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혁련발발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북하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3368 0%, #26619C 20%, #26619C 80%, #003368); color: #ece5b6" '''북하 초대 황제[br]{{{+1 세조 무열제 | 世祖 武烈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혁련발발.webp|width=100%]]}}} || ||<-2> {{{#ece5b6 {{{-2 통만성유물박물관에 있는 혁련발발의 동상 (왼쪽)}}} }}} || ||<|2> '''출생''' ||[[381년]] ||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 [[산시성(섬서성)|삭방군]] [[위린시|삭방현]][br](현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위린시]] 징볜현) || ||<|2> '''사망''' ||[[425년]] (향년 45세) || ||[[북하]] [[위린시|통만성]] 황궁 영안전[br](현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위린시]] 징볜현) || || '''능묘''' ||가평릉(嘉平陵) || ||<|6> '''재위기간''' ||'''{{{#ece5b6 제8대 철불부 수령}}}''' || ||[[391년]] ~ [[407년]] || ||'''{{{#ece5b6 초대 천왕}}}''' || ||[[407년]] ~ [[418년]] || ||'''{{{#ece5b6 초대 황제}}}''' || ||[[418년]] ~ [[425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흉노|유(劉)]] → 혁련(赫連) || || '''휘''' ||발발(勃勃) || || '''부모''' ||부황 [[유위진|태조]][br]모후 부인 [[전진(오호십육국시대)|부씨]] || || '''형제자매''' ||5남 중 3남 || || '''배우자''' ||부인 파다라씨, 부인 양씨 || || '''자녀''' ||7남 5녀 || || '''신체''' ||201cm[* 8척 5촌], 115cm(허리 둘레)[* 10위] || || '''자''' ||굴혈(屈孑) || || '''작호''' ||오원군공(五原郡公) || || '''묘호''' ||'''[[세조]](世祖)''' || || '''시호''' ||무열황제(武烈皇帝) || || '''연호''' ||용승(龍昇, [[407년]] ~ [[413년]])[br]봉상(鳳祥, [[413년]] ~ [[418년]])[br]창무(昌武, [[418년]] ~ [[419년]])[br]진흥(眞興, [[419년]] ~ [[425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북하]](北夏)의 초대 [[황제]]. [[흉노|남흉노]] [[선우]] [[호주천]]의 후예이자, 남흉노와 [[선비족]]의 [[혼혈]]이었던 [[철불부]]의 수장 [[유위진]]의 아들로, 본래 이름은 유발발이었으나 413년에 성씨를 혁련(赫連)으로 고쳤기 때문에 혁련발발이라 칭해진다. == 생애 == === 멸문지화 === 391년 11월, 대래성에서 철불부의 부족민들을 모아 힘을 키우던 아버지 유위진이 [[북위]]의 태조 도무제 [[탁발규]]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5,000여 명의 종실들이 주살당했다. 유위진 또한 북위의 장수 이위(伊謂)가 이끄는 경기병 추격대에게 쫓기다가 부하에게 배신당해 피살되었다. 이때 유위진의 어린 아들 유발발은 가까스로 도망쳐 선비 질간부로 피신하니, 북위의 도무제 탁발규가 사신을 보내 유발발을 요구했다. 