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혜경궁 홍씨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조선 왕세자빈)]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0730, #1b0e64 20%, #1b0e64 80%, #0d0730)" {{{#ffd400 '''혜경궁 홍씨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추존 왕비)] ---- [include(틀:대한제국 추존 황후)]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0730, #1b0e64 20%, #1b0e64 80%, #0d0730)" {{{#ffd400 '''조선 사도세자의 세자빈[br]{{{+1 헌경혜빈 홍씨 | 獻敬惠嬪 洪氏}}}'''}}}}}}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0730, #1b0e64 20%, #1b0e64 80%, #0d0730); color: #ffd400; min-height: 31px" {{{#!folding [ 존호 · 시호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ADEB, #008ec1 20%, #008ec1 80%, #00ADEB); color: #ffd400" '''조선 정조 · 순조조 자궁{{{-2 (慈宮)}}} [br]{{{+1 혜경궁 홍씨 | 惠慶宮 洪氏}}}'''}}}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조선 장종의 왕비[br]{{{+1 헌경왕후 | 獻敬王后}}}'''}}}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color: #B22222" '''대한제국 장조의 황후[br]{{{+1 헌경의황후 | 獻敬懿皇后}}}'''}}} || }}}}}}}}}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융릉.jpg|width=100%]]}}} || ||<-2> {{{#ffd400 {{{-2 융릉 전경}}} }}} || ||<|2> '''출생''' ||[[1735년]] [[7월 26일]]^^([[음력]] [[6월 18일]])^^[* [[음력]] 생일이 손자 [[순조]]와 같은데, 당시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06004_001|실록]]을 보면 이런 경우가 [[조선 왕조]]에서 유일했던 것 같다.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06018_001|1791년 6월 18일]]에는 혜경궁의 생일과 [[순조]]의 첫 돌을 맞아 잔치도 크게 열고 백성들에게까지 떡을 돌렸다고 한다.] || ||[[조선]] [[한성부|한성부 서부]] [[서대문구|반송방]] [[홍봉한|홍봉한 사저]][br](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일대) || ||<|2> '''사망''' ||[[1816년]] [[1월 1일]][br]{{{-2 ([[음력]] [[1815년]] [[12월 15일]]) (향년 80세)}}} ||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 '''능묘''' ||[[융릉|현륭원]](顯隆園) → [[융릉]](隆陵) || ||<|6> '''재위기간''' ||'''{{{#ffd400 조선 왕세자빈}}}''' || ||[[1744년]] [[2월 10일]] ~ [[1816년]] [[1월 1일]] || ||'''{{{#ffd400 조선 왕세자빈 | 혜빈}}}''' || ||[[1762년]] [[7월 4일]] ~ [[1816년]] [[1월 1일]] || ||'''{{{#ffd400 조선 왕세자빈 | 혜경궁 {{{-2 (자궁)}}}}}}''' || ||[[1776년]] [[4월 16일]] ~ [[1816년]] [[1월 1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풍산 홍씨]] || || '''부모''' ||부친 - 영풍부원군 [[홍봉한]] (永豊府院君 洪鳳漢, {{{-3 1713 ~ 1778}}}) 모친 - 한산부부인 [[한산 이씨]] (韓山府夫人 韓山 李氏, {{{-3 1713 ~ 1755}}}) || || '''형제자매''' ||8남 3녀 중 차녀 || || '''배우자''' ||[[사도세자|장조 의황제]] || || '''자녀''' ||{{{#!folding 2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의소세자]](懿昭太子, {{{-3 1750 ~ 1752}}}) 차남 - '''[[정조(조선)|정조]](正祖, {{{-3 1752 ~ 1800}}})''' 장녀 - [[청연공주]](淸衍公主, {{{-3 1754 ~ 1821}}}) 차녀 - [[청선공주]](淸璿公主, {{{-3 1756 ~ 1802}}}) }}} || || '''봉작''' ||혜빈(惠嬪) || || '''궁호''' ||혜경궁(惠慶宮) / 자궁(慈宮) / 자전(慈殿) || || '''전호''' ||경모전(景慕殿) || || '''존호'''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br](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 || || '''휘호''' ||인철계성(仁哲啓聖) || || '''시호''' ||'''[[조선]]''': '''헌경왕후(獻敬王后)''' ---- '''[[대한제국]]''':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 }}}}}}}}} || [목차] [clearfix] == 개요 == ||<#FFFFFF,#191919><:>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Hij9hj7hvkE)]}}}||<#FFFFFF,#191919>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DDGd5uBQaZo)]}}}|| ||<-2> [[KBS]] 한국사 傳 - 피눈물의 기록 [[한중록]], 혜경궁 홍씨 ||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는 [[사도세자]]의 정실이며 [[정조(조선)|정조]]의 친어머니다. 그 외의 자녀로는 [[의소세손]], [[청연공주]], [[청선공주]]가 있다. 혜경궁(惠慶宮)은 아들 [[정조(조선)|정조]]에게서 받은 [[궁호]]다. [[궁호]]를 받은 경우엔 당대에 궁호를 호칭으로 쓰긴 했지만([[원빈 홍씨|숙창궁]], [[수빈 박씨|가순궁]] 등), 후대에 궁호가 통칭으로 굳어진 건 '혜경궁' 뿐이다.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된 경우에는 '생전에 받은 존호+대비'의 호칭으로 많이 불리는데([[인수대비]], [[자순대비]] 등), 혜경궁은 대비가 되지는 못했지만 대비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사실상 이 [[궁호]]가 [[존호]] 대신으로 쓰인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인 듯하다.[* 다만 [[1778년]](정조 2년)에 효강, [[1783년]](정조 7년)에 '자희(慈禧)', [[1784년]](정조 8년)에 '정선(貞宣)', 그리고 혜경궁의 회갑을 한 해 [[1794년|앞둔 해]]에는 '휘목(徽穆)'의 [[존호]]를 올렸으며 혜경궁 사후 [[철종(조선)|철종]]에 의해 '유정(裕靖)'이라는 최종적인 시호를 올렸다. 따라서 혜경궁 홍씨의 공식적인 호칭은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혜빈(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惠嬪)'이며, [[정조(조선)|정조]]가 [[1778년]](정조 2년) 3월에 그 경칭을 [[저하]]라 하였으며, 혜경궁은 어디까지나 [[정조(조선)|정조]]가 생모를 추앙하기 위한 비공식적인 경칭으로 보인다.] == 생애 == === 간택 === 영안위 '''[[홍주원]]'''의 5대손으로 홍주원의 부인이 [[선조(조선)|선조]]의 딸 [[정명공주]]였기 때문에 [[선조(조선)|선조]]의 외6대손이기도 하다.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 [[1744년]](영조 20년), 10살의 어린 나이[*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도 15세 소녀의 나이로 [[영조]]와 혼인했지만 혜경궁 홍씨는 더 어린 10세였다.]에 [[세자빈]]에 책봉되어, 동갑내기 [[사도세자]]와 [[혼인]]하였다. 명목상 간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초간택 때 이미 대왕대비 [[인원왕후]], 왕비 [[정성왕후]]를 비롯한 왕실의 높으신 분들을 뵙고 궁인들이 홍씨가 괴로워할 정도로 그녀를 안으려 다툰 것을 보아 간택 전에 이미 그녀는 세자빈으로 낙점이 되었던 듯하다. 이 때 그녀의 조상인 [[정명공주]]가 사용하던 물품들이 [[혼수]]로 들어와 기이하게 여겼다.[* 할아버지 홍현보는 [[예조판서]]까지 역임했지만 《[[한중록]]》에 의하면 혜경궁 일가의 가계는 빈한(貧寒, 가난하고 쓸쓸함)하여 혜경궁과 그의 언니가 출가할 때 [[혼수]]품이 넉넉하지 않았고, 혜경궁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려 세자빈을 배출하게 되자 얼굴도 모르고 난생 처음 보는 친척들이 나타나서 자신의 이름을 알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할만큼 가세가 기울어 찢어질 정도로 [[가난]]했다.][* [[혜경궁 홍씨]]와 남편 [[사도세자]]는 '''13촌 먼 숙질'''로 엮이는데 혜경궁 홍씨의 5대조,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의 고조부인 [[홍주원]]이 [[정명공주]]의 남편(영안위)이다. [[사도세자]]는 [[선조(조선)|선조]]와 [[인빈 김씨]]의 아들 [[정원군]](추존 원종, [[인조]]의 생부)의 후손(6대손)이고 혜경궁 홍씨는 [[선조(조선)|선조]]와 [[인목왕후|인목왕후 김씨]]의 딸 [[정명공주]]의 후손(5대손)이니 '13촌 지간'이다.] 특히 병풍에는 [[홍봉한]]이 꾼 그녀의 특별한 [[태몽]]에 나타난 흑룡과 똑같은 흑룡이 수놓아져 있었다고 한다. === 출산 === [[1750년]](영조 26년), 첫아이 [[의소세손]]을 낳았는데 이 때 [[꿈]]에 이미 죽은 시누이 [[화평옹주]]가 보여서 혹시 해산하다 죽은 [[화평옹주]]가 무슨 해코지를 하러 온 것은 아닌가 불안해했다. 