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유옹주 (문서 편집) [[분류:조선의 옹주]][[분류:1740년 출생]][[분류:1777년 사망]] [include(틀:조선의 왕녀/중종 ~ 철종)]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4153e, #94153e 20%, #94153e 80%, #94153e); color: #FFD400" '''조선 영조의 왕녀[br]{{{+1 화유옹주 | 和柔翁主}}}'''}}}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황인점화유옹주묘.jpg|width=100%]]}}} || ||<-2> {{{#gold {{{-2 화유옹주묘 전경}}} }}} || || '''출생''' ||[[1740년]]^^([[영조]] 16년)^^ [[11월 18일]]^^([[음력]] [[9월 29일]])^^ || ||<|2> '''사망''' ||[[1777년]]^^([[정조(조선)|정조]] 1년)^^ [[6월 25일]]^^([[음력]] [[5월 21일]])^^ [br](향년 38세) || ||[[조선]] [[한성부]] [[창성궁]] || ||<|2> '''능묘''' ||화유옹주묘(和柔翁主墓)[* [[부천시]] 향토문화재 제7호] ||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작동 산28-6번지[* 원래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작동 126번지에 있었으나, 도로 건설로 인하여 [[1992년]]에 현재 위치로 이장되었다.] || || '''본관''' ||[[전주 이씨]] || || '''부모''' ||부왕 [[영조]][br]생모 [[귀인 조씨(영조)|귀인 조씨]] || || '''부군''' ||창성위 황인점(昌城尉 黃仁點) || || '''자녀''' ||'''슬하 1남 1녀''' 장남 - 황기옥(黃基玉) 장녀 - 김제만(金濟萬)의 처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영조]]의 서10녀. [[귀인 조씨(영조)|귀인 조씨]]에게는 차녀가 된다.[*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략》에서 귀인 조씨의 장녀는 요절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경기도 부천시에 소재한 신생옹주지묘의 주인공이 화유옹주의 친언니다. 화유옹주는 조씨의 둘째딸] == 생애 == 1751년(영조 27) 영조는 호조 참판 황재(黃梓)의 아들 황인점을 화유옹주의 부마로 결정하고, 창성위로 삼았다. 그러나 이듬해 [[화협옹주]]가 세상을 떠나면서 혼인이 연기되었고, 실제 혼인은 1753년(영조 29)에 치러진다. 《[[한중록]]》에 따르면, 방이 좁은 탓에 화유옹주가 [[혜경궁 홍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자 당시 대왕대비였던 [[인원왕후]]가 "빈궁이 얼마나 중한데 제가 감히 그리하느냐"고 혼을 낸 적이 있었다. 인원왕후가 궁중의 예법에 엄격한 사람이기도 했으나 그만큼 [[세자빈]]의 권위에 [[옹주]]는 물론이고 [[공주]] 역시 맞설 수 없었음을 나타낸다. 1753년 영조 29년 8월 6일 부왕인 영조의 전교에 따라 조부 숙종의 후궁이자 서조모가 되는 [[영빈 김씨]]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이는 옹주로서 봉사손 출계를 한 이례적인 경우이다.[* 화유옹주가 하가한 장수황씨 시가에서 영빈의 제례를 맡고있다] 화유옹주는 1777년(정조 1)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정조(조선)|정조]]는 크게 슬퍼하면서 "선조의 옹주 가운데 궁중을 출입한 사람은 단지 이 옹주 하나 뿐이었는데" 라고 말하고 3년간 그대로 녹봉을 주게 하였다.[* 정조실록 3권, 정조 1년 5월 21일 을유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5021_001|#]] ] 영조는 [[딸부잣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슬하에 많은 딸들이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요절한 탓에[* 12명의 옹주들 중 9명이 아버지인 영조보다 먼저 사망했다.], 정조 대까지 살아있었던 옹주는 화유옹주, [[화완옹주]], [[화령옹주]] 뿐이었다. 하지만 정조가 즉위하면서 [[화완옹주]]는 폐서인 되었고, [[화령옹주]]는 [[숙의 문씨]]의 딸이란 이유로 폐서인이 될 뻔한 걸 정조가 허락하지 않아서 간신히 옹주 작위만 유지하던 상태였다. 그러므로 궁궐에 출입해도 문제가 없던 이는 화유옹주 한 사람 뿐이었다. 