이에 질간부의 수장이 북위가 두려워 유발발을 압송하려 하자, 수장의 조카였던 질간아리(叱干阿利)가 급히 나아가 아뢰었다. >"새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사람의 품에 안기면 재난을 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데, 하물며 패가망신한 어린 아이의 경우에야 다르겠습니까? 설령 그를 품을 수 없더라도 마땅히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합니다. 지금 유발발을 잡아다가 북위에 보내는 것은 어진 자의 소행이 아닙니다." 하지만 질간부의 수장은 북위에 책망받을까 두려워 이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질간아리는 하는 수 없이 몰래 용맹한 자를 보내 유발발을 압송해가던 일행을 습격하고는 그를 빼돌려서 [[강족]] 요씨의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으로 보냈다. 이후 유발발은 후진의 휘하에서 [[오르도스]] 지역의 고평을 다스리던 선비 다란부(多蘭部)의 수령 [[몰혁간]]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고, 그의 [[딸]]과 결혼했다.[* 참고로 질간부가 유발발을 보내오지 않자 북위의 도무제 탁발규는 그대로 군사를 보내 질간부를 도륙내버렸다. 이로 인해 질간부의 수령은 북쪽으로 도망쳤고, 질간아리는 후진에 있는 유발발에게 갔다.] 유발발이 장성했을 때, 그의 키는 8척 5촌[* 당시 척인 23.7cm로 계산하면 201cm가 나온다.]에 달했고, 허리 둘레는 10위[* 현재 기준으로 계산하면 115cm 정도이다.]였다. 화려한 풍채의 미남인데다가, 총명하고 언변에도 능숙하여 후진의 황제였던 고조 문환제 [[요흥]]의 총애를 받았다. 요흥이 그를 처음 만나보고는 매우 놀라워하며, 그 자리에서 유발발을 효기장군으로 임명하고, 항상 그와 더불어 군국대사를 의논했다. 요흥의 동생 요옹(姚邕)은 형이 개국공신들보다 유발발을 총애하는 모습을 보고 >"유발발은 천성이 어질지 못해 친해질 수 없습니다" 라고 경고했지만, 요흥은 >"유발발은 대재다능하여 그 재능을 이용해 천하통일하려는데 안될 거 뭐 있겠는가!" 라며 맞받아쳤다. 이후로도 요흥은 유발발을 신뢰하여, 406년에 그를 안북장군에 임명하고 오원공에 봉한 뒤, 삼교(三交)의 5부 선비족과 기타 이민족 병사 30,000명을 주어 그의 장인인 몰혁간과 함께 고평과 삭방 지역을 지키도록 했다. === 북하 건국 === 407년, 북위의 [[도무제]] 탁발규와 후진의 문환제 [[요흥]]이 서로 포로를 교환했다. 북위에선 일전에 전투에서 사로잡은 후진의 월기교위 당소방(唐小方)을 보내왔고, 후진은 억류했던 북위의 사자 북부대인 하적간(賀狄干)을 말 1,000여 필과 함께 돌려보냈다. 유발발은 이 소식을 듣고 요흥이 원수인 북위와 화친한다고 오해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유연(민족)|유연족]]이 북위에 바치려던 말 8,000필을 중간에서 탈취하고, 자신의 무리 30,000명으로 고평을 습격해 장인인 몰혁간을 살해했다. 유발발이 몰혁간의 무리까지 흡수해버리니, 그가 이끄는 인마는 수만에 이르렀다. 유발발은 스스로 [[하나라]] 사성 [[계왕(하나라)|하후씨]]의 후손임을 칭하면서 [[북하]]를 건국해, 대하천왕, 대선우(天王, 大單于)를 자칭하고, [[연호]]를 [[용승]](龍昇)이라고 했다. 큰형 유우지대(劉右地代)를 승상, 대공(代公)으로 삼고, 둘째형 유역사제(劉力俟提)를 대장군, 위공(魏公)으로 삼았다. 또, 질간아리는 어사대부, 양공(梁公), 동생 유아리라인(劉阿利羅引)은 정남장군, 사예교위, 유약문(劉若門)은 상서령, 유질이달(劉叱以韃)은 정서장군, 상서좌복야, 유을두(劉乙斗)는 정북장군, 상서우복야에 각각 임명했다. 이렇게 하왕에 오른 유발발은 총명했으나 성정이 잔학하여 북하의 백성들은 학정(虐政)에 시달렸다. 407년 10월, 북하를 건국한 유발발은 후진에 복속되어 있었던 선비족 설간부(薛干部) 등 3부를 격파해 그 무리 10,000여 명을 항복시켰다. 그리고는 삼성(三城)[* 현재의 중국 [[옌안시]].] 