처음에는 [[사랑]]하던 딸 [[화평옹주]]의 3주기 즈음에 태어난 아이라 탐탁치 않아 하던 [[영조]]가 갑자기 와서 아이를 살피는데 [[화평옹주]]와 같은 곳에 점이 있어 화평옹주의 [[환생]]이라 여기고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의소세손]]은 3세(만 1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사망]]하였으며 [[1752년|같은 해]]에 [[정조(조선)|정조]]를 낳는다. 그래도 결혼 초반에는 금슬이 좋아서 17살때부터 22살때까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2남 2녀를 낳고 2명을 [[유산(의학)|유산]]했다. 계산해보자면 매년 임신했을만큼 금슬이 좋았다는 얘기다. === 후궁 문제 === [[1755년]](영조 41년), 22세 때 [[청선군주]][* [[세자]]의 적녀를 '군주(郡主)', 서녀를 '현주(縣主)'라고 칭했다. [[조선/왕사|왕]]의 적녀와 서녀인 [[공주]]와 [[옹주]]는 무품이었지만 '군주'는 정2품으로 품계가 있었다고 한다.]를 낳고 이후로는 [[임신]]하지 못했다. 이는 다음 해 연이어 (법적으로)시어머니인 중전 [[정성왕후]]와 시할머니인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사망|승하]]했기에 3년상을 마치기 전까지 [[세자빈]]이 [[임신]]하기는 어려웠을 상황이었고 이후로는 [[사도세자]]의 [[정신병|병증]]이 심각했기에 그녀가 더이상 자식을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숙빈 임씨]]가 [[임신]]하자 부왕 [[영조]]의 질책이 두려워, 심지어 때려서라도 [[낙태]]까지 시키려 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세자빈]] 홍씨가 [[숙빈 임씨|임씨]]를 불쌍히 여겨 도와줬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은언군]]이 태어나자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왕 [[영조]]는 1달 넘게 아들 [[사도세자]]를 꾸중했고 세자빈 홍씨까지 질책을 들었다고 한다.[* 이 때 [[영조]]는 세자빈 홍씨에게 "넌 [[여자]]면서 투기도 안 하냐"며 엄책(嚴責)했는데 이 때가 혜경궁 홍씨가 [[영조|시아버지]]에게 질책받은 유일한 일이었다고 한다. [[조선]]은 [[칠거지악|여자의 질투를 금기시]]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질투]]를 조금도 안 하면 남편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서 나쁘게 여기기도 한다. [[중종(조선)|중종]]이 딸 [[효정옹주]]를 질책할 때에도 "부녀자의 투기가 없을 수 없다"고 이야기했을 정도.] 학문을 가까이 해야 할 20세의 [[사도세자|젊은 세자]]가 [[숙빈 임씨|궁녀]]에게서 자식을 일찍 본 것이 [[영조]]에게는 매우 못마땅했던 것.[* 웃전인 대비 인원왕후의 궁녀였던 경빈 박씨와는 달리 숙빈 임씨는 평범한 궁녀였는데, 젊은 세자가 궁녀를 가까이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1달 내내 꾸중을 들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은언군]] 이후에도 [[숙빈 임씨|임씨]]에게서 [[은신군]], 또다른 [[궁녀]]였던 [[경빈 박씨(장조)|박씨]]에게서 [[청근현주]]와 [[은전군]]을 얻어 [[영조]]의 노여움을 크게 샀다. [[경빈 박씨(장조)|경빈 박씨]]는 총애를 받았지만 결국 [[사도세자]]에게 [[폭행]]으로 [[살해]]당했다.[* '''[[나경언]]의 고변 사건'''에서 나온 내용이기도 하며 [[영조]] 역시도 [[사도세자]]를 불러서 "[[경빈 박씨(장조)|박씨]]는 그토록 사랑해놓고는 왜 죽였느냐? 분명 그녀가 강직하여 너의 행동에 간언하다 죽은 것이다."라고 질타했다.] [[사도세자]]는 자신의 [[후궁]]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고 [[영조]]가 [[숙빈 임씨|후]][[경빈 박씨(장조)|궁들]]과 그 [[은언군|자]][[은신군|녀]][[은전군|들]]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세자빈 홍씨는 [[사도세자|남편]]의 [[후궁]]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는커녕 되레 동정심과 연민을 느꼈을 정도다.[* 세자의 아이를 임신했음에도 사도세자에게 박대받는 [[숙빈 임씨]]는 정말 안타까워 했고 사도세자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경빈 박씨(장조)|경빈 박씨]]에게는 약간의 [[질투]]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생조모가 되는 [[영빈 이씨]]조차 세자가 얻은 후궁 소생 손주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한중록]]》의 서술로는 [[숙빈 임씨|후]][[경빈 박씨(장조)|궁들]]이 자식을 낳자 여자로서 자신도 기분이 좋았겠냐마는 [[영조]]가 가뜩이나 [[사도세자|세자]]의 [[후궁]]들 문제로 펄펄 날뛰는 상황에서 자신마저 바가지를 긁으면 [[사도세자|세자]]가 더 스트레스를 받고 더 날뛸까봐 참고 챙겨줬다고 한다. 또한 [[사도세자]]의 사후 혜경궁과 [[정조(조선)|정조]]마저도 위태로운 판국에 자신들이 아니면 남은 [[숙빈 임씨|후궁]]과 그 [[은언군|자]][[은신군|식]][[은전군|들]]은 정말로 누구 하나 챙겨주는 사람 없이 죽을 판국이라 나름 신경을 써 주었다고. === 부자간의 갈등 === [[영조]]는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유일한 [[조선/왕사|후계자]]였던 [[사도세자]]에 대한 큰 기대와 두 부자간의 [[성격]] 차이 등 두 부자간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때는 [[사도세자]]가 [[정신병|광증]](狂症) 때문에 [[내시]]들과 [[궁녀]]들을 무차별적으로 마구 [[살해]]하자 시어머니 [[영빈 이씨]]에게 가서 같이 울면서 의논했는데 [[영빈 이씨]]가 "[[영조|주상 전하]]께 이야기하는게 어떻냐"고 묻자 대경실색하면서 "[[영조|왕]]에게 [[사도세자|세자]]를 헐뜯은걸 [[사도세자|세자]]가 알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뜯어말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도 [[영조|시아버지]]와의 갈등 때문에 점점 미쳐가는 [[사도세자|남편]]을 말릴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정신병|광증]](狂症)을 나타내는 서술이 있다. 단, 광증이 기록된 시작점이 [[1761년]](영조 37년)이며, [[사도세자]]는 1년 후인 [[1762년]](영조 38년)에 죽었고 [[대리청정]]을 무려 14년이나 한 사람이라는건 기억해두자. [[내시]]나 [[궁녀]]등을 100여명이나 죽여버리는 일을 저질렀고 그 설명은 [[조현병]]으로 보이는게 분명한 서술들이 나오는데 [[사도세자]] 본인도 장인 [[홍봉한]]과의 서신에서 본래 있던 화증(火症, 울울하고 답답하여 일어나는 병세)이라고 말했다. >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영조|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청정|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1757년|정축년]] ·[[1758년|무인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녀|궁비]](宮婢)와 [[환관|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영조|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사도세자|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영조|임금]]이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하자 [[영조|두]] [[사도세자|궁]](兩宮)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宦官)·[[기생|기녀]](妓女)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遊戲)하면서 하루 3차례의 문안(問安)을 모두 폐하였으니, [[영조|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자식|후사]]가 없었으므로 [[영조|임금]]이 매양 [[조선/왕사|종국]](宗國)을 위해 근심하였다. >---- >-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 (을해) 2번째기사''' > 한참 후에 [[사도세자|세자]]가 [[상복|입]](笠)과 [[곤룡포|포]](袍) 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영조|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영조|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경빈 박씨(장조)|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비구니|여승(女僧)]][* '가선(假仙)'이라는 [[이름]]의 [[여승]]. [[사도세자]]는 [[평안도]]에 갔다가 [[비구니|여승]]이던 가선을 데려와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사도세자]]가 [[임오화변|뒤주에 갇혀 죽은]] 후, 가선은 [[사도세자]]를 모시던 [[내시]] 박필수(朴弼秀) 및 5명의 [[기녀]]들과 함께 [[참수형|참형]]에 처해졌다.]