후일 정조는 화유옹주와 그녀의 어머니인 귀인 조씨의 무덤에 치제하는 등, 고모에 대한 성의를 잊지 않았다. >나의 고모시여 / 曰我姑母 >부드럽고 아름다움을 본받았으니 / 柔嘉維則 >부모님의 당부 말씀을 밤낮으로 지켜 / 蚤夜鞶衿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네 / 不遺寸尺 >병신년[* 영조가 승하한 1776년(영조 52)이다. ] 이후로는 / 維丙以後 >우러르는 나의 심정이 더했는데 / 增予依仰 >심원의 종고에 / 沁園鐘鼓 >도위가 무고하네 / 都尉無恙 >묘소의 입구가 눈에 보이는데 / 墓門延眺 >그 나무가 꽤나 굵어졌으니 / 厥木拱把 >무엇으로 심회를 쏟을까 / 何以瀉懷 >이에 나의 행차를 멈추네 / 爲停予馬 > >---- >《홍재전서》 和柔翁主墓致祭文 그녀의 남편 황인점은 1779년부터 1793년까지 모두 6회에 걸쳐 정사(正使)로서 [[연경]]에 다녀왔다. 그런데 1784년(정조 8)에 같이 간 [[이승훈 베드로|이승훈]]이 [[천주실의]]를 비롯한 [[천주교]] 서적을 반입했던 일이 드러나 관직이 삭탈되었다. 죽은 뒤에는 화유옹주와 합장하였다. == 여담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화유옹주_출토유물.jpg|width=100%]]}}}|| || 《화유옹주 묘 출토 명기》 || * 화유옹주는 도자기를 비롯하여 옥제 비녀, 금동제 비녀, 은제 주전자, 녹색 벼루 등 30점이 넘는 부장품과 함께 묻혔다. 1991년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나왔으며, 후손들은 이를 국가에 기증하였다. 현재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복제품은 부천향토역사관에서 볼 수 있다. 이 중 도자기는 청화 안료로 장식한 합과 화려한 색으로 등나무 무늬를 장식한 합과 잔이 있어서 눈에 띄었는데, 진한 녹색을 띄는 팔각의 유리병에는 굽 바닥에 '건륭년제' 라고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남편 황인점이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옹주를 위해 사온 선물로 추정된다. * 영조의 딸들 중 가장 무난한 삶을 살았다. [[정빈 이씨]]의 소생 중 [[화억옹주]]는 돌을 넘기지 못한 채 사망했고, [[화순옹주]]는 친모와 친동기들을 어릴 때 잃고 남편마저 먼저 사망하자 그를 따라 자식없이 39세의 나이에 사실상 자살로 사망했다.[* 남편의 죽음에 상심한 나머지 스스로 곡기를 끊은지 열흘만에 사망했다.] [[영빈 이씨]]의 소생 중 세 딸은 아기 때 죽고 [[화평옹주]]는 22세 때 난산으로 사망, [[화협옹주]]는 20세의 나이로 자식없이 홍역으로 사망, [[화완옹주]]는 72세로 장수했지만 딸과 남편을 일찍 보내고 정조 즉위 후 폐서인이 되었다. [[귀인 조씨(영조)|귀인 조씨]]의 장녀이자 화유옹주의 친언니는 아기 때 죽었다. [[숙의 문씨]]의 소생 중 장녀 [[화령옹주]] 역시 69세로 장수하고 1남 2녀를 두었지만 친모가 정조 즉위 후 사사당하면서, 본인도 폐서인 될 뻔했다가 옹주 지위만 간신히 유지하고 아들은 후사없이 일찍 사망했다. 숙의 문씨의 차녀 [[화길옹주]] 역시 1남 2녀를 두었지만, 1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이처럼 영조의 딸들 중 20대 이전에 사망하거나 후사가 없거나 죄에 연루된 옹주들이 많은데 비해, 화유옹주는 이러한 불운들 중 어떠한 것도 해당되지 않은 채로 살았다.[* 향년 38세, 슬하 1남 1녀, 친모 귀인 조씨와 본인 모두 죄에 연루될 일이 없었음] * [[한중록]]에 세자빈 시절의 [[혜경궁 홍씨]]와 나란히 앉았다가 [[인원왕후]]에게 혼났다는 기록이 있다.[* 신분이 높은 사람과 나란하거나 마주보지 않고 ㄱ자로 꺾어 앉는 곡좌(曲坐)라는 예법이 있다. 왕, 왕비, 대비 정도가 아니고서야 서로 마주보거나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다. 아무리 같은 무품이라고 해도 세자빈은 차기 중전이자 세자의 정실이고, 옹주는 왕의 서녀에 불과하기 때문에 신분 자체가 다르다.] 그 덕분에 [[효종(조선)|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와 함께 조선 왕실의 엄격한 예법을 방증하는 인물로 자주 언급된다. == 가족 관계 == * 친정([[조선 왕실]]) * 부 : [[영조]](英祖)^^1694 ~ 1776^^ * 모 : [[귀인 조씨(영조)|귀인 조씨]](貴人 趙氏)^^1707 ~ 1780^^ * 언니 : 옹주(翁主)^^1736 ~ 1736^^ - 조졸 * 시가([[창원 황씨]]) * 남편 : 창성위 황인점(昌城尉 黃仁點)^^1740 ~ 1802^^[* 측실에게 딸을 한명 보았는데 그 딸은 [[순원왕후]]의 사촌 동생 김손근(金遜根)에게 시집을 갔고, 후에 도적에 의해 피살됨.] * 장남 : 황기옥(黃基玉, 1760 ~ 1794)[* 1781년(정조 5) [[영희전]] 참봉으로 관직에 올라 양천현령, 재령군수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 며느리 : [[여산 송씨]](礪山 宋氏) * 장녀 : [[창원 황씨]](昌原 黃氏) * 사위 : 김제만(金濟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