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0.19(야구) (문단 편집) == 여담 == * 더블헤더 1차전 패전투수였던 우시지마 카즈히코는 후일 "원래는 1루가 비어 있어서 [[나시다 마사타카|나시다]] 씨를 [[고의4구]]로 내보내려고 했으나, 생애 마지막 타석을 맞는 나시다 씨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정면승부 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 * 이 날은 경기 시작 전부터 [[퍼시픽 리그]]와 [[일본프로야구]]계에 상당히 이상한 기류가 감돌았다. 85년부터 87년까지 리그 3연패, 그 때까지 6년간 무려 5번의 리그 우승에 4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요미우리에 이어 일본의 야구팬들을 신물나게~~한 [[세이부 라이온즈]]의 우승 행진에 드디어 브레이크가 걸리는가라는 기대감이 감돌면서 [[퍼시픽 리그]]의 두 비인기팀의 대결임에도 일본 전국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게다가 이날 저녁에는 이미 다이에로의 매각이 확정된 [[난카이 호크스]]에 이어 '''[[한큐 브레이브스]]가 오릭스에 매각'''된다는 뉴스가 속보로 전해지면서 야구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다만 한큐는 훗날 [[한신 전기철도]]를 자회사로 인수하게 되면서 '''[[한신 타이거스]]'''까지 덤으로 인수하게 된다.] 난카이의 경우는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성적, 인기가 모조리 떨어지며 지속적으로 적자가 쌓인 데다 적자 구단을 어찌저찌 지속한 결과 모기업 [[난카이 전기철도]]의 자금 사정도 악화되며 모기업 이사회, 노조 등이 틈만 나면 구단을 매각하라고 압력을 넣는 상황에서 구단주이자 난카이 전기철도 회장인 카와카츠 덴의 고집으로 겨우겨우 구단을 잡고 있던 와중에 카와카츠가 1988년 노환으로 별세를 했기 때문에 난카이가 곧바로 쓸모없는 짐짝이나 다름없는 구단을 처리할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히 예상을 할 수 있었고, 실제로 1988년 시즌 중에 이미 구단 측에서 대놓고 ~~50주년 기념이라고~~ 매각 작업을 추진했기 때문에 다이에로의 매각이 확정된 것 자체는 팬들에 주는 충격이 적었다. 사실 진짜로 충격적인 건 다이에가 [[오사카]] 연고 유지, 오사카 인근이자 다이에의 본사가 있었던 [[고베시|고베]]로의 연고이전도 아닌 [[후쿠오카]]로 간다는 결정을 한 것. 그러나 한큐의 경우에는 정말로 아무도 모르게 물밑에서 매각작업이 추진이 되었고 모든 협상이 완료된 후에 갑작스럽게 이날 매각 결정이 발표되었기 때문에 팬들에게 주는 충격이 더욱 컸다. 비록 한큐도 팀의 저조한 인기 탓에 골머리를 앓았기에 매각을 추진해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계속 비밀번호만 찍던 난카이와는 달리 한큐는 6~70년대에 리그 우승 8번, 1975~1977년 일본시리즈 3년 연속 제패에 불과 4년 전인 1984년에도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등[* 위에서 얘기한 세이부의 6년간 5번의 리그 우승 중에서 유일하게 우승을 하지 못한 해가 이 해이다. 그러나 한큐는 [[1984년 일본시리즈|그 해 일본시리즈]]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3승 4패로 패배했다.] 줄곧 중상위권의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던지라 아무도 한큐가 구단을 매각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튼 1950~60년대를 주름잡던 난카이와 1960년대 후반에 급성장한 신흥강호 한큐라는 간사이 지역 퍼시픽 리그의 대표 두 팀이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해에 매각이 결정된 것 자체가 일본프로야구를 지탱한 비즈니스 모델 중에서 사철회사의 부수 사업으로서의 구단 운영이 더 이상 유지가 불가능함이 표면화 된 사건이며 철도와 신문회사에 의해 지탱된 일본프로야구의 한 시대에 종언을 고한 중대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후에 벌어진 더블헤더 1차전이 극적인 승부로 킨테츠의 승리로 끝나면서 킨테츠의 희망이 계속 살아난 상황이라 그날 하루 동안 해당 경기에 대한 관심도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등 이 날은 퍼시픽리그 전 역사를 통틀어서도 상당히 기묘한 분위기의 하루였다. 