을 [[창경궁|궁]]으로 들였으며, [[평안도|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평양|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사도세자|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신하|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경빈 박씨(장조)|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살해|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조선|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사도세자|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面質, 죄의 여부를 대질함)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책망하기를, >“이 역시 [[조선|나라]]를 망칠 말이다. [[대리청정|대리]](代理)하는 [[사도세자|저군]](儲君)이 어찌 [[나경언|죄인]]과 면질해야 하겠는가?” >하니, [[사도세자|세자]]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이는 과연 '''[[사도세자|신]]의 본래 있었던 [[화병|화증]](火症)입니다'''.” >하매, [[영조|임금]]이 말하기를, >“차라리 '''[[발광]](發狂)'''을 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하고, 물러가기를 명하니, [[사도세자|세자]]가 밖으로 나와 금천교(禁川橋) 위에서 대죄하였다. >---- >-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5월 22일 (을묘) 2번째기사''' >[[평양시|평양]] 사람 이갑(李甲)이 용력이 있었는데 [[환관]]을 통해서 [[사도세자|동궁]]을 모시게 되었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사도세자|동궁]]이 어떤 사람과 즐겁게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심화가 치밀어 오르자, 철편(鐵鞭)을 휘둘러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맞아 죽었다. 애증을 분간하지 못한 것이 마치 [[날씨]]가 갠 날에 밝았다가 어두운 [[구름]]이 갑자기 가리는 것과 같았다" >---- >- '''《玄皐記(현고기)》'''[* [[박종겸]]이 쓴 [[소론]] 준론계 당론서. 시종일관 [[사도세자]]에 우호적이고 [[노론]]에게 적대적이지만, [[사도세자]]의 병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사도세자|세자]]가 [[환관|내관]], [[내시|내인]], [[궁녀|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100여 명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일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 때 몇 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겨우 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지금 비록 제 몸이야 돌아보지 않더라도 우러러 [[영조|임금]]의 몸(玉體)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 >- '''《廢世子頒敎(폐세자반교)》'''[* 정병설, [[http://cafe.naver.com/mhdn/29204]]에서 재인용.] === [[나경언]] 고변 사건 === [[1762년]](영조 38년) 5월 22일, [[나경언]]이란 자가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고변하자, [[영조]]는 친히 [[고문|국문]]을 하였다. [[나경언]]은 액정별감 나상언의 형으로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속였다. 가산이 탕진되어 자립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사도세자|세자]]를 제거할 계책을 내어 [[형조]]에 글을 올렸다.[* 출처 :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5월 22일 (을묘) 2번째기사'''.] >'''[[나경언]](羅景彦)'''이 복주(伏誅)되었다. [[나경언]]이란 자는 액정 별감(掖庭別監) 나상언(羅尙彦)의 형이니,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꾀어냈다. >가산(家産)이 탕패되어 자립(自立)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사도세자|춘궁]](春宮) 을 제거할 계책을 내어 형조에 글을 올려, >[[환관|환시]](宦侍)가 장차 불궤(不軌)한 모의를 한다고 고하였다. >참의 이해중(李海重)이 영의정 [[홍봉한]]에게 달려가 고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는 청대(請對, 급한 일로 임금 뵙기를 청함)하여 계품(啓稟, 임금에게 아룀)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하매, 이해중이 이에 세 차례나 청대하였다. 임금의 마음이 놀라 이해중의 입시를 명하니, 이해중이 드디어 그 글을 아뢰었다. >[[영조|임금]]이 상(床)을 치면서 크게 놀라 말하기를, >>"변란이 주액(肘腋)에서 있게 되었으니, 마땅히 [[고문|친국]](親鞫)하겠다." >하였다. >경기 감사 홍계희(洪啓禧)가 마침 입시하고 있다가 [[영조|임금]]에게 호위(護衛)하게 하기를 권하니, >[[영조|임금]]이 이에 성문 및 아래 대궐의 여러 문을 닫으라고 명하였다. [[영조|임금]]이 즉시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국청(鞫廳)을 설치하니, >시임 대신 홍봉한·윤동도와 원임 대신 신만(申晩) 등이 입시하였다. >남태제(南泰齊)를 지의금(知義禁)으로 삼아 판의금(判義禁) 한익모(韓翼謨)·동의금(同義禁) 윤득양(尹得養), 문랑(問郞) 홍낙순(洪樂純) 등 8인과 함께 죄인을 [[고문|국문]](鞫問)하였다. >[[나경언]]이 옷솔기에서 흉서(凶書, 고변서)를 내놓으면서 말하기를, >>"이 글을 구중(九重, 구중궁궐)의 천폐(天陛, 궁전의 섬돌)에 올리고자 했으나 올릴 길이 없기 때문에 우선 [[형조]]에 원서(原書)를 올려 계제(階梯)[* [[사도세자]]를 제거할 음모, 계획을 의미한다.]를 삼았습니다." >하였다. [[영조|임금]]이 다 읽지 못하고서 손으로 문미(門楣, 문얼굴 위에 가로 대는 나무)를 치면서 말하기를, >>'''"이런 변이 있을 줄 염려하였었다."''' >(중략) >---- >-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5월 22일 (을묘) 2번째기사''' >'''[[임오화변]]의 원인으로 [[영조]]가 [[노론]]을 견제키 위해 키운 외척계 탕평당인 [[홍봉한]] 계열과 [[영조]]의 [[탕평책|탕평]]에 반발하던 [[노론]]계의 대립으로''' >'''기행을 일삼던 [[사도세자]] 문제가 정치적으로 떠올랐는데 반 탕평파에서 [[홍봉한]]을 공격하기 위해 그의 약점이던 [[사도세자]] 문제를 정치 문제화 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홍봉한]]은 이를 덮기 위해 [[뇌물]]까지 제공하며 은폐하려 했지만 [[나경언]]의 고변까지 들어가고 더이상 어쩔 수 없는 상태까지 오자 [[영조]]가 [[종묘|종]][[사직|사]](宗社)를 위해 아들을 포기했고 [[정조(조선)|손자]]를 지키기 위해 [[홍봉한]]에게 자신의 명을 따르도록 종용했다고 한다.''' >---- >- '''《[[임오화변]]》 / 원인 분석 中''' 이후 상당한 [[상소]]에서도 [[사도세자|세자]]의 비행을 은폐하는 [[홍봉한]]에 대한 공격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 === [[임오화변]] === 세자빈 홍씨는 사도세자가 [[임오화변|대처분]]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는 안절부절하다 오후 3시에 [[창경궁]] 밧소주방의 [[뒤주]]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 [[칼]]로 2차례나 [[자결]]하려 했으나 주위에서 [[칼]]을 빼앗아 실패했다. 세자빈 홍씨는 [[사도세자]]를 만나기 위해서 달려갔으나 들어가지는 못하고 [[사도세자]]가 울부짖는 [[소리]]만 들으면서 "그리 [[힘]]도 세신 분이 어째서 [[뒤주]]에 들어가란다고 그냥 들어가셨다는 말인가?"하고 [[사도세자|남편]]을 원망 아닌 원망을 하며 울었다.[*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애원하는 소리를 들으니 간장(肝腸, 간과 창자)이 마디마디 끊어지고 눈앞이 막막했다고 《[[한중록]]》에 기록했다.] 이후 세자빈 홍씨는 [[내시]]를 시켜서 영조에게 "[[죄인]]의 아내가 어찌 [[궁]]에 있겠습니까"하고 친정으로 갈 것을 허락해달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정조(조선)|세손]]을 지켜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고 잠시 후에 세자빈의 오빠 홍낙인이 [[혜경궁 홍씨|세자빈]]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면서 “[[사도세자|동궁]]을 [[폐위]]하여 [[폐서인|서인]](庶人)으로 만드셨다 하니 [[세자빈|빈궁]]도 더이상 대궐에 있지 못할 것이라. [[영조|주상]]께서 [[풍산 홍씨|본가]]로 나가라 하시니 [[가마(탈것)|가마]]가 들어오면 나가시고 [[정조(조선)|세손]]은 남여(藍輿)[* 지붕이 없는 작은 가마.]를 들여오라 하였으니 그것을 타고 나가시리이다."라고 했고 세자빈 홍씨도 통곡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당일에 세자빈 홍씨에게 '혜빈(惠嬪)'이라는 빈호(嬪號)를 내린다.[* [[순빈 봉씨]] 이후로 [[조선]]의 [[세자빈]]들은 별도의 빈호를 쓰지 않았지만 남편인 [[왕세자|세자]]가 죽은 경우에는 빈호를 썼다. [[인수대비]]도 남편 [[의경세자]]가 죽자 '수빈(粹嬪)'이 되었고 혜경궁 홍씨의 손윗동서인 [[효순왕후]]도 남편 [[효장세자]] 사후에는 '현빈(賢嬪)'으로 불렸다.] [[영조]]의 명으로 [[풍산 홍씨|친정]]으로 나가 있다가 다시 [[창경궁|궁]]으로 돌아온 혜빈은 [[정조(조선)|아들]]을 잘 키워 훌륭한 [[조선/왕사|임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유일한 희망 밖에 없었을 것이다. 친정아버지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 [[영조]]에게 직접 바친 [[상소|상소문]]에서 혜빈 홍씨는 [[왕세손]] [[정조(조선)|정조]]에게 "나는 아내로서 [[임오화변|이런 경우]]를 당하고 [[정조(조선)|너]]는 자식으로 이런 경우를 만났으니 다만 스스로 [[운명]]을 슬퍼할 뿐이다. 장차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허물하겠느냐? 또 나와 네가 지금까지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영조|성상]](聖上) 덕분이며 우러러 의지하고 목숨을 맡길 분도 오직 [[영조|성상]] 뿐이다."라고 하며 성은(聖恩, 성스러운 은혜)에 보답해야 말했다고 한다. 