이북에 후진이 세워둔 여러 주둔지를 토벌하여 후진의 장수 양비(楊丕)와 요석생(姚石生) 등을 죽였다. 유발발 휘하의 장수들이 고평을 도읍으로 삼은 후 지켜야한다고 간언했으나 유발발이 거절하며 말했다. >"너희들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구나. 나는 대업을 이루었으나 군대가 많지 않고, 요흥도 당대의 영웅이라 아직 관중을 도모할 수는 없다. 게다가 후진의 각 진영들은 명령을 잘 받들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데, 만약 우리가 고평성 하나만 지킬 때, 후진군이 힘을 합쳐 고평을 공격해오면, 성은 반드시 함락되어 우리는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신속하게 움직여서 후진군이 전방을 구원하러 가면 후방을 치고, 후방을 구원하러 가면 전방을 치는 방식으로 그들을 바쁘게 한다면''', 10년도 안되어 우리는 영북(嶺北)과 하동(河東) 지역을 전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 힘을 기르다가 요흥이 죽게되면 그때 장안을 공략해 나약한 그의 아들 [[요홍]](姚泓)을 사로잡으면 된다. 과거 [[황제(중국 신화)|헌원씨]]도 사람들을 이끌고 20여 년 동안 이 지역을 왔다갔다 했는데, 하물며 나라고 못할 쏘냐!" 그리하여 북하군은 유발발의 지휘 아래 한동안 전통적인 [[유목민족]]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일부러 도읍을 정하지 않고 떠돌아 다니는 독특한 전략을 채택하는 등 [[유격전]]을 벌이며 후진을 압박했다. 특히 영북군과 하동군을 자주 침략해오니, 각 성문은 낮에도 감히 문을 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유발발의 계책으로 국경이 혼란스러워지자, 문환제 요흥은 >"내가 요옹의 말에 따르지 않아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라며 탄식했다. 407년 11월, 유발발이 [[남량]]의 군주 [[독발녹단]]에게 혼약을 청했지만, 독발녹단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유발발은 이 일을 빌미로 20,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양비(楊非)에서 지양(支陽)까지 총 300여 리를 진격해 10,000여 명을 살해하고, 백성 27,000여 명과 소, 말, 양 등 가축 수십만 구를 노획한 뒤 돌아갔다. 독발녹단이 북하군을 추격하려고 하자 초랑(焦朗)이 말렸다. 독발녹단은 분노하여 >"내게 계책이 있으니 추격하지 말라고 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겠다!" 라며 엄포를 놓고 출진했다. 유발발은 독발녹단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그는 양무(陽武) 아래의 골짜기에 얼음을 뚫고 수레를 묻어 길을 막고는 진격해오는 남량군을 맞았다. 드디어 북하군을 만난 독발녹단은 먼저 활을 잘쏘는 병사들을 앞으로 보내 활을 쏘게 했는데, 유발발의 왼쪽 팔뚝에 화살이 꼳혔다. 하지만 유발발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화살을 뽑은 뒤, 날랜 기병들을 몰아 매섭게 진격하니, 예상외의 기동력과 용맹함에 놀란 남량군은 황급히 맞서싸우다가 결국 대패했다. 독발녹단은 겨우 도망쳤지만 북하군에게 80여리를 추격당했고, 전사한 남량군이 10,000명, 전사한 용장은 10여 명이었다. 유발발은 남량군의 시체를 쌓아 [[경관]]을 만들고 '촉루대'(髑髏臺)라는 이름을 붙이며 조롱했다. 이후 노획한 물자들을 가지고 다시 북하로 돌아갔다. === 후진 침략 === 408년, 청석원(靑石原)에서 후진의 장수 장불생(張佛生)을 무찌르고 5,000여 명을 사로잡거나 참수했다. 이에 문환제 요흥은 후진의 좌복야 제난(齊難)에게 기병 20,000명을 주어 추격하게 하니, 유발발은 하곡(河曲)으로 일단 군사를 물렸다. 