이 더블헤더는 원래 [[TV 아사히]] 계열의 오사카 지역방송인 [[아사히 방송]]의 [[간사이]] 로컬 중계로 기획되었으나, 2차전에서 킨테츠가 역전을 해 8년 만의 우승 가능성이 열리자, 라디오를 듣고 있던 전국의 킨테츠 팬들이 TV 아사히로 전국중계를 해달라는 요청 전화를 어마어마하게 걸기 시작했다. 결국 TV 아사히는 방송 편성을 긴급 변경하여 사상 최초로 드라마를[* 이 때, 방송예정되어 있다가 결방된 드라마는 범죄 수사극 유랑 형사 여정편 2화였다.] 결방시키고 더블헤더 2차전을 전국 생중계로 돌렸고, 심지어 간판 프로그램인 [[뉴스 스테이션]]마저 본래 예정되었던 특집을 전부 결방시키고 야구 중계에 할애했다.[* 그 날 원래는 [[리크루트 사건]] 보도와 조에츠선 화물열차 탈선사고, 상술한 [[한큐 브레이브스]]의 오릭스 매각 소식, 1년 전의 [[검은 월요일]] 주식 대폭락 이후 미국 [[월 스트리트]] 주식시장을 현지 취재한 특집 보도가 예정되어 있었고, 당시 오늘내일하던 [[쇼와 덴노]]의 건강 상태도 매일 보도되었다고 한다. 하나하나가 빅 뉴스인데 이걸 축소 보도해야 할 정도로 더블헤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엄청났다는 소리다.][* 게다가 원래는 야구 중계를 10분만 하려고 했으나 결국 중계 연장이 결정되면서 진짜로 드라마를 결방시키고 뉴스 스테이션도 야구 중계에 할애했었다. 공수 교대 중에 뉴스를 전달하는 형식으로 진행했는데, 당시 메인 캐스터인 쿠메 히로시는 뉴스 오프닝에서 "오늘 전해야 할 뉴스가 많습니다만 (실은 퍼시픽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시합이 지금 9회초 2사 주자 1,2루에 있는 상황이라서) 여기서 야구 중계를 그만 둘 수 없습니다." 라고 말했고 이후 9회초가 득점 없이 끝나자 "어떤 프로가 될지 오늘 밤은 모릅니다만, 전할 소식도 많고.. 살려주세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날 중계된 더블헤더 2차전은 시청률 30.9%를 기록하면서 퍼시픽 리그 정규시즌 경기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심지어 30.9%는 [[칸사이]]가 아닌 [[칸토]] 기준이었다. 킨테츠의 연고지 오사카와는 정반대에 있는 칸토에서도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것인데, 당시 똑같이 우승이 걸려있었던 세이부 팬들도 이 경기를 TV로 봤을 것을 감안해도 놀라운 기록이다.] 그야말로 1988년 10월 19일은 퍼시픽 리그의 역사에 큰 전환점이 된 날이라 할 수 있었으며 그 때문에 이 문서의 표제어인 10.19가 전설로서 인구에 회자되게 된 것이다. * 만약 킨테츠가 이 해에 우승을 했으면 퍼시픽 리그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전년도 최하위 팀이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기록을 세울 뻔 했다. 일본 프로야구 전체로 따지면 4번째인데 그 전에는 1960년의 [[타이요 훼일즈]], 1975년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6년의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기록했으며 이들은 모두 [[센트럴 리그]] 소속이었다. 퍼시픽 리그에서 전년도 최하위 팀이 굴욕을 딛고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최초의 기록은 이로부터 무려 13년 뒤인 2001년에야 나왔는데 그 기록을 세운 주인공이 바로 이 날의 비극의 주인공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킨테츠]]였다.[* 공교롭게도 당시 감독이 더블헤더 1차전 승리를 결정지은 적시타를 날린 [[나시다 마사타카]]였다.] 이해 킨테츠는 팀 방어율이 4.98에 육박했던 빈약한 투수진을 무지막지한 장타력을 앞세워 들소같은 기세로 커버하면서 전년도 우승팀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세이부 라이온즈]]와 더불어 치열한 우승 경쟁을 전개한 끝에 매직넘버 1을 남겨둔 채 진행한 9월 26일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홈경기에서 [[키타가와 히로토시]]가 9회말 3점차로 뒤진 상황에서 '''[[대타]] 역전 [[끝내기(야구)|끝내기]] [[만루 홈런]]'''을 터뜨리며 극적으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상대팀 오릭스의 감독이 바로 이 10.19와 1989년 [[퍼시픽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오기 아키라]]였다. 