물론 [[영조]]는 후회하지 않았고 "자신이 [[종묘|종]][[사직|사]](宗社)를 위해 의(義)로써 결단한 것"이라고 [[홍봉한]]에게 말했다. [[영조]] 자신도 [[홍봉한]]이 상소문을 바치기 전에 이미 직접 혜빈을 찾아가 보았는데 "저희 모자가 살아있는건 다 [[영조|성상]]의 은혜 덕분입니다"라고 [[영조]]의 [[임오화변|처분]]을 긍정하는 뜻을 보이자 그녀가 효성스러웠다고 칭찬했다. 한편 혜빈 홍씨는 [[영조]]에게 [[정조(조선)|세손]]이 [[경희궁]]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혜빈은 [[창덕궁]]에 있었으므로 자식과 생이별을 하는 셈이었지만 남편 [[사도세자]]가 죄인으로 몰려 죽은 상황에서 아들 [[정조(조선)|세손]]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는데 당시 [[정조(조선)|세손]]은 9세였다.[* 이후 [[정조(조선)|정조]]는 [[조선/왕사|국왕]]으로 즉위하는 [[1776년]](영조 52년)까지 생(生)조모인 [[영빈 이씨]]의 처소 부근인 [[경희궁]]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 번은 [[정조(조선)|어린 세손]]이 혜빈에게 와서는 울면서 떨어지지 않자 [[영조]]가 "이렇게 어미를 그리워하니 놔두고 가는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여기 있으면 [[영조|주상]]을 그리워한다."며 무정하게 떼어놓았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두 가지인데, 정조가 자신이 아닌 혜경궁을 선택하면 영조가 섭섭해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죽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어린 시절 사도세자와 영조가 멀리 떨어져있어서 잘 만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영조와 사이가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정조를 영조의 마음을 잃게 하지 않기 위해 가까이 지내게 하였다. ==== 사도세자 사망 이후 ==== [[1769년]](영조 45년), [[정조(조선)|세손 산]]은 흥은부위(興恩副尉) 정재화(鄭在和) 등과 함께 기방에 출입했다가 [[화완옹주]], [[홍국영]] 등이 각각 목격했다. 이는 [[화완옹주]], [[홍국영]] 등이 각각 혜경궁 홍씨에게 직접 알렸고, 혜경궁은 친정아버지 [[홍봉한]]을 찾아가 [[정조(조선)|어린 세손]]이 [[사도세자]]와 같이 될까봐 염려된다며 사건 수습을 요청했다. [[홍봉한]]은 개입하기를 거절했고, 혜경궁은 단식농성을 했다. [[홍봉한]]이 나서서 [[정조(조선)|세손]]을 보았던 [[기생]]들을 [[유배]]보내고 [[정조(조선)|세손]]에게 후보고를 한 후 사건을 수습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직접 언급되었다. [* 당시 궁중의 상황을 살펴보건대 세손과 세손빈의 부부사이가 서로 얼굴을 상면하지 않으려 할만큼 좋지가 못했다. 이것에 대해 혜경궁이 한중록에서 주장한대로 화완옹주가 개입한것인지는 불명] [[1775년]](영조 51년), [[영조]]가 [[정조(조선)|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혜빈의 작은아버지였던 [[홍인한]]은 극력 반대하였고, 이 문제로 [[정조(조선)|정조]]의 미움을 사서 [[정조(조선)|정조]] 즉위 이후 [[유배]]되어 사사된다. [[홍봉한]]은 [[1770년]](영조 46년) 경 반대파 [[김귀주]], [[정후겸]]의 공격으로 정계에서 영원히 은퇴하고 봉조하의 직함으로 교외에 거주했으며 이후에도 이복동생이던 [[홍인한]]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홍봉한|형]]을 배신했다고 [[정조(조선)|정조]]가 말한적이 있다. [[사도세자]] 생전부터 있었던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경주 김씨|외척 가문]]과의 정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에도 [[김귀주]] 정파의 [[홍봉한]] [[탄핵]]이 여러번 있었으며 [[정조(조선)|정조]] 즉위초에도, [[정조(조선)|정조]]의 [[죽음|승하]] 이후에도 이들이 [[홍봉한]]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사도세자]]의 [[추존|추숭]]에 대해 당시 [[왕세손|세손]]이던 [[정조(조선)|정조]]와 사석에서 [[홍봉한]]이 나눈 이야기를 [[김귀주]]가 [[영조]]에게 고자질해서 [[홍봉한]]을 [[역적]]으로 몰기도 했었다. === [[정조(조선)|정조]] 시기 === 아들 [[정조(조선)|정조]]가 즉위한 뒤에 '''‘혜경궁(惠慶宮)’'''이라는 [[궁호]]를 받았으며 '자궁(慈宮)'이라 불리게 된다. 전통적으로 [[조선/왕실|조선 왕실]]에서 [[조선/왕사|국왕]]의 적모를 일컫는 칭호는 '자전(慈殿)'이었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정조(조선)|왕]]의 어머니이자 [[조선/왕실|왕실]] [[내명부]] 여인 중 나이로 치면, 가장 연장자였지만 홍씨의 살아 생전에 [[사도세자]]가 [[조선/왕사|국왕]]으로 [[추존|추증]]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그녀는 [[왕대비]]가 되지 못했다. 또, [[정조(조선)|정조]]가 백부 [[효장세자]]의 아들로 [[양자(가족)|양자]] 입적되면서 [[법|법적]]으로는 [[정조(조선)|국왕]]의 어머니조차 아니었기 때문에 '자전(慈殿)'이라는 칭호 조차도 쓰지 못하고 그 [[지위]]도 공식적으로 확실하게 보장받지 못했다. 당시에 [[조선/왕실|왕실]]의 [[내명부]] [[서열]] 1위이자 최고어른은 혜경궁 홍씨의 시어머니이자 그녀보다 10살이나 더 어린 [[왕대비]]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였다. 만일 당시에 혜경궁 홍씨가 아들 [[정조(조선)|정조]]재위 시기에 [[사도세자|남편]]이 [[조선/왕사|국왕]]으로 [[추존]]되었다면 자신은 [[왕대비]]가 되고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가 [[대왕대비]]가 되었을 것이다. [[정조(조선)|정조]]는 궁여지책으로 1단계 낮은 '자궁(慈宮)'이라는 칭호와 함께 실질적으로는 [[왕대비]]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보다는 낮고 [[왕비|중전]] [[효의왕후|효의왕후 김씨]]보다는 높은 대우를 하여 결과적으로 [[대비]](大妃)에 준하는 대접을 해서 친어머니를 직접 위로했다.[* 사실 당시 [[내명부]] 서열은 왕대비전([[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내전([[효의왕후]]), 자궁([[혜경궁 홍씨]]), 가순궁([[수빈 박씨]]) 순서로 [[효의왕후]]가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보다 높은 대우를 받기는 했다. 문안 순서도 [[내명부]] 위계를 그대로 따라 [[정순왕후(조선 영조)|왕대비]], [[효의왕후|왕비]]를 거친 후에야 혜경궁에게 문안 인사가 돌아갔다. 4명 모두 [[내명부]] 무품이기는 하나 혜경궁 홍씨는 어디까지나 [[세자빈|왕세자빈]]의 [[신분]]이니 [[효의왕후|왕비]]에 우선할 수는 없던 것. 심지어 친손자 [[순조]]가 [[1800년]](정조 24년), [[조선/왕사|왕위]]에 즉위하고 나서는 서열이 하나 더 밀려 대왕대비전([[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왕대비전([[효의왕후]]), 내전([[순원왕후]]), 자궁([[혜경궁 홍씨]]), 가순궁([[수빈 박씨]]) 순서였다.] 혜빈 홍씨가 [[궁호]]인 '''‘혜경궁(惠慶宮)’'''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정조(조선)|아들]]의 즉위 초반 반대파들의 [[공격]]에 [[풍산 홍씨|친정]]이 수난을 당했으나 [[정조(조선)|정조]]는 끝까지 외가를 보호했고 즉위 중후반 이후로는 [[정조(조선)|정조]]가 직접 [[풍산 홍씨|외가]]에 대한 [[명예]] 회복에 나서며 아들의 극진한 [[효도]]를 받으며 평온한 시절을 보낸다.[* 외할아버지 [[홍봉한]]에게 '익정공(翼貞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친히 제문을 지어 수시로 내리고 [[풍산 홍씨|외가]]의 [[족보]]나 [[풍산 홍씨|외가]] [[친척]]들의 친목계인 화수회까지 [[정조(조선)|정조]]가 직접 챙겨 주관하며 [[홍봉한|외조부]]의 생전의 [[상소]]들을 모아 외삼촌인 홍낙임과 함께 상소 문집까지 편찬에 관여하며 직접 서문까지 썼다.] [[1796년]](정조 20년), [[정조(조선)|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위해 [[수원화성|화성]] 행차를 했는데 혜경궁 홍씨는 무려 33년만에 처음으로 ''남편 [[사도세자]]의 [[융건릉|무덤]]^^(현륭원)^^'''에 방문했다. [[정조(조선)|왕]]조차도 [[궁궐]] 밖 외출이 자유롭지는 않았는데 더구나 [[조선/왕실|왕실]] [[내명부]]의 여성이었던 혜경궁 홍씨는 당연히 [[사도세자|남편]]의 무덤은 커녕 [[궁궐]] 밖에 외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남편]]과 오랜만에 만나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한중록]]》에 따르면 '[[임오화변]] 당시 앞날이 막막했으나 당시 11살이던 [[정조(조선)|아들]]은 [[조선/왕사|왕]]이 되었고 10살이 되지 않았던 [[청연공주|딸]][[청선공주|들]]은 현재 모두 장성하여 40세가 넘었다'며 마음 속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 [[순조]] 시기 === 하지만 [[1800년]](정조 24년) 6월, [[정조(조선)|정조]] 사후 그녀의 큰 고난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아들 [[정조(조선)|정조]] 사후에도 16년을 더 살았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 [[풍산 홍씨]]와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의 친정 [[경주 김씨]]가 크게 대립했기에 [[정조(조선)|정조]] 사후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가 혜경궁 홍씨의 남동생 홍낙임을 [[신유박해]] 계기으로 처벌하려고 했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단식]] 투쟁을 벌여가면서까지 반대했고 며느리였던 [[수빈 박씨]]도 합세해 둘이서 손자 [[순조]]에게 기대어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의 뜻을 일단 꺾었으나 결국 홍낙임은 [[유배]]를 보낸 후 [[사약|사사]]되었다. 