제난은 유발발이 완전히 도주한 줄 알고 안심하여 병사를 풀어 사방을 노략질했는데,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던 유발발이 비밀리에 진군하여 약탈에 정신이 팔린 제난의 후진군을 기습했다. 후진군은 패배하여 7,000여 명이 포로로 잡히고 군마와 병기를 모두 빼앗겼다. 제난은 목성(木城)으로 갔지만, 뒤쫓아온 유발발이 목성까지 함락시키고 제난과 후진군 3,000여 명을 추가로 사로잡았다. 이 일로 인해 영북에 거주하던 이민족과 한족 10,000여 명이 강족의 후진을 버리고 유발발에게 항복했으며, 유발발은 이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409년 4월, 유발발은 또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후진을 침략해 평량(平涼)군에 거주하던 여러 이민족 7,000여 호를 약탈했다. 이후 포로들은 후방으로 보낸 뒤 의역천(依力川)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유발발의 패악질을 견디다 못한 문환제 요흥은 친히 그를 정벌하기 위해 이성(貳城)에 이르러, 안원장군 요상(姚賞)을 보내 각지에서 군대를 불러모으도록 했다. 유발발은 요흥의 군대가 아직 모이지 않은 틈을 타서 기병을 거느리고 이성을 엄습했다. 요흥은 두려워 요문숭(姚文宗)을 내보내 싸우게 하니, 유발발은 싸우다가 거짓후퇴하며 군사를 매복시켰다. 요흥은 이를 보고 요유생(姚榆生) 등에게 명령을 내려 추격하게 했고, 결국 이들은 유발발의 매복에 걸려들어 모두 생포당했다. 유발발은 기세를 타고 이성을 밀어붙였으나, 요문숭의 분투로 인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물러나야만 했다. 문환제 요흥 또한 전투가 끝나자 수도 장안으로 돌아갔다. 409년 9월, 칙기보(敕奇堡)에서 후진의 장수 왕해(王奚)가 강족 병사 3,000여 명을 모아 북하의 침략에 저항했다. 왕해가 굳건히 지켜 북하군의 피해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자, 유발발은 제방을 쌓아 물줄기를 끊어버렸다. 칙기보 안의 사람들은 몹시 궁핍해져 왕해를 사로잡아 유발발에게 바치며 투항했다. 유발발이 왕해에게 말했다. >"그대는 충신이로다! 짐은 그대와 함께 천하를 평정하고자 한다!" 왕해가 대답했다. >"내가 여기서 죽는 것이야말로 큰 은덕(恩德)이다." 그러고는 측근 수십 명과 함께 죽음을 택했다. 칙기보를 점령한 유발발은 후진의 장수 김낙생(金洛生)을 쳐 황석고(黃石固)를 차지했고, 뒤이어 미저호지(彌姐豪地)가 지키는 아라성까지 공격해 함락시켰다. 세 지역에 살던 백성 7,000여 호는 대성(大城)으로 강제이주시키고, 승상 유우지대를 유주목으로 삼아 관리하도록 했다. 410년 3월, 상서 김찬(金纂)을 보내 10,000명의 기병으로 후진의 평량군을 다시 침략했으나 문환제 [[요흥]]이 친히 구원군을 이끌고 와 김찬을 참살했다. 그러자 유발발은 자신의 조카였던 좌장군 유나제(劉羅提)에게 보•기 10,000명을 주어 정양(定陽)으로 가 그곳에 주둔 중이던 요흥의 장수 요광도(姚廣都)를 치도록 했다. 유나제는 후진의 장수와 병사 4,000여 명을 사로잡아 생매장해 죽이고, 정양에서 부녀자를 약탈해 북하군의 병사들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요광도는 사로잡혀 북하에 항복했다. 유발발은 또 후진을 침범해 백애보(白崖堡)를 헐고, 약양군 청수성(清水城)에 도착했다. 청수성을 지키던 후진의 장수 요수도(姚壽都)는 성을 버리고 상규(上邽)로 도망쳤다. 유발발은 청수의 백성 16,000여 호를 대성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이때 북하에 항복했던 제난과 요광도가 서로 모반을 모의했다가 들통나 주살되었다. 411년 정월, 후진의 안원장군 요상(姚詳)이 행성(杏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유발발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남쪽의 대소(大蘇)로 도망갔다. 