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차 바르바리 전쟁 (문서 편집) [[분류:1800년대 사건사고]][[분류:아프리카의 전쟁]][[분류:제퍼슨 시대]][[분류:해전]][[분류:이탈리아-리비아 관계]][[분류:미국-리비아 관계]] [include(틀:미국의 대외전쟁)] [include(틀:오스만 제국의 대외전쟁)] || [[파일:external/i1.wp.com/USS-Enterprise-barbary-war.jpg|width=100%]] || || 트리폴리 사략선과 교전 중인 USS [[엔터프라이즈]](1801년) || First Barbary War (Tripolitanian War, Barbary Coast War) حرب طرابلس [목차] == 개요 == 1801년에서 1805년까지 벌어진 [[미국]]과 [[바르바리 해적]]간의 전쟁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외전쟁'''이자 세계 최강 [[미합중국 해군|미 해군]]의 첫 해외원정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 당시의 [[미국]]은 [[유럽]]의 [[강대국]]들로부터 땅만 무식하게 큰 [[약소국]] 취급을 받았고, 실제 국력도 별 볼 일없는 수준이었다. 독립 당시 인구가 250-300만 수준인데, 동시대 조선 인구가 1천 500만에 달했을 정도다.] == 배경 == 18세기에서 19세기 초만 하더라도 [[지중해]] 일대에는 여전히 [[바르바리 해적]]이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이들은 [[유럽]]의 상선들을 습격해 납치한 뒤,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다.[* 쉽게 말해서 21세기의 [[소말리아]] 해적하고 같다. 다만 [[영국]] 국적선은 건드리지 않았는데, 영국 국적선을 건드렸다가는 '''당시 세계 최강 [[영국 해군]]이 출동해 그야말로 초토화를 시켜줬기 때문에''' 악명 높은 바르바리 해적들도 영국 국적선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들은 단순히 상선만 터는 수준이 아니라, [[지브롤터 해협]] 너머 [[북해]]의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는 물론이며 심지어 [[대서양]]을 횡단하여 [[북아메리카]]의 해안가 마을을 틈만 나면 침략해 주민들을 납치하는 글로벌 [[해적]]들이었다. [[미국]]이 독립하기 전에는 [[13개 식민지]] 선박들도 영국 국적선으로 인정을 받아서 [[바르바리 해적]]들의 납치를 면할수 있었지만, [[미국 독립 혁명|미국이 독립한 후]]로 바르바리 해적들은 신생국 미국의 국력을 대놓고 무시하면서 미국 선박들을 납치해 몸값을 뜯어냈다.[* 당연히 [[영국 해군]]은 이러한 사태에 개입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신생 국가로서 나라 재정이 열악한 형편이라 제때 몸값을 주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때문에 1796년 바르바리 해적과 [[트리폴리 조약]]을 맺어 미국 정부와 바르바리 세력간의 우호 관계를 확립하는 대가로 미국 국적의 선박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보장을 받았다. 하지만 바르바리 해적은 이후에도 조약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미국 선박들을 나포했다.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미국]] 정부는 [[윌리엄 베이브리지]]를 사절로 보내 요구 금액에 겨우 모자라게 맞춘 돈을 들려 바르바리 해적을 통제하는 [[지중해]] 파샤들과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파샤들은 종주국인 [[이스탄불]]에 가서 협상하라는 핑계로 회담을 피했다. 결국 베이브리지는 이스탄불까지 가서 [[오스만 제국]]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오스만 제국이 입항을 거부한 탓에 결국 [[성조기]]를 내리고 오스만 제국 깃발을 달아 입항하는 굴욕까지 맛봐야 했다. 협상이 통하지 않자, [[미국]]은 자국민 안보에 위협을 느껴 [[미합중국 해군|해군]]의 창설 및 군비 증강에 나서게 되었다. 