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승우 (문서 편집) [include(틀:양서)] [include(틀:남사)] [목차] == 개요 == 胡僧祐 (492 ~ 554) [[남북조시대]] [[양(남조)|앙나라]]의 장수로 자는 원과(願果). 남양군(南陽郡) 관군현(冠軍縣) 출신. == 생애 == 호승우는 어린 시절에 용맹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군사적인 재간을 지녔다. 호승우는 처음 [[북위]]에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의 벼슬을 받았다가 528년 양나라로 귀순하였다. 호승우는 자주 [[무제(양)|무제]]에게 상소를 올렸고 소연에게 중시되어 중시하여 가절(假節), 초무장군(超武將軍), 문덕주수(文德主帥)로 임명되고 항성(項城)에 진수하였다. 항성이 함락된 뒤 다시 북위의 장수가 되었다. 529년, [[진경지]]가 [[원호(북위)|원호]]를 낙양으로 보낼 때 호승우는 다시 양나라로 귀순했고 남천수군(南天水郡)과 천문군(天門郡)의 태수를 역임하며 선정을 펼쳤다. 호승우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지만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연회가 열릴 때마다 호승우는 반드시 시를 지었는데 그 내용이 거칠어서 비웃음을 받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기뻐하며 자신이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더욱 자랑을 했다. 이후 호승우는 상동왕(湘東王) 소역을 섬겨서 그의 녹사참군(錄事參軍)이 되었다. [[후경]]의 반란으로 양나라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서저만(西沮蠻)이 배반하자, 소역은 호승우에게 서저만을 토벌하고 서저만의 우두머리를 모두 죽이라고 명했는데, 호승우는 여기에 대해서 간언을 올렸다가 투옥되었다. 551년, 후경이 파릉(巴陵)을 침공하여 왕승변을 포위하자, 상동왕 소역은 호승우를 석방하고 가절, 무맹장군(武猛將軍)으로 임명하고 신시현후(新市縣侯)로 봉한 뒤 왕승변의 구원을 명했다. 호승우는 출병하기 전에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2개의 문을 열어서 한쪽 문은 주(朱)를 쓰고 한쪽 문은 백(白)을 쓰거라. 길한 일이 일어나면 주문(朱門)을 통해 올 것이고 흉한 일이 일어나면 백문(白門)을 통해 올 것이다. 내가 이기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 소역은 호승우의 말을 듣고 그를 장하게 여겼다. 양포(楊浦)에 이를 때 후경의 장수 임약(任約)이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척(白塉)을 점령하며 호승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승우가 다른 길을 따라서 서진하자, 임약은 호승우가 자신을 두려워해서 물러나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를 추격하도록 명했고 천구(芊口)에서 호승우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 >오아(吳兒)는 왜 빨리 항복하지 않는가? 어디로 도망치려는 것이냐! 호승우는 임약의 외침에 대답하지 않았고 몰래 적사정(赤砂亭)으로 물러났다가 육법화(陸法和)가 당도하자 그와 합류하여 임약을 물리치고 임약을 강릉으로 압송하였다. 후경은 임약이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달아났다. 호승우는 시중(侍中), 영군장군(領軍將軍)으로 임명되고 형주로 복귀하였다. 553년, 거기장군(車騎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진위되었고 나머지는 예전과 같이 받았다. 554년, [[서위]]가 강릉을 침공하자, 호승우를 도독성동제군사(都督城東諸軍事)로 삼았다. 서위군이 강릉을 사면으로 공격하자, 호승우는 직접 전장에 나서며 밤낮으로 전투를 독려했으며, 장수들을 칭찬하고 상벌을 엄격하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하지만 호승우는 전투를 지휘하던 도중 화살에 맞아 죽었고 소역은 호승우의 전사에 대한 소식을 듣고 슬피 울었으며, 강릉성은 호승우의 전사로 인해 혼란에 빠지면서 결국 서위에게 함락되었다. [[분류:양(남조)/인물]][[분류:492년 출생]][[분류:554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