 병졸들이 부상을 입은 것을 보자 그들에게 물었다. >숙주성 아래는 대수(大水)인데 아군이 패배하여 통제 전준매가 이미 적에게 사로잡혔다. 필재우는 진효경의 군대와 조우하나, 진효경은 후퇴하려 하였고 필재우가 반대한다. >숙주에서는 비록 이기지 못했지만 병가는 승부가 불확실한데 어찌 스스로 자신을 꺾을 수 있겠는가! 나는 초무의 명을 받들어 서주를 공격했는데, 그 길로 영벽의 북문 밖에서 죽을지언정 영벽의 남문 밖에서는 죽지 않겠다. 마침 곽탁이 진효경에게 서신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오라고 명령하자 필재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곽탁, 이여익 군대가 궤멸하면 적이 반드시 뒤따라올 것이니 내가 스스로 적을 막아내야 한다. 금군은 과연 6천여 기병을 두 갈래로 나누어 쫓아오게 하였는데, 필재우는 다시 결사군 20명을 영벽의 북문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금인은 그의 장기를 보고 "필 장군이 왔다"고 소리치며 패주했다. 필재우는 손을 맞잡고 칼을 휘둘렀고, 물을 건너 추격해 수많은 금군을 죽였고, 그의 갑옷과 옷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 여세를 몰아 30리를 추격하던 와중 금의 한 장군이 말을 달려나갔고, 필재우는 오른손 칼로 그의 패를 막고 오른손 칼로 옆구리를 내리쳤고, 금 장수가 낙마하여 죽었다. 영벽에서 출발한 송군은 홀로 남겨진 채 움직이지 않다가 송군이 20여 리를 걸어갔을 것 때 영벽성을 불태우기 시작했는데, 병사들이 의아해했다. >밤에는 태우지 않고, 지금은 태우는데, 왜 그러는 것입니까? 필재우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밤에 불을 피우면 우리의 허실이 보이고, 낮의 연기와 먼지가 적의 시야를 가릴 수 있으며, 적이 이미 실패하여 감히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해야 제군이 안심하고 행군할 수 있다. 군사가 쉬우면 물러서기 어렵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느냐. === 우이 수복 === 그는 사주로 돌아온 후 무절랑에서 무공대부로 승진하여 좌급위장군에 임명되었다. 이때 신임 강회선무사(江淮宣撫使) 구종산이 곽예에게 유양(惟揚)을 철회하게 하고, 곧 고립된 사주(泗州)를 버렸다. 필재우도 명령에 따라 우이로 돌아가 금군이 양회 지역의 송군의 연락을 끊는 것을 막았다. 얼마 후, 다시 진강중군통제(鎭江中軍統制)로 전임된 뒤 봉황산의 전공으로 달주자사로 서임되었다. 개희 2년(1206년) 겨울 10월, 호사호[* 이후 위소왕을 죽이고 선종이 즉위하자 처형당한다.]는 보병, 기병 수만 명 및 전선(戰船) 500여 척을 이끌고 청하구에서 회하를 건너 초주(楚州, 지금의 강소 회안), 회음(淮陰) 사이에 정박하여 초주를 포위하였다. 강회선무사는 격문을 돌려 필재우에게 초주를 원조하게 하고, 단정(段政), 장귀(張貴) 등을 대신 보내 우이군을 지키게 했다. 결국 다시 만나 우이를 떠나자 금군은 곧 공격을 개시하였고, 단정 등은 당황하여 물러가 우이를 함락시켰다. 그 후 소식을 듣고 돌아와 우이를 수복하고 진강부도통제(鎭江副都統制)에 임명된다. === 육합에서의 격전 === 금군은 7만 명이 초주성 아래에 주둔하고 있는데, 삼천 명이 회양에서 양초를 간호하고 또 삼천 척의 곡식을 실은 배가 대청하에 정박하였다. 필재우가 이를 탐지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은 우리의 10배이다. 우리가 이기기 어려우니 계략으로 적을 쳐부술 수 있다. 그래서 허준을 보내 작은 길에서 회양으로 달려가게 했는데, 밤 이경에 군사의 입에서 한 발이 들어가 쥐죽은 듯 적진에 이르렀다.송군은 저마다 불씨를 가지고 잠입해 50여 군데의 곡식 수레 사이에 매복했다가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불을 질렀다. 금군은 놀라 도망쳤고, 오고륜사륵·포찰원노 등 23명은 생포됐다. 개희 2년(1206년) 11월 금군이 황구탄에서 회하를 건넜고, 와구의 수장이 도망쳤으며, 호, 저의 2주가 차례로 함락되자 금군은 안풍군을 격파했다. 필재우는 여러 장수들을 만나 말하였다. >초주는 군사가 많고 적의 군량과 마초가 비었으니 내가 걱정하는 것은 회서뿐이다. 육합(六合)이 가장 중요하고, 적들은 반드시 전력을 다해 공격할 것이다. 그리하여 군사를 이끌고 육합으로 달려갔다.얼마 후 조정은 그에게 회동군마를 절제하라고 명령했다. 