그렇게 창설된 함대를 지중해로 파견해 상선들을 보호하고 해적과의 협상을 거부하는 강경책을 피자 바르바리 해적들도 "미국 선박은 납치하여도 돈을 안 준다"라면서 잡아둔 포로들을 노예로 파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미국의 신경이 날카로워지던 때에, 1801년 5월 14일,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의 파샤인 유수프 카라만르(Yusuf Karamanlı)[* [[알바니아]] 출신의 [[오스만 제국]]의 세력가로 [[트리폴리]]에서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군주다.]가 트리폴리에 있던 [[미국]] [[영사관]]의 [[성조기]]가 걸린 깃대를 칼로 베어서 성조기를 쓰러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침내 분노한 미국은 이 사건을 '''미국에 대한 모욕'''이라 간주하며 트리폴리에 대한 반감을 고조시켰다. == 진행 == 그러던 6월 1일, [[리처드 데일]]이 인솔하는 4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미합중국 해군|미 해군]] 함대가 지브롤터를 통과해 지중해로 들어왔다. 이들의 본래 임무는 지중해의 미국 상선 보호였지만 [[트리폴리]]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통보해''' 1차 바르바리 전쟁이 시작되었다. 갑작스레 전쟁이 시작되자, 미 해군 함대는 트리폴리를 섣불리 공격하지는 않고 그 앞바다에 진주하여 해상 봉쇄에 치중했다. 트리폴리의 [[바르바리 해적]] 세력이 전선 24척에 2만 5000여 병사를 거느리고 있어서 정면공격은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8월 1일에는 미 해군 [[엔터프라이즈]]호와 트리폴리 바르바리 해적의 폴라카선이 교전을 벌였는데, [[참교육|엔터프라이즈호의 포격으로 해적 폴라카선이 전투불능이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ecatur_Boarding_the_Tripolitan_Gunboat.jpg]] 그 후 1803년에는 전함 7척으로 구성된 미 해군 함대가 [[트리폴리]]를 봉쇄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805년에는 [[윌리엄 이튼]](William Eaton) 장군이 이끄는 [[미합중국 해병대|미 해병대]]와 현지 용병으로 구성된 혼성 부대가 [[리비아]] 북동부 도시 [[데르나|다르나]](Darnah)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 측은 35명이 전사하고 64명이 부상을 당한 데 비해, 바르바리 해적단은 800명이 사망하고 1200명이 부상을 입었다. == 결과 == 이 전투로 인해 파샤 유수프 카라만르는 300명에 이르는 [[미국인]]과 [[유럽|유럽인]] 포로들을 석방하고 배상금 6만 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휴전 조약을 조인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바르바리 해적]]의 무력이 완전히 꺾이진 않았기에, [[미국]]이 [[미영전쟁]]에 정신이 팔린 동안 바르바리 해적들은 다시 미국 선박을 공격했다. 이에 [[겐트 조약]]으로 한숨 돌린 [[제임스 매디슨]] [[미국 대통령|대통령]]은 다시 [[지중해]]에 [[미합중국 해군|미 해군]]을 파견하여(2차 바르바리 전쟁) 바르바리 해적을 토벌했다. 바르바리 해적은 이 토벌로 큰 피해를 입어 다시는 미국 선박을 건드리지 못했다. [[미합중국 해병대|미 해병대]]의 군가 [[Marines' Hymn]][[https://youtu.be/SwS6OkgUXKE|#]]에 [[몬테수마]] 궁전에서 [[트리폴리]] 해변까지(From the Halls of Montezuma, To the shores of Tripoli) 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바로 이 전쟁 때문이다. 몬테수마는 미국-멕시코 전쟁, 트리폴리는 바르바리 전쟁을 말하는것. 전투에서 활약한 [[미합중국 해병대|미 해병대]] 병사들은 [[바르바리 해적]]들이 휘두르는 칼날로부터 목을 보호하기 위해 질긴 가죽으로 만든 칼라가 달린 제복을 입었는데, 미군 해병대를 가리켜 부르는 '가죽 목(Leatherneck)'이란 별칭은 1차 바르바리 전쟁에서 유래했다.[* 도현신(2012), <15장 바르바리 해적단, 서구인들의 300년 공포>,《어메이징 세계사》, 서해문집, 206쪽]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