유발발이 평동장군 녹혁간(鹿弈干)을 보내 요상을 추격하여, 요상과 그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유발발은 요상을 가리켜 장수로서 부끄럽지도 않냐며 크게 꾸짓고는 그를 참수했다. 유발발은 행성으로 가던 방향을 틀어 30,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이번엔 후진의 안정(安定)을 쳤다. 안정 동쪽에 위치한 청석(靑石)에서 요흥의 장수 양불승(楊佛嵩)과 교전하여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후진군 45,000여 명이 항복했고 군마 20,000필을 얻었다. 북하군은 계속 동진하여 후진의 장수 당지륭(黨智隆)과 싸워 승리하니, 당지륭이 투항했다. 유발발은 당지륭을 광록훈으로 삼고, 백성 3,000여 호를 이성으로 이주시켰다. 후진의 진북참군 왕매덕(王買德)이 투항하자, 유발발이 왕매덕에게 후진을 멸할 계책을 물었다. 왕매덕은 >"후진의 국정은 쇠락했으나 각 지역에 설치해둔 번진(藩鎭)들은 아직 견고하니, 신중히 나아가야 합니다." 라고 진언했다. 유발발은 그를 매우 칭찬하며 군사중랑장으로 임명했다. 412년 10월, 문환제 요흥이 양불승을 옹주자사로 삼아 영북군의 병사들을 통솔해 북하를 치도록 했다. 양불승은 며칠 간 행군하여 북하를 공격했으나 유발발의 반격을 받고 패배해, 칼로 목을 찌르고 자살했다. 413년, 연호를 봉상(鳳翔)으로 개원했다. 3월에 어사대부 질간아리를 장작대장으로 임명하고는 백성 100,000명을 동원하여 흑수(黑水) 남쪽에 성을 건축했다. 유발발은 >"천하를 통일하고, 만방을 통치한다" 는 의미를 담아 성을 '통만성'(統萬城)이라고 명명했다. 현장 감독을 맡은 질간아리는 천성이 잔인하여, 흙을 올려 성벽을 쌓을 때 만약 송곳이 1촌이라도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존재하면 성벽을 쌓은 사람을 즉시 죽이고, 그 시체를 함께 담을 쌓았다. 또한 질간아리는 구리를 주조해 큰 북과 비렴(飛廉), 옹중(翁仲), 낙타, 용, 호랑이 등의 동상들을 만들어, 이를 황금 장식으로 한껏 꾸민 뒤, 대궐 앞에 진열했다. 이 과정에서 정교함을 따지느라 공인 수 천 명이 살해당했으나, 유발발은 이를 질간아리의 충성심이라 여겨 오히려 기특하게 생각했다. 마침내 통만성이 완성되자 이곳을 도읍으로 정했다.[* 이 통만성은 엄청나게 화려했는지, 훗날 통만성을 함락시킨 북위 제3대 세조 [[태무제]] 탁발도가 궁전을 둘러보며 "이렇게 백성들을 수탈했는데 어찌 망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라고 탄식했을 정도였다. 이후 태무제 탁발도는 진귀한 물건은 죄다 떼어내 가져가고 목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유발발은 >"제왕은 하늘의 아들이며, 그 휘 '''혁'''(徽'''赫''')은 하늘과 '''잇닿아(連)''' 있다." 라는 의미에서 자신과 종실들의 성(姓)을 '혁련'(赫連)으로 전부 바꿨다. 그리고 방계에겐 >"강하고 예리함이 마치 철(鐵)과 같아 적들을 모두 정벌(伐)할 수 있다." 라는 의미에서 '철벌'(鐵伐)이라는 성씨를 내렸다. 혁련발발은 아내 양씨(梁氏)를 왕후로, 아들 혁련괴(赫連璝)를 태자로 삼았다. 나머지 아들들인 혁련연(赫連延)은 양평공, [[혁련창]]은 태원공, 혁련륜(赫連倫)은 주천공, 혁련정(赫連定)은 평원공, 혁련만(赫連滿)은 하남공, 혁련안(赫連安)은 중산공으로 각각 봉했다. 415년 3월, 혁련발발은 행성을 쳐 후진의 장수 요규(姚逵)와 그의 부하 요대용(姚大用), 요안화(姚安和), 요리복(姚利僕), 윤적(尹敵) 등을 사로잡고 후진군 20,000명을 생매장해 죽였다. 415년 5월, 혁련발발은 어사중승 오락고(烏洛孤)를 [[북량]]으로 보내 동맹을 청했다. [[저거몽손]] 또한 그의 장수 저거한평을 보내 동맹 요청을 수락했다. === 관중 공략 === 416년 6월, 혁련발발이 40,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20일 만에 상규를 점령해, 후진의 진주자사 요평도(姚平都)와 후진군 5,000여 명을 죽이고 그 성을 헐어버렸다. 