금인이 죽진까지 다다르자 송군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 성을 나가 적을 맞이하더니, 북소리를 듣고 성에 깃발을 나란히 들었고, 금인은 황급히 도망쳤고, 송군은 추격하여 금군을 크게 물리쳤다. 금 만호 완안포랄도, 천호 니방고가 10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성가교, 마안산에 주둔하고, 진병하여 육합성을 에워싸고, 제당목을 불태우고 참호의 물을 끊으려 하자, 다시 강력한 쇠뇌로 적을 물리친다. 이윽고 성중의 화살이 바닥나자, 필재우가 청개를 모아 성 위로 가져온 뒤, 금군은 송군의 통수인 줄 알고 화살을 다투어 쏘았다. 이윽고 화살이 모였는데, 송군은 20여만개의 화살을 받았다. 도통 흘석렬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가고, 얼마 뒤 군사를 늘려 성을 에워싸고, 육합성 사면의 금군 막사가 삼십 리나 길게 이어졌다. 필재우가 성문 앞에서 악을 연주하라는 명령을 내려 금군에게 송군이 한가하다는 것을 알렸고, 종종 기병을 보내 금군을 습격했다. 금군은 밤낮으로 쉬지 못하고 물러갔음에도 금군이 다시 올 것으로 예상되자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성동의 야신교를 빼앗아 적후에 나타나자 도망쳤고, 추저우까지 추격하여 큰 비를 만나야 비로소 회군하였다.육합일역, 송군은 금군 노새와 말 천오백삼십일 필, 안장 육백 벌, 그리고 수많은 갑옷과 깃발을 노획하였고 그 공으로 충주단련사에 임명되었다. === 초주의 포위를 풀다 === 개희 2년(1206년) 11월, 진강도통제 겸 권산동(權山東)·경동초무사(京東招撫司事)에 임명되었다. 그는 양주로 돌아와 또 효위대장군에 서임되었다. 금군이 초주를 포위한 지 석 달이나 되어 육십여 리에 주둔하였다. 필재우가 장수를 파견하여 금병을 막으니 군대의 위세를 크게 떨쳐 초주의 포위망을 풀었다. 이후 양주(揚州)와 회동(淮東)의 안무사(安務使)직을 겸했다. 양주에는 북군 2천5백 명이 있었는데, 필재우에게 부탁하여 건강부와 진강부의 각 군에 각각 속하게 하고, 각 군대가 몇 명을 넘지 않게 하여 반란을 일으킬 수 없게 하였다. 결사군은 원래 오합지졸로, 필재우는 다시 이들을 부릴 수 있었다. 진세웅, 허준 등은 모두 필재우가 추천했다. 필재우의 부장인 장건웅은 자신의 용맹에 의지하여 난폭하게 굴었고, 필재우는 그의 죄상을 열거하여 조정에 상소하여 군법에 따라 장건웅을 참수하자, 여러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 죽음 === 가정(嘉定) 원년(1208년), 좌효위상장군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가정화의(嘉定和議)가 이루어지고 귀향하라는 조서를 받자[* 개희북벌 실패 이후 한탁주가 주살당하였고, 사미원이 집권하였다. 한탁주의 수급은 중도대흥부로 보내졌고, 장종 완안경은 조상들에게 승전을 고한다.] 송 영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보강군승선사(保康軍承宣使)로 임명하고 조서를 내려 그에게 포유했다. 오래지 않아 또 그에게 직책을 안내하여 우신관을 들게 하였다. 가정 4년(1211년) 2월, 다시 언관의 탄핵을 받아 한 관등을 내린 데 이어 탄핵을 받자 우신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가정 6년(1213년), 제거태평흥국궁(提擧太平興國宮)으로 전환되었다. 가정(嘉定) 10년(1217년) 4월, 금군(金軍)이 다시 남파했다.[* 금의 선종이 몽골군의 위협으로 인해 변경으로 천도했다. 이에 남송의 영토를 빼앗아 다시 힘을 키우고자 했던 것.] 고희에 가까운 나이에 다시 금군을 만나니, 이미 전쟁터에서 죽을 힘이 없어 무신군 절도사로 승진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호주삽계에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났으며, 이 해에 7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가정(嘉定) 11년(1218년), 태위(太尉)에 추증되었다. 이후 태사(太師)가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 일화 == == 여담 == 금군은 그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도망치기에 바빴고, [[항저우]]에 그 묘소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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