당시 궁중의 분위기가 어떠했는가 하면 혜경궁 홍씨에게 문후(問厚)를 오는 이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순조]]는 물론이고 [[왕대비]]인 [[효의왕후]]와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마저도 [[대왕대비]]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의 [[눈치]]를 봐 혜경궁 홍씨에게 올 수가 없었던 것. 혜경궁의 친손자인 [[순조]]가 [[순원왕후]]와 [[결혼식|가례]]를 올릴 때도 혜경궁 홍씨는 폐백을 받지 못했다.[* 폐백은 [[순원왕후|신부]]가 [[결혼|혼례]](婚禮)를 마치고 [[조선/왕실|시댁]]에 와서 시부모(媤父母)를 비롯한 여러 시댁의 큰 어른들에게 드리는 첫인사를 말한다. 그러나 [[조선/왕실|왕실]] 법도에 의하면 남편인 [[사도세자]]가 [[조선/왕사|왕]]의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빈이 되는 혜경궁 홍씨 또한 [[세자빈|왕세자빈]]의 신분이고 법적으로 [[순조]]는 그녀의 손자가 아닌 윗동서 [[효순왕후]]의 손자이므로 폐백을 받지 않는 것이 맞다. 이 부분은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의 고집이 아닌 처음부터 시아버지 [[영조]]의 뜻이었으니 오해하지 말자.][* 당시 [[조선/왕실|왕실]] [[내명부]] 의례 서열은 예순대왕대비([[정순왕후(조선 영조)|영조 계비]]) - 왕대비 김씨([[효의왕후|정조 비]]) - 혜경궁 홍씨([[혜경궁 홍씨|사도세자빈]]) - 가순궁 박씨([[수빈 박씨|정조 무품 빈]]) 순차대로 올려지는것이 법도였다. 폐백 대신 별도로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대왕대비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가 이 논란을 잠재웠다.] [[1814년]](순조 14년), 정적이었던 정순왕후가 죽은 뒤, 차례차례 혜경궁 홍씨의 [[풍산 홍씨|친정]]이 신원, 복권되었다. 또한 [[홍봉한]]의 [[죽음]] 직전에 그를 비난했던 정이환, 이심도 등의 처벌을 [[순조]]에게 요구한다. 이심도는 결국 [[사형]]에 처해진다. 혜경궁 홍씨는 전에 [[1805년]](순조 5년)부터 담현증(痰昡症)을 앓아 오래 병석에 누웠는데, 점차 병세가 깊어져 [[1815년]](순조 15년) 12월 15일, 81세의 일기를 끝으로 [[창경궁 경춘전]]에서 눈을 감았는데 손자 [[순조]]가 '헌경(獻敬)'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헌경(獻敬)'의 뜻은 '''총명하고 예지(睿知)함'''을 '헌(獻)'이라 하고 '''밤낮으로 경계함을 일러''' '경(敬)'이라 하였다 한다.][* [[사료(역사)|사료]]에서 '혜경궁'을 '헌경빈(獻敬嬪)'으로 부른 경우가 거의 없어서 헷갈리기 쉬운데 당시 혜경궁은 여기에 생전에 받은 빈호를 합친 '헌경혜빈(獻敬惠嬪)'이라고 불렀다.] >'''빈청에서 혜경궁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여 올리다''' >---- >빈청(賓廳)에서 '''혜경궁'''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여 상계(上啓, 조정이나 윗 사람에게 여쭈어 봄)하였는데, >[[시호]]는 '''헌(獻)''' 【총명(聰明)하고 예지(睿知)함.】 '''경(敬)''' 【밤낮으로 경계(儆戒)함.】 이다. >---- >- '''《[[순조실록]]》 18권, 순조 15년([[1815년]], 청 가경(嘉慶) 20년) 12월 25일 (을해) 2번째기사''' === 사후 === [[1854년]](철종 5년), '''‘유정(裕靖)’'''의 [[존호]]가 추가되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 대에 [[1899년]](광무 3년) 8월 3일에 경연특진관 서상조(徐相祖)의 상소로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할 것을 청하였다.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가 승인하여 남편 [[사도세자]]가 '장종(莊宗)'으로 추존되자 혜경궁은 '헌경왕후(獻敬王后)'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성립 후 다시 한 번 장종이 '장조(莊祖)'로 [[대한제국]] [[황제]]에 재추존되면서 함께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높여졌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의황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懿皇后)’이다. 그러나 그녀는 손자 [[순조]]의 치세에도 [[왕비]]로 [[추존]]되지 못했는데 생전에 그리도 싫어하던 [[은신군]]의 [[남연군|양자]]의 [[고종(대한제국)|손자]]에 의해 [[왕비]]를 뛰어넘어 [[황후]]로 추존되었음이 [[역사]]의 얄궂음이라 하겠다. 다만, [[고종(대한제국)|고종]]은 [[효명세자|문조]](文祖)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하였으므로 법적으로는 [[효장세자]]가 고조할아버지이다. [[나라]]를 세우거나 [[칭제건원|칭제]]를 했을 때 4대조까지 [[추존]]하는 관례를 따르면 [[사도세자]]까지 [[추존]]함이 맞다. 능은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위치한 '''[[융건릉|융릉]](隆陵)'''으로 남편인 [[사도세자|장조]]와 함께 '합장릉의 형식'으로 묻혀 있으며, 인근에는 아들 [[정조(조선)|정조]]와 며느리인 [[효의왕후]]의 능인 [[건릉]](健陵)도 함께 위치하여 있다. == 가계 == === 친가([[풍산 홍씨]]) === * 5대조 : 영안위 문의공 [[홍주원]](永安尉 文懿公 洪柱元) * 5대조 : [[정명공주]](貞明公主) * 고조부 : 예조판서 정간공 홍만용(禮曹判書 貞簡公 洪萬容) * 고조모 : 여산 송씨(礪山 宋氏) - 송시길(宋時吉)의 딸 * 증조부 : 홍중기(洪重箕) * 조부 : 홍현보(洪鉉輔) * 생조모 : [[풍천 임씨]](豊川 任氏) - 임방(任埅)의 딸 * 고모 : 정경부인 [[풍산 홍씨|홍씨]](貞敬夫人 洪氏) * 고모부 : 문익공 [[조엄(조선)|조엄]](文益公 趙曮)[* [[조선통신사]]로 파견 다녀와서 [[조선]] 최초로 우리나라에 '''[[고구마]] 종자를 전파한 인물'''로서,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세자빈|부인]]이자 [[고종(대한제국)|고종]] 때에 이르러 [[대왕대비]]였던 [[신정왕후|신정왕후 조씨]]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 계조모 : [[성주 이씨]](星州 李氏) * 숙부 : [[홍인한]](洪麟漢) * 숙부 : 홍준한(洪俊漢) * 숙부 : 홍용한(洪鏞漢) * '''아버지 : 익정공 영풍부원군 [[홍봉한]](翼靖公 永豊府院君 洪鳳漢)''' * '''어머니 : 한산부부인 [[한산 이씨|이씨]](韓山府夫人 李氏)''' * 오빠 : 홍낙인(洪樂仁) * 올케 : [[여흥 민씨]](驪興 閔氏)[* 홍낙인의 처인 부인 민씨는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의 증손녀이다.] * 동생 : 홍낙신(洪樂信) * 동생 : 홍낙임(洪樂任)[* 혜경궁 홍씨의 친정 [[풍산 홍씨]]와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의 친정 [[경주 김씨]]가 크게 대립했기에 [[정조(조선)|정조]] 사후에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가 [[혜경궁 홍씨]]의 남동생 홍낙임을 처벌하려고 했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단식]] 투쟁을 벌여가면서까지 격렬히 반대했고 며느리였던 [[수빈 박씨]]도 합세해 둘이서 손자 [[순조]]에게 기대어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의 뜻을 일단 꺾었으나 결국 홍낙임은 [[유배]]를 보낸 후 [[사약|사사]]되었다.] * 올케 : [[조씨|임천 조씨]](林川 趙氏) * 동생 : 홍낙륜(洪樂倫)[* [[정조(조선)|정조]]의 친필 한글편지에 나오는 '돌아재'라는 표현이 홍낙륜을 지칭하는 말로, 항렬상 정조의 외삼촌이지만 [[정조(조선)|정조]]와 2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아 또래 친구처럼 지냈다고 했다.] * 올케 : [[청풍 김씨]]((淸風 金氏)[* [[정조(조선)|정조]]의 정비 [[효의왕후]]와 사촌 관계라 [[효의왕후]]와도 무척 친했다고 한다.] * 동생 : [[풍산 홍씨]](豊山 洪氏) * 제부 : 이복일(李福逸) === 외가([[한산 이씨]]) === * 외조부 : 한산부원군 이집(韓山府院君 李潗)[* 딸중 하나가 [[김조순]]의 조모] * 외조모 : 부부인 [[기계 유씨]](府夫人 杞溪 兪氏) === 시가([[조선/왕실|전주 이씨]]) === * 시부 : [[영조]](英祖) * 시모 : [[영빈 이씨|소유영빈]] [[전의 이씨|이씨]](昭裕暎嬪 李氏)[* 법적으로는 [[정성왕후]] 서씨 →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 * 시누이 : [[화평옹주]](和平翁主) * 시누이 : [[화협옹주]](和協翁主) * 시누이 : [[화완옹주]] 이용완(和緩翁主 李蓉婉) ==== 배우자 / 자녀 ==== * 남편 : {{{-3 추존}}}[[사도세자|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 장남 : {{{-3 추존}}}[[의소세손|의소태자]] 이정(懿昭太子 李琔)''' - [[요절]] * '''차남 : {{{-3 추존}}}[[정조(조선)|정조 선황제]] 이산(正祖宣皇帝 李祘)''' * '''며느리 : {{{-3 추존}}}[[효의왕후|효의선황후]] [[청풍 김씨|김씨]](孝懿宣皇后 金氏)''' * '''며느리 : {{{-3 추존}}}[[수빈 박씨|현목수비]] [[반남 박씨|박씨]](顯穆綏妃 朴氏)'''[* [[http://cb.khu.ac.kr/index/bbs/board.php?bo_table=comm_02&wr_id=188&sfl=&stx=&sst=wr_hit&sod=desc&sop=and&page=11|#]]혜경궁이 죽기 전에 《[[한중록]]》을 맡겼다. 