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더슨 소령 사건 (문서 편집) [include(틀:사건사고)] [include(틀:북미관계 관련 문서)] ||<-3> '''{{{+2 헨더슨 소령 사건}}}[br]Major Henderson Incident''' || ||<-3>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nwse-kr-13778_18223_3621.jpg|width=100%]]}}} || ||<-2> '''일시''' ||[[1975년]] [[6월 30일]] || ||<-2> '''장소''' ||[[경기도]] [[파주시|파주군]] [[진서면]] 선적리[br][[공동경비구역]] || ||<-2> '''원인''' ||헨더슨 소령에 대한 북한 기자 배성동의 도발 || || '''인명[br]피해''' || '''부상''' ||1명 {{{-2 (유엔군 소속 W,D.헨더슨 소령)}}}[* [[미 육군]] 소령] || ||<-2> '''영향 국가''' ||[include(틀:국기, 국명=미국)][br][include(틀:국기, 국명=북한)][br][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nwse-kr-13778_18223_3621.jpg|width=100%]]}}}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1 북한군이 쓰러진 소령을 구타하는 장면}}}'''}}} || || {{{-2 벤치의 등받이에 앉아 있는 남성이 문제의 배성동 북한 기자다.}}} || 1975년 6월 30일, [[공동경비구역|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유엔군사령부]] 소속 [[미 육군]] 소령 W.D.헨더슨이 북한 측 군인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한 사건.[* 해당 사건은 영문 위키피디아에도 기록될 정도로 외국에선 꽤나 비중있게 조명되었던 사건이나,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많이 없는 편이다.] 당시 수십 명의 대한민국 군인과 유엔군들이 겨우겨우 북한군들을 말리는 데 수십 명의 북한군들이 더 달려오고, 이에 [[대한민국]] 측 장병들도 수십 명이 몰려와 굉장히 험악한 분위기 속에 집단 난투극이 벌어질 뻔했다고 한다. 참고로 위 사진은 80년대 [[전두환 정부]]에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사진과 함께 [[국민학교]] 교실마다 붙여놓고 반공 교육에 쓰이기도 했다. == 상세 == 때는 북한의 [[대남도발]]이 끊이지 않았던 [[대한민국 제4공화국|유신]] 시절. 당연히 남북한 최정예 군인들과 미군이 코앞에서 서로 정렬해 있는 [[판문점]]의 [[공동경비구역|JSA]]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이날은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의 제364차 본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JSA에 유엔군 소속으로 근무하던 헨더슨 소령은 본회의 회담장 인근의 벤치에 앉아 정모를 벗은 채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에 북한의 기자 배성동이 다가와 헨더슨 소령에게 "자리를 비키라", "이 놈 나보다 키가 작다", "[[간나새끼]] 빨리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우"라는 불손한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선 의자 등받이 위로 올라타 헨더슨 소령의 머리를 만지거나 때리는 등의 약을 올렸다. 헨더슨 소령은 "불손한 태도를 삼가라"라고 주의를 주거나, 머리를 만지려는 그의 손을 쳐내는 등 별다른 저항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이후 배성동이 헨더슨 소령에게 침을 뱉었고, 그가 발끈해서 일어서자 이내 그의 배에 주먹을 두 차례 날린다. 이에 헨더슨 소령도 반격하며 싸움이 벌어졌고, 근무교대를 위해 근처에 모여 있던 북한군 여러 명이 이를 보고선 헨더슨 소령에게 달려들어 바닥에 밀쳐 넘어뜨린 뒤, 쓰러진 그를 발로 짓밟고 걷어차는 등 심한 구타를 가했다. 집단구타의 주도자는 북한군 박철 중위로 1년 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의 주도자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2.jpg|width=100%]]}}}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1 인민군과 헌병 간의 실랑이가 벌어지는 장면}}}'''}}} || 현장 인근에는 30여명의 유엔군 병사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헨더슨 소령을 구타하는 북한군 무리를 말리려다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이후 국군 병사와 유엔군, 헌병들이 뒤섞여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고 진행 중이던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도 약 5분간 일시중단 되었다. 헨더슨 소령은 후두부 [[두개골]]과 [[경추]]가 골절되고 중태에 빠지는 등, 치명상을 입게 된다. 난투극은 남북 양측 소속의 경비장교들의 개입으로 곧 중단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1.jpg|width=100%]]}}}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1 국군병원으로 긴급 호송되고 있는 헨더슨 소령}}}'''}}} || 이후 헨더슨 소령은 [[헬기]]로 [[국군병원]]까지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으며, 이후 고국인 미국으로 송환되어 메릴랜드 주에 위치한 월터 리드 국제 군사 의료 센터(Walter Reed National Military Medical Center)에서 회복을 거친 뒤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명예 전역하게 된다. 이때 그는 잠깐동안 언어 구사 능력을 상실하는 후유증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던 것이, 당시에는 공동경비구역 [[공동경비구역|JSA]] 내에서 상호간의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남한군과 북한군이 대화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남북 화해무드가 무르익었을 때[* [[7.4 남북 공동 성명]] 당시]는 서로 형 동생하며 통일되면 서로의 집에 놀러가자고 주소를 교환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에도 미군 소령이 두들겨 맞을 때 남한 병사들이 "형, 왜 이래."라고 하면서 뜯어 말렸다고. 이러한 자유왕래는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이후 완전히 구역이 나눠지면서 불가능하게 된다. 이 당시 북한군과 대화한 남한 병사들의 증언이 [[반공]]교육 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http://pdf.joins.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1199012220073|#]] 이 자료에는 휴전선에서 대화한 것과 JSA에서 대화한 내용이 섞여있다. 북한 측은 사후 회의에서도 "핸더슨 놈은 살아서 자기네 소굴을 밟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라고 뻗대며 난동을 부렸고 유엔군 측이 제시한 경비병력의 감축과 비무장, 군사분계선을 따른 분할 요구도 씹어버렸다. == 영향 == 이 사건으로 인해 안 그래도 엉망인 북미관계는 더 악화되어, 결국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나는 데도 영향을 끼친다. 양국 군인들끼리 벌어진 구타사건일 뿐이지만 [[중소 분쟁]]같은 대형 사건도 비슷한 사건을 통해 일어난 사건인 만큼 역사적으로 꽤나 비중 있는 사건이다. [[분류:북한/대남 도발]][[분류:북한/대미 도발]][[분류:제4공화국/사건사고]][[분류:김일성 시대]][[분류:포드 행정부]][[분류:1975년/사건사고]][[분류:미군/사건 사고]][[분류:파주시의 사건사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