오기는 2001시즌 종료 후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퇴임했다가 2005년 양팀의 합병으로 생긴 [[오릭스 버팔로즈]]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하여 그 해 2년 연속 최하위를 찍은 오릭스를 4위로 올려놓는 업적을 이뤘지만 시즌 종료 후 [[폐암]]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렇게 13년 전에 실패했던 기록을 세우며 구단 사상 첫 [[2001년 일본시리즈|일본시리즈]] 우승에 도전했지만 그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1승 4패로 패하면서 또 다시 눈물을 흘렸고, 그 이후 두번 다시 킨테츠에게 일본시리즈 우승의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14년 뒤인 2015년에 야쿠르트는 사상 5번째로 전년도 최하위에서 리그 우승을 달성한 팀이 되었으나, [[2015년 일본시리즈]]에서 [[이대호]]가 중심타자로 있었던 소프트뱅크에게 14년 전 자신들이 킨테츠를 이겼던 스코어인 1승 4패로 압살당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04년 모기업 [[킨키 일본 철도]]는 버블경제의 후폭풍과 구단의 흥행 부진에 따른 막대한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구단을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흡수합병하는 형태로 해산시키면서 극적인 승부를 여럿 남기며 일본프로야구에 족적을 남긴 '''킨테츠 버팔로즈'''의 이름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졌다. 이로써 칸사이 지역의 프로야구를 지탱해 오던 [[한신 전기철도|한신]], [[한큐 전철|한큐]], [[난카이]], [[킨테츠]] 등의 지역 대형 사철들은 [[한신 전기철도]]를 제외하면 모두 프로야구 사업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 킨테츠는 이 날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바로 다음 해인 1989년 시즌 마침내 리그 우승에 성공하면서 세이부의 [[연속우승]] 행진에 제동을 걸었다. 이 해는 킨테츠와 세이부, 그리고 한큐로부터 구단을 인수한 오릭스, 이 3팀이 시즌 마지막 까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승 경쟁이 펼쳐져서 프로야구 팬들을 열광시켰다. 킨테츠의 경우에는 시즌 초반 이날의 극적인 우승 실패의 충격이 여전히 가시지 않은 듯 하위권에서 비틀거렸으나 여름 무렵부터 전력을 정비해서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오면서 리그의 판도를 혼돈으로 빠트렸다. 이 해 절정기에 다다른 주포 [[랄프 브라이언트]]의 홈런 공세와 10.19에서 무려 두 경기나 구원등판을 했음에도 결국 마지막 경기에 동점 홈런을 허용하면서 팀의 우승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쓴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의 살신성인 활약으로 우승에 성공했다. * 특히 89년 킨테츠 우승을 결정지은 것도 바로 더블헤더였는데, 공교롭게 또 10월에 열렸다. 10월 12일에 열린 세이부와의 더블헤더에서 킨테츠가 2경기 모두 역전승을 거두며 승기를 잡았다. 이 승부도 명승부인데, 더블헤더 1차전에서 세이부의 공세로 0-5로 지고 있었지만, 랄프 브라이언트가 무려 '''3타석 연속 홈런'''으로 혼자 6점(솔로 2개, 만루 1개)을 쓸어모으는 말도 안되는 활약[* 심지어 홈런을 쳐낸 투수는 [[궈타이위엔]], [[와타나베 히사노부]] 등 세이부의 초특급 에이스들이었다.]으로 6-5로 승리했으며, 2차전에서도 2-2로 맞선 3회, 역시나 랄프 브라이언트의 홈런을 필두로 리베라, 스즈키의 홈런이 폭발하면서 역전에 성공해 2경기를 모두 쓸어담았다. 시즌 결과는 2위인 오릭스와는 게임차가 없었고, 3위인 세이부와는 불과 0.5게임차였다. 