손자였던 [[순조]]가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 '''손자 : [[순조|순조 숙황제]](純祖 肅皇帝) 이공(李玜)''' * 손녀 : [[숙선옹주]](淑善翁主) * 장녀 : [[청연공주]](淸衍公主) * 사위 : 광은위 [[광산 김씨|김기성]](光恩尉 金箕性) * 차녀 : [[청선공주]](淸璿公主) * 사위 : 홍은위 [[연일 정씨|정재화]](興恩尉 鄭在和)[* [[선조(조선)|선조]]조에 활동했던 [[정철|송강 정철]]의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 == 여담 == * 베스트셀러가 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에서 혜경궁 홍씨의 추존 시호를 "경의왕후"로 '''잘못''' 적어버리는 바람에 그 잘못된 시호가 공공기관과 개인 홈페이지를 안 가리고 여기저기로 퍼져버리고 말았다. 혜경궁 홍씨는 "헌경"+"의"+"황후"='''헌경의황후'''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헌경의황후", 줄여서 "헌경황후", "의황후"로 부르는 것이 맞으며, 굳이 조선시대의 작위인 "왕후"로 부르겠다면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헌경왕후"로 부르는 것이 맞다. 헌경의황후를 "경의왕후"로 부르면 "명성태황후"를 '''"성태왕후"'''로 부르는 것과 같다. 해당 도서가 출간된지 25년이 지났음에도 곳곳에서 아직도 그런 오류가 발견된다. [[http://www.kyeonggi.com/1521609|예시 1]], [[https://www.emuseum.go.kr/detail?relicId=PS0100100101600546800000|예시 2]], [[https://www.culture.go.kr/knowledge/encyclopediaView.do?vvm_seq=8171|예시 3]], [[https://www.mcst.go.kr/kor/s_culture/festival/festivalView.jsp?pSeq=462|예시 4]][* 예시 2와 3, 4는 공공기관 홈페이지임에도 틀린 시호를 당당하게 적어놨다.(...)] * [[정조(조선)|정조]] 대의 문신 이재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에 혜경궁 홍씨는 아버지 [[홍봉한]]의 청지기의 딸 '[[의빈 성씨|성덕임]]'을 [[궁녀]]로 거두어 친히 길렀다고 한다. [[조선시대]] [[왕비]]들은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어린 [[궁녀]]를 친딸처럼 기르기도 했는데, 혜경궁 홍씨는 [[의빈 성씨|덕임]]과 비슷한 나이의 자녀([[정조(조선)|정조]], [[청연군주]], [[청선군주]])가 총 셋이 있었다. * [[정조(조선)|정조]]는 어머니가 기르는 [[궁녀]]인 [[의빈 성씨|성덕임]]에게 첫눈에 반해 [[왕세손|세손]]이었던 [[1766년|15살 소년시절]]에 고백했으나 사양했고, 15년 후에 [[1781년|30살]] 청년군주가 되어 고백했으나 또 사양했다고 한다. [[정조(조선)|정조]]가 [[의빈 성씨|덕임]]의 사속[* 私贖, [[궁녀]]가 개인적으로 부리는 하인, 무수리 등을 지칭함.]을 책벌[* 責罰, 저지른 과오에 대하여 이를 뉘우치고 반성하고 반복하지 않도록 징계하기 위하여 벌을 줌.]한 연후에야 비로소 스스로 [[성관계|승은]]할 [[후궁|마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속을 책벌할 정도면 혜경궁의 귀에도 들어갔을 텐데, 혜경궁은 아들을 2번이나 찬 [[의빈 성씨|덕임]]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듯, [[출산]]할 때 [[풍산 홍씨|친정]]에서 데려온 [[노비|몸종]]과 [[유모]]를 보내 돕는 등 아들 [[정조(조선)|정조]]의 [[문효세자|자식]]과 [[의빈 성씨|덕임]]을 지극히 챙겨줬다고 한다. * 이 '덕임'이라는 [[궁녀]]가 바로 [[정조(조선)|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이다. 즉, 혜경궁은 자신이 딸처럼 키운 [[궁녀]]를 [[며느리]]로 맞이하게 된 셈. 또한, [[의빈 성씨]]는 [[궁녀]] 시절 혜경궁의 딸들인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함께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하기도 하는 등 밀접한 사이였다. * [[정조(조선)|정조]] 즉위 이후, [[사도세자]]가 [[임오화변|죄인 신분으로 요절했던 탓]]에 [[정조(조선)|왕]]의 [[어머니|친모]]이기는 했지만 [[효순왕후|대비]]나 [[효의왕후|중전]]의 예도, [[세자빈]]의 예도 들기 뭣해 [[하늘색|천청색]] 치적의를 입었다고 한다. * [[2007년]] 권두환 교수는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발견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5&aid=0000100738|해당 편지 내용]]을 보면 [[사도세자]]가 [[우울증]] 때문에 [[약]]을 부탁했다고 나온다. 원문을 [[번역]]한 내용은 이렇다.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에 달해 답답하다'''. '''우울증을 씻어내는 약을 남몰래 보내 달라'''([[1753년]] 또는 [[1754년]] 모월(某月) 모일(某日).)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79&aid=0000167062|#]] * [[2014년]]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의사 정하은과 김창윤이 《[[한중록]]》을 분석했다. 그 내용이 [[정신병]] 증상에 맞으며 모르는 사람이 서술했다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당 서술이 현대의 정신 의학적 지식을 가진게 아니라면 허구로 기록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한다.''' 참고로 이와 같이 [[역사학자]]들도 자기가 모르는 분야는 관련 전문가들에게 의뢰하기도 한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풍산 홍씨|친정 홍씨 집안]]을 방어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 사후에 기록한 것이므로 내용이 [[왜곡]]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사도세자]]는 [[붕당 정치|당쟁]]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 [[이덕일|Lee DI]]. The world dreamed by Prince Sado. Goyang: Wisdomhouse;2011. p.53-54. ) 하지만 《[[한중록]]》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신병]]적 증상에 들어맞는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정신 증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순전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술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접근 가능한 역사적 자료의 양이 부족하여 자료 수집에 제약이 많았고, 이로 인해 근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연구의 가장 큰 제한점이다. 또한, 연구자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을 살펴보면 증상에 대한 기술이 상당히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현대의 정신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허구로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https://pdfs.semanticscholar.org/5b47/ae0ec3c51c0d7dcfe7866bd9ed869efed944.pdf|해당 논문기사]] * [[2019년]] 6월, [[청선공주]]의 남편 정재화(鄭在和) 후손이 [[수원화성]]박물관에 기증한 유물중에 [[조선/왕실|왕실]]에서 주고받은 [[한글]] 편지가 대량 나왔다. 그 중에 대부분이 혜경궁과 그의 외손자인 정의(鄭漪)가 주고 받은 편지들인데, 혜경궁이 정의에게 보낸게 77통, 정의가 외할머니에게 보낸게 55통이나 된다. [[http://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7895|#]] >하루 사이 잘 지내느냐? >오늘은 네 생일이니 어느새 열살을 넘었으니 어른이 다 된듯 다행하기 이를것 없다. >오직 너를 위하여 축원하기는, 무병장수하고 학문이 진취하고 덕행이 탁월하여 금옥의 견고함과 큰선비의 이름을 얻어, >입신성취에 남부끄럽지 아니하여 칭송하는 소리가 네 어미의 귀에 들려 효도를 이루어 착한 아들을 낳은 어진 어머니의 이름을 네 어미에게 들리게 하고 모자가 백세 장수하여 어머니는 아들을 의지하여 온갖 복을 받고 아들은 어머니를 우러러 지극한 효도로 공양하여 >태평안락에 자손이 면면히 이어져 [[정철|정 송강]] 가문을 일으켜 세운다고 하니 기쁘다 >오늘날 너를 생각하고 축원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네가 태어나던 시간에 앉아 이 편지를 쓰니 늙은 외조모의 지극한 축원을 네 몸에 간직하여라. >섭섭하여 면포 1필, 명주1필, 솜5근 보낸다. 솜은 꽃이니 네 몸에 입어 만복이 오게 하려는 덕담이고 필묵과 편지지가 가니 갈수록 글잘하고 대나무 그릇에 담아주니 대나무는 군자의 높은 절개로 비기니 그처럼 높고 굳은 사람이 되어라 >찬합 탕 한그릇 보내니 즉시 먹고 국수는 길게 장수하라는 뜻으로 먹게 보내니 즉시 먹어라. >할미가 말 많은 것을 웃어라. * 혜경궁의 친필 한시[[http://www.k-heritage.tv/brd/board/256/L/CATEGORY/615/menu/254?brdCodeField=CATEGORY&brdCodeValue=615&bbIdx=5716&brdType=R&tab=|#]] === [[음모론]] === [[이덕일]]이나 그 일파인 [[이주한]] 같은 사람 때문에 '무고한 [[사도세자]]에게 누명을 씌운 [[여자]]'라는 [[이미지]]가 퍼졌었다. [[이덕일]]이 활동하기 수십 년 전부터 혜경궁 홍씨가 [[악녀]]로 나온건 [[1980년대]]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도 있지만 [[이덕일]]은 [[역사학]] 박사였다는게 문제로[* [[붕당 정치|당쟁]]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은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과 [[정신병|정신질환]]으로 추측되는 [[사도세자]]의 기이한 행동에 [[붕당 정치|당쟁]]을 포함한 여러가지 복합적인 문제 때문에 [[비극]]을 맞이했던 것이지 순전히 [[붕당 정치|당쟁]]의 결과물인 것은 아니다.] 