그리고 동북쪽으로 진격하여 안정군의 음밀(陰密)을 쳐 그곳을 지키던 요랑자(姚良子)와 후진군 10,000여 명을 사살했다. 혁련발발은 태원공 혁련창을 전장군, 옹주자사로 삼아 음밀을 진수하도록 했다. 음밀을 빼앗겼단 소식을 들은 정북장군 요회(姚恢)는 안정군을 버린 채 수도 장안으로 도망쳤고, 안정군 사람 호엄(胡儼)과 화도(華韜)가 5,000여 호를 이끌고 혁련발발에게 투항했다. 혁련발발은 호엄을 시중, 화도를 상서로 임명해 안정군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옹성(雍城)을 쳤는데, 옹성을 수비하던 요심(姚諶)은 장안으로 도망쳤다. 혁련발발이 계속 진격하여 미성(郿城)에 주둔했다. 문환제 요흥이 붕어하고 그 자리를 계승한 [[요홍]]이 동평공 요소(姚紹)와 정로장군 윤소(尹昭)에게 보•기 50,000명을 주어 미성에 주둔한 북하군을 치니, 혁련발발이 패배해 다시 안정으로 퇴각했다. 이때 북하에 항복했던 호엄 등은 혁련발발이 감시 목적으로 남겨둔 양구아(羊苟兒) 등을 습격해 살해하고는 다시 요홍에게 안정군을 들어 항복했다. 혁련발발은 하는 수 없이 행성으로 방향을 돌렸는데 추격해오던 요소와 안정군 남쪽에 위치한 마안판(馬鞍阪)에서 만나 대패하고 말았다. 행성으로 무사히 도망쳐온 혁련발발은 다시 혁련나제를 보내 부풍군의 지양(池陽)을 공격하고 후진의 거기장군 요유(姚裕) 등을 물리쳤다. 416년 8월, [[동진]]의 명장이자 권신인 [[무제(유송)|유유]]가 후진을 정벌한다는 소식에 혁련발발이 웃으며 말했다. >"[[송무제|유유]]가 수륙 양면으로 후진을 향해 진격하고 있는데, 유유는 세상 사람보다 뛰어난 지략을 지니고 있으니 요홍이 어찌 당해낼 수 있겠는가! 내 예상컨대 유유는 반드시 요홍을 물리칠 것이다. 게다가 요씨 형제들은 내부에서 서로 불화하고 있으니, 어찌 외부의 침략에 제대로 저항할 수 있겠는가! 유유가 장안을 함락한 후, 자제들과 각 장수들을 관중에 남겨두고 속히 돌아가는 것이 제일 좋을 듯 하구나. 유유 등이 출발하면 나는 땅을 줍는 것처럼 쳐들어가 쉽게 관중을 얻을 수 있어, 더이상 우리 병마를 고생시킬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혁련발발은 이후 즉시 병기와 군마를 정비하고, 나아가 안정군을 다시 점령하자, 영북군의 모든 군현이 북하에 항복했다.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키고 장안으로 들어가, 혁련발발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며 형제를 약조하자고 했다. 이에 혁련발발은 암암리에 중서시랑 황보휘(皇甫徽)에게 회신을 대신 쓰라 명령했고, 황보휘가 회신을 써오자 몰래 받아 그걸 사신에게 건네주었다. [* 글자도 모르는 까막눈이라서 대필을 명령한 건 아니고, 당시 한족 지식인이나 귀족들이 쓰던 격식있는 문체에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혁련발발의 회신을 읽은 유유는 그의 박식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혁련발발을 직접 만나고 온 사신 또한 그의 기이하고 잘생긴 용모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니, 유유는 >"내가 그보다 못하구나!" 라며 탄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유는 고작 12살인 아들 [[유의진]]을 장안 수비의 총책임자 직책에 앉히고, 동진으로 돌아갔다. 혁련발발이 크게 기뻐하며 왕매덕을 불러 관중을 공략할 방법을 물었다. 