시즌 막판까지 우승권에 있던 세 팀이 날마다 순위가 바뀌는 등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거의 매경기가 명승부라고 불릴만한 상황이 전개되었고, 그에 비례해서 야구팬들의 관심도도 고조되었다. * 특히 이 더블헤더에서의 우승은 1987년 데뷔 이후 탤런트 같은 용모로 라이벌인 [[닛폰햄 파이터즈|닛폰햄]]의 니시자키 유키히로와 더불어 '''트렌디 에이스'''라는 칭호를 얻으며 퍼시픽 리그의 얼굴마담 역할을 한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의 활약은 전년도의 실패를 배경으로 깔면서 비장감마저도 느끼게 할만큼 극적이었다. 그리고 치열한 접전을 극복해낸 킨테츠에게는 전년도의 실패의 설욕과 리그 우승이라는 영광이 주어졌다. 그러나 [[1989년 일본시리즈|일본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를 상대로 먼저 3연승을 해 놓고도 4연패로 리버스 스윕을 당하면서 '''또다시 우승에 실패했다.''' * 여담으로 전년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팀의 의지가 너무도 강한 나머지 킨테츠는 시즌 막판에 상당한 무리수를 뒀고 그 결과는 완투경기 다음에 3일 휴식 후 선발 등판, 2일 휴식후 구원 등판이라는 초강수를 두며 온 몸을 불사른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의 팔꿈치 부상이라는 혹독한 대가로 돌아왔다. 신인왕에 오른 1987년부터 이 해까지 3년간 무려 48승을 올리면서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좌완 에이스는 이 해의 부상 때문에 그 다음해인 1990년 시즌 10승을 겨우 채운 것을 끝으로 두번 다시 두자리수 승수를 거두지 못했으며 결국 통산 100승도 거두지 못하고 [[교진군|요미우리]]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요코하마]]를 떠돌다가 은퇴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팀으로서는 두고두고 아쉬운 결과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노모 히데오|이 해의 드래프트에서 무려 8구단의 경합을 물리치고 추첨 끝에 획득한 초대형 괴물 신인 투수]]가 바로 다음 시즌부터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에이스로서 활약을 했기 때문이었다. 야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아와노가 이 해 무리를 하지 않고 조금만 더 길게 활약을 하면서 그 투수와 선발 로테이션의 중심축을 형성할 수 있었으면 킨테츠의 일본시리즈 우승은 물론이요, 전성기는 상당기간 지속될 수 있었고, --그보다 투구폼 드립치면서 노모를 토사구팽하고, 아와노의 투수 생명을 아싸리 끊어놓은 [[스즈키 케이시|초혼]] 양반이 더 문제이긴 하지만-- 다음 해부터 벌어진 세이부 라이온즈의 괴물같은 일본시리즈 3연패 및 리그 5연패의 기록도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히도 아와노는 당시 킨테츠의 투수 코치였던 [[곤도 히로시]]가 감독을 맡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중간계투로 반등하며 1998년 요코하마의 38년 만의 우승에 공헌했다. * 여담으로 이 해 킨테츠는 우승 실패 외에도 [[퍼시픽리그]] 개인 타이틀,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를 [[요시이 마사토]]의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 빼고 아무도 못 타는 불운도 겪어야 했다.[* 그나마도 오늘날처럼 세이브 수만 집계했다면 위의 1차전 패전투수인 우시지마 카즈히코에게 타이틀을 뺏길 판이었으나, 당시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은 [[세이브 포인트]]가 가장 많은 투수한테 주는 제도였는지라 세이브가 우시지마보다 적은 대신 구원승이 우시지마보다 훨씬 더 많았던 요시이가 SP를 많이 얻어내며 타이틀을 수상할 수 있었다.] * 그리고 이로부터 26년 뒤 [[10.2 결전#s-2|이 시즌과 흡사한 상황이 재현되고]], 이로부터 또 8년 뒤 [[10.2 결전#s-3|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게 된다.]] [[분류:일본프로야구/개별 문서가 있는 경기]][[분류:치바 롯데 마린즈]][[분류: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분류: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