제대로 근거가 없거나 날조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덕일]]은 혜경궁 홍씨를 '[[사도세자|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처'라면서 사도세자의 [[정신병]] 서술을 조작이라 설명하는데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한중록]]》 말고도 증거가 많다.[* 게다가 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사도세자]]가 친[[소론]]이거나 [[노론]]에게 비판적이지는 않았고 [[사도세자]]의 [[죽음]] 역시 [[붕당 정치|당쟁]]보다는 [[영조]]의 의중이 적용되었던 것이라는 증거들도 속속히 나오고 있다.] 또한 [[이덕일]]은 혜경궁 홍씨가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조작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며 다음을 증거로 하였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사도세자]]가 22살이 되도록 [[영조]]가 능행할 때 1번도 수가(隨駕, 임금의 어가를 모시고 따라 다님)하지 못했다고 기록했지만 부자 간의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의도적으로 꾸민 [[거짓말]]에 불과하다. [[사도세자|세자]]는 그 전에 여러차례 [[영조]]를 수가해 능행에 다녀왔는데 혜경궁 홍씨가 처음이라고 [[1756년|주장했던 해]]보다 4년 앞선 [[1752년]](영조 28년) 7월, [[종묘|태묘]](太廟, 종묘)에 거동할 때 수가했으며 [[1752년]](영조 28년) 12월, 태실에 나아갈 때와 [[1753년]](영조 29년) 첫날, 태묘에 나아갈 때도 따라갔다. [[이덕일]]은 '태묘'라는 [[단어]]에 '태조의 묘'라고 설명까지 달아놓았는데 태묘는 [[무덤]]이 아니며 '[[종묘]]의 정전(正殿)'을 말하는 것이다. 이건 굳이 [[정병설]] 같은 [[전문가]]까지 갈 필요도 없이 [[국어사전]]에서 [[https://ko.dict.naver.com/#/entry/koko/84c781c78d3743e1a599c0d206041947|해당 뜻]]만 보면 알 수 있는데 [[국어사전]]에 있는 단어도 명확히 확인하지 않고 1차 사료를 부정했다. 이에 대해 [[이덕일]] 본인은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서문을 통해 이미 《이덕일의 여인열전》에서 '태묘'의 뜻을 바로 풀어썼다며 "사소한 실수 하나로 [[작가]]를 매장시키지 말라"고 반박했다. [[이주한]]은 한 술 더 떠서 혜경궁 홍씨를 [[가해자]]로 기본 전제해서 논리를 전개한 적이 있다. 혜경궁 홍씨를 '''‘남편을 누명씌워 죽인 [[가해자]]’'''로 전제해놓고 [[이덕일]]의 사료 왜곡에 반박했던 정병설은 중요한 [[살인]] 사건에 대해 [[가해자]]의 말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논리적 오류/비형식적 오류#s-1.3.3|반사실적 가정의 오류]]를 범했다.[* [[이주한]],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2011년, pp.39~40 「3장 비판 아닌 비판을 비판하다」] 그러나 정작 정병설은 그러한 논거를 쓴 적 없고 "[[사도세자]]가 [[정신병|정신질환]]이 있다는건 <[[한중록]]>에만 있는 사실이 아니다. 영조가 사도세자 무덤에 두려고 직접 쓴 묘지 이름,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간찰, 정조가 사돈 [[김조순]]에게 한말 등(후략)"라고 여러 사료와 [[교차검증]]하여 이덕일을 반박했다. 이건 [[논리적 오류/비형식적 오류#s-1.3.8|관련 논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오류]]를 써서 상대의 논거를 날조한 것이다. 일단 혜경궁 홍씨를 무조건 믿을 수는 없는데 혜경궁 홍씨가 거짓말을 했다는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료는 [[저자]]의 주관에 따라 편향성이나 왜곡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중록]]>은 그 특성상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집안의 책임을 실제보다 작게 묘사했다는 의혹을 피하기 힘들며 정병설도 《[[한중록]]》을 완벽히 믿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사도세자]]의 정신병 기록은 《[[한중록]]》에만 있지 않다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사료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는 모든 [[학자]]들이 가져야만 하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그 가능성을 넘어서 딱히 고의적인 날조를 했다는 정황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는데도 이덕일과 그 부류의 인물들은 제대로 증거도 없이 의심을 넘어 확신을 하며 [[유사역사학]] 방법을 동원하는게 문제이다. 모순적이게도 [[음모론|음모론자]]들은 [[정조(조선)|정조]]가 즉위한 뒤 혜경궁 홍씨에게 극진한 [[효도]]를 다했음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음모론]]대로라면 혜경궁 홍씨는 [[정조(조선)|정조]]에게는 '훌륭한 [[사도세자|아버지]]를 [[정신병자]]로 모함해 죽인 원수이자 [[정적]]'인데도 왜 [[정조(조선)|정조]]는 친모에게 하소연조차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물론 당연히 생각해보면 [[정조(조선)|정조]]에게 혜경궁 홍씨는 [[어머니|생모]]이기에 대놓고 박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는 하다.] == 대중매체에서 == [[2000년대]] 이전까지는 '''억울하게 [[사도세자|남편]]을 잃은 비운의 여인'''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는 경향이 컸으나, [[이덕일]]을 필두로 한 [[노론 음모론]]이 제기된 이후로는 '''[[풍산 홍씨|친정]]의 영달(榮達, 부귀영화)을 위해 [[사도세자|남편]]과 [[정조(조선)|자식]]을 버린 비정한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았다. 하지만 [[노론 음모론]]이 논파[* 論破, 학설이 논의 되어 근거가 된 사실이 의미가 없어지게 됨.]된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다시금 옛날의 비운의 [[세자빈]] 이미지’'''를 재조명하는 경향이 커졌고, 서슬퍼런 정국 속에서도 아들 [[정조(조선)|정조]]를 시아버지 [[영조]]에게서 지켜내려는 의외의 강인함이 부각되기도 한다. === [[드라마]] === ==== [[안국동 아씨]](1979) ==== 1979년 [[MBC]] 드라마 《안국동 아씨》에서는 배우 [[김영란(배우)|김영란]]이 연기했다. ==== [[하늘아 하늘아]](1988) ==== 1988년 [[KBS]] 드라마 [[https://youtu.be/xa7pswBBOTo|〈하늘아 하늘아〉]][* 혜경궁 홍씨가 [[주인공]]으로 〈[[한중록]]〉을 기초삼아 만들어졌으며 극본은 임충, 연출은 안영동 PD.]에서는 배우 [[하희라]][* 본인의 [[최수종|남편]]은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의 [[사도세자]] 역.]가 연기했다.[* 아역은 [[이재은(1980)|이재은]].] 고전적인 해석인 비운의 여인으로 나왔다. ==== [[조선왕조 오백년]](1988) ====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드라마)|한중록]]에서는 배우 [[최명길(배우)|최명길]]이 연기했다.[* 이 때 [[사도세자]] 역을 맡은 배우가 [[최수종]]이었다.] ==== [[왕도(드라마)|왕도]](1991) ==== 1991년 [[KBS]] 드라마 《[[왕도(드라마)|왕도]]》에서는 배우 [[정영숙]]이 연기했다. ==== [[대왕의 길]](1998) ==== 1998년 [[MBC]] 드라마 《[[대왕의 길]]》에서는 배우 [[홍리나]]가 연기했다. [[이인혜]]가 연기한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나 [[윤손하]]가 연기한 [[숙의 문씨]]가 표독스러운 [[캐릭터]]로 그려지는 반면 혜경궁 홍씨는 이에 대비되는 착하고 가련한 여인으로 그려진다. 극 중 내내 참거나 당하는 포지션. ==== 정조 암살 미스터리-8일(2007) ==== 2007년 [[채널CGV]] 드라마 《정조 암살 미스터리-8일》에서는 [[이덕일]] 식 역사관을 참고했기 때문인지 혜경궁 홍씨를 [[풍산 홍씨|친정]]을 위해 [[사도세자|남편]]을 버렸고 이제는 [[정조(조선)|아들]]까지 버리려 하는 냉혹한 이미지로 묘사했으며 배우 [[정애리]]가 연기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아들 [[정조(조선)|정조]]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고 [[사도세자|남편]]과 [[정조(조선)|아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으로 극이 마무리되었다.[* 2007년 [[KBS]] 드라마 《[[한성별곡]]》에서는 [[정애리]]가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를 모티브로 한 대비로 등장하고 혜경궁 홍씨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흥미롭다.] ==== [[이산(드라마)|이산]](2007) ==== 2007년 [[MBC]] 드라마 《[[이산(드라마)|이산]]》에서는 배우 [[견미리]]가 연기했다. [[임오화변]] 한참 후의 시기를 메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비운의 여인 이미지보다는 자애로운 어머니 이미지이다. [[사도세자|남편]]을 잃고 [[정조(조선)|아들]]도 몇 번이나 잃을 위기를 맞은 것에는 당연히 한이 맺혀 있기에 [[노론]] 측에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 때문에 같은 집안 사람이자 자신의 숙부이자 정조의 작은할아버지이면서 노론 측에 껴서는 정조를 몰아내려고한 홍인한한테도 마찬가지였다. 