왕매덕이 답했다. >"관중의 지세가 비록 유리하나, 머리에 피도 안마른 애송이에게 이를 지키게 한 것은 장기적으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유유가 이런 결정을 하고 황급히 돌아간 이유는 그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제위 찬탈을 하고자 하여, 중원에 신경쓸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장강 이남과 관중을 잇는 요충지인 청니(青泥)와 상낙(上洛)에 유격대를 배치하시어 동진과의 왕래를 차단하고, 동관(潼關)과 효섬(崤陝)에 군대를 주둔시켜 수륙 양로를 점거하십시오. 그런 다음 폐하께서 관중 각지에 격문을 띄워 은덕을 널리 알린다면, 관중의 백성들은 모두 술과 음식을 들고 폐하의 군대를 환영할 것입니다. 유의진 혼자 빈 성에 앉아 도망갈 곳이 없을 터이니, 반드시 10일 안에 폐하 앞에 와서 투항할 것이고, 이리하면 병사들의 칼에 피를 묻힐 필요없이 바로 관중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혁련발발은 이를 매우 옳다고 여겨, 태자 혁련괴를 도독선봉제군사 겸 무군대장군으로 삼아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장안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또한 전장군 혁련창에게도 군사를 주어 동관을 치게 하고, 왕매덕을 무군우장사로 임명해 청니의 길을 끊게 했다. 418년 정월, 혁련괴가 위양(渭陽)에 이르자, 관중의 백성들이 줄을 지어 항복해왔다. 동진의 유의진은 용양장군 [[심전자]]를 보내 북하군을 막았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유회보(劉回堡)로 퇴각했다. 유회보에서 한숨 돌리던 심전자는 평소 자신이 싫어하던 사마 [[왕진악]]을 살해했고, 심전자는 왕수(王修)에게 잡혀 참수되었다. 이에 유의진은 다시 [[부홍지]](傅弘之)를 보내 지양(池陽)에서 혁련괴를 격파하고, 과부도(寡婦渡)에서 한번 더 격파시키니, 혁련괴는 잠시 물러났다. 그럼에도 유의진은 북하가 두려워 밖에 있었던 군사를 모두 장안성 안으로 소환하고는 성문을 걸어 잠그는 최악의 수를 두었다. 의지할 데가 없어진 관중의 군현들은 모두 북하에 투항했다. 패잔병 수습을 마친 혁련괴가 군사를 몰아 장안성을 야습했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퇴각했다. 418년 11월, 혁련발발이 친히 군사를 일으켜 함양(咸陽)을 차지하고 보급로를 끊었다. 동진에선 옹주자사 [[주령석]]을 보내 유의진을 돕게 했지만, 유의진과 그의 장수들은 더이상 성을 지켜낼 수 없음을 알고 방종하여 장안성을 크게 약탈했다. 약탈을 마친 유의진은 수많은 보물 및 여자와 아이 등을 수레에 싣고 성에서 나와 동쪽으로 향했다. 이런 막장을 지켜보다 못한 옹주별가 위화(韋華)는 몰래 행렬에서 빠져나와 북하에 투항하고 혁련발발에게 현 상황을 고했다. 혁련발발이 즉시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유의진을 추격하니, 건위장군 부홍지가 유의진에게 약탈품들을 모두 버리자고 권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유의진은 고집을 부리며 끝까지 약탈품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북하의 군대가 유의진의 무리를 따라잡자, 부홍지와 보국장군 [[괴은]]이 나서서 사력을 다해 막으며 이동을 계속했지만, 결국 청니에 이르렀을 때 혁련발발과 왕매덕에게 양면으로 협공을 당하면서 유의진의 동진군은 전멸했다. 북하군은 [[부홍지]], 괴은, 사마 [[모수지]] 등 동진군의 여러 장수들을 사로잡았다. 다만, 총대장인 유의진은 부하 장수들의 희생으로 겨우 인근 수풀 속에 숨어있다가 중병참군 단굉(段宏)에게 구조되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혁련발발은 부홍지를 회유하려고 했으나, 부홍지가 욕하며 저항하니 사로잡은 동진군의 장수들과 함께 모두 죽여버렸다. 