전중반부에 노론 세력이 전부 몰락할 위기에 처하자 홍인한이 이복형인 홍봉한에게 자신을 살려달라고하는 애원에 겨우겨우해서 혜경궁 홍씨를 만났지만 끝끝내 용서받지 못했고 마지막 발악을 하다가 끝내 사사되었다. 특히 혜경궁 홍씨 입장에서는 더 용서가 안되는게 같은 가족이면서 자기 조카손자를 죽이려고한 무리에게 동참했으니 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 [[정조(조선)|정조]] 즉위 후에는 엄한 [[내명부]]의 주인 역할을 맡기도 한다. 히로인인 [[의빈 성씨]]와 [[정조(조선)|정조]]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청나라]]에 보내버리기도 하는 등 무서운 [[시어머니]] 역할도 하였다.[* 혜경궁 홍씨 입장에서도 의빈 성씨인 성송연 도움덕에 아들인 정조가 목숨을 건진 일이 있긴 했지만 당시 성송연은 뒷배없는 도화서 다모였기에 왕이 된 정조에게는 도움이 안될거다라는 판단도 있었다. 그래서 데리고 왔던 게 같은 풍산 홍씨 사람이자 홍국영의 여동생인 원빈 홍씨였고 그녀를 적극적으로 밀어주었고 원빈 홍씨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누구보다 기뻐했었다. 그러나 그 임신이 상싱임신이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왕실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효의왕후에게 질책을 받게 되면서 사실상 내쳐지게 된다. 결국에는 의빈 성씨와 정조의 사이를 인정해주었고 문효세자가 태어났을 때도 기뻐했었다. 근데 이것도 마냥 좋은 과정이 아니었던 게 원빈 이후 혜경궁 홍씨가 밀어주던 게 화빈 윤씨라는 후궁이었는데 그녀가 의빈 성씨와 같은 날 아이를 낳았는데 의빈 성씨는 아들인 왕자인 문효세자를 낳고 화빈 윤씨는 옹주를 낳아서 의빈 쪽으로 기울은 것이다. 작중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혜경궁 홍씨는 의빈 성씨가 아니라 화빈 윤씨에게 먼저갔었고 이에 당시 의빈 성씨의 상궁이었던 양초비가 화를 냈었다.][* 실제로는 드라마와 달리 혜경궁 홍씨는 정조의 정실인 효의왕후 못지않게 의빈 성씨를 아꼈었으며, 본인이 직접 [[의빈 성씨]]를 입궁시켜 친딸처럼 길렀다.] ==== 한국사 傳(2008) ==== 2008년 [[KBS]] 다큐멘터리 《한국사 傳》에서는 아나운서 [[이선영(KBS)|이선영]] 아나운서가 연기했다. ==== [[비밀의 문]](2014) ==== 2014년 [[SBS]] 드라마 《[[비밀의 문]]》에서는 배우 [[박은빈]]이 연기했다. 남편인 [[사도세자]]와 아들 [[정조(조선)|이산]]을 지키기 위해 시아버지 [[영조]]를 비롯한 궁궐 인물들과 대립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궐에서 홀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혜경궁 홍씨를 보면 탐정놀음이나 하는 주인공 [[사도세자]]가 더 짜증날 지경.. ==== [[붉은 달(드라마)|붉은 달]](2015) ==== 2015년 [[KBS]] 드라마 스페셜 《[[붉은 달(드라마)|붉은 달]]》에서는 배우 [[박하나]]가 연기했다. ==== [[옷소매 붉은 끝동(드라마)|옷소매 붉은 끝동]](2021) ==== 2021년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드라마)|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배우 [[강말금]]이 연기했다. 부군인 [[사도세자]]의 사후 그의 광증을 알면서도 제때 말리지 못한 걸 후회하며 처신 또한 상당히 조심하고 아들인 산만을 바라보고 살아간다. 1화에서 이모비야 사건 때문에 아들이 폐세손될 위기에 처하자 넙죽 엎드려 영조의 역정을 듣기만 하다가, 문제의 구절이 찢어진 것을 보고 영조가 화를 풀자 안도한다. 시누이 [[화완옹주]]가 워낙에 안하무인이라 그를 못마땅해하고 있으며, 화완옹주도 조카인 산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 어미인 혜경궁 또한 미워하여 둘의 관계는 이미 파탄나 있었다. 실제 역사에선 엄청난 불경일 행동도 화완옹주가 서슴지 않는데, 혜경궁에게 찻물을 뿌리며 '너는 절대 대비 못 된다'고 욕하고 당장 세손의 대리청정을 물리라고 윽박지른다. 혜경궁은 이런 무례를 당하고도 큰소리 한 번 안 내고 조곤조곤히 '나는 대비가 될 수 없지만 세손은 낳아준 어미를 생각하여 봉호와 작위를 내려준다는데, 너는 옹주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정씨의 처로 불릴 것'이라고 조롱한다. 결국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화완옹주가 혜경궁에게 달려들자 양자인 정백익이 말리는데, 이 와중에 정백익이 '밖으로 나가시라'고 말하자 '''"여기가 내 처소인데 나더러 나가라니"'''라고 황당해하며 웃는다. 아들이 즉위한 후에는 '온 세상이 주상더러 임금으로서 행동하라 할 뿐 행복하라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어미로서 아들의 행복을 빌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산아, 행복해지렴."'''이라며 아들의 사랑과 행복을 응원한다. === [[영화]] === 2014년 개봉한 영화 《[[역린(영화)|역린]]》에서는 배우 [[김성령]]이 연기했다. [[정조(조선)|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사도세자|남편]]을 버린 비정한 면이 아니라 아들을 위해 어린 시어머니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에게 굴욕을 당하고 인내하는 등 [[어머니]]로서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 [[사도(영화)|사도]](2015) ==== '''2015년 개봉한 영화 《[[사도(영화)|사도]]》에서는 배우 [[문근영]]이 연기했다.''' [[임오화변]]을 위주로 주변 배경을 다뤘다. 이윽고 장면은 어린 혜경궁이 갓 왕가에 시집을 온 시점으로 변경된다. 시가 어른들께 '영조께선 이런 분이시다.'라는 조언을 들은 후 영조를 어려워하는 혜경궁에게 사도세자는 '아바바마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세자가 나이가 들수록 영조의 핍박은 더 심해져 도리어 사도세자가 점점 미쳐가고 만다. 혜경궁은 아무래도 어머니 된 입장으로서 세손을 중시하다보니 아내로서 세자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여 세자로부터 '자네는 입만 열면 세손 타령'이라는 원망을 듣는다.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가 세자에겐 큰 상처였던 듯, 아들 내외가 문안을 오자 '부부란 사소한 예법에 얽매이지 않으며 서로 끝없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한탄 섞인 조언을 해 주기도 한다. 이후 세자가 더 이상 울화를 참지 못하고 하수구를 통해 경희궁에 침입하여 부왕을 시해하려 하자, 울며 말렸지만 밀쳐지고 만다. 혜경궁은 그 길로 시어머니 영빈에게 달려가 '이대로 가다간 세자에 세손까지 죽는다'고 고해 바치고, 충격을 받은 영빈은 세손이라도 살리기 위해 영조에게 대처분을 청하게 된다. 하나 세자가 사망한 후 영빈이 '내 아들 내가 죽인 거 아니지?'라며 절규하자 '이것이 어찌 어머니 탓이겠습니까'라며 영빈을 위로한다. 세자의 장례가 치러지고, 화완옹주는 빈전에서 세손을 끌어내며 세손의 상복을 벗겨 영조가 있는 경희궁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혜경궁 또한 이 의견에 동의하여 세손에게 상복을 벗을 것을 명하나 세손이 울면서 완강히 거부하자 혜경궁 또한 감정에 북받혀 세손에게 손찌검을 한 후, 이내 진정하고 '네가 보위를 이어야 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 있다'고 다독인다. 시간이 흘러 세손은 보위를 잇고, 노인이 된 혜경궁을 위해 회갑연이 열린다. 정조-혜경궁 모자는 사도세자원을 찾아 참배를 드리고, 혜경궁은 남편에게 용서를 구한다. === [[소설]] === ==== 붉은 왕세자빈 ==== [[영국인]] 작가 마가렛 드래블[* 마가렛 드래블은 A.S. 바이어트의 여동생.]이 혜경궁 홍씨의 이야기를 듣고 《붉은 왕세자빈》이라는 작품을 썼다. ==== [[옷소매 붉은 끝동]] ==== 강미강 작가의 소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효강혜빈(孝康惠嬪)'으로 등장한다. ==== 왕의 언약 / 사도세자 ==== 김경민 작가의 소설 《왕의 언약》과 《사도세자》에서 '혜경궁'으로 등장한다. === [[게임]] === ==== [[도미네이션즈]] ==== 혜경궁의 [[반지]]가 유물로 등장한다. === [[뮤지컬]] === ==== 정조대왕(2007) ==== 2007년 개봉한 [[뮤지컬]] 《정조대왕》에서는 뮤지컬 배우 조미정이 연기했다. == 참고 문서 == * [[경빈 박씨(장조)|경빈 박씨]] * [[경희궁]] *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 * [[김귀주]] * [[김조순]] * [[김종수(조선)|김종수]] * [[나경언]] * [[노론 음모론]] * [[대한제국]] * [[문효세자]] * [[상계군 이담|상계군]] * [[수빈 박씨]] * [[수원화성]] * [[숙빈 임씨]] * [[숙의 문씨]] * [[순조]] * [[순조실록]] * [[승정원일기]] * [[영빈 이씨]] * [[영조]] * [[영조실록]] * [[원빈 홍씨]] * [[원행을묘정리의궤]] * [[융건릉|융릉]](隆陵) * [[은신군]] * [[은언군]] * [[은전군]] * [[의빈 성씨]] * [[의소세손]] * [[이덕일]] * [[인원왕후]] * [[임오화변]] * [[정성왕후]] *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 [[정조(조선)|정조]] * [[정조실록]] * [[정후겸]] * [[조선/왕사]] * [[조선왕조실록]] * [[창경궁]] * [[창경궁 경춘전]] * [[창경궁 자경전]] * [[청선공주]] * [[청연공주]] * [[한중록]] * [[화빈 윤씨]] * [[화완옹주]] * [[화평옹주]] * [[화협옹주]] * [[혜경궁진찬소의궤]] * [[혜빈궁일기]] * [[홍국영]] * [[홍계희]] * [[홍봉한]] * [[홍인한]] * [[홍주원]] * [[효순왕후]] * [[효의왕후]] * [[효장세자]] [[분류:조선의 왕비]][[분류:한국 여성 작가]][[분류:풍산 홍씨]][[분류:1735년 출생]][[분류:1816년 사망]][[분류:서대문구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