혁련발발은 지난 양무 전투때와 마찬가지로 동진군의 머리로 [[경관]]을 쌓아 '촉루대'를 지었다. 한편, 홀로 남아 장안을 지키던 주령석은 분노한 백성들에 의해 장안에서 쫓겨나 동관으로 도주했다. 혁련발발은 장안으로 들어가 잔치를 베풀고, 이번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왕매덕을 도관상서, 관군장군, 양무후로 삼았다. 동관으로 도망치던 주령석은 조공루(曹公壘)에 이르러 용양장군 왕경선(王敬先)과 합류했는데, 마침 주령석의 동생인 중서시랑 [[주초석]]도 형을 돕기 위해 조공루에 미리 와있었다. 그러나 혁련창이 조공루를 공격해 함락시키고는, 주령석, 주초석 형제와 왕경선, 우군장군 유흠지(劉欽之) 등을 모조리 사로잡아 장안으로 압송했다. 혁련발발은 장안에 도착한 포로들을 모두 죽였다. === 칭제 === 418년 11월, 장안 동쪽에 위치한 패상(灞上)에 단을 쌓고 황제를 칭했다. 경내에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는 창무(昌武)로 개원했다. 419년 정월, 장수 질노후제(叱奴侯提)에게 보•기 20,000명을 주어 포판(蒲阪)을 치도록 했다. 포판을 지키던 동진의 보국장군 [[모덕조]]는 팽성으로 도망쳤고, 질노후제는 포판을 그대로 점령한 후 그곳에 주둔했다. 419년 2월, 여러 군신들이 장안을 도읍으로 하길 청했지만, 혁련발발은 장안성을 도읍으로 할 경우, [[북위]]와 100여 리 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통만성이 위태로워진다며 거절했다. 그리고는 장안에 남대(南臺)를 설치한 뒤, 혁련괴를 대장군으로 임명해 장안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통만성으로 돌아갔다. 통만성에 도착한 혁련발발은 경내에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진흥(眞興)으로 고쳤다. 또, 통만성 남쪽에 비석을 세워 자신의 공덕을 칭송하는 문구를 세기고, [[철불부]]의 선조들을 전부 황제로 추존했다. 혁련발발은 흉포하고 살인을 좋아해, 그의 통치는 매우 잔학했다. 언제나 활과 검을 곁에 두고 눈에 거슬리거나 미워하는 자를 손수 죽였다. 혁련발발과 눈을 마주친 자는 눈알이 파헤쳐져 실명되었고, 앞에서 웃은 자는 입술이 잘려졌으며, 간언한 자는 혀가 잘려진 뒤 참살되었다. 이민족, 한족 할 거 없이 항상 불안에 떨어야했고, 백성들은 각종 수탈을 당해 살기 힘들어했다. 424년 12월, 혁련발발은 장남 혁련괴를 태자에서 폐하고 주천공 혁련륜을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이에 분노한 혁련괴가 군사 70,000명을 이끌고 장안에서 나와 혁련륜을 치니, 혁련륜은 고평(高平)에서 30,000명의 기병으로 저항했으나 패사했다. 그러자 혁련륜의 동생인 혁련창이 기병 10,000명을 이끌고 혁련괴를 기습해 죽이고는, 그의 무리를 병합해 총 85,000명을 거느린 채 통만성으로 귀환했다. 혁련발발은 크게 기뻐하며 태원공 혁련창을 태자로 삼았다. 425년 8월, 혁련발발이 영안전(永安殿)에서 붕어하고 태자 혁련창이 그 뒤를 이었다. 시호는 무열제(武烈帝), 묘호는 세조(世祖)로 했고, 가평릉(嘉平陵)에 안장되었다. 다만, 가평릉의 위치는 현재로선 명확하지 않고, 단지 청나라 시대에 쓰여진 《연안부지》의 기록을 참고하여 [[옌안시]] 옌촨현에 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옌촨현에 혁련발발의 묘비와 주민들이 세운 작은 절이 있긴 하나, 학자들은 후대에 세워진 것이며 실제 가평릉은 아닐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서)] [include(틀:북사)]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황제]][[분류:381년 출생]